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156화 (156/530)

< 혼란스러운 유럽 >

이 무렵 유럽의 전장은 완전히 굳어진 상황이었다. 루이가 부관인 조제프에게 잠시 지휘를 맡기고서 파리에 갔다 올 수 있을 정도로, 전선의 변동이 거의 일어나지 않던 것이다. 처음에는 루이가 처음 선보이는 참호 전술에 놀라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던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이, 프랑스가 동맹국 이탈리아를 돕기 위해 우회하면서 시간을 끄는 동안 조금씩 참호전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물론 이들 또한 제대로 참호전에 익숙해진 것은 아니어서 여전히 화려한 제복을 과시하고 돌격 시에도 오와 열을 맞추려 노력하는 등 시행착오는 반복되었으나, 어설프게나마 참호를 파고 철저한 방어 일변도로 전략을 바꾸자 루이가 이끄는 프랑스군 또한 섣불리 공격할 수 없었다. 동맹국의 영토에서 싸우던 연합군과는 다르게 프랑스군은 적지인 독일 제후국들의 영토에서 싸워야 하기에 더군다나 그랬다.

프로이센군이 프랑스 영내에서 반프로이센 반군들에게 시달렸듯이, 프랑스군 또한 독일 영내로 진입하면서 반프랑스 반군들에게 시달리게 된 것이다. 결국 뮌헨을 포위한 것을 끝으로 루이는 진격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고, 양군은 뉘른베르크, 프랑크푸르트, 브라운슈바이크, 뮌헨, 함부르크 다섯 도시를 경계 삼아 대치하고 있었다.

"침략자 오스트리아 놈들을 몰아내자! 붉은 셔츠 군단이여, 전진 앞으로! 우리들이 가까스로 이룩해낸 위대한 조국 이탈리아의 통일을 또다시 압제자 오스트리아 놈들이 방해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왕이시여, 장수하소서! 통일 이탈리아 만세! 주세페 가리발디 장군 만세! 붉은 셔츠 군단 만만세-! """

이렇게 독일 전선이 사실상 굳어지면서, 되려 격전지구로 변모한 곳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가 맞부딪히던 북부 이탈리아 일대가 되었다. 당초 형편없이 오스트리아군에게 밀리던 이탈리아군은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 주세페 가리발디가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통일 조국의 부름에 응하여 재차 붉은 셔츠 군단을 조직하여 궐기하면서 팽팽한 접전으로 돌변했다.

여기에 프랑스가 진격을 포기하고서 남부 군단을 동맹국 이탈리아를 돕기 위해 북부 이탈리아로 돌리면서, 전황은 뒤집혔다. 프랑스의 원군과 가리발디의 지휘에 힘입어 이탈리아군은 동아시아에서는 천명대전이 한창이던 9월 중순 오스트리아군이 점령한 밀라노를 재차 탈환하였고, 기세를 몰아 베네치아 일대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탈리아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다! 가장 고귀한 공화국 베네치아 만세! 아드리아해의 여왕이여, 다시 한번 영광을 되찾으소서!"

"나가자, 사랑하는 조국 베네치아의 자유 시민들아! 차라리 다시 한번 합스부르크의 자유 도시가 될지언정, 사르데냐 촌것들의 노예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가장 위대한 공화국 베네치아여, 영원하여라!"

그러자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 통합되기를 거부하고 있던 베네치아 임시정부를 내세워 전후 가장 고귀한 공화국 베네치아를 재건해주겠다는 명분으로 의용군을 끌어모았다. 이들은 베네치아 공화국군이라는 이름으로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아 붉은 셔츠 군단과 맞부딪혔고, 프랑스가 멋대로 자국의 독일 내 점령지에 라인연방을 부활시키고 하노버 왕국을 세웠듯이 오스트리아가 정식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재건을 선언하면서 이들 베네치아 공화국군 또한 정규군의 지위로 올라섰다.

물론 이탈리아 왕국에 있어서 이들 베네치아 공화국군은 어디까지나 자국 영토를 점령한 반란군이었고, 외세를 끌어들여 이탈리아 민족을 위협하는 민족의 배신자였다. 반대로 베네치아 공화국군은 자신들이 이탈리아 민족에 속한다는 정체성 그 자체를 거부하고서 자신들은 가장 고귀한 공화국 베네치아의 자유 시민이라 항변했으며, 베네치아 민족주의를 선전하며 애국심을 고취했다.

