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둔전 >
연해주 평정을 끝으로, 극동에서 공식적인 전투는 사라졌다. 비공식적으로 대한제국 북방군 소속의 수색 중대와 극동 러시아 민병 간의 크고 작은 교전은 계속하여 이어졌으나, 러시아 정규군은 이후로도 계속하여 중앙아시아에 주둔하며 대한제국의 침공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을 뿐 어떠한 반격 시도도 취하지 않았다. 미하일이 이형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켜주었다고 평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만큼 시베리아 러시아가 궁핍했다는 게 보다 정확하리라.
이는 대한제국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무렵의 대한제국군은 러시아군에 대한 경계와 공포로 다분히 수세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형이 손수 이끌었던-사실 이는 사실과 달랐지만-몽골군이 중앙아시아에서 끝내 러시아군에게 참패를 당했다는 소식은 그만큼 대한제국군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그간 단 한 차례의 실패도 없이 승리에 승리를 거듭한 정복 군주에 대한 기대와 신망이란 그만큼 컸다.
이 무렵 박규수를 위시한 문관들이 추수기에 무리한 동원과 연이은 모내기 철의 과도한 동원에 우려를 표한 것 또한 컸다. 국가재정이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고 있는 국채 덕분에 전에 없던 흑자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아직 대한제국은 화폐경제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유지되는 산업국가가 아니었다. 여전히 농업이 국가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1872년의 대한제국에, 이 이상 무리한 원정은 국가 경제 파탄의 우려가 있었다.
"『짐은 그대들이 참으로 자랑스럽다. 오늘, 우리 대한이 천하를 평정함에 있어서 그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찌 이 모든 위업이 가능했으리오? 우리 조선이 이와 같은 위기를 맞이한 것은 지난 500년간 수차례 있어왔으나, 그때마다 우리 조선이 무사히 수차례의 변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까닭은 전적으로 배운 것 하나 없어도 나라를 위하여 일어설 수 있었던 그대들과 같은 충심 깊은 백성들이 있었던 덕분임을 짐은 다시 한번 마음속 깊이 알게 되었다.
마침내 천하는 우리 대한의 손안에 들어왔으며, 북적들은 우리 대한을 두려워하여 감히 천하를 어지럽힐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으니. 이제는 이만 그대들에게 일상으로 돌아가 다시금 충실한 대한의 백성으로서 생업에 종사하기를 명하는 바이다. 이를 두고 애석하게 여기지 말지며,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하라. 생업에 종사하여 나라를 살찌우는 것 또한 나라를 위하는 길일지언저. 그대들은 짐의 감사를 받을 만한 일을 해주었다.
다만, 달리 갈 길이 없는 이들은 이대로 군문에 종사하여도 좋도다. 앞으로도 북적과는 다투게 될지니, 내 친히 그대들에게 농토를 내려 남을 일평생 둔전에 종사하도록 배려하여주겠다.』"
"오오, 황상! 어, 어찌 이리 과분하신 말씀을…!"
"쇤네 같은 천것들에게 감사하다니, 어찌 그런…! 크흑, 황상! 참으로 하늘에서 내리신 분이야. 하늘에서 내리신 분이고 말고!"
결국 이형이 모내기 철을 기점으로 하여 동원해제를 선포함에 따라, 이 무렵 총 병력 50만에 이르는 대군을 자랑하던 대한제국군은 단숨에 20만까지 축소되며 전 전선에 걸쳐 수세를 굳히게 되었다. 태평천국을 끝으로 중원에서 대한제국에 대항하는 세력들이 사실상 사라졌기에 가능했던 군축이었다. 물론 이마저도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15만이 채 되지 않던 대한제국군을 고려하면 전쟁 이전보다 단번에 총 병력이 30% 이상 확충된 격이었다.
또한, 예비군의 경우에는 그대로 해산하였으되 이 무렵 몽골 내전에 파병되어 있던 중원 출신의 난민들과 몽골인, 만주인 등으로 구성된 의용군 30만은 소속을 정식으로 대한제국군에 편입시키며 실질적으로는 50만 상당의 병력 규모를 고스란히 유지하였다. 이들은 아직 정식으로 대한제국의 백성이 된 것은 아니었던 까닭에, 구태여 농토로 돌려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이 무렵 대한제국이 확보한 영토와 영향권을 유지하려면 50만 상당의 병력은 상시 유지해야 하던 것도 사실이었기에, 박규수를 비롯한 문관들도 재정적 부담을 우려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러한 결정에 동의해야만 했다. 다만 현실적으로 언제까지 국채판매에 의존하며 50만에 이르는 대군을 유지할 수는 없었던 까닭에, 둔전제도가 부활하게 되었다.
