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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고종대왕 일대기-176화 (176/530)

< 보신 >

"…그렇습니까."

한참을 망설이던 셍게린첸이 간신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었던 것은 그 한마디였다. 그로서는 도통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 이형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겠을 뿐 더러, 이런 말을 하는 저의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지금 이형이 한 말에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도 셍게린첸은 망설일 수밖에는 없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공감해야 하는가. 동정해야 하는가. 그도 아니면 자신을 그렇게 비하하지 말라고 꾸짖어줘야 하는가. 그도 아니면 못 들은 척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해주는 것이 옳은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로서는 도통 말을 고를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이형의 처지에 도통 공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이 두 번째 삶이라는 것 또한 이형이 먼저 말을 하지 않는 한 알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그가 세상에 버려져 본 것도 아니었다. 비록 난관에 부닥친 적은 많았으나, 그는 본래부터 고귀한 핏줄로서 태어났으며 또 고귀한 핏줄에 걸맞은 책임을 짊어지고 권한을 휘둘러왔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이형이 먼저 자신의 지난 생을 설명하지 않는 한 셍게린첸으로서는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상대가 말하지도 않은 것을 알고 있다면 그건 이미 모두 알고서도 모른 체하는 사기꾼이라는 이야기밖에는 않는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셍게린첸은 그런 부류에 속한 인물은 아니었다.

"전쟁을 즐긴다고 했나? 뭐, 부정하지는 않겠어. 그래, 그 말이 맞지. 나는 지금 즐기고 있어. 책임을 즐기고 있고, 전쟁을 즐기고 있고, 권력을 즐기고 있지. 왕이라는 자리를 누구보다 열심히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즐겁거든. 정말로 즐거워. 내 행보 하나하나가 세상을 쥐락펴락하고 있다는 게 즐겁고, 나에게 무슨 일이 나는 것만으로 세상이 뒤흔들린다는 것도 즐거워.

하지만 동시에 무섭기도 해. 무섭지. 나는 정말로 무서워. 또다시 세상이 나를 버릴까 봐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어. 죽는 것보다도, 상처 입는 것보다도 그게 더 무서워. 그러니까 자꾸 억지로 전장에 나서려는 거겠지. 뭐든지 우선 내가 먼저 앞장서지 않으면 세상이 내가 있다는 것조차 금방 잊어버릴 것 같거든. 안사람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

이형은 찬찬히 말을 이어갔다. 셍게린첸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셍게린첸이 그의 말을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고 있는 건 이미 눈에 훤히 보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셍게린첸에게 자신의 사정을 하나하나 설명해가며 이해시킬 생각도 이형에게는 처음부터 없었다. 사실상 술주정이었다.

뒤늦게 그것을 자각하고서, 이형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잠자코 셍게린첸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뭐라고 말할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셍게린첸으로서는 도저히 이형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그의 말에 호응해 줄 수가 없었다.

이형은 작게 혓바닥을 찼다. 절로 흥이 가셨다.

"하지만 자네가 하는 말대로야. 전쟁을 즐기면 안 된다고 해놓고서 내가 전쟁을 즐겨서야 곤란하지. 지금까지야 전쟁을 즐기는 폭군이 필요한 세상이었다지만, 앞으로 그런 폭군은 세상에 쓸모가 없어. 전쟁을 즐기는 폭군보다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암군이 차라리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 그래서 자네는 짐이 어떻게 하면 좋다고 생각하나? 짐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전쟁을 끊을 수 있겠는가?"