자연히 이탈리아 통일을 외치는 붉은 셔츠 군단과 베네치아의 독립을 외치는 베네치아 공화국군 간의 전투는 국제법조차 통용되지 않는 살육과 약탈의 반복이 되었다. 서로서로 정규군이라고 인정하지 않고서 민병대 내지 군벌 집단으로 간주하다 보니, 설령 포로를 잡아도 국가반역자라는 명분으로 현장에서 즉결처형하고 적들의 자산 또한 반역자의 것이니 국가가 몰수한다는 명분으로 약탈해가던 것이다.

"이탈리아 왕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만세! 통일 이탈리아 왕국 만만세! 압제자 오스트리아 침략자 놈들을 몰아내자! 전군 돌격 앞으로-!"

"가장 고귀한 베네치아여, 아드리아해의 여왕이여, 베네치아 자유 시민들의 사랑스러운 신부여! 영원할지어다! 사르데냐 촌것들을 몰아내자! 전군 착검-!"

점차 북부 이탈리아 전선은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은 베네치아 공화국군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이탈리아 왕국 군의 내전 양상으로 치닫게 되었다. 독일 전선에서 프랑스가 반프랑스 반군들에게 시달리면서도 수적 우세를 앞세워 연합군을 압박해 방어선을 조금씩 헐겁게 만드는 동안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수적 우세를 앞세워 밀어붙이는 붉은 셔츠 군단과 참호의 방호력을 내세워 가까스로 버티는 베네치아 공화국군의 악전고투가 이어졌다.

재정적으로 풍족하여 척탄병들에게 흉갑과 투구, 샷건 따위의 무장을 제공하여 장갑 척탄병이라는 새로운 병과를 창조해낸 프랑스군과는 달리 가난한 신생 이탈리아 왕국은 병사들에게 그런 고급 장비들을 보급할 여력이 없었다. 이들은 그저 맨몸으로 소총과 총검 하나에 의존하여 참호를 향해 달려들어야 했고,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아 급조된 베네치아 공화국군도 마찬가지로 참호의 지형적 우위만으로 돌격해오는 이탈리아 왕국군과 맞서야 했다.

자연스럽게 전선에서는 백병전이 매우 흔하게 일어났고, 르네상스 시대 아래로 전장에서 사용된 적 없던 철퇴나 장검 따위를 들고서 돌격하는 병사들까지 등장했다. 이탈리아 전선에 파병된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군은 미적거리며 그들의 동맹군이 악전고투하는 것을 반쯤 방관했다. 프랑스로서는 이탈리아가 버텨주고 있는 것만으로 그들의 목표는 달성된 것이었고, 오스트리아로서도 이번 전쟁에서 베네치아만이라도 되찾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결국 전장에서 참혹하게 죽어 나가는 것은 이탈리아의 청년들일 수밖에 없었다.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그들 각자는 각자의 명분을 내세워 서로 죽이고 또 죽였다.

"세르비아 독립 만세! 범슬라브주의 만만세! 가자, 사랑하는 형제들아! 우리의 러시아 친구들과 함께 저 터키 압제자 놈들을 쳐부수러가자!"

"알라는 위대하시도다! 위대한 튀르크의 전사들이여, 알라의 검들이여! 성지 메카의 수호자이시자 로마의 황제이신 우리의 칼리프께서 부르고 계시도다! 저 가증스러운 기독교인 반군을 쳐부수고 알라의 이치야말로 진정 정당함을 알게 하여라!"

한편 이탈리아 전선이 점차 내전으로 치닫고 있었다면, 발칸 전선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독립을 외치는 발칸의 슬라브인들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이를 저지하려 하는 오스만 튀르크의 대결이 한창이었다. 굳이 따진다면 이들 또한 오스만 튀르크 제국 내의 내전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서로 역사는 달라도 쓰는 말은 같았던 이탈리아와 베네치아의 대결과는 달리 이들은 언어도 달랐고 종교도 달랐으며 무엇보다 인종도 서로 달랐다.

