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대 위로 >
솔즈베리 후작의 설명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로서는 이조차 최대한 그가 그 당시 이형에 받았던 인상을 최대한 간소하게, 그리고 디즈레일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는 것이었지만 그걸 듣고 있는 디즈레일리로서는 그렇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해서, 디즈레일리가 듣기에 솔즈베리 후작의 설명은 너무나도 장황했으며 허황 되었을 뿐 아니라 어처구니없기도 했다.
그로서는 도중에 몇 차례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눌러야만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솔즈베리 후작의 설명 속에 그가 결코 놓칠 수 없는, 놓쳐서는 안 되는 이야기가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왕과 왕실, 더 나아가 제국의 안위와 직결된 사항이었다. 너무나도 허황되어 믿기 어려운 설명뿐일지라도, 단 하나. 그것 하나만은 주목할만했다.
"그럴만한 이유도, 이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만 한 경위도 없이 그 극동의 나폴레옹은 우리 영국, 더 나아가 유럽에 대하여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라."
"네, 그 말씀대로입니다.".
디즈레일리의 말에, 솔즈베리 후작은 화색을 띠었다. 그가 가장 전하고 싶었던 내용이 전달된 것이다. 기실 그 극동의 황제가 예언가라는 것도,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결국 이 하나의 착안점에서 뻗어 나온 무수한 가능성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시기상 그리고 지리상 몰라야 하며, 또 모르는 것이 당연한 정보를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알고 있는 극동의 황제다.
하다못해 청나라나 일본이라면 모를까, 조선이라니. 이제 본격적으로 유럽과 교역을 시작한 지 10년도 되지 않은 나라가 아닌가. 당연히 유럽의 정세에 눈이 어두워야만 하고, 정보는 한세대에서 두 세대 이상 낡은 것이 옳다. 그러나 그 극동의 황제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영국의 여왕을 언급했다. 그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다. 도대체 극동에서 무슨 수로 영국의 여왕이 이번 전쟁을 바랄 것이라는 걸 안단 말인가.
나폴레옹 전쟁 시절 운운이나 신성로마제국이야 어떻게 어떻게 이해할 수 있어도, 현 영국의 여왕인 빅토리아의 성향까지 꿰고 있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허세를 부린 것이라는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 황제는 여왕이 참전할 것이라 확신하고서 국유화 운운으로 물주인 미국의 심기를 거슬렀다. 설령 아무리 간이 큰 인물이라도, 그 정도 사고를 칠 정도라면 무언가 확실한 정보를 얻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다.
"…무언가 착오가 있는 건 아닌가? 우리가 달리 파악하지 못하는 선에서 조선이 우리 영국과 유럽의 정보를 접할 수단이 있었던가, 아니면 저 황제만 뭔가 특별한 가정교육을 받았을 가능성은? 저 황제의 친모는 구교도라고 들었다. 구교도의 선교회에서 무언가 음모를 꾸민 것은 아닌가?"
"분명 그런 가능성도 있습니다만…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합니다. 그 황제의 친부라는 대만의 섭정을 보십시오. 우리 영국이 잡아 끄는 대로 아무런 대응도 못한 채 질질 끌려다니는 꼴이 아닙니까. 만일 그 또한 연기라면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보고에 따르자면 그자는 우리 영국과 유럽에 대하여 거의 완벽하게 무지하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한국의 외교관들 또한 매한가지입니다. 그들은 현지에서 걸음마를 걷듯이 조심스럽게 우리에 대하여 파악하는 중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관료들이 더듬거리며 걸음마를 갓 배우고 있을 때, 황제는 이미 우리들보다 훨씬 멀리 보고서 훨훨 날아 우리들을 앞서가고 있습니다. 만일 황제가 무언가 특별한 교육을 받았거나 조선 정부 차원에서 교육을 받았더라면, 이러한 경험과 식견의 불균형은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으음…."
솔즈베리 후작의 말에, 디즈레일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런던에 한국의 공사관이 들어선 지 이제 갓 10년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여타 비유럽권의 외교관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유럽의 사교계에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유럽에 대하여 알아가는 와중이었고, 유럽의 문물에 적응하는 와중이었다. 저들이 본격적인 열강의 외교관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유럽과 대등하게 협상하려면 아직도 10년에서 20년은 더 필요할 터였다.
