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내 >
"그러나, 이런 얼간이라도 왕은 왕. 매장한다면 후세에라도 망국의 추종자들이 모여 죽음을 추모하며 세를 모으게 되겠지. 활활 태워 잿더미로 만든 다음 바람에 날려 보내라. 어디로 날아갔는지는 따로 보고하지 않아도 좋다."
"하명하신대로 하겠나이다. 하오나 폐하, 그것은 역도에게 있어서 너무 관대하신 조치가 아닐는지요. 혹세무민을 일삼고 최후까지 백성들을 수탈하다 끝내 백성들의 손에 목숨이 다한 역도가 아니 옵니까. 죽은 몸뿐이라고 하나, 마땅히 일벌백계하여 두 번 다시 이와 같은 사달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옳은 줄 아뢰옵니다."
"되었다. 이미 죽은 놈이 아니더냐. 놈의 죄는 후세에 두고두고 사서에 극악무도한 사교의 교주로서 기록되는 것으로 족하다. 되었으니, 놈의 수급을 이만 불태워 없애 버리거라."
동석하고 있던 부족장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형은 가볍게 손을 저으며 이를 무산시켰다. 여전히 청나라 시절 크게 작게 이어져 온 한족 반란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는 그들로서는 소수의 유목민족이 다수의 정주민족을 통치하기 위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나면 이를 가혹하게 보복하면서 질서를 유지했던 시절을 떠올리는 것이 당연했지만, 지금의 대한제국에 그런 가혹한 보복은 불필요했다.
물론 한성근에 의하여 마지막까지 태평천국의 본거지로서 존립해온 쓰촨성 일대는 불바다가 되겠지만, 이형 또한 그건 예상한 바였으며 어쩔 수 없는 결과라고 무시하고 있었다. 보복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오랜 시간 태평천국의 가르침을 주입 당하며 주민들의 상식과 세계관이 뒤틀린 것이 문제였다. 이를 가볍게 무시하고 넘어갔다가는 후일에라도 재차 태평천국을 그리워한 현지 주민들에 의하여 반란이 일어날 수 있었다.
'딱히 불필요하게 많이 죽일 필요는 없지. 아니, 사실 애초에 죽일 필요도 없다. 그냥 모조리 불태우고 주민들을 내쫓는 것 만으로 충분해. 그렇게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면 모래알이 흩어지듯 약해져서 수면 아래에 가라앉은 불만 세력이 될 수는 있어도 힘을 한데 모아 반란을 일으키거나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해.'
문제가 있다면 이건 이형의 생각이고, 실제로 군을 이끌고 나간 한성근의 경우에는 어떨지 미지수라는 것. 우선 적당히 조절해두라고 명령은 내려뒀지만, 이형이 보낸 전령이 도착할 무렵이면 이미 한성근이 모두 정리한 다음일 터였다. 태평천국이 어리석게도 유격전 대신 야전을 선택하면서 예상했던 것보다 배는 빠르게 몰락한 탓이었다. 이형이 후방에서 뭐라 방침을 정해두기도 전에 태평천국을 토벌하고 현지를 점령한 것이다.
이형으로서는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민족주의의 발흥과 계속된 승전으로 한국군 내부에 묘한 바람이 흐르기 시작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형이 따로 통찰력을 발휘해 시류를 읽어냈다기보다도, 그가 이와 유사한 역사적 사례들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족주의와 자국에 대한 자부심이 전체주의와 군국주의로 돌변하는 건 그야말로 한순간의 일이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한국의 천명에 대항한 역도이자 혹세무민을 일삼은 사교도 무리. 유교적 향촌 사회에서도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았던 가장 악독한 족속들이었다. 병사들이 태평천국 잔당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지는 볼보 듯 훤했다. 홍경래의 난 때는 그나마 서로 말이나 통했지, 생긴 것도 말하는 것도 핏줄도 다른 사교도 무리에게까지 자비를 베풀어줄 도덕적인 집단은 이 시대에 없었다.
'그나마 청나라를 계승한 덕분에 반란을 진압한 다음 필요 이상의 보복을 가해도 한족들에게 만주 오랑캐와 다를 바 없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추가적인 반란이나 유생들의 시위 같은 건 걱정할 필요가 적다는 게 장점 아닌 장점인가. 유목제국 다 되었군 그래. 아니, 제국주의 열강인가? …가능하다면 10만 명 선에서 끝내줬으면 좋겠는데.'
