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170화 (170/530)

< 역모? >

"거 정말로 막 나가는 녀석이로군."

이형은 새삼스럽게 어처구니가 없어 작게 혀를 찼다. 하는 말이야 이치에 아주 완벽히 틀리지 않다. 당장 근대화조차 마저 끝내지 못한 지금의 한국이 그들의 근대화를 후원하던 영국과 적대하게 된다면 무사할 리가 없다. 프랑스가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힘이 빠진 것이 되레 불행이 되어 돌아오는 격이다. 영국이 바라는 것은 언제나 대륙 세력 간의 힘의 균형이다.

대륙세력들의 힘이 서로 엇비슷하여 계속 대륙의 패권을 두고서 다퉈야지만 비로소 대륙의 열강들이 섣불리 바다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그래야지만 영국이 이렇다 할 견제세력 없이 바다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이 러시아를 상대로 완승을 하여버린다면, 그 순간 대륙의 균형은 사라져 없어진다. 중원과 대초원 전부를 손에 넣은 패권세력의 탄생이다.

그러니 하는 말은 이치에 맞다. 문제가 있다면, 이걸 이야기하는 자가 고작 해봐야 일개 장군이라는 것이다. 하다못해 총독, 혹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고관이나 러시아의 차르라면 모를까 일개 장군이 향후 러시아의 국가전략을 좌지우지하는 격이다. 이형이야 조선의 황제라지만, 일개 러시아의 장군이 러시아의 국가전략을 논할 권한이 있던가.

'제가 옳다고 생각하거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상부에서 뭐라 간섭하건 듣는 체도 안 하고 일단 도박부터 걸어보는 막무가내인가. 미친놈. 하기야 나도 막 나가는 거야 마찬가지라지만, 이놈은 그것보다 더하구먼.'

이형은 설령 막 나가더라도 그가 왕이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있다. 신하들과 상담하지 않고서 설령 무모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정책을 밀어붙이더라도, 그는 여전히 왕이다. 그렇기에 조정의 신하들이나 세간에서도 이형을 두고서 폭군이라고 손가락질할지언정 이형의 행동 그 자체를 처벌할 수는 없다. 왕은 처음부터 그 나라의 국가전략을 정하라고 존재하는 지위이니까.

그런데 장군은 어떻던가. 그야 물론 상당한 군세를 이끌 수 있으며, 점령지에서 군정을 펼치거나 하나의 전선을 뜻대로 조율할 수 있는 권한 정도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개 장군이 허락도 없이 적국의 황제를 만나러 가고, 자국의 영토를 일정 부분 양보하겠다고 나서고, 하물며 전후 조국이 어떤 국가전략을 취하면 좋을지에 대해서 멋대로 침범한다?

불경하다는 수준이 아니다. 그냥 극악무도한 역도다. 처벌 받는 게 당연하고, 처벌받지 않는다면 그 나라의 법치에 무언가 이상이 생겼다는 증거다. 이 정도면 목숨을 내놓고서 도박을 건다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작정하고 죽을 생각이지만 죽을 방법은 고르겠다-라고 나선 것이나 다름없다.

"부끄럽사옵니다, 폐하."

"…허, 참."

미하일은 그리 말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물론 전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볼을 붉히기는커녕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있으니 되려 괴기하기만 했다. 이형 또한 차마 그 모습에 뭐라 더 말은 못 하고 헛웃음만 흘렸다. 참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구나-싶었다. 이형 또한 그 나름대로 도박광 내지 스릴중독자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눈앞의 자살지망생을 보고서는 그저 혀를 내두르는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이형의 역사 지식에 근간하여 돌이켜 생각해보면 눈앞의 장군은 처음부터 상부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서 멋대로 활동하는 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이번에는 정도가 지나쳤다고 지적할지언정, 미쳤다는 표현은 알맞지 않을지도 몰랐다. 미친것이 아니라 본래 성정부터가 정상범주를 벗어난, 간이 배밖에 튀어나온 인물일 뿐이니까.

"그래, 만일 지금 짐이 군사를 일으켜 러시아를 시베리아에서 내쫓는다면 그야 물론 영국의 견제를 받게 되겠지. 그러나 감히 묻겠다만. 네가 생각하기에 진정 짐이 영국을 적대하는 것보다 러시아를 적대하기가 쉽다고 생각하느냐? 만일 설령 네가 말한 대로 시베리아를 반으로 나눈다고 한들 우리 조선은 너희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게 된다. 그에 반하여 영국은 저기 바다 건너에 있느니라.

대군을 보내어 다투게 된다면 당연히 국경을 접한 너희 러시아가 더 쉽지 않더냐. 짐을 우롱할 셈이더냐?"