따라서 이는 내전이라기보다는 독립전쟁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명분을 선전한 것은 자연스럽게도 발칸의 슬라브계 독립군이었다. 마침 유럽에 퍼져나가던 민족주의의 광풍과 러시아의 지원을 동시에 받게 되었으니 힘이 쏠리던 것도 당연했다.

이들에게 불행은 이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줘야 했을 러시아가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는 동시에 몽골 내전, 태평천국 지원 등으로 힘이 분산되면서 정작 발칸에 쓸 힘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조러 전쟁에서의 패전, 미국과의 관계 악화까지 겹치며 러시아 그 자체가 온전한 국력이 아니었던 것도 한몫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러시아군이 방위선을 돌파하기 직전이란 말이네! 당장 지원군을 보내게. 어서 빨리! 도대체 지금 뭘 하느라 시간만 질질 끌고 있는 건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지금 마침 알라께 기도를 드릴 시간이란 말입니다. 중요한 기도 시간을 방해하지 마십시오, 프랑크인이여. 지원군은 기도가 끝난 다음에라도 늦지 않을 겁니다."

"뭐 이런…! 됐네. 차라리 우리들 프랑스군만으로 지원을 하러 가겠다! 자네들은 지금 전쟁을 하려고 온 건가, 아니면 기도를 드리려고 온 건가!"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스만 튀르크는 그들 또한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어도 러시아와는 달리 전선이 한정되어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선을 유지하는 수준이었지, 그들 또한 막상 슬라브계 독립군들을 짓밟고서 발칸을 안정시킬만한 힘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앞선 크림전쟁에서 제기되었던 튀르크 군 그 자체의 문제점이 거의 시정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저조했고, 장교들의 대응은 언제나 굼떴다. 전쟁에서의 승리보다는 당장 종교적 규율을 지키는 것이 우선시 되었고, 범이슬람주의의 영향으로 날로 교조화되던 관료들은 기껏 반군들을 진압하고 해당 지역을 다시 점령하더라도 지나친 보복 주의와 종교적 율법의 강요로 또다시 봉기하도록 만드는 경우도 흔하게 일어났다. 이렇다 보니 전쟁이 이어질수록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슬라브 계열 독립군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만 계속 넓어져만 가고 있었다.

당장 러시아를 전방위에서 압박하기 위하여 오스만 튀르크의 참전을 종용한 프랑스 제국에서 자신들의 결정을 땅을 치며 후회하는 지경이었다. 다만 프랑스군이라고 잘하는 건 없었다. 이들 또한 동맹국 튀르크 군을 업신여기고 불신하면서 현지 기독교인들을 동원하거나 의용병으로 불리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튀르크 군은 점차 프랑스의 도움을 신뢰하지 않았고,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지 못한 튀르크 군은 민병대 수준의 슬라브 독립군조차 이기지 못하며 지리멸렬했다.

"폴란드 독립 만세! 바르샤바 공국 만세! 폴란드의 형제들이여, 일어나라! 폴란드의 강토에 애국자의 핏자국을 새기고 비스와 강을 압제자들의 붉은 피로 물들이자!"

"러시아는 물러가라! 프로이센은 물러가라! 자유 폴란드 만만세!"

프랑스에 있어서 되려 가장 든든한 동맹군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연합군의 후방에서 날뛰던 자유 폴란드군이었다. 이들이 일시적으로나마 지배하는 영역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독일 전선에서 프랑스군이 받는 압력도 줄어들었을뿐더러 독립 의지에 기반한 사기도 드높아 약간의 지원만으로 높은 성과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조금씩 더 많은 병력을 폴란드 반군의 활동을 억제하는 데에 투자해야 했고, 이러한 후방의 불안 요소는 독일 전선에서 러시아군이 공세를 꺼리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러시아에는 가장 중요했던 발칸 전선까지 러시아의 지원 부족으로 난전이 되면서 러시아군은 조금씩 독일 전선에서 물러나는 대신 그들의 모든 여력을 발칸 진출과 폴란드의 독립 저지에 투입했다. 주전장인 독일 전선에서의 후퇴가 연합군 내에서 러시아의 발언력을 크게 줄였음은 물론이었다.

