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국을 위하여 >
수도, 한양.
지난 반천년 간 이어져 온 대조선국의 오랜 도읍이자, 새로운 대한제국의 도읍. 비록 지금은 황상께서 부재하고 계시나, 여전히 한양은 이 나라의 오랜 도읍으로서 화려한 번영을 이어가고 있다. 비록 그것이 지난 반천년 간의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서역의 도시들과 같은 번영이라고 할지라도.
거리로 나가면 시야를 압도하는 널찍한 벽돌길과 시멘트로 지어진 신식 건물들을 뒤로하고 서역에서 들어온 잘 빠진 양장에 머리를 짧게 자른 모던 보이들이 거리에 가득하다. 한성 중심에 자리를 잡은 큼지막한 서울역에는 매일 같이 오고 가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그 옆으로는 아직도 새로이 건물을 짓는 인부들이 시멘트와 벽돌 따위를 수레에 실어 나르고 있다. 근래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는 나에게는 좋은 구경거리다.
마침 아침 시간인 걸까. 인부들은 하나 같이 온몸을 시꺼먼 때와 먼지로 더럽히고서 허겁지겁 국밥을 입안에 퍼넣고 있었다. 근래에는 따로 주막을 가지지 않고서 식재와 수레 하나, 가마솥 하나만 들고서 한양 곳곳에서 장사하는 길거리 장수들도 한양의 명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인부들의 닦달에 솜씨 좋게 국밥을 놋쇠그릇에 덜어주는 이름 모를 중년의 여성 또한 그들 중 하나이리라.
"이모! 여기 국밥 한그릇만 더 주시오! 누리끼리한 고깃기름 가득히 떠 주시고 뜨끈한 무도 뭉텅뭉텅 잘라주시오!"
"아이고, 이 사람아! 정말 게눈 감추듯 잘도 해치우는구먼! 에구, 알겠소. 잠깐만 기다려주시오. 지금 이거 나르는 대로 바로 또 퍼줄 테니까!"
"낄낄낄! 누구를 탓하겠소. 국밥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는 우리 이모님 요리 솜씨를 탓해야지! 얼른얼른 말아주시오. 또 금방 종치면 벽돌 나르러 가야 하는데 사람이 먹은 게 있어야 뭘 나르지!"
"쯧, 마음에도 없는 칭찬하기는! 또 그렇게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서 어음 쓸 생각은 꿈도 꾸지 마소!"
말은 그렇게하면서도, 입꼬리는 이미 늘어진지 오래다. 보아하건데 저런 식으로 몇번이고 티격태격하며 지속하여 온 징한 관계인거겠지. 아침부터 좋은 구경을 했다. 무심코 나도 입꼬리가 늘어졌다. 참으로 활기가 넘치는 사람들이다. 비록 고기 한 점 없이 고깃기름만 그득한 이름뿐인 고깃국이라지만, 생각해보면 옛날에는 저런 고깃국을 어디 공사장 인부 같은 이들이 먹을 수 있던가.
이것도 황상께서 만주를 정벌하시며 북방에서 목초지가 크게 늘고 만주의 야인들에게서 말이나 양 따위의 고기를 흔히 구할 수 있게 된 덕분이었다.서울의 백성은 흔히 농담으로서 서울역에 돌아다니는 것은 병사가 반이고 짐승이 나머지 반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국경을 지키려 머리를 깎고 북방으로 향하는 병사들도 반대로 만주에서 들여온 가축들도 많다는 뜻이다.
물론 요즈음에는 반대가 되었다. 황상께서 동원령을 철회하신 까닭이다. 북방으로 향하던 병사들로 가득하던 서울역은 요즈음에는 북방에서 돌아오는 병사들로 북적거리게 되었다. 물론, 그들을 환영하는 가족들 또한 흔히 늘었다.
"아이고, 동현아! 아이고, 내 새끼. 내 새끼 어쩌나! 얼굴이 반쪽이 됐네! 얘가 배고프면 먹으라고 챙겨준 곶감은 다 어쩌고! 그리고 뭔 짐승 가죽을 이렇게 빙빙 둘렀니, 얘! 못 보는 새에 오랑캐가 다 됐네!"
"아니 어머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야, 북쪽은 추우니까 짐승 가죽이라도 둘러야지요! 그리고 곶감은 선임들이 다 훔쳐먹었지 어떻게 제가 먹습니까. 곶감은 구경도 못했지요."
"못된 놈들. 이런 못된 놈들! 아니 그 곶감이 어떤 곶감인데 내 새끼 곶감을 뺏어 먹어! 얘, 이럴 때가 아니다. 당장 관아로 가자꾸나. 어서 관아에 일러서 본때를 보여줘야지!"