"폐하께서는 이미 한차례 영국의 대군이 청의 도읍을 불태운 것을 알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만일 우리 러시아가 대군을 보내어 다툰다고 한들, 감히 북경을 범할 수 있겠습니까. 러시아와 다투신다면 그저 대초원을 두고 다투는 것으로 끝나겠으나, 영국과 다투게 되신다면 도읍을 두고 다투게 되니 이것이 곧 영국을 적으로 삼음이 위험한 까닭입니다."

'뭐, 아주 틀리지는 않군.'

이형은 한국의 항구들을 근대적 항구로 개조한 것이 다름 아닌 영국이라는 걸 떠올렸다. 달리 말하자면 한반도 전역의 항구가 어떻게 생겼는지 영국은 이미 알고 있다는 이야기였으며, 한국의 항구들은 어디까지나 영국이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개조한 것이라는 뜻이었다. 만일 전쟁이 시작되고 영국이 극동함대를 파병한다면, 그 즉시 한국의 제해권은 박탈당한다. 일본이 한국을 배신하건 배신하지 않건 결과는 같다.

범아시아 조약기구와 영국의 해군력은 그 정도의 격차가 있다. 그리고 동아시아 특유의 기나긴 해안선은 작정하고 해안요새를 세우면서 상륙지점을 좁히지 않는 한 병사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상륙에 취약해지게 만든다. 영국군이 정말로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불태우건 말건, 영국의 상륙에 대비해 병사들을 흩어지게 만드는 것만으로 한국의 천하는 내부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

그 반면 러시아와 범아시아 조약기구의 육군력 격차는 영국과의 해군력 격차만큼 크지는 않다. 엄청난 시간과 예산을 들여서 차근차근 육성해야 하는 해군력과 달리, 육군력은 우선 사람과 물자만 준비되면 머릿수를 채울 수 있고 해군보다 인적 자원을 육성하는 것도 간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원을 발아래에 둔 시점에서, 이형은 무제한의 인력과 자원을 손에 넣은 격이다.

자연히 앞으로의 육군력은 급속도로 팽창하면 팽창하였지 약화할 이유는 없었다. 러시아가 전후 승리하건 패배하건 그 여파로 극동에 병사를 파병하기 어려운 것과는 대조적이다. 10년 후에도 여전히 한국은 영국의 해군을 이기지 못하겠지만, 10년 후 한국은 러시아의 육군과 대등하게, 혹은 우세하게 싸울 수 있다. 이형은 조금씩 마음이 기울고 있는 걸 느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이미 우랄산맥 동쪽의 시베리아에 신경을 쓸 여력이 되지 못합니다. 그만큼 유럽에서의 전쟁이 격화되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미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마저 징병하여 모조리 유럽에 투자하고 있는 마당인데, 가까운 시일 내에 시베리아의 전력이 확충되기는 어렵습니다. 폐하께서는 현명하시며, 강인하시며, 위대하신 지도자이십니다.

제가 어찌 제 조국 러시아의 안위만을 생각하여 이러겠습니까? 모두 그만큼 폐하의 위업을 흠모하며 애태워 온 까닭입니다.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소서, 폐하. 이는 곧 러시아만을 위한 일이 아닌, 조선을 위한 길이기도 하옵니다."

"흐음…."

'…내 위업을 흠모한 놈이 내 목숨을 노리려고 태평천국 놈들을 충동질시켜서 암살자들을 보내? 에라, 이 자식아.'

미하일은 이형이 흔들리고 있음을 눈치채고서 다시 한번 자세를 급히 숙이며 아첨을 늘어놓았다. 물론 이형으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였다. 뻔히 생명을 노려진 걸 기억하고 있는데, 이제 와서 이형을 흠모하였다느니 하는 말을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서 늘어놓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형으로서는 뒤늦게 뒤통수라도 한 대 더 세게 후려쳐 줄까 하는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이형은 애써 충동을 억눌렀다. 안 그래도 도자기 잔을 맞고서도 이렇다 할 치료조차 없이 계속 피가 흘러내리는 채로 제 좋을 대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미하일이었다. 이런 마당에 장난삼아라도 한 대 더 후려갈겼다가는 정말로 억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을지도 몰랐다. 그래서야 곤란했다. 지금까지 미하일이 늘어놓은 구상이 허풍이건 아니건 간에 이형 혼자서 이런 구상을 알아봐야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형은 권총을 거두어 홀스터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러고서도 한동안 미하일의 자세는 변할 줄을 몰랐다. 한참을 그런 미하일을 내려다보다가, 이형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서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적을 구태여 고른다면, 너희 러시아가 옳다. 영국을 적으로 골랐다가는 짐의 제국이라도 성하기는 어렵겠지. 그러나 짐이 도대체 무엇을 믿고서 너희 러시아를 믿으란 말이더냐? 이미 두 차례 다투었고 그때마다 짐의 화친을 거부한 너희 러시아가 아니더냐. 이제 와서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너희 러시아를 믿으란 말이더냐?"

