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174화 (174/530)

< 말세 >

승리를 기념하는 대한제국군만의 축하 연회는 조촐하게 마무리되었다. 사령관이던 한성근이 인근의 민가에 폐를 끼치지 말라고 엄히 명해둔 까닭이었다. 다소의 음주는 허락되었으되, 어디까지나 목을 축이는 수준이 고작. 병사들은 알딸딸하게 코끝을 간질이는 가벼운 취기만을 품고서 자정이 되자마자 잠자리에 들어야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발을 디디고 있는 곳은 적진이었고, 부상병들의 수습도 채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 번의 승리만으로 도취하여 흥청거리기에는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전장을 수습하는 것은 그중에서도 으뜸가는 일이었다.

"오늘 행군은 없다. 각 부대는 지정된 구역의 시신을 수습한 후, 자율적으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한다. 혹여나 삽으로 전우들의 시신에 흠을 내거나 하는 일은 없도록, 작업 시에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한다. 실시."

이튿날, 한성근은 병사들에게 휴식을 명하였다. 물론 허울 좋은 휴식일 뿐, 그 실상은 전장을 뒷수습하기 위하여 짧게나마 전장에 남아 있을 필요가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 휴식이라는 핑계로 대부분 병사들은 삽을 들어야 했고, 그들은 전장에서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던 적과 우군의 시신들을 변별하여 파묻어갔다. 적전 도주하여 탈영한 것인지, 아니면 명예롭게 전사한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인 작업이었다.

그래야지만 전후 유가족들에게 사망통지서를 전달하건 아니면 국가헌병대에게 알려 탈영병을 수색하도록 하건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대한제국군의 전사자 중 대부분은 신원이 간편하게 확인되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우군과 함께 뒤엉켜 있는 상황 속에서 목숨을 잃었기에, 비록 훼손이 심하여 형체를 알기 어렵더라도 인식표와 소속 부대의 결원 파악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신원을 파악할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대한제국군에 한정된 이야기일 뿐, 태평천국 군의 시신은 아무렇게나 가매장 되거나 한데 모아 불에 태워졌다. 한국군이 아니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애초에 이들의 신원을 확인할 방법 그 자체가 없었다. 그러니 하다못해 전염병을 퍼뜨리거나 하지는 않도록 글자 그대로 최소한의 조치 정도만을 취했다.

"각하, 수색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사교의 교주는 이미 이 전장을 빠져나간 모양입니다. 사교의 교주로 추정되는 포로나, 시신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추격대에게 뒤쫓으라 하시겠습니까?"

"으음…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쯧, 기개라고는 없는 놈이로군. 하다못해 그 이홍장이라는 역도는 이대로 도망치면 뒤가 없다는 걸 알고서 마지막까지 맞서 싸웠거늘. 호걸 소리를 듣기에는 한없이 도량이 작은놈이야. 포로들로부터는 뭐라 증언은 없나?"

"도망치기 전에 제 병사들에게 '고기 방패가 되어라!'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 이후로는 어디로 갔는지 도통 알 수 없다더군요. 아무래도 제 측근들만 데리고서 내뺐거나, 아예 혈혈단신으로 몸만 빠져나간 듯합니다. 어느 쪽이건 한심한 놈이라는 건 매한가지입니다만."

물론 이러한 작업에는 행방이 묘연한 홍천귀복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확실하게 해두려는 목적이 더욱 컸다. 그리고 수색의 결과는 한성근 또한 예상했다시피 전장에서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한성근으로서는 머리가 절로 지끈거리는 일이었다. 예상하기는 했지만, 예상했던 대로 진행되기를 기대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무엇을 강력히 바라면 그 반대로 이뤄지는 모양이었다.

측근들만을 데리고서 도망쳤건, 아니면 혈혈단신으로 도망쳤건 간에 전장에서 도망쳤다는 것이 확실시되는 이상 사태의 조기 수습은 물 건너간 격이었다. 안 그래도 현인 신을 자칭하며 모든 권력과 권위를 천왕 한 사람에게 집중하던 태평천국이었다. 홍천귀복의 생존은 후일 두고두고 근심거리가 될 소지가 너무 컸다.

