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159화 (159/530)

< 허심탄회 >

"폐, 폐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전령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아직 전령이 폐하께서 답을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으아아!"

"서둘러라. 저 양치기 놈들이 이 소식을 알게 되기 전에 선수를 잡아야 한다! 목적지는 몽골, 형제들의 고향 땅이니라! 금의환향은 승리한 다음이라도 늦지 않도다. 모두 말을 급히 몰라!"

"""존명!"""

이미 저 멀리 달려가는 이형의 등 뒤로 있는 힘껏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전봉준은 전봉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아차 싶어 제 자리로 돌아온 이형의 손에 등을 덥석 하고 붙잡혀 그의 등 뒤에 끌어 앉혀졌다. 겉모양만 보자면 흡사 북방 오랑캐 부족장이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어린 병사를 납치해가는 모습이었다. 그 누구도 차마 조선의 왕이 제가 요즈음 곁에 두고 있는 시동을 데려가는 꼴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이형은 개의치 않았다. 졸지에 생전 처음으로 말에 올라 시도 때도 없이 덜컹거리는 극악한 승마감을 견디지 못한 전봉준이 순식간에 안색이 초췌해져서는 연신 헛구역질을 해대도, 이형은 계속해서 전사들에게 서두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댈 따름이었다. 그리고 전사들은 이형의 말에 희희낙락하며 말을 몰았다. 이형이 앞서 중원에서의 일이 마무리되는 즉시 몽골을 돕겠다는 약속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아직 강남 군벌들과의 충돌에 대비하여 언제든 출격 준비를 끝마쳐 두도록 전시 비상태세가 내려져 있던 것이 본의 아니게 도움이 되었다. 그 덕에 이형의 뒤를 따르는 3만의 북방 기병들은 그들이 챙겨온 병장기들과 원정에 필요한 보급품 전부를 그 즉시 챙겨서는 출격을 알리는 고동 소리를 뒤로 한 채 난징을 나설 수 있었다. 그 위용에 놀라지 않고, 겁먹지 않는 이들은 없었다.

3만의 북방 기병이 일제히 성문에서 뛰쳐나와 오와 열을 맞추어 일제히 행군하는 모습을 멀리에서 지켜본 것만으로 난징에 주둔 중이던 한국군과의 대결을 포기하고서 무기를 들고 투항하는 강남의 군벌들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이형은 그의 뒤를 따라오는 북방 기병들을 슬쩍 돌아보고서, 작게 혀를 찼다. 역시나, 이제 그럭저럭 그럴싸한 제복도 배급되고 기병용 카빈총이나 리볼버, 사브레 따위의 서양식 군장을 그럭저럭 끝마친 한국군 기병대와는 다르게 그의 뒤를 따르는 만주와 몽골의 기병들은 드문드문 서양식 무기를 들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변발하고 화승총 같은 전근대적 무장을 하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대한제국 내에서도 조선계에 대한 편애가 이루어졌다는 증거였다. 황제인 이형부터가 조선인이며 대한제국의 도읍 또한 조선의 도읍이었던 한성인 이상 당연한 일이겠지만, 지금 이들만으로 러시아와 승부를 봐야 하는 이형으로서는 영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전근대적인 북방 유목민족들과 누구보다 자주 부딪히면서 그들의 전략전술을 익히고 흉내 내며 또한 역으로 이용해온 러시아가 아니던가.

고작 해봤자 2천 명도 안되는 러시아군에게 3만 명의 수비대가 지키던 타슈켄트가 함락당하고 50명도 안 되는 코사크 기병들의 돌격에 5000여 명의 유목민 기병대가 패주한 게 불과 6년 전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들이 러시아와 정면 대결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아무리 러시아가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힘이 온통 쏠렸다지만, 이형은 자신이 그리 유리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물론 지금 내 수중에 있는 건 북방 유목 민족 중에서도 최강으로 군림해온 그 몽골족이고, 그 만주족이라지만…. 그것도 옛말이지. 만주족은 요즈음 계속 전쟁이 이어지고 소속도 한국군으로 옮겨오면서 비교적 기강이 잡혔다지만 팔기군 시절에 아편도 하고 매관매직도 하고 하면서 기강이 완전히 무너져있던 게 아직 10년도 안 되었어. 그때 사고 치던 놈들이 그대로 군문에 남아있는데 전투력이 전성기 시절일 리가 없다.

결국 한국군을 두고 온 이상 믿고 의지할 건 몽골족뿐이야. 솔직히 몽골족조차 러시아를 상대로 확실하게 압도하거나 대등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전투는 성립한다. 이쪽이 열세라도 최소한 맞서 싸울 수만 있다면 그다음에는 지휘관의 역량에 따라 뒤집을 수도 있어. 일단 몽골족부터 규합해야 한다.'