"둔전…? 그러니까 나라에서 우리 땅을 가져가서 쓰겠다고?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여긴 우리 마을에서 수백 년 전부터 가축 따위를 풀어놓아 기르던 땅이란 말이야! 느닷없이 나라에서 가져다 쓰겠다니, 이런 날강도 같은 놈들이 다 있나!"
"말이야 그럴듯한데, 결국 그걸 증명할 사람이 토지소유권이 인정되었을 경우 이익을 볼 이 마을 사람들뿐이지 않나. 그런 사람들의 말을 도대체 무슨 수로 믿으라는 거야. 정 억울하면 하다못해 전조 시절의 문서라도 좋으니까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 하나만 가져와 보라고. 그러면 인정해주겠다니까 그러네!"
"아니, 거 답답한 사람아! 우리 중에 글을 읽거나 쓸 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런 종이 쪼가리가 나오라고 하면 턱! 하고 나와! 진짜 답답하네그려. 아무튼, 절대로 인정 못 하네! 정 나라에서 쓰겠거든 우린 여기 드러누울 테니까 우리들을 짓밟고 쓰던가!"
"그래, 인제야 본색을 드러냈구먼! 상부에 곧장 보고하게. 여기 아무 증거도 없이 국유지가 본래 제 것이었다고 행패를 부리는 폭도들이 있다고! 이 사람들이 국가헌병대 나으리들의 몽둥이맛을 두둑이 봐야 나라 무서운 줄 알겠구먼!"
앞선 토지개혁으로 본국이라 할 수 있던 조선 8도에는 여유가 없었고, 결국 간도를 포함한 만주와 요동, 새롭게 점령한 연해주 등 북방영토 전토가 50만에 이르는 상비군을 먹여 살릴 둔전으로서 분배되었다. 아직도 대부분 북방영토가 텅 빈 공백 지대였기에 가능했던 조치였다. 서류상으로 80% 이상의 토지가 국유지이거나 소유가 불분명한 상태였다. 물론 실제로도 그럴 리는 없었다. 그저 관습적으로 현지 만주족 부락이 공동소유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던 것뿐이다.
그리고 이들은 급작스럽게 결정된 둔전제도로 인한 불이익을 톡톡하게 당하였다. 그저 관습적으로 마을에서 공동소유하거나 따로 정해진 주인 없이 돌아가면서 쓰던 토지를 나라에서 둔전으로 쓰겠다며 모조리 징발해 간 것이다. 기실 조선 8도 또한 이러한 사정에서는 아직 크게 나을 것도 없었지만, 조선 8도와 북방영토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대한제국의 행정을 담당하던 관료들 절대다수가 조선인이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같은 조선인끼리는 서로 사정을 봐주거나 유예기간을 주는 식의 융통성이 발휘되기 쉬웠고, 본격적인 근대적 토지조사가 시작된 이후에도 현지 유림이나 서원의 협력으로 토지명세를 찾아보기 쉬웠다. 그에 반하여 만주족은 조선인 관료들에게 있어서 딱히 사정을 봐줄 필요도 없었고, 무엇보다 토지 장부나 명세를 찾아보기도 번거로웠다. 이에 따라 조선인 관료들은 만주족 부락에서 먼저 토지 장부를 제출하여 등록하지 않으면 임의로 국유지 내지 공백 지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뒤늦게 만주족 부락에서 불이익을 당하고서 관아를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흔히 일어났으나, 여전히 조선인 관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만주족 부락에서 뒤늦게라도 증명서류를 제출한다면 귀찮은 티를 내면서도 상부에 보고를 올려 둔전에서 제외했지만, 증명서류가 부재할 시에는 가차 없이 국가헌병대에 요청하여 무력으로라도 시위대를 강제해산 시켰다. 뒤늦게 땅을 빼앗긴 부락들이 땅을 치며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차피 이 극한의 동토에서 국경이 될 만한 것은 없다. 고작 해봐야 강을 경계로 세워둔 목조요새나, 아니면 얼기설기 세워둔 수 킬로미터 길이의 철조망과 말뚝 지대를 지키는 보초 한두 명이 끝이겠지.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 그때부터야 말로 우리 대한과 노서아 사이의 뺏고 빼앗기는 개척지 쟁탈전이 시작될 거다. 아직 모든 것이 부족한 북방에 둔전을 가지게 된 둔전병은 필연적으로 모피사냥에 매달리게 될 테고, 그들이 모피사냥에 매달릴수록 대한은 앞서갈 수 있어.