한성근은 이에 실망하였으나, 결단은 빨랐다. 이대로 오래도록 시간을 끌어봐야 태평천국의 본거지, 청두까지 홍천귀복이 도망쳐 마지막 발악을 시도할 여유를 남겨주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 한심한 놈이지. 그러나, 그런 한심한 놈이라도 대한의 천하에 거역하는 역도다. 가벼이 웃어넘길 수도 없는 노릇.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출병한다.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씨를 말려 황상께서 두 번 다시 골치를 썩이시는 일이 없도록 만들겠다."

"넷. 충성!"

하루 간의 휴식을 가진 후, 토벌군은 다시 행군하기 시작하였다. 목표는 태평천국의 근거지이며, 임시 도읍이기도 했던 청두. 두 번 다시 재흥할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점령 후에는 현지 호족들과 태평천국의 간부세력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예정되어 있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호족들에 대한 숙청만이 아니라 태평천국에 일정 수준 이상으로 부역한 민간인 또한 숙청의 대상이었다.

이는 이형의 지시라기보다, 한성근의 판단이었다. 이형이 그에게 내렸던 지시는 어디까지나 '태평천국을 토벌하라, 그를 위하여 5만의 병사들을 뜻대로 쓸 수 있도록 허락하겠다.' 이 두 가지 뿐. 토벌하고 난 다음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에 대해서는 따로 지시하지 않았다. 이는 곧 사후의 처리에 대해서는 우선 사후보고 원칙에 따라 현지에서 자율적으로 해결하라 해석해도 무방했다.

적어도 한성근은 그렇게 판단했다. 애초에 중화제국과 태평천국은 그 근간부터가 달랐다. 중화제국은 비록 어설프게나마 국가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중원의 백성들을 통치하려고 했고, 비록 미수에 그치기는 했으나 근대화를 진행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니 이형 또한 이홍장을 죽이고서 남경에 거하고서도 구태여 중화제국에 동조한 관료들을 벌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복잡한 명분을 따지자면 분명 대한제국과 중화제국의 전쟁은 멋대로 황제를 자칭하는 역도 무리에 대항한 토벌 전쟁이었으나, 그 본질은 국가 간 전쟁이었다. 이형 또한 그 점을 들어 이홍장을 벌하였을 뿐 그에게 동조한 이들까지 벌하지는 않았다. 물론 권력의 중심에서 내쫓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정권교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황제의 뜻은 대한제국의 관료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현지 관료들을 정복자로서 다소 오만하고 폭압적으로 대했을지언정 한 사람의 유자이자 국가의 중책을 맡은 고관으로서 우대하였다. 만일 이형이 남경에 천도하여 중원을 직접 통치하려 했다면 모르겠으나, 전쟁이 끝나고 나면 한성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이상 불필요하게 현지의 반발을 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태평천국, 그 사교도들은 다르다.'

한성근을 비롯한 군관들의 뜻은 확고했다. 결코 태평천국에서는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기실 이는 군관들뿐만이 아니라 과격함의 차이가 있었을지언정 문관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청과 만주를 적대하고 한족을 부흥시키려는 뜻은 중화제국과 같았을지도 모르겠으나, 그 세부적인 행동 원리와 조직체계는 판이하다.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서역의 통치이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겉으로나마 공화국을 가장하거나 입헌군주국을 자칭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통치이념은 종교였고, 통치체제는 신정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백성들을 따르게 하는 근간은 증오였다. 가진 자들에 대한 증오, 외세에 대한 증오.

그 구역질 나기 그지없는 증오의 탑 위에서 아편 장사 따위에 손을 대며 백성들의 바람을 배신하고 양이와 손을 잡아 목숨을 부지해온, 천하를 위협하는 극악무도한 역도 무리였다. 자비를 베풀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전통적인 유자로서의 관점에서건, 신진 지식인으로서의 관점에서건 두 번 다시 재흥할 수 없도록 짓밟는 것이 옳았다.