그러나 황제는 홀로 저 멀리 달려가고 있다. 유럽의 열강들과 처음으로 마주하던 순간부터 그러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열강들이 노리고 있던 이권을 턱턱 내놓았다. 그리고 이권을 내놓고서는 또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부분을 가져갔고,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을 이해하고 영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자신들은 해양진출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등 용의주도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유럽이 전에 없던 대전쟁으로 극동에 신경 쓸 새가 없어지자 영국의 아군으로서 참전하여 연해주를 점령하고 러시아령 동시베리아를 짓밟았다. 이는 그간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에 대하여 우려하고 있던 미국과 영국이 한국에 기대했던 대로의 움직임이다. 그렇다, 기대했던 대로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확실히, 단지 영특한 것만은 아닌 듯하군."
디즈레일리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착잡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단지 영특하다거나, 단지 용의주도하다는 표현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이미 정도를 넘어섰다. 마치 처음부터 그들이 무엇을 요구로 하는지, 무엇을 기대로 하는지 이해하고서 그에 발맞춰 철저하게 움직여온 듯한 움직임이다. 목표는 무엇일까. 당연히 한국의 국력 신장이고, 자신의 명성이 세상에 떨치도록 하려는 명예욕과 정복 군주에게는 누구나 당연히 있는 정복욕일 것이다.
기회가 오자마자 그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듯이 중원으로 진출하여 단숨에 동아시아 전체를 발아래에 둔 것도 마찬가지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연해주를 점령한 것은 어디까지나 영국과 미국에 당근으로 내밀기 위한 덤이고 이쪽이 본래의 목적이었던 것임이 분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이 동시베리아를 차지함으로써 얻게 될 이익은 적어도 향후 10년간 없다. 아직 러시아 제국조차 어떠한 자원이 있는지 다 파악하지도 못하고 있는 시베리아가 아닌가.
아직은 고작 해봐야 쓸모없는 얼음 냉장고 수준에 지나지 않는 동시베리아 따위, 당장 수억의 시장과 노동력이 있으며 익히 알려진 무수한 자원이 늘어선 중원과는 감히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즉 한국은, 영국에게 중원에서의 독점적인 영향력을 인정받기 위하여 불필요한 시베리아 원정을 계획했다. 적어도 디즈레일리에게는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이번에도 속아주는 셈 치고서 연해주를 농락해준 대가로 저들에게 중국을 넘겨야 한다고 생각하나. 저 기름진 중국을 저들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양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극동의 황제는 말씀드렸다시피 용의주도한 자입니다. 영국이 먼저 한국을 적대하지 않는 한, 결코 저자는 먼저 우리 영국을 적대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저자는 우리 영국이 한국보다 더욱 강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대신 관리하게 두라는 거군. 대리인 같은 건가?"
"예. 제국의 금고를 관리할 금고관리인, 그 정도로 생각해주십시오. 금고 안에 든 금을 시시때때로 훔쳐 가는 못된 금고관리인 말입니다. 적어도 러시아의 위협이 건재하며, 우리 영국이 주도하는 질서가 굳건할 때 저자는 결코 우리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분명 위험한 자임은 틀림없으나, 적어도 그 송곳니는 아직 우리 영국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직은 향하고 있지 않다. 이는 다시 말하여 언젠가는 영국을 향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영국을 향할 것이다. 솔즈베리 후작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만일 저자가 정말로 극동의 나폴레옹이라면, 먼저 패배를 경험하기 전까지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 알렉산드로스가 그러했듯이, 카이사르가 그러했듯이, 오로지 죽음과 패배만이 그를 멈출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륙의 정복 군주는 언제나 영국의 극심한 안보위협을 초래했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머나먼 극동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보니 비교적 여유가 생긴 편이지만, 그것은 과연 어떨까. 알렉산드로스가 그러했듯이 그의 사후 그의 제국이 휘하 장군들의 손에 갈가리 찢기게 된다면 걱정할 이유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 카이사르가 그러했듯이 그의 사후 더욱 위대한 후계자가 등장하여 제국이 반석에 오르고 천년을 가는 제국이 도래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통일 아시아 제국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황화론 이 실체를 가진 위협이 되는 순간이다.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영국에게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전개는 저 극동의 나폴레옹이 지금에 만족하여 더 이상의 정복 활동을 멈춘 채 조용히 썩어 문드러지다가, 그의 사후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걸어 과거의 영광을 잃게 되지만 여전히 그 유산은 남아 극동의 패권국으로서 영국의 우방국으로 남게 되는 전개다.