러시아가 주전장인 독일에서 조금씩 후퇴하면서, 발언권은 자연스럽게 오스트리아에 집중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 제후국들을 이끌고 독일 영내에 침공해온 프랑스군과 전 전선에 걸쳐 맞부딪혔고, 이는 오스트리아가 주도하는 독일의 질서를 선전하는 효과를 낳았다. 오스트리아의 부흥은 대독일주의의 부흥을 이끌었고, 반대로 프로이센의 쇠락은 독일인들에게 소독일 주의와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 그 자체를 한낮 몽상으로 여기게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대영제국은 이제 프랑스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영불 양국이 힘을 합하면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거 말은 좋구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시오. 짐은 그대들 영국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소."

이런 와중 영국이 유럽 대륙의 평화 회복과 러시아의 발칸 진출 저지를 명분으로 전쟁에 끼어들었다. 이대로 가면 프랑스가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모든 유럽 열강국과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혁명 전쟁기의 악몽이 되살아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섭정 의회가 황제를 설득하면서 프랑스는 영국의 합의문을 수용하였으나, 오스트리아의 대답은 달랐다.

그들로서는 나폴레옹이 신성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60여 년 만에 다시 돌아온 독일 재통일의 기회를 놓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는 영국의 평화 중재안을 대놓고서 거부했다.

"제국 선거의 결과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노버 공작, 부재로 자동기권. 보헤미아 국왕, 본인 지명. 이하 6명의 선제후 전원의 만장일치로서 보헤비마 국왕이시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카를 폐하께서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할 정당한 카이저로 선출되었음을 알리는 바입니다!"

"""주여, 새로이 부활한 라이히의 새로운 카이저에게 승리와 영광을 약속하여주소서! 카이저여, 장수하소서!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이여, 영원하여라! 만세! 만만세-!"""

영국의 전권대사가 프랑스 황제의 손등에 입맞춤하며 양국의 우호를 맹세하던 날, 불과 수 킬로미터 거리에서 전투가 한창이던 프랑크푸르트에서 모습을 드러낸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는 근 100여 년 만에 독일 제후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제국 선거를 개최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카이저로서 대관식을 올렸다. 이는 독일 연방의 부활을 제안한 영국의 제안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사실상의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도발 행위였다.

새로이 제위에 오른 카이저는 이탈리아의 교황령 합병은 무효이며 이에 동의한 현 교황 또한 프랑스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주장했다. 카이저는 헝가리의 추기경 조셉 미할로 비치를 대립 교황으로 내세워 교황령의 해방과 제국 영내에 불법 침입한 프랑스군의 완전한 격멸을 외쳤고, 이는 대독일주의를 외치던 독일 민족주의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게 아니야. 우리가 바랬던 독일은 이게 아니라고. 영광스러운 신교 신앙의 수호자 프로이센의 영광은 어디로 사라진 거지? 퀴퀴한 냄새나 풍기는 골동품 놈들의 주구로 전락하다니, 이건 루터에게 죄를 짓는 격이고 프리드리히 대왕께서도 절대 바라지 않았을 일이야!"

"빌어먹을, 프랑스를 피했더니 다음은 오스트리아냐? 비스마르크, 이 프로이센의 배신자 놈아! 선왕께서 너를 보시면 뭐라고 할까! 저 오스트리아 놈들의 일부가 될 바에야 독일 통일 따위 거부하겠다! 통일 독일 따위 감자나 먹으라 해!"

그러나 이는 동시에 프로이센인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이었지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의 꼭두각시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실망은 특히나 프로이센의 수도인 베를린에서 도드라져, 프로이센의 멸망을 회피하기 위해서라지만 오스트리아에 멋대로 고개를 숙인 수상 비스마르크를 프로이센의 배신자라고 비난하는 시민 여론이 두드러졌다.

점차 수도 베를린에서는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이 실패하게 될 바에야 독일 일부가 되기를 거부하고 독립하자는 여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꼭 이런 극단적인 발상이 아니더라도, 국왕과 귀족의회에 실망한 시민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비프로이센계 독일인들이 신성로마제국의 부활에 고무되어 사기가 치솟은 것과는 정반대로, 당장 프로이센군은 상관살해 사건의 빈도가 대거 늘어나며 일선 병사들까지 오스트리아 주도의 독일 통일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카를 마르크스가 조국 프로이센에 돌아온 것은 이러한 혼란기가 한창이던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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