"아무튼 이로써 천하 평정은 마무리되었도다. 더 이상 후방의 소요사태를 우려하여 전사를 낭비할 것도 없다. 형제들이여, 출진하라. 우리에게 남아있는 과업은 이제 대초원을 평정하여 초원의 백성들에게 정당한 주인을 알려주는 것뿐이니라."
"""존명!"""
이형은 내심 혀를 차면서도, 겉으로는 이를 드러내지 않고서 가능한 담담한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이형의 명령에 젊은 부족장들은 그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희희낙락하며 제자리에 엎드렸다. 그리고 이형은 그런 그들을 차디찬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미하일과 작당하고서 가짜 전쟁을 치르기로 한 이형에게 있어서 이번 전쟁의 목적은 처음부터 대초원의 평정이 아니라 눈앞의 부족장들을 숙청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몽골의 친왕인 셍게린첸 또한 이에 동의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몽골의 원로들 또한 지금쯤 셍게린첸에게 전해 들어 이번 출정의 진짜 목적에 대하여 전해 듣고 있을 터였다. 이미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러시아의 손을 빌려 바람이 과하게 들어간 잠재적 역도들을 숙청할 궁리를 하는 와중 사지에 내몰린 당사자들만 제가 사지에 몰리는지도 모르고 공을 세워 무명을 떨칠 상상에 기뻐하는 꼴이었다.
결국 그들은 대칸의 권위를 한차례 부정한 죗값을 치른다는 속죄 의식도 겉에 내비치지 않고서 마치 소풍이라도 나가는 마냥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났다. 대칸인 이형과 몽고친왕인 셍게린첸, 그외 몽골의 원로들 모두가 후방에 남은 와중 좋게 말하면 젊은 피고 나쁘게 말하면 천둥벌거숭이나 다름없는 애송이만으로 이루어진 원정군을 파견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의심 한번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홍장, 그놈을 괜히 죽였어. 이렇게 인재가 없다니, 이게 도대체 어딜 봐서 군웅할거의 난세란 말인가. 이홍장이야 그저 운이 나빴을 뿐 그릇이 부족했던 건 아니었지만, 홍천귀복이니 저 애송이 놈들이니 감히 저따위 그릇으로 천자를 꿈꾸고 대칸을 꿈꾸다니. 이건 반만년 중화에 대한 모욕이고 예케 몽골 울루스에 대한 모욕이야. 우라질, 천하평정은 개뿔. 내 군웅은 한명 밖에 보지 못했거늘 무슨 천하를 평정했다는 건가?
고작 해봐야 천명을 감당할 그릇 두 개 밖에 준비하지 못할 만큼 이 땅이 비좁았던가? 말세야. 정말로 말세야."
원정군이 서둘러 말을 몰아 중앙아시아로 떠나고, 이형은 셍게린첸과 만나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그의 입에서는 불평불만이 그칠 줄을 몰랐다. 허무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간단하게 천하를 평정해도 되는지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맞수라고는 이홍장의 중화제국이 고작이었고, 그를 쓰러트리고 나자 더 이상 이형을 가로막을 적수가 없었다.
그나마 기대해보았던 미하일도 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다 보니 굴욕을 무릅쓰고 제자리에 엎드려 자비를 비는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이형에게 협상을 걸고 끝내는 마음을 돌려 이형이 중앙아시아 원정을 단념하게 하고 시베리아의 절반-구체적으로는 예니세이강과 바이칼호를 경계로 하는 새로운 국경선을 받아들이게 하는 등 최선을 다하였지만, 애초에 미하일이 맡은 직급도 힘도 이형의 것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이형은 술잔을 기울이면서 연신 쩝쩝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가 목표로 하였던 바는 모두 이룬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막상 거기까지 가는 도중에 역경이 그의 기대에 도저히 미치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런 이형을 셍게린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소신이 처음 폐하를 뵈었을 적에 비하여 많이 변하신 듯합니다."
"음?"
셍게린첸의 말에, 이형은 잠시 말의 뜻을 읽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갸웃거리다가, 잠시 생각하고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났을 때라면 언제 말인가? 짐이 아직 조선의 왕이고, 청국이 천하를 제패하고 있었을 무렵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만일 불쾌하시다면 이만 멈추겠습니다."