바닥에 내려다 놓았던 술잔을 들어 기울이며, 이형은 입을 열었다. 결국 중요한 건 이유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형이 전쟁을 즐기는 건 문제이고, 그걸 고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형의 사소한 감상이나 신세 한탄 같은 건 그리 중요한 일이 못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이형이 화두를 돌리니, 비로소 셍게린첸 또한 대화를 따라갈 수 있었다.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먼저 이형이 전쟁을 즐기는 건 문제라고 지적한 건 셍게린첸이었다. 아무래도, 그 나름대로 이를 해결할 방도가 있었기에 이야기를 꺼낸 것일 수밖에는 없었다. 셍게린첸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러나,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서 입안을 맴돌았다. 셍게린첸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고, 이형에게는 의아한 일이었다. 이런 사태는 두 사람 모두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필연적인 일이기도 했다. 셍게린첸이 예측한 문제의 원인과 이형이 신세 한탄을 주절거리면서 암시한 실제 문제의 원인은 천지 차이였기 때문이었다.

셍게린첸이 예상한 이형의 문제 원인은 이형이 옛 영웅들의 영웅담에 지나치게 빠져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한창때의 젊은 왕에게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영웅들을 동경하고 영웅들의 이야기에 매료된 나머지 자신을 그 영웅들과 동일시하거나 아니면 영웅들이 활약하는 전쟁을 가볍게 여기는 애송이는 천하에 흔하고 또 흔했다. 무턱대고 이형의 권위에 대항하려고 한 몽골의 젊은이들 또한 그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흔하디흔한 만큼, 해결법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가장 좋은 해결법은 연륜을 쌓거나 경험을 쌓아 시야를 넓히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셍게린첸은 천하 유람을 권유할 작정이었다. 천하를 유람하면서 아직도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각지의 실력가들에게 대한제국이 얼마나 강성하며, 대한제국에 대항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 알게 하고 이형 자신도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견문을 쌓고 시야를 넓히도록 할 생각이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이형이 털어놓은 심리상태와는 동떨어져 있었다. 이형이 말한 대로 믿는다면, 그는 자신에게 역할을 줬다는 사실 그 자체를 기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껏 그가 보여온 왕으로서의 모습도 그의 진실한 모습이 아니라 연기일 가능성도 있었다. 저 자신조차 속이는, 천하를 배경으로 한 연극인 것이다.

'아니 분명, 돌이켜 생각해보면…기실 문약한 조선에 필요했던 건 폐하와 같은 폭군이었다. 강자를 존중하고 승자를 숭상하는 서역의 오랑캐들에게, 문약한 왕이 눈에 차기나 할까. 무모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되 청국과 전쟁까지 불사하는 호쾌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서역의 오랑캐들은 필시 조선을 업신여겼을 테고, 조선이 수중에 거머쥔 것만으로는 도저히 서역 오랑캐들이 요구로 하는 교역을 감당할 수가 없었을 터.

조선의 사정에 대해서 그리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청국조차 감당하지 못한 서역의 수탈을 조선이 견디면서 천하의 주인이 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개혁을 단행하거나 영토를 확장할만한 국력이 남았을 공산은…딱 잘라 말해서 없다. 분명 조선에 필요했던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성군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거칠 것 없이 백성을 희생시키며 전쟁과 숙청을 남발하는 폭군이야.'

그러나 여기에는 한가지 전제조건이 존재한다. 과연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왕위에 올랐을 무렵에는 사춘기조차 오지 않았던 어린 소년 왕이 과연 그걸 알아챌 수 있을까. 노년에 접어든, 몽골 친왕이라는 지위에 있던 그조차 인제야 긴가민가하고 의심하는 수준의 식견을 그 나이에 벌써 쌓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설령 그것을 알아챈다고 한들, 자신의 성정을 거기에 끼워 맞춘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자신의 성정을 억지로 끼워 맞춰야만 하는 이유는 조금 전 엿보았다. 도대체 이제 갓 스물이 된 청년이 어쩌다가 벌써 세상에 한차례 버려진 절망감을 품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가 보기에 이 청년 왕이 연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디까지 이야기하면 좋을지 거리감을 도통 알지 못하여 애를 먹는 기색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절망감은 사람이 변해야만 하는 절실한 동기가 된다.