"좋아, 그자와 협력해야만 하는 이유는 알았네. 어떻게 하면 공존할 수 있을지도 알았어. 그러나, 어떻게 하면 그자를 통제할 수 있을지를 아직 듣지 못했네만."
"저자는 우리 영국이 강건한 이상 먼저 적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적대하지 않더라도, 이번 사태와 같이 어떤 식으로건 우리 영국의 이권을 침해할 수도 있잖나. 그때에는 어떻게 대응할 셈이지?"
디즈레일리는 구태여 황제의 정체에 대하여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 황제가 예언자이건 아니건 그건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황제가 이상할 정도로 영국과 유럽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그것만 알면 족했다. 그에게 있어서 보다 중요한 건 언제나 그래서 그러한 인물을 어떻게 대영제국의 국익을 위하여 이용할 것이며 통제할 것 인가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인가는 부차적인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이 황제의 그릇을 잘못 파악했다. 이는 분명 뼈아픈 실패지만, 만회할 수 없는 정도의 실패는 아니다. 황제가 영국이 파악하고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또한 난데없이 뒤통수를 맞은 격이지만 달리 말하면 그뿐, 치명상은 아니다. 알았다면 이제부터라도 고쳐나가면 된다. 태도도, 경계도, 그리고 무엇보다 통제도.
디즈레일리는 그것이 가능한 입장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에게 가르쳐줄 인물을 마주하고 있었다.대영제국의 세계패권을 위하여, 이를 수정하기란 그리 대단한 수고도 아니었다.
"우선 안전 패를 하나 손에 넣어 뒀습니다만…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으로서 생각해두는 것이 옳겠지요. 그 마녀가 언제 우리 영국의 통제를 벗어날지 예측조차 불가능하니까 말입니다."
"마녀라…아아, 과연. 그 중국의 마녀 말인가. 티베트에서 수용해두라고 했으니, 괜히 탈출시도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명색이 주요 요인이라는 여자가 그런 고원에서 산길을 헤매다가 죽기라도 한다면 블랙 조크도 못되니까. …그럼 그 마녀의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그래서, 그 극동의 황제를 어떻게 할 작정인가?"
디즈레일리는 문득 서태후를 떠올렸다가, 곧장 머릿속에서 지웠다. 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청에 그간 영국이 얼마나 많은 투자를 퍼부었고, 또 그 투자를 그 마녀가 얼마나 시원스럽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놨는가를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나 솔즈베리 후작의 입에서 나온 대답 또한 그에 못지않게 머리가 지끈거려오는 대답이었다.
"간단합니다. ―그자를 무대 위로 끌어올려 줍시다."
"…흐음."
디즈레일리는 정계의 호사가들에게 도대체 어떻게 이 일을 설명하면 좋을지 골머리를 싸맬 수밖에 없었다.
***
한편, 이 무렵 북경.
"오랜만에 만나는구려, 장인어른. 그래, 그간 기분은 좀 어떠셨소?"
"…보이시는 대로고 생각하시는 대로 입니다. 대관절 언제쯤 우리 청조를 멸하실 작정이신지요?"
"유감스럽게도 그럴 생각일랑 없소. 조만간 왕이 될 테니 기대하고나 있으시오."