"아이고, 참으십시오 어머니! 이제 다 끝난 일을 가지고서 왜 또 그러십니까? 인제 그만 집으로 갑시다, 예? 다-지난 일 가지고서 뭘 또 관아를 찾아가고 그런답니까?"
또 시끌벅적하여 고개를 돌리니, 온몸에 곰 가죽을 빙빙 두르고서 머리를 짧게 자른 귀환병이 노모와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귀환병은 선임들의 만행을 관아에 이르겠다며 난리법석을 피우는 노모를 어떻게든 말리려는 모양새지만, 부모를 이기는 자식 없다고 어쩔 수 없이 질질 끌려가고 있는 모양새였다. 힘에서 밀릴 리도 없으니, 어쩌면 마음속으로는 노모와 동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헛수고라 여기며 지나치려던 나의 시선은 귀환병의 가슴팍에 찬란히 빛나고 있는 금속 쪼가리에서 멈췄다. 금으로 도금되어 찬란한 금색을 내뿜는 금색 테, 그 중심에 아로새겨진 태극문양과 그 위로 기세 좋게 날개를 펼치고 있는 삼족오까지. 이번 전쟁 중에 조정에서 새로이 제정했다는 갑종 태극무공훈장이었다. 팔다리 성히 받은 사람보다 죽거나 반병신이 되어 받은 사람이 많다는, 귀환병들 사이에서도 반쯤 전장전설 취급받던 귀한 몸이었다.
깜짝놀라 다시금 복장을 살피니, 그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흑갈색 군복 위에 두르고 있는 곰 가죽부터가 무두질도 제대로 되지 않은 불곰 가죽이었다. 전장에서 사냥하고서 무두질도 할 줄 몰라서 되는 대로 가죽만 벗기고 전리품 삼아 입고서 돌아온 것임이 분명했다. 시베리아에서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활약했다는 소문만 무성한 독립수색연대 출신의 귀환병인 모양이었다.
'관아에서 골머리를 앓게 생겼군.'
독립수색연대 출신의 귀환병, 그것도 겉으로 보기에는 이렇다 할 흉터 하나 없이 돌아온 갑종 태극무공훈장 수훈자다. 저 정도 전쟁 영웅이라면 관아에서도 무시하고 넘어가기 쉽지 않다. 필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리라. 안 그래도 요근래 너무 군인들이 기세등등하다며 아니꼽게 여기는 서생들이 많다. 제대로 몰아치기 시작하면 어디까지 커질지 나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오늘따라 아침부터 좋은 구경을 했다. 재수가 좋았다. 오늘도 새벽 같이 일하는 인부들과, 무사히 팔다리 성하게 전장에서 돌아와 노모와 재회한 귀환병까지. 필시 좋은 안줏거리가 되리라. 마침 오늘 밤에도 어김없이 소대원들과 술자리가 예정된 차였다. 소대원들 앞에서 즐겁게 떠벌일 좋은 무용담이 생겼다는 생각에,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땡땡땡-.
"일해라, 이 굼벵이들아! 자, 다들 가던 길 가소! 어디 공장일 하는 사람들 처음 보나! 자자, 어제 월급 받았거든 오늘은 받은 값을 해야지! 다들 잘-살아보세!"
"아으, 또 아침이구나…. 입 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어디 때려치울 수도 없고. …으으으, 내 팔자야!"
좋은 기분은 시기적절하게 저 멀리에서 들려온 종소리에 깨졌다. 요란스러운 종소리와 함께 이곳저곳에서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로 지친 얼굴의 노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나와 비슷한 또래의 청년들이었다. 개중에는 몇몇 눈에 익은 얼굴들도 보였다. 그렇다면 귀환병일지도 모른다. 전장에서 돌아온 귀환병이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역에서 내린 즉시 서울에 무턱대고 정착하여 공장에 취직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장에서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던 어제의 용사들이 전쟁이 끝나가니 저런 몰골인가. 피로와 때에 찌든 그들의 얼굴에서 전장에서 내보였을 젊은 패기는 엿볼 수 없었다. 그저 하루 일하여 하루를 벌어 먹고사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레디메이드 인생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저들이야말로 매일 같이 방에 틀어박혀서 글이나 읽고 있는 서생들보다도 이 나라에 필요한 인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저들은 성실히 일하며 당장에 필요한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에 반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매일 같이 길거리를 서성거리다가 밤에는 옛 전우들과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시간을 보내는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간만에 들뜨던 마음은 차갑게 식었다. 역시, 저런 일이라도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비록 전쟁으로 미처 공부를 마치지 못하였다고 하나, 나 또한 신식학문을 조금이나마 익힌 신시대의 지식인이 아닌가. 아무리 오갈 곳이 없더라도 저기까지 영락하고 싶지는 않다.'