그러나 그런 동기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들 정말로 바뀔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건 아무리 총명한 머리를 지니고 태어났다고 한들 한낱 소년이 해낼 수 없는 일이다. 한창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려야 할 나이의 어린아이가 시대가 요구로 하는 왕의 모습을 눈치채고서 자신을 그 왕에게 끼워 맞춘다니, 인간을 초월한 초월자가 아닌 한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가능하다. 가능할지도 몰라. 괴력난신을 배제하고 고민하려고 하니까 해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만일,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전생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눈앞의 청년 왕은 사실 셍게린첸이 그를 처음 만나던 소년 왕이던 적부터 겉으로 보이는 그대로 소년이 아니었으며, 이미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성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공부를 한차례 끝마치지 못했다는 말도, 고귀한 핏줄이 아니었다는 말도, 모두 설명이 된다. 한차례 인생을 실패한 성인이었기에 두 번째는 그렇게 실패하지 않으리라 각오를 다지며 계속 내적으로 자신을 몰아붙였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모습을 이상적인 왕에 끼워 맞췄다는 의심도 현실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만일 문제의 원인이 그가 예측해온 매우 흔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괴력난신이 얽힌 이야기라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달라이 라마였다. 그 또한 몽골인으로서 티베트 불교에 심취한 만큼, 윤회전생이라고 한다면 달라이 라마가 가장 먼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셍게린첸은 달라이 라마를 만나야 한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설령 황제라고 해도 만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가볍게 만날 수 있을 정도로, 달라이 라마의 이름은 가볍지 않았다. 하물며 눈앞의 황제는 천주를 신봉하는 천주쟁이라는 소문이 천하에 파다했다. 천주를 신봉한 나머지 석가를 천대하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꺼려질 수밖에는 없었다.

"왜 말이 없는가. 경은 짐을 기다리다가 늙어 죽게 할 셈인가?"

결국 셍게린첸이 입을 여는 것보다, 기다리다 지친 이형이 턱을 괴며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치는 것이 먼저였다. 그러자 셍게린첸 또한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이미 이형에게 이야기를 시작한 이상, 어떤 식으로건 그는 이형의 문제를 고치기 위한 해결책을 내놓아야만 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셍게린첸은, 처음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엉뚱한 대답을 입 밖으로 내놓았다.

"폐하께서 전쟁을 즐기심은 곧 전장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시다 보니 전장의 법도에 익숙해져 궁정의 법도를 잊게 되신 까닭입니다. 어찌 까닭 없이 전쟁을 즐기는 이가 있겠습니까. 엎드려 청컨대, 황상께서는 궁정에 머무르시며 궁정의 법도로서 전장의 법도를 잊도록 하소서."

되는대로 내뱉은 말이었다. 입 밖으로 내뱉은 다음, 차라리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천하를 유람하며 견문을 쌓으라고 권하는 것이 나을 뻔했다-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형은 그 말을 듣고서 잠시 생각하더니, 찬찬히 입을 열었다.

"그래, 그 말대로일지도 모르겠어.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지. 덕분에 시야가 확 트인 기분일세. 정말로 고맙군."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셍게린첸은 차마 이형의 비위를 거스를까 두려워 말을 고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

셍게린첸에게 기개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몇 차례고 스스로 전사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섰던 노익장에게, 이형 하나가 두려워 꼼짝도 못할 리는 없었다. 단지 그는 어디까지나 대한제국의 이익을 위하여, 궁극적으로는 몽골의 이익을 위하여 이형에게 숙이고 있었을 뿐. 이형 개인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구태여 이형의 심기를 거슬러가며 지름길을 가르쳐줄 의리까지는 없었던 것뿐이었다.

그러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기개가 부족했다기보다는 보신에 능했다고 평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무렵, 보신에 능한 또 한 사람이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이건 이상하군."