'토벌하고, 씨를 말려 삭초제근해야만한다. 모조리 불태워 흔적을 없애고, 사교의 가르침에 물들어 돌이킬 수 없게 된 폭도들은 죽인다. 그리고…그다음에는 황상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따른다. 마음 같아서는 흔적도 없이 멸하고 싶으나, 이는 나의 소관을 벗어난 일이니….'

청두를 포위할 무렵, 이미 한성근의 각오는 굳어진 뒤였다. 손속의 자비를 두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만일 저들이 조선의 백성이었다면 마땅히 유자로서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하니 손속에 자비를 두었겠지만, 본질적으로 태평천국의 가르침에 빠져든 사교도들은 이국의 백성에 불과했다. 한국이 구태여 오랜 시간과 많은 공을 들여 올바른 길로 인도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두 번 다시 반란은 생각지도 못할 지경으로 짓밟아두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것이 대한제국의 군관으로서 황제에 충성을 다하는 길이라고,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막상 청두에 다다른 한성근은 예상하지 못했던 장애물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 십, 백…못해도 2천은 되겠군. 놈, 대관절 노서아에게서 받은 신식 병장기는 어디에 숨겼나 했더니 도읍을 지키라 남겨두었던가."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한성근은 이를 갈았다. 청두를 빙 두르고 있는 거대한 성벽 위로, 러시아의 장총으로 무장한 태평천국의 정병들이 늘어서고 있었다. 물론 그들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 배는 족히 넘는 숫자의 민병들 또한 함께 성벽에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한성근은 그들을 위협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 사춘기조차 오지 않은 듯한 어린아이와 아녀자,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병자나 노인들을 줄줄이 세워놓은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서역의 병장기로 무장하고 그들의 전술을 배운 대한제국군의 상대가 되기에는 너무나도 허약한 민병들이었다. 숫자는 더욱 적어도, 어설프게나마 통일된 제복을 갖추고서 러시아의 소총을 들고 있는 태평천국의 정병들이 더욱 눈에 거슬리는 건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제대로 된 대포 하나 없다고 하나, 그래도 성벽은 성벽이고 요새는 요새.

한성근으로서는 되려 이만한 전력을 갖추고서 정작 앞선 전투에서 이들을 동원하지 않았다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처음부터 조금이라도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본거지로 돌아갈 작정으로 병력을 아낀 것인지, 아니면 사실 교주라는 작자는 겉치장일 뿐이고 저 청두에 남아있는 자들이야말로 실세인지. 어느 쪽이건 한심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이유야 아무튼, 제법 잘 만들어진 요새에 민병을 방패막이 삼아 저토록 많은 정병을 육성하다니. 하지만 덕분에 일망타진하기는 쉬워졌군. 그래, 홍천귀복이라는 교주도 저 요새에 숨어있겠다?"

"그것이, 그렇지만도 않다는 모양입니다. 첩보에 따르자면, 성 어디에도 어기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저 사교도 무리가 무언가 책략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래도 그 교주는 이곳에 없는 모양입니다."

"뭐라?"

의아한 보고에, 한성근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한눈에 보아도 최후의 발악을 위하여 준비된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설령 자신이 그 사교의 교주라고 하여도 전투에서 패하여 주력군을 잃어버린 이상 우선 꽁지가 빠지라고 이 요새 안으로 기어들어 갈 터였다. 그래야 한국군을 격퇴하건 아니면 구원군이라도 올 때까지 버티건 간에 후일을 기약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참모의 보고에 놀라 다시 망원경을 통해 살피니, 그 말대로였다. 어디에도 어기가 보이지 않았다. 태평천국의 깃발은 휘날리고 있되, 막상 홍씨 가문의 깃발이 보이지를 않았다. 참모의 말대로 일부러 한국군을 속이려 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말로 사교의 교주는 저 안에 없다는 이야기밖에는 되지 않았다.