그리고 노국인들의 간도 이주도 단순한 강제이주라고 여기지 마라. 이는 향후 반백 년 간을 결정지을 장대한 땅따먹기 싸움의 일환이니까. 눈에 보이는 노서아인은 모조리 붙잡아 와라. 순순히 따라오지 않는다면 죽이든 내쫓든 마음대로 해도 좋다. 좌우지간, 노서아가 동쪽을 쳐다보고 있지 못하는 사이에 극동의 노서아 개척민들을 가능한 한 빼앗아와. 그래야지만 우리 북방이 안정될 수 있다."
"하명하신대로 따르겠습니다, 황상! 하오나, 괜찮겠습니까? 노국인들이 혹여나 소란을 피우고 한다면…."
"만일 그렇게 된다면…조금 더 독한 수를 쓰는 수밖에. 성씨와 신앙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면 조용히 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일러둬라. 조용히 지낸다면 성씨와 신앙까지 빼앗지는 않을 거라고도 일러두고."
물론 이러한 만주족 부락들의 크고 작은 소요사태는 이형에게까지 따로 보고가 올라가지도 않았다. 그만한 규모에 미치지 못했던 까닭이다. 조선인 관료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나, 대한제국의 행정관 중에는 만주족들 또한 절대 적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형이 아이신기오로 황실과 맺어지면서 덩달아 흡수된 만주계 명가들 또한 절대 적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이들이 소유한 토지는 이미 토지 장부에 등록된 이후였다.
단지 토지개혁으로 불필요한 토지들은 팔아치우고 알짜배기들로 골라 소유하였을 뿐이다. 결국 불이익을 당한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힘없는 이들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각지에서 불만에 찬 부락들이 난동을 부려도, 이형에게 따로 보고가 올라갈 만한 규모의 소요사태는 되지 않았다. 이들의 불만을 한데 모아 기폭 시킬만한 힘 있는 자들에게는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남의 이야기였던 까닭이다.
자연히 이형은 둔전의 부작용은 대강 짐작하고 있어도 현지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는 아직 본격적인 실시 이전 준비 단계에 있던 둔전보다 당장 중요한 전쟁에 집중했다.
"자, 싸게싸게 끝내자고! 잉? 뭘 그리 죽상이여. 이걸로 벌써 5번째인데 익숙해질 때도 됐잖어? 강 건너서 말 타고 다니는 나리들 만나서 야들 넘기고 나면 다음번에는 더 깊숙이 올라가려니까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두라고, 잉!"
"그, 그래도…이래도 되는 걸까요? 분명 중대장 각하께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야 인마, 그 양반도 뻔-히 우리들 고생하는 거 알고 있는데. 그냥 하는 말이지, 그냥 하는 말이야! 자, 자꾸 그렇게 멍 때리고 있으면 술 뺏어간다!"
이형의 지시는 간단했다. 극동 러시아인 개척마을을 습격하여 개척민들을 납치하고 마을은 불태우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 러시아의 극동 장악능력을 거세하려는 작전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단지 시작에 불과했고, 곧 이형의 지시에 따라 대한제국군 소속의 수색 중대들이 대거 파병되어 동시베리아 곳곳의 러시아인 개척마을들을 불태우고 현지 주민들은 납치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색 중대 각각이 독자적인 명령체계에 따라 움직였으나, 1872년 가을이 지날 무렵에는 대한제국 북방군 직속부대로서 독립수색연대가 창설되어 동시베리아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이들 독립수색연대는 전원이 북방 출신이거나 수렵에 종사하던 포수들로 이뤄져 있었다.
"Этот татарский…! (이 타타르 놈이…!)"
"허, 이놈들 보게. 오랑캐 놈이 우리들보고 오랑캐라네! 왜? 내가 못 알아들을 줄 알았나? 이것들이 진짜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뻐억-.