이는 이형의 진심이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는 처음부터 러시아를 적대할 생각도 없었다. 영국과 러시아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고뇌하였고, 그러다가 러시아가 먼저 조선의 안위를 위협하면서 어쩔 수 없이 영국과 손을 잡게 된 것이지 그 직전까지만 해도 러시아에 상당 부분 기울어져 있기도 했다. 결국 이형이 러시아를 적대한 것은 러시아가 먼저 이형을 적대하였기 때문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러시아와 이제 와서, 그리고 이미 한차례 목숨까지 노린 처지에 신뢰하라니.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설령 적대적 공생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신뢰가 있어야 유지할 것 아니던가. 러시아가 조선이 계속 다투고 있는 것이 영국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옳다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란 어려웠다.

그러자 미하일은 고개를 숙이며 차분한 목소리로 답하였다.

"저도 염치가 있지, 어찌 러시아를 믿으라 하겠습니까? 이미 우리 러시아가 여러 차례에 걸쳐 폐하의 신뢰를 저버렸음은 저 또한 알고 있나이다. 그러니 러시아를 신용하지 마소서, 폐하. 저를 신뢰하여 주십시오. 저를 신뢰하여 주신다면 폐하께서 가장 고대하시던 자들의 목을 가져다 바치겠나이다."

"…허."

이형은 새삼 머리가 띵해지는 듯했다. 그간의 발언도 발언이었지만, 이건 또 뭐란 말이던가. 러시아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일개 장군에 지나지 않는 자신을 신뢰하여 달라? 그것도 이미 이형의 목숨을 한차례 노린 자신을? 염치가 없는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그 자체로서 문제가 많은 발언이었다.

러시아가 아닌 자신을 믿어달라니. 마치 러시아와 자신을 분리하여 생각해달라는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가. 이는 그의 행동이 러시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고 해석해도 무방한 발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본국이 힘겨운 전쟁을 치르는 와중 한 전선을 담당한 장군이 적국의 황제에게 먼저 찾아가 러시아 대신 자신을 믿어달라고 지껄이고 있다?

"이 미치광이 역도 같으니라고."

이형은 혀를 내둘렀다. 제정신이 아닌 줄은 알았어도, 이만하면 그 이상으로 막 나가는 놈이었다.

미하일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칭찬하여 주시니 그저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폐하."

그러자 이형 또한 차마 그에 대하여 뭐라고 더 말할 건덕지가 없었다.

그는 그저 시종들을 시켜 미하일의 상처를 치료하라고 명하였을 따름이었다.

***

한편, 그 무렵.

"대칸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아직 노서아에서 온 장군이라는 자와 담소를 나누고 계신 모양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목을 자르지 않겠습니까? 먼저 죽여달라고 알아서 찾아온 얼간이이니, 설령 죽더라도 제 어리석음을 탓해야지요."

이형의 게르와는 조금 떨어져 있는 게르에서, 한 무리의 부족장들이 모여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몽고친왕 셍게린첸과, 그의 전사들이 있었다. 그간은 몽골 내전에 투입되어 러시아군과 다투느라 이형과 떨어져 있었으나, 이제 이형의 군세까지 몽골에 돌아와 대군을 형성하게 되니 자연스레 합류하여 부사령관을 담당하고 있던 것이다.

이형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밀회가 아닐 수 없었다. 외몽골이 불타면서 그의 지도력에도 흠집이 생긴 지금, 그를 배제하고서 몽골의 유력자들끼리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면 이형에게 그걸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들의 밀회는 이형에게 그리 달갑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저자를 죽인 다음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뜻이더냐?"

"칭기즈칸께서 처음 몽골을 일통하신 이래 이만한 대군이 한대 집결한 것은 실로 오랜만입니다. 이만한 대군이 있다면 서방의 위구르와 돌궐 따위는 그리 힘을 들이지 않고서 짓뭉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초원을 일통하고서 노서아마저 무릎 꿇린다면, 누가 감히 몽골에 대항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느 부족장이 태연하게 던진 한마디에, 셍게린첸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이리 말을 빙빙 돌리고 있는지 대강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단 말이더냐. 작금의 우리 몽골이 이와 같은 세를 되찾은 것은 대칸께서 전사들을 이끌어 천하를 평정한 덕분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대칸의 은혜를 칭송하며 언제까지고 말 꼬랑지를 뒤쫓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것도 우스운 이야기지요. 만주의 칸이라는 족속이 예케 몽골 울루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게 된 것은 먼저 몽골 초원 전역을 평정하고 난 다음이 아니었습니까. 그 이후로도 두고두고 그 황제가 황금 씨족과 피를 섞으며 고귀한 혈통을 유지하였기에 비로소 우리 몽골의 전사들도 만주의 칸을 따랐습니다.