애써 고개를 저어 마음의 동요를 끊어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역 뒤로는 오늘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한강 근교 공장들의 매연이 피어오르고 있다. 유별나게 시꺼먼 색을 띈 공장의 매연은 멀리에서도 쉽게 눈에 띈다. 그래 봐야 한둘 뿐이지만, 언젠가는 저 공장 매연으로 시야가 가득해지는 날이 오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조금 아연하기도 했다. 과연 그런 날 이 올까.
이 나라 조선이 진정으로 부유한 산업 강국으로 거듭나는 날이, 온통 하늘이 공장에서 내뿜는 매연을 내뿜는 날이 과연 올까. 대답은 뻔했다. 온다, 올 것이다. 올 것임이 틀림없다. 황상께서는 현명하신 분이다. 그분의 치세 아래 매일 같이 부강해지는 오늘날의 조선이라면, 분명 언젠가 그와 같은 경지에도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경지에 다다르는데 나라는 인간은 정말로 필요한 걸까. 아버지의 불호령이 두려워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성실히 일하지도 않고, 병사로서 일하면서 모아온 월급으로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길거리를 서성이며 시간을 보내는 것뿐. 이래서야 영락없는 부랑아가 아닌가. 그런 생각에 무서워졌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흔하디흔하던 나무로 세운 목제 건물들은 이제는 시외로 나가거나 궁궐에 가까이 가야지만 볼 수 있게 되었다.
"호외요, 호외! 노서아가 항복했다는 오늘 아침에 막 따끈따끈하게 들어온 속보요!"
"뭣이? 그게 참말인가! 아니, 참말이네! 참말이네그려! 허허허, 맙소사! 기어이, 기어이 이런 날이 오는구나! 만세! 황상 만세! 만만세!"
"푸-하하! 그래, 이런 날이 오는구나! 이런 날이 왔구나! 우리 조선이 마침내 천하를 웅비하는 시대가 마침내 왔어! 으흐흐, 으흐흐! 아이고, 아버지! 이 좋은 시대를 왜 못 보시고 그냥 가셨소!"
때문에 그것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눈 오는 날 집 개처럼 역 앞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방긋 웃는 얼굴로 신문을 건네는 여느 소년처럼, 소년이 건네준 신문을 받아 읽고서 흥에 겨워 절로 어깨춤을 추는 사람들처럼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우리 한국이 전쟁에서 이겼다. 그건 분명 대단한 일이다. 이것보다 기쁜 일이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한국의 승전을 위하여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였단 말인가. 정겨운 고향 땅 전주를 떠나며 친우들과 함께 나라를 위하여 용감하게 싸우자며 맹세하던 젊은 혈기는 어디 가고, 병사로서 자원입대해서는 줄곧 안전한 후방만 빙빙 돌다가 위에서 내려준 전역증만 받아들고서 터덜터덜 한국에 돌아온 내가 아닌가.
나는 과연 이 승전을 함께 기뻐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자랑스러운 나의 조국을 위하여 도대체 무엇을 하였단 말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 자랑스러운 조국을 위하여, 결국 말만 그럴듯하게 지껄였을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한국이 이겼다! 한국이 이겼어. 나의 조국,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이 마침내 승리하였다! 그거면 된 거야. 저 길거리에 사람들은 그럼 전쟁 중에 무엇을 했다고 저렇게 들떠 있단 말인가?'
그렇게 애써 자신을 다독여도, 마음 속 한 쪽에 진 응어리는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를 않았다. 초라했다. 비참했다. 그래도 이 나라에서 극히 드문 신학문을 배운 서생으로서, 생도로서 무엇하나 조국의 승전에 이바지한 것이 없다는 비참함이 가슴 속을 후벼팠다. 이제라도 일을 시작해야 할까. 하지만 학교에서 신식학문을 배워서는 공장일이나 하고 있다는 걸 집에서 알면 그때야말로 호적에서 파이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만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결국, 그날은 더는 거리 구경도 하지 못하고서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하숙집으로 돌아와도, 반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승전 소식에 기뻐서 거리로 뛰쳐나간 것이다. 저 멀리에서 만세 소리가 들렸다. 하숙집은 광장에서 30분은 걸어야 하는데도,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만세 소리가 하숙집까지 쩌렁쩌렁 울리는 듯했다.