"아니, 좋네. 그래, 그대가 보기에 짐은 변하였다고 하였지. 짐이 대관절 어떻게 변하였단 말인가?"
술병을 건네며, 이형은 셍게린첸에게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권했다. 셍게린첸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또한 이형의 곁에서 그를 섬기며 이형의 성정을 대강 알게 된 다음이었기에, 기실 이는 처음부터 셍게린첸이 이야기를 꺼내려 먼저 판을 깔고 이형이 어울려준 셈이었다. 자신의 앞에서 말을 하다가 마는 이들을 가만 못 봐주는 것이 이형의 성정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셍게린첸이 꺼낸 이야기의 수위는 이형이 생각한 것을 크게 웃돌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전쟁을 즐기게 되신 것 같습니다."
"…흠"
이형은 잠시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라지만 전쟁을 좋아한다는 평가는 어떻게 해석해도 좋은 평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형 또한 잠시나마 셍게리첸까지 그의 권위에 대항하려고 이러는가 싶어 무심코 허리춤에 손이 갔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형은 도중에 손을 멈추었다. 그런 것치고, 셍게린첸의 태도는 꽤 진중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곧 그의 권위를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이형이 진지하게 우려되어 이야기를 꺼낸 충언이라는 의미였다. 그것이 그의 사적인 충성심에 기반한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적어도 들어둔다면 대한제국의 천하에 도움이 되었다면 되었지 방해가 될리는 없었다.
이형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가라앉히고서,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이야기를 꺼냈다면 어찌하여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또한 들어야겠지. 계속해보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나?"
"송구하옵게도 폐하께서 허락하여 주셨으니 감히 계속해보려 합니다. 황상께서는 이 늙은이의 불손 무례한 언사를 용서하여 주소서."
셍게린첸은 조심스럽게 제 자리에서 일어나 이형을 향하여 세 차례 절을 올리며 예의를 갖추었다. 가능한 한 이형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형은 잠자코 자리에 앉아 술잔을 계속하여 기울이며 셍게린첸이 말문을 열도록 기다렸다.
셍게린첸은 그대로 자리에 엎드린 채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가 폐하를 처음 뵈었을 적에, 비록 먼발치에서 보았으나 참으로 사내대장부다운 소년 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문약하기로 익히 알고 있던 조선의 왕이 몸소 전장에 나서다니,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미 그 무렵 소신은 이 전쟁에서 패하였다고 단념하고 있었나이다.
하오나 그 무렵부터 폐하께서는 어쩐지 즐거워하시는 듯 보였습니다. 드물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옛 영웅들의 활극을 즐겨 읽은 청년이라면 응당 그런 법이었습니다. 전장의 참혹함을 미처 알지 못하니 그런 것이지요. 그러니 그때는 그리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폐하께서 전쟁을 경험하시며 어련히 변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변하지 않았다. 아니, 되려 심화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무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오나, 실로 그 말씀대로입니다. 멀리 계셨을 적에는 그저 소식을 들었을 따름이라 미처 알지 못하였으나, 지금 폐하를 곁에서 모셔보니 비로소 알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전쟁을 즐기고 계십니다. 소신이 보기에 폐하께서는 스스로가 위기에 몰리시는 걸 기대하고 계시는 듯 보입니다. 공포를 즐기고 계시는 듯 보입니다.
이는 분명 천하를 웅비할 대장군의 그릇이라고 할 수 있으나, 장차 천하를 다스릴 위정자의 자세가 아니옵니다. 엎드려 청하건대, 폐하께서는 부디 헤아려 주시옵소서."
셍게린첸은 이마를 세차게 바닥에 들이박으며 말하였다. 낮게 깔리는, 그러나 힘이 있는 음색이었다. 이형으로서는 꽤 마음에 드는 음색이었다. 시끄럽지 않으면서 힘 있는 울림이 단전에 울리니, 과연 사내대장부의 음색이라고 할 만했다.
'그러고 보면, 이 자도 나와 패권을 논할 그릇이었다고 할 수 있겠군. 대초원만으로 패권을 논하기에는 이미 시대가 너무 뒤바뀌어 싸우지 않고서 내게 무릎 꿇었을 뿐.'