한성으로 돌아가는 길, 이형은 북경에서 공친왕과 짧은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도중에 장안에서 재회한 전봉준 또한 함께하고 있었다. 지난 1년여간에 요양 덕분인지, 이 무렵 전봉준의 상태는 당시에 비하면 크게 호전되어 이제는 옆에서 누가 부축하지 않아도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는 수준까지 회복한 상태였다. 물론, 단지 걷는 것만을 넘어 뛰는 것부터는 역시나 무리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형과 공친왕 사이를 흐르는 공기는 언제나 그랬듯이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동석한 전봉준이 쭈뼛쭈뼛 눈치를 보면서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쥐죽은 듯 엎드리고 있을 지경이었다. 언제 나와 같이 공친왕은 이형을 빤히 노려 다 보고 있었고, 이형은 빙긋 웃고 있었다. 이형이 장강 이남으로 남하하여 천하를 평정하는 동안 공친왕은 화북에 뿔뿔이 흩어진 농민 반군들을 상대하며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으니 그가 이형에게 감정이 좋을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도 차마 더욱 격한 언사가 오가지 못하는 까닭은 이미 대한제국의 우위가 굳어졌으며, 이형이 멸망 직전이던 청조를 구원한 것 또한 사실인 까닭이었다. 물론 청조가 멸망 직전까지 몰린 원흉에 이형 또한 일조했음을 고려하면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자신이 처리한 격이었지만, 그게 어디든 가. 세상에는 그조차 하지 않는 후안무치한 열강들이야 널리고 널려있었다.
"이번은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듣자하니, 이번 전쟁도 승전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딱히 북경에서 승전을 축하할 것도 아닌 모양이신데, 도대체 이것이 어쩐 일인지요."
이형을 한참 동안 노려 다 보던 공친왕은, 결국 깊이 한숨을 내쉬며 먼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지금보다 우위에 있던 것은 이형이었고, 언제 나와 같이 더욱 급한 것은 공친왕이었다. 결국, 그는 이형이 무언가를 요구로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이형의 요구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바로 직전에 중원을 평정한 정복군주의 앞에서 누가 감히 함부로 대항할 수 있겠는가.
그가 이렇게 투덜거려봐야 사적인 불평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당장에 이형이 오늘에야말로 청나라를 멸하겠다고 말해도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형이 병사들을 이끌고 아무런 기별도 없이 찾아오니 공친왕으로서는 여간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화북의 도적 떼들을 모두 진압한 것도 아닌 와중에, 이형이 새로이 병사들을 요구로 하거나 대규모 토목사업을 요구하기라도 한다면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공친왕에게 이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별일 아니요. 조만간 자금성을 잠깐 빌려 쓸 일이 있소. 종전조약에 서명하려 하는데, 아무 궁궐이나 빌려 쓰자면 영 체면이 살지 않잖소. 그래서 자금성을 빌려 쓰려 하는데."
"마음껏 가져다 쓰십시오. 천하를 평정한 천자가 자금성을 써야지 그럼 또 누가 쓰겠습니까. …좋을 대로 쓰도록 하십시오."
이형의 요구에, 공친왕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또였다. 또, 이 조선의 황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댔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이 정도면 그리 대단한 요구도 아니라고 진심으로 여기고 있는 건지. 어느 쪽이건 그로서는 피곤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전에는 이 조선의 황제가 청의 명운을 쥐고 있었고, 이제는 이 조선의 황제가 진정으로 천하의 주인이 된 까닭이다.
반쯤 자포자기하여, 공친왕은 물었다.
"그럼 서역의 공사들이 또 한동안 체류하면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논의하게 되겠군요. 얼마나 걸리실 거라 예상하십니까?"
"음? 아아, 그럴 일은 없소. 자금성에서는 어디까지나 종전조약의 형식적인 서명만이 이뤄질 것이오. 그저 우리 대한이 북적에 맞서 승리하였음을 천하만방에 알리고자 하는 형식적 행사일 뿐이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외다."
이형의 대답에, 공친왕은 허를 찔린 얼굴이 되어 눈을 껌뻑거렸다. 아니 그건 무슨 소리인가. 자금성에서는 서명만이 이뤄질 예정이라면, 협상은 어느 곳에서 진행한단 말인가?
그에 대하여, 이형은 대수롭지 않은 듯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 대한제국은 이번에 백림(伯林:베를린)으로 초청받았소. 협상과 공식적인 서명이라면 백림에서 이뤄질 것이고, 북경에서의 공식적인 종전은 그저 우리 대한의 천명에 마지막 쐐기를 박아넣는 절차일 따름이라오."
"…허."
공친왕은 순간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