이형은 내심 이를 갈았다. 새삼스럽게 유럽과 아시아의 격차가 뼈저리게 느껴지는 듯했다. 사방에서 전쟁 중인 러시아 제국을 상대로도 확실하게 우세를 잡았다고 말하기 어렵다니. 그러나 누구를 탓하랴. 유럽인들이 오대양을 누비며 온 세상의 부와 문물을 빨아들여 기어이는 산업혁명이라는 역사적 전환점을 불러일으키는 동안 잠만 자고 있던 대가였다.

그걸 사실상 홀몸으로 뒷수습 해야 하는 이형으로서는 고량주가 절로 당기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이형은 급히 말을 몰면서도 계속 허리춤에 콜트권총을 만지작거렸다. 결코 자신이 전선에 나설 일은 없다고 다짐하고서 한성을 나선 참이었지만, 아무래도 그 약속은 이번에도 지켜지지 못할 모양이었다.

"전군 정지! 오늘은 이만 이곳에서 야영한다. 언제 도적 떼들이 습격해올지 모르니 철저히 경계하도록."

해가 저물고 난 다음에야 이형이 이끄는 3만의 기병들은 멈추어 섰다. 그러나, 전성기 몽골 제국군이 하루에도 100여 km을 내달렸다는 것과 같은 신화적인 진격은 없었다. 얼마 달리지 못하고서 뒤로 처지는 이들이 있었기에 중간중간 속도를 줄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 대부분 팔기군 시절에도 문제만 일으키던 이들이었다.

이형은 그제야 자신의 뒷자리에 앉아있던 전봉준을 돌아봤다. 반나절 동안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 위에 올라 다른 말보다 덩치도 좋고 힘도 좋은 바둑이에게 신세를 지다 보니, 얼굴도 창백하고 입꼬리에는 희멀건 침이 흘러내리는 것이 영락없는 산송장이었다. 이형은 그 모습이 우스워 낄낄 웃었다.

"짐의 등판을 친정 바닥인 줄 아는 놈이로구나. 당당하기도 하지. 어여 일어나거라. 혹, 이대로 동이 틀 때까지 등을 빌려주면 좋겠더냐?"

"그,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감히 옥체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 이 죄를 어찌…어어어!"

이형이 낄낄 웃으며 한 말에 그제야 정신이 들었던지, 전봉준은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다만 잘은 안 되었다. 어찌나 이형의 허리를 있는 힘껏 움켜쥐었던지 팔이 굳어서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전봉준은 기역처럼 휜 제 팔을 가누지 못하고 버둥거리다가 뒤로 넘어갔다.

미리 키가 작은 이형이 다른 말보다 배는 커다란 바둑이의 등 위에서 내려올 때 곁에서 바쳐주기 위하여 다가온 몽골인 시종들이 말에서 떨어지는 전봉준을 받아주지 못했더라면, 영락없이 낙마로 큰 변고를 당할 뻔했다. 그러나 이형은 상관하지 않고서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그 녹두 장군이 제 앞에서 저런 어리숙한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멈추지를 않았다.

"영락없이 애송이로구나. 그래서야 어찌 짐이 오늘 밤잠을 이루겠느냐? 이 안에 조선인이라고는 짐과 너뿐인데 말이다. 위병이 이래서야 원, 내일이면 짐의 목이 달아나 있겠구나."

이형은 낄낄 웃으며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아니, 뛰어내리려 했다. 뛰어내리려 했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여주지를 않았다. 이형은 욱신거려오는 무릎 통증에 뒤늦게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서,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는 순순히 그를 받아주러 다가온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말 위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여전히 전봉준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종일 익숙하지도 않은 말 위에 올라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보니 완전히 탈진한 모양이었다. 이형은 시종들에게 까딱거리며 손짓했다. 먼저 눕혀서 재우라는 의미였다. 시종들은 말없이 그에게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고서는 쓰러진 전봉준을 데리고 갔다.

"그래, 이곳이 어느 즈음이더냐? 어디 만큼 왔더냐."

"정원현인 줄 아뢰옵니다. 이대로 내일이면 회남시를 지나칠 것 같습니다. 아니면, 물자를 징발하려 잠시 주둔하시겠습니까?"

"일 없다. 아마 지금쯤 그 전령 놈이 뒤처진 줄 알고서 급히 말을 몰아 돌아가고 있을 터. 그놈이 러시아까지 전신이 닿는 곳까지 다다르기 전에 뒤를 치려면 서둘러야 하느니라."