전봉준과 함께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던 추영철이 배속된 곳은 바로 이 독립수색연대였다. 포수 출신이며, 비록 공장의 작업반장 수준이라고 하나 집단을 이끈 경험을 인정받아 이 무렵에는 이미 5개의 러시아 개척마을을 불태운 공로로 중사로 진급한 그였다. 흔히 말하는 전쟁영웅이 된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러운가-하면 그럴 리 없었다. 평생을 따뜻한 호남땅에서 살던 그가 무턱대고 포수 출신이라는 이유로 극한의 동토까지 끌려간 격이었으니 당연히 좋을 리가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그가 이끌던 소대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부터 북방 출신이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그들 대부분이 따스한 삼남도 출신이던 것이다. 처음에는 애국심으로 움직이더라도, 차차 시간이 지나면 아무래도 극한의 환경 속에서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그래도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삶의 낙은 뻔한 것이었다.
"Господи, куда ты идешь?(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년은 또 뭐라는 거야? 어이, 동현이. 넌 알아듣겠남?"
"모르지요! 아니, 영철이 형님. 노국 놈들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자자, 술 떨어졌다! 흐흐흐, 어디 한잔 더 따라보더라고! 또 아나? 그럼 그 은반지라도 돌려줄지!"
"Лорд…! (주여…!)"
마을에서 약탈한 술과 음식으로 축제를 벌이고, 아리따운 마을 처녀들을 불러 흥을 돋우는 흔하디 흔한 병사들의 일탈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반복되고 있었다. 당연히 대한제국군 또한 이런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고, 군법의 지엄함을 내세우며 현지 병력 등을 통제하려 시도했으나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대한제국군의 통제가 듣기에 독립수색연대는 너무 시베리아 깊숙이까지 들어가 활동하고 있었고, 또 너무나도 극한의 환경 속에서 싸워나가고 있었다.
이따금 현지인들의 고발로 이러한 일탈 행위가 알려지더라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대로 무시되기 일수였다. 현지 장교나 헌병 또한 그런 크고 작은 일탈 행위 없이 버티기에 극한의 동토는 너무나도 참혹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무엇보다 강제로 이주당하는 처지에 있던 러시아인들이 관아를 찾아가 고발할 수도 없던 노릇.
결국 수색연대의 일탈은 북방군의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문민에 따로 보고되는 바 없이 독립수색연대의 영웅적 활약 속에 잊혔다. 바닷물조차 얼어버리는 극한의 동토를 배경으로 제국을 위하여 북적과 맞서 싸우는 무적의 영웅들에게 가려진 어두운 일면이었다.
"쩝, 요즈음에는 해삼위 가까이에서 도통 보이지를 않는구먼-. 꼼짝없이 빙하 구경 한 번 더 하게 생겼다. 야들아, 짐 챙겨라!"
"아이고, 또요? 한겨울에 빙하 구경이라니…으으으!"
무엇보다 이들의 활약은 절대 가볍지 않아, 1872년의 겨울이 되면 비교적 따뜻한 남방이나 해안선 일대의 러시아 개척마을은 사실상 씨가 마르게 되었다. 이형이 기대했던 대로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라도 러시아가 재차 영향력을 발휘할 여지를 거세한 셈이었다. 연해주와 그 근방에서 완전히 밀려난 러시아인들은 캄차카까지 도주하거나, 아니면 예니세이강을 건너 중앙아시아까지 먼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이 중 이형의 심기를 거스른 것은 캄차카 반도에 기어들어 간 러시아인들이었다. 지금이야 열강들의 해상봉쇄로 꼼짝달싹도 못 하는 처지라고 하나, 전쟁이 끝나고 나면 캄차카 반도의 러시아군은 두고두고 걸림돌이 될 여지가 많았다. 무엇보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미치지는 못해도 캄차카 또한 극동 러시아 해군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렇지만…이거 애매하게 되었군. 시기가 안 좋아. 이 시점에서 괜히 확전시켰다가는 우리 혼자서 러시아랑 싸우게 생겼군."
입맛을 다시면서도, 이형은 단념했다.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 시기가 좋지 않았다.
"양보를 기대해보는 수밖에."
이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원섭섭한 기분이었다. 마침내, 한성에 돌아갈 날이 된 것이다.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전보에는, 바르샤바를 함락시킨 연합군이 러시아, 신성로마제국과 베를린에서 만나 종전 협상을 시작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