"""승리 만세! 황상 만세! 대한제국 만세! 한민족 만세! 만만세-!"""
그 만세 소리가 마음을 후벼 파는 듯했다. 창문 너머, 저 멀리 펄럭이는 새하얀 태극기의 행렬이 아련하게만 보였다. 나도 저들과 함께 거리로 뛰쳐나가 함께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신시대의 지식인으로서, 이 승전에 무엇하나 공헌하지 못했다. 그런 부채의식만 늘어났다.
결국 견디다 못해 이불 위에 엎드려 베개로 귀를 틀어막았다. 눈물이 흘렀다. 왜 나는 저들과 함께 만세를 외치지 못하는 걸까. 이럴 바에야 차라리 학교에 남아 공부를 끝마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기왕에 병사로서 자원입대하여 전장에 나갔다면, 전쟁영웅이 되지 못할지언정 하다못해 팔다리 하나는 부서져서 돌아오면 좋았을 것을. 부끄럽게도 상처 하나 없이 후방에서 요령만 피우다가 돌아오고 말았다.
아아. 부끄러웠다. 그저 수치스럽고 낯뜨거웠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나도 중원에서 죽었다면 좋았을 텐데. 전우들과 함께 저 차가운 흙에 파묻혀 썩어 문드러지더라도 그것이 나의 조국, 나의 민족을 위하는 길이었을 텐데. 나는 그저 수치스럽게도 오늘 하루도 무책임하게, 무료하게 보내고 있을 뿐이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어이-강규! 들리나? 어이, 이 상병! 나야 나, 박 병장일세! 또 날도 저물었는데 한잔해야지? 오늘같이 좋은 날에 술독에 빠져 죽지 않으면 어찌 대한의 건아라 할 수 있겠나!"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문을 두드리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로 판단하건대, 박진호 병장이었다. 나와 함께 줄곧 후방만 전전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매일 같이 무료하게 시간만 보내고 있는, 같은 처지 동지이자 전우였다.
여전히 창문 바깥은 요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시끄럽게 울리는 징소리와 꽹과리 소리, 장구 소리와 북소리. 그리고 시끌벅적하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 무엇하나 어지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덕분에 잠은 금세 달아났다. 한숨과 함께 눈을 뜨니, 쿰쿰한 곰팡내를 풍기는 초라한 하숙방이 보였다. 이마저도 다음 달이면 떠나야 했다. 울적한 현실이었다.
터덜터덜 문 앞으로 가니, 술 냄새가 진창 풍겼다. 이미 한바탕 소대원들과 술잔치를 벌였던 것임이 분명했다. 아마 지금쯤 신 이병이 요 근처에 만주인 주인이 하는 길림식 주점에 자리를 잡아두고 있을 것이다. 1번째는 호남식, 2번째는 만주식. 그것이 우리 소대 술잔치의 불문율이었으니까.
"야 인마, 얼굴이 왜 그래? 너 울었냐? 인마, 기분 풀어. 오늘 같은 좋은 날 왜 또…."
박 병장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늘같이 기쁜 날, 나처럼 궁상을 떠는 놈이 이상한 녀석이니까. 평소라면 아무 일 아니라 웃어넘겼겠지만, 그날 따라서는 마음이 울적하여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울면서 하소연했다. 친우들과 함께 이 나라를 위하여 용감하게 싸우자고 약속한 일.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서 결국 한국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던 일. 그리고 지금의 궁상맞은 처지에 대한 한탄까지.
한참동안을 박 병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취기는 진작 가신 듯, 박 병장의 얼굴은 전에 없이 진중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인마…내가 마침 우리 민족을 위해서 좋은 일 할 수 있는 곳을 알고 있는데…어떠냐, 나랑 한번 같이 일해볼래?"
그거야말로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말이었다. 나는 그 즉시 고개를 끄덕여 순응했고, 박 병장은 그런 나에게 피식 웃으며 다가와 어깨동무를 해주었다.
"그래, 이제 우리는 같은 배를 탄 거다! 너 잘 선택한 거야, 인마. 절대 후회하지 않게 해줄께!"
그날, 박 병장은 소대원들에게 미안하다 이야기하고서는 나와 단둘이서 그의 단골 술집으로 가 술을 사주었다. 그날따라 마시는 술은 달았다. 그제야, 나는 나의 조국이 승리하였음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었다. 몸이 가벼웠고, 마음이 개운했다. 이날 내가 마신 술보다 달고 맛있는 술은 아마 내 일평생 없으리라.
그리고 다음날, 박 병장은 나를 '조선애국당'이라고 명패가 붙어있는 신식건물로 데려가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