'대충 50여 km을 내달린 셈인가. 빠르기도 하군. 하기야 그 북방 기병들을 이끌고서 전투 한번 없이 달리기만 했으니 이상할 것도 없지. 하지만 이대로는 따라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징발을 권유하는 부장의 말을 거부하고서, 이형은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문득, 만주족들을 두고서 몽골족만 끌고 따라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건 안될 말이었다. 조선인은 말할 것도 없고 만주족도 아이신기오로의 공주와 혼인하여 장자를 본 이상 그를 무조건 따르겠지만, 조선인도 만주족도 없이 이형 혼자서 몽골족과 마주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야심가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었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 세력이야 천하에 널리고 널렸다. 조선과 만주는 확실하게 그의 것이었지만, 몽골은 아직 러시아라는 공통된 적에 맞서 힘을 합치고 있는 동맹 세력 내지 그의 보호 아래에 놓인 세력이었다. 제아무리 이형이라도 제 세력조차 없이 전선에 나설 만큼 간땡이가 불어터지진 못했다.

'만주족은 러시아와 싸울 전력이 못 된다. 그러나 몽골족은 온전히 믿을 수가 없다. 성가시게 되었군. 하기야, 성가신 건 뒤통수가 근질거릴 러시아 놈들이 더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짐이 될만한 건 두고 간다. 어차피 전쟁에 사용할 물자라면 몽골에 가면 얼마든지 있을 터. 자그마치 20만에 이르는 대군이 주둔 중인데 그조차 없다면 말이 안 되지. 전사들에게도 가능한 한 경무장하고서 좌우간 빨리 몽골로 돌아가는 것만 생각하라 전해두도록."

"""존명!"""

이형의 말에, 부장들은 일제히 포권을 하며 흩어졌다. 그 모습이 낯설다고 느끼면서도,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고 여기며 이형은 자신의 막사로 들어갔다. 먼저 시종들이 막사에 데려간 전봉준이 잠을 자기는커녕 무릎을 꿇고서 앉아 있었다.

"어째서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느냐? 보아하니, 지쳐서 말하는 것조차 힘겨운 듯하다만."

"그, 냄새가 심하여서…."

이형이 묻자, 전봉준은 머뭇거리면서도 답했다. 이형은 어리둥절해 하며 코를 벌렁거리다가, 뒤늦게 지독한 땀 냄새와 가죽 냄새를 눈치챘다. 아직 완전히 유목민물이 들었다고 하기 어려워하던 이형이었지만, 그런 그도 이번에 군에 자원하면서 뒤늦게 북방 유목민들을 맞닥뜨렸을 전봉준에 비하면 유목민들의 생활상에 익숙해져 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않으냐. 우리 조선이야 온 사방 천지가 개울이요, 하천이니 물이 풍부하여 목욕은 못 하여도 세수 정도는 자주 하지만, 초원에는 물이 귀하여 먹는 물조차 없어 짐승의 젖 따위로 목을 축이니 말이다. 너도 저들과 같이 지내다 보면 절로 익숙해질 게다."

"그,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 어찌 제게 이런 과분한 총애를…."

"보면 모르겠느냐? 내 너를 후일 천하의 대장군으로 쓰려고 그러느니라."

이형의 말에, 전봉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말은 한 번도 듣지 못했을뿐더러, 이형이 그에게 왜 이런 관심을 보여주는지 알지도 못하였으니 당연한 이치였다. 이형은 히죽 웃으며 전봉준에게 다가가 그의 앞에 양반다리로 주저앉았다. 차마 이형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서 시선을 피하는 전봉준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이형은 손가락을 튕겨 시종에게 술상을 가져오라 시켰다.

"네가 천하 대장군이라니 천하에 인재도 참으로 없다-싶더냐?"

"그,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예, 그렇습니다."

"짐 또한 동감이다. 그러나 어쩌겠느냐? 내 너를 제하자면 달리 시킬 인물이 생각나지 않는 것을. 이런 놈팡이도 황제 노릇 하고 있는데 난쟁이 서생이 천하 대장군 못하라는 법이 어디 있더냐? 난세에는 생각지도 못한 놈부터 알을 깨고 날아오르는 법이다."

이형은 시종이 차려온 술잔을 먼저 비우고서는, 슬쩍 전봉준에게도 내밀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이형이 건넨 술을 받은 전봉준은 이내 그 낯선 맛에 혼이 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황제가 내린 술이라고 어떻게든 뱉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퍽 우스워, 이형은 낄낄 웃었다.