이형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셍게린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았다. 그 자신도 어느 정도는 자각하고 있던 문제였다. 그러나, 그가 어째서 이런 성향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는가 잘 가늠되지를 않았다.
잠시간 말을 고르고서, 이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말재간이라고는 없던 그였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이야기하는 편이 더 이해하기 쉬울는지도 몰랐다.
"짐은, 아니. '나'는 본디 왕이 아니었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왕이 될 운명도 아니었지."
"그것은 전해 들었나이다. 조선의 왕이 후사가 없이 죽어, 새 왕을 찾아내야만 했노라고…."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아무튼간에. 나는 왕이 될 운명도, 고귀한 핏줄도 아니었어.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몸을 쓰는 일, 행패를 부리는 일, 그리고 채 마무리 짓지 못한 공부. 그래서 우연하게도 기회가 다시 돌아왔을 적에는, 이번에야말로 못다 한 공부를 마무리하겠다고 생각했었지."
결국 체질에 맞지 않았는지 또다시 때려치웠지만.하고 이형은 덧붙였다. 그런 이형의 말에, 셍게린첸은 이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눈을 껌뻑거렸다.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는 그렇다 치고, 고귀한 핏줄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전주 이씨의 왕족이지 않았던가. 왕위를 계승 받지 못할 뿐이지 왕족이면서, 고귀한 핏줄이 아니라는 부정은 또 뭐란 말인가.
공부를 마무리 짓지 못했다는 건 또 무슨 말인가. 이제 고작 해봐야 스무 살이 되지 않았던가. 공부를 마무리 짓지 못하기는커녕 아직도 한창 공부할 나이가 아닌가. 이상했다. 말이 하나도 아귀가 들어맞지를 않았다. 셍게린첸은 어딘가 낯선, 이질적인 기척을 느꼈다.
"왕이 된다는 사실에 감흥이 없었어. 내가 이 나라에 빚진 것이 없는데 무슨 애국심을 불태울 수 있겠나? 모든 걸 망치고 남들은 쉽게 쉽게 얻어버리는, 그런 당연한 것들도 감히 손댈 엄두도 내지 못하고서 뒷골목이나 전전하다 인생 종친 애새끼가 무슨 나라에 애착을 느끼고 동족들에게 애착을 느끼냔 말이야. 솔직하게 말할까. 나는 왕이 될 이유를 스스로 찾지 못했어.
그저 왕 또한 직업이니 직장에 충실해지자, 그 정도의 생각만 가지고서 왕위에 올랐었지. 그런데 막상 왕위에 올랐더니, 어떻게 변했는지 알겠냐?"
"…잘 모르겠나이다."
"모두가 나에게 의지해 오는 거야. 내가 아니면 이 나라가 당장 망하게 생긴 거지. 그게 어느 정도는 내 탓이라고 해도 상관없었어.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패배자 녀석, 맨날 같잖지도 않은 놈들에게 욕이나 얻어먹고 다니면서 하루 벌어서 하루에 탕진하며 살아가는 지저분한 주정뱅이, 죽마고우가 도와줘도 고마운 줄도 모르던 후안무치한 인간쓰레기. 그런 놈에게 다들 의지하는 거야."
이형은 키득키득 웃었다. 술기운이 올라, 그의 볼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니, 과연 술기운 때문일까. 셍게린첸은 어딘가 위화감을 느꼈다. 그가 마주하고 있는 이 황제가, 그가 그동안 알고 지내온 황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기쁜 줄 알겠나? 세상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해주는게 얼마나 기쁜 줄 아느냔 말이야. 내가 쓰다가 버리면 아무도 기억해주지도 못하는 일회용품이 아니라, 나 하나가 사라지는 것만으로 온 세상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알겠나. 모를 거야. 모르겠지. 그건 세상에 한번 버려지지 않은 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해.
조조, 그러니까 위 무제는 말했다지. 내가 세상을 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버리게 두지는 않겠다고. 나는 그 말을 아주 좋아해. 세상에 한번 버려진 놈은, 세상이 필요로 한다는 것만으로 너무 기뻐서 두 번 다시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거든."
이형은 쓸쓸하게 미소지으며, 술잔을 바닥에 내려다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