'설마 다른 피난처가 있는가? 우리 한국군이 곧장 청두를 불태울 것이라 짐작하고서, 산속으로 줄행랑을 친 건가? 놈, 그 그릇은 비좁기 그지없으나 도망치는 재주 하나는 일품이로구나. 오냐, 이놈. 어디 네놈이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지 내 끝까지 추격하여 그 목을 베어 주겠다…!'

한성근은 있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생각 이상으로 일이 꼬이기는 했으나, 어쨌건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청두를 함락시켜 불태우고, 그 뒤로는 산속으로 도망친 홍천귀복을 수색하여 붙잡아 효수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한의 천하에 저항하는 역도는 사라지고, 중원은 온전하게 대한의 발아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를 위한 마지막 걸음에 불과했다. 설령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어떤 수고를 들이더라도 반드시 완수해야만 하는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자 과업이었다. 한성근은 각오를 굳혔다. 이를 위하여 우선 배제해야 할 것은 눈앞에 보이는 사교의 요새.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파괴해야만 하는 사교의 뿌리였다.

"놈이 어디로 도망쳤는가는 우선 성을 함락시키고서 사교의 간부를 심문하여 차차 알아내면 그만인 일이다. 황상께서 우리를 자랑스럽게 여길 멋진 분투를 기대하고 있겠다. 전군 돌-."

"각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또 무엇인가!"

느닷없이 달려온 전령을 향하여, 한성근은 역정을 내었다. 사교의 교주를 하루라도 빨리 추격하기 위하여 한시가 바쁜 와중, 괜한 일로 시간을 버리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령은 그런 한성근에게 겁을 집어먹으면서도, 자리에 부복하며 있는 힘껏 소리쳤다.

"무례를 용서하여주십시오, 장군! 하오나, 이 근방을 수색하고 있던 수색대가 이르기를 1각여 전 행색이 수상한 부랑자가 멀리에서 우군의 군영을 살피는 것이 수상하여 사로잡았더니…!"

"…뭐라?"

한성근은 새삼 눈을 껌뻑거렸다. 그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령의 보고는 그만큼 충격적이고, 황당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

약 한 달여 후, 우르도스에 주둔하고 있던 이형에게는 태평천국을 토벌한 한성근이 작성한 사후보고서가 도착했다. 문단마다 이형의 치세를 칭송하는 미사여구들과 이형의 옥체를 근심하는 내용이 가득하여 이형으로서는 낯간지럽기만 한 글이었지만, 이를 간략히 줄이자면 다음과 같았다.

'황상께서 명하신 대로 군세를 이끌고 사교의 무리와 동남구(潼南區)에서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두었나이다. 이후 기세를 몰아 사교의 본거지로 갔으나, 그 방비가 실로 탄탄하여 고전하리라 여겼습니다. 하나 천운으로 사교의 교주라는 자가 포악하고 우둔하여 민가를 괴롭히며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 우군이 그를 앞질러, 교주가 미처 성도(成都)에 돌아가지 못하고 포로로 잡힌 덕에 순조롭게 항복을 받아내 천하평정을 마무리 지었나이다.'

"…이게 뭐야?"

이형은 글을 읽고서도 어안이 벙벙해서 몇 번이고 반복하여 사후보고서를 고쳐 읽었다. 도저히 보고서에 담긴 내용이 이해가 가지를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몇 차례고 반복해서 읽어도 내용은 같았다. 태평천국은, 그 교주가 우둔하여 자멸했다는 내용이었다. 마침 목만 남은 홍천귀복의 수급이 소금에 절여져 왔으니 보고서의 내용이 거짓부렁일 리도 없었다.

그렇게 3번을 반복해서 읽고 나서야, 이형은 자신이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깨닫고서, 결론 내렸다.

"이런 놈도 왕 노릇을 했다니, 말세로구먼."

실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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