사마르칸트. 반쯤 광인이 되어 발광하고 있던 서태후는, 이 무렵 간신히 이성이 돌아와 있었다. 아니. 엄밀히는 발광하고 있었던 것도 절반은 연기에 가까웠다. 그릇이 작고 염치가 없으며 탐욕스럽기 그지없을지언정, 그녀는 멍청한 인물은 아니었다. 애초에, 멍청했다면 설령 황제의 친모였다고 하나 청나라를 뜻대로 좌지우지할 수는 없었을 터였다.

그녀가 광인 행세를 하고 있었던 것은 절반은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여 자포자기가 되었던 탓이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그래야지만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서태후가 필요 이상으로 영특한 모습을 보이거나 아니면 멋대로 모략을 꾸미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러시아는 자신들로서는 서태후를 뜻대로 제어할 수 없으리라 판단하고서 토사구팽해 버릴 공산이 컸다.

아무튼 러시아에 필요한 것은 동치제지, 서태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태후는 구태여 말하자면 동치제를 거둬들이면서 덤으로 얻게 된 거추장스러운 부산물에 불과했다. 서태후 또한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일부러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러시아가 서태후를 업신 여겨 경계하지 않도록 애썼다. 그 결과 그녀는 동치제마저 속이면서 완벽한 광인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고,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서태후는 자신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음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제 와서 노서아가 본녀에게 이토록 많은 은혜를 베풀다니…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지금 노서아에게 중원을 평정할 여력이 남아있다는 걸 본녀에게 믿으라는 건가?"

치렁치렁한 진주목걸이와 화려한 비단옷, 그리고 식탁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듯한 수십가지 이상의 산해진미. 이곳 사마르칸트로 피신한 이래로 한차례도 구경하지 못한 호사스러운 생활이었다. 러시아에서는 이를 두고 이제 곧 중원으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아서 그렇다는 말을 지껄였지만, 서태후는 냉소적이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중원에 돌아가기에는 너무 이르고 너무 늦었다. 벌써 조선이 천명을 잃었다면 이미 진작에 그에 합당한 엄청난 대사건이 벌어졌을 테고, 그 소식은 필시 한 번쯤 그녀의 귓가에 들어왔어야 정상이었다. 노환으로 정신이 나간 광인의 앞에서 말을 조심할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알게 모르게, 서태후는 러시아인들에게서 많은 정보를 엿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소식은 전해 듣지 못했다. 되려, 그녀를 배신한 극악무도한 역도 이홍장이 끝내는 조선의 손에 목이 날아갔다는 소식만 전해졌을 뿐이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시점에서, 서태후는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사실상 포기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이미 청나라는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청의 천명은 조선에 넘어갔고, 앞으로는 조선의 천하가 열릴 터였다. 이제 서태후가 고민해야 할 건 어떻게 살아남을 것 인가지,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가 아니었다.

"그놈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이런 호사를 베풀 까닭이 없지. 가증스러운 북적 놈들. 곧 죽을 몸이라고 거창하게도 치장해주었구나."

서태후는 자신이 입은 비단옷을 흘끗 살피며, 가증스럽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예상하던 바였다. 조선이 이홍장의 목을 베고서 청의 천명을 온전하게 계승한 이상, 러시아도 조선을 허투루 상대할 수는 없다. 청나라를 한번 다스려본 만큼, 청나라를 온전히 통치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거대한 힘을 휘두를 수 있는지는 서태후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늦건 빠르건 언젠가는 러시아가 이제 중원을 침탈하기란 어렵다는 걸 깨닫고서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는 동치제와 서태후를 숙청하리란 건 예상하였다. 러시아가 조선과 화친하려 한다면, 가장 먼저 꺼낼 패가 바로 서태후와 동치제의 목이라는 것 또한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순순히 버려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영길리라."

서태후는 식탁 위에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던 간식 중 유독 서구적인 비스킷 하나를 집어 앞과 뒤를 살피고서는 피식 웃으며 한입에 삼켰다.

그 앞면과 뒷면에는 '명일자정', '냉수배달'이라고 각각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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