하나, 고작 해봐야 반쪽짜리 내몽골을 평정하였을뿐 노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추대한 대칸을 진정한 대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거 조용하지 못하겠나!"

셍게린첸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발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석해도 대칸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한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 발언이었다. 만일 대칸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 즉시 목을 벤다고 해도 결코 처벌이 과하다고 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또 다른 부족장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자가 도대체 무엇을 하였단 말입니까? 노서아의 침략을 막으라며 병사를 보내주었으나 노서아를 자극하여서는 안 된다며 병사들을 함부로 쓰지 못하도록 하더니 결국 노서아에 의하여 초원이 불타고 말았습니다! 그런 와중 대칸이라는 자가 전사들을 가지고 무엇을 하였습니까? 황하에서 이홍장이라는 자와 싸워 이기며 중원의 패권을 거머쥐었지요!

몽골 초원이 노서아에게 불타는 동안, 저자는 우리 전사들을 멋대로 데려가 제가 중원의 패권을 거머쥐는데 이용하였을 뿐입니다. 냉정해지십시오. 저자는 조선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 몽골을 멋대로 이용하고 버리려는 것뿐입니다!"

"폐하께서는 우리 몽골의 자치를 보장하여 주셨고, 스스로 몽골의 대칸이라 자칭하셨으며, 몽골의 백성들이 험난한 겨울에 시달리지 않도록 물자를 나눠주셨다. 그 은혜를 모른 척 할 셈인가!"

"은혜라니요. 서로 이용하였을 뿐이지요! 이제 노서아마저 꺾고 나면, 그때는 이만 이별하여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저자를 대칸으로 추대하셨던 이유도 노서아와 싸울 힘이 필요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우리 몽골이 노서아를 몰아낼 수 있도록 저자가 도움을 주었듯이 우리 몽골도 고향 땅이 불타면서까지 저자가 중원을 제패할 수 있도록 도왔으니, 은혜라면 이미 갚은 것이 아닙니까!"

"조용-! 이번 일은 없었던 걸로 하겠다. 오늘은 이만 물러날 테니, 너희들도 각자 게르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게야!"

고함을 지르고서는, 셍게린첸은 게르를 박차고 나왔다. 게르 바깥에 위병들은 없었다. 처음부터 세워두지 않았던 탓이라지만, 천만다행이었다. 그 또한 여기까지 과격한 발언이 나올 줄 알았다면 이 모임에 참여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뒷간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더니, 이제 와서 다들 엉뚱한 마음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뒤따라 나서는 이들은 없었다. 그나마 이 자리에서 그를 죽이려고 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셍게린첸은 생각했다. 이런 위험한 이야기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은 자들이 지난 역사를 비추어 볼때 얼마나 많았던가.

"이용하였을 뿐이다, 라."

셍게린첸은 헛웃음을 흘렸다. 분명 그 말대로였다. 몽골과 조선은 서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대한제국이라는 하나의 틀 안에 묶여있다지만, 정말로 두 나라가 하나라고 여기는 자들이 몇이나 될까. 결국 두 나라는 하나로 묶여있는 편이 그들 각자의 사정에 편리하기 때문에 힘을 합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셍게린첸은 또한 나지막이 말했다.

"어리석은 놈들. 조선과 손을 끊는다고 한들 이용당하지 않을 성싶더냐? 우리 몽골 홀로 천하를 쥐락펴락하던 시대는 진즉에 끝났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고작 해봐야 누구에게 이용당하는가 뿐이란 말이다."

조선과 몽골의 관계는 결코 대등하지 않다. 냉정하게 말하여, 조선이 몽골을 부리면서 그 대신 이것저것 당근을 내리고 있는 것 뿐이다. 셍게린첸은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은 상전이었고, 몽골은 조선을 따르고 있는 처지였다. 저들의 인식과는 달리, 결코 양국의 관계는 대등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은, 객관적으로 보아도 그리 나쁘지 않은 주인이었다. 그저 다이칭 구룬의 통치법을 그대로 계승하였을 뿐이니, 현상 유지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보다 이상적인 주인이 있을 수 없었다.

셍게린첸은 눈을 질끔 감았다. 몽골 제국의 낡은 환상이, 치기 어린 젊은이들의 눈을 흐리게 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