몇 잔 주고받지도 않아서, 전봉준의 얼굴이 붉어졌다. 낮 내내 쌓인 피로가 더해져 난생처음 마시는 술에 금세 술기운이 오른 것이다. 이형은 적당히 무르익었다고 여기고는, 대뜸 입을 열었다.

"네가 보기에 작금의 천하는 어떤 것 같느냐."

이형의 느닷없는 말에, 전봉준은 눈을 껌뻑거렸다. 그러다가 뒤늦게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난세, 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황상께서 청의 천명이 다하였으니 난세이고, 난세이니 우리 조선이 천하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읽었습니다."

"들었다가 아니라 읽었다라. 그래, 난세이지.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 같으냐?"

"그야 물론…황상께서 천명을 받아 천하의 기강을 바로잡으셨으니 태평성대가 도래하지 않겠습니까."

이형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명백한 부정의 의사였다. 당황하는 전봉준에게 술잔을 건네며, 이형은 담담하게 말했다.

"틀렸다. 앞으로도 계속 태평성대는 오지 않을 것이야. 하나, 난세도 오지 않으리라."

"…네? 어, 어찌 그러합니까. 황상께서 천하의 천명을 받았는데 어찌…!"

"바로 그렇기 때문이니라."

전봉준이 이형이 건넨 술을 들이켜자마자, 이형은 새로 한잔을 따라주며 말했다. 이미 전봉준의 눈은 취기로 풀린지 오래였다. 황제가 보는 앞이라고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이 이형으로서도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형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고의로 이런 상태가 될 때까지 술을 먹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간의 상식 관으로 이형이 지금부터 할 말들을 거르는 것보다, 취기로 이성이 무너진 상태에서 전봉준의 머릿속에 직접 때려 넣기 위하여 말이다.

"애당초 천하라는 것이 무엇이더냐? 하늘 아래. 그래, 한자로 곧이곧대로 생각하자면 그러하지. 하지만 천하가 진정 하늘 아래 모든 세상을 가리키고 있더냐? 다르도다. 천하는 고작 해봐야 옛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던 작은 세상을 가리킬 뿐이다."

"소, 소신은 황상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잠자코 듣고 있거라. 결국 천하는 주나라적 선비들이 만든 것이다. 중원이야말로 세상 전부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옳았다. 조선이니 몽골이니 만주니 일본이니, 그 시절에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지. 그러니 춘추전국시대란 곧 온 세상이 서로 다투는 난세였고, 후일 시황제가 천하를 일통하는 것은 곧 세상을 하나로 만든 것과 같았다. 대단한 위업이었지. 세상 바깥의 오랑캐들이 위세를 키우기 전에는 말이다."

이형은 술잔을 찰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더는 천하는 중원이 아니게 되었다. 중원 바깥의 오랑캐들이 저리도 강대한데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 오랑캐들을 달래기 위하여 천자니 번국이니 하여 주나라적 중원의 법도로 천조질서를 세웠으나, 여전히 천하는 오로지 중원이었다. 때로는 재화를 주어 달래고, 때로는 힘으로 짓밟으면서 천하 바깥의 오랑캐들이 감히 천하를 범접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말했지. '천하는 하나'라고 말이다."

"…."

"천하가 하나이니 춘추시대나 전국시대와 같이 서로 다툴 이유가 없었다. 모두가 같은 나라 사람이니 당연했지. 법가가 세상을 하나로 만들었고, 유가가 세상을 하나로 유지하였다. 작금에 와서는 법가도 유가도 분간할 수 없이 하나로 뒤엉켰지만 말이다. 이는 중원의 유가를 받아들인 우리 조선이라고 다르지 않다. 조선은 하나다. 이를 부정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 조선은 하나다. 당연한 일이지. 그것이 유학의 힘이다. 본질적으로 수없이 많은 나라로 이루어진 세상을 하나로 합치기 위하여 만들어진 까닭이다. 중원에게는 중원의 천하가 있었으며, 조선에게는 조선의 천하가 있었다. 일본에도 일본의 천하가 있었겠지. 서로의 천하는 각기 나누어져 감히 침범되지 아니하였으며, 왜란과 호란과 같은 극히 예외의 사태를 제외하자면 각각의 천하는 하나였기에 세상은 평안하였다."

그러나, 하고 이형은 덧붙였다.

그리고 전봉준의 눈을 빤히 바라 보며 이형은 말했다.

"너도 학생이라면 신식학문을 배웠을 테고, 서역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네 짧은 식견으로 보기에, 그들의 천하가 진정 하나이더냐? 그들이 인식하는 세상이 고작 해봐야 그들의 나라 하나, 더 넓어 봐야 중원에 지나지 않더냐?"

전봉준은 그제야 아, 하고 탄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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