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회 >
'우라질, 이게 도대체 뭐야…! 아니 뭐, 내가 그동안 중앙에서 생각해보면 돈 왕창 쓸 일밖에 안 하기는 했지만! 뭐든지 정도가 있는 거잖아!'
이형은 뒷골이 절로 당기는 것을 느꼈다. 굳이 거울이 없어도 지금쯤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으리라는 걸 훤히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여기까지 재정이 파탄 나는지, 이형으로서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이형이 예산을 필요로 하는 사업을 대거 벌였던 것은 사실이다. 우선 원정 규모부터가 대한제국의 국가역량을 벗어났다. 이제 근대화를 시작한 지 10년도 안 된 나라를 끌고서 총동원령을 내리지를 않나 북경을 넘어 장강을 건너 남경까지 쳐들어가고, 그조차도 부족해서 장안에 오르고스 고원에 사천성까지 그야말로 중원 전역을 쏘다녔다.
아무리 현지에서 보급품들을 충당해도, 한계는 있는 법이다. 식량이나 의약품이야 현지에서 보급한다 쳐도, 무기나 탄환들까지 현지에서 충당할 수는 없다. 그것들만큼은 당연히 한국에서 만들어서 전선에 보급해줘야만 한다. 당연히, 지난날 프랑스와 영국이 세운 무기공장들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무기를 생산했으리라는 건 짐작 가능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형은 깨달았다.
'잠깐, 이건 또 뭐야. 신구간 건설? 부산에서 북경까지? 아니 장안까지 뚫어버리겠다고? 전선에 병사들에게 보급물자 충당하려는 이유라고? 그리고 이건 또 뭐야. 한양 원산 노선? 거기에, 한양에서 부산까지 역을 6개를 더 짓겠다고? 야, X발 잠깐만. 이것들 설마 재정 고문을…!'
이형은 불안감에 휩싸여 서류 제일 위, 그리고 맨 오른쪽에 새겨진 서명을 확인했다. 내무부에서 요즈음 관리한 재정 고문의 명의가 새겨지는 공란이었다. 그곳에는 당당하게도 앤드루 B. 테일러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형은 그것이 누구인지 몰랐다. 얼굴도 본 적 없었다. 그러나 이름만 보고서도 이형은 한눈에 알았다.
아, 이놈은. 트러스트 관련 인물이구나-하고.
"…하, 진짜. 이런 우라질 놈을 봤나! 보나 마나 카네기가 지 빽으로 꽂아준 건데, 이거. 아니, 그렇다고 하자는 대로 다 따라 하면 어째. 진짜 답답하네."
이형은 목덜미가 한층 더 당겨오는 걸 느꼈다. 그제야 이 모든 일이 무슨 일인지 이형은 깨달았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박규수와 조정의 관료들은 적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이형과 전선의 한국군을 지원하려고 모든 수를 마련했고, 이를 위해 철도청을 통하여 미국에 새로운 철도 노선들을 의뢰했다.
그리고 미국은 기꺼이 이 의뢰를 받아들였고, 덕분에 미국의 투자가 점점 늘어나면서 전선의 일차적으로 요동과 화북이 철도로 연결되었으며 이를 통해 한반도와 화북이 철도로 연결되었다. 그 이후로도 전쟁이 이어지면서 한국은 계속해서 전선의 병사들에게 보급물자를 전달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철도를 늘릴 필요가 있었고, 그렇게 계속 노선은 늘어나갔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애초에, 이만한 길이의 노선을 한국 정부는 감당할 수 없어야 정상이라는 것이다. 전쟁 기간 동안 한국의 철도 노선은 불과 3년 만에 1000km에서 2500km로 단숨에 2.5배가 늘어나고 5년 안에 재차 두 배로 늘어 5000km까지 늘어나도록 예정되었다. 심양에서 한양을 관통하여 부산까지 간신히 연결하던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 화북을 연결하고 한반도 곳곳에 거미줄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당연히 한국 조정에서 그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 모으기 운동만으로는 전쟁 초기라면 몰라도 그 이후에도 계속 재정을 충당해줄 수는 없다. 그 수단이 국채였고, 이형 또한 애초에 국채 판매를 통한 전쟁 준비를 생각하고 있던 만큼 여기에 문제는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딱 한 가지.
'정도를 지나쳤어! 브레이크 역할을 해줄 재정 고문이라는 놈이 옆에서 계속 부추겼으니 이 꼴이 나는 거지! 아직 금전 감각이 미묘한 선비들에게 세 치 혀 나불대는 솜씨 하나로 먹고사는 자본주의의 앞잡이를 붙여뒀으니 그야…!'
일종의 국채 판매에 의한 거품경제인 셈이다. 당연히 이와 같은 재정 상황이 건전할 리가 없다. 머리로는 100만 원이라고 알아도 그 100만 원이 얼마나 되는 가치를 지녔는가를 아직 전혀 가늠하지 못하던 관료들이 재정 고문이라는 자가 괜찮다고 계속 꼬드기니까 그런 줄만 알고서 마구 국채를 팔아서 일단 되는대로 전쟁예산으로 퍼부은 것이다.
이형은 새삼 자신이 막 전쟁에서 이기며 중원을 발아래에 두었다는 사실에 마음속 깊이 감사했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확실하게 재정적으로 파탄했으리라. 현물경제가 따라잡지 못하는 금융호황은 결국 파탄에 이르는 법이니 말이다. 그리고 고작 해봐야 화북 일부와 한반도, 만주 정도가 고작이던 전쟁 이전의 대한제국이라면 그와 같은 위기에 대처할 방도는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 전쟁 탓에 이와 같은 위기를 맞게 된 것을 생각하면 병주고 약주 고인 격이었지만. 지금은 우선 착취를 해서라도 어떻게든 저만한 규모의 국채를 갚을 방도가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사실상 중원을 온전히 발아래에 두면서 덩치 자체가 크게 불리지 못했다면, 거품이 한순간에 꺼지면서 몰락했을 터였다.
'일단 내가 돌아왔으니 당장에 국채판매부터 당분간 멈춘다. 이미 통상적인 상황이라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규모야. 여기에서 더 늘려봐야 죽도 밥도 안돼! 그리고-옛 중화제국에서 쓰던 남경의 국고를 털어와서 조금씩 갚아나가는 수밖에. 최소한 우리가 갚을 역량이 있다는 것을 보이면 국채가 한방에 푹 꺼지지는 않겠지….'
그것이 일차적으로 이형이 생각해낼 수 있는 조치였다. 우선 추가적인 국채판매는 없애고, 우선은 중화제국을 멸하고서 얻은 재물들로 이를 갚아 최대한 거품 붕괴를 늦추는 것. 이차적인 조치는 당연히 우선 농업과 경공업에 투자하며 단계적으로 산업화를 이룩하려던 계획에서 대폭 수정하여 중공업 중심의 초고속 산업화를 목표로 하는 것.
당연히 여기에 직접 드러나지는 않아도 이 모두를 합친 것만큼이나 중요한 학교와 병원, 교통설비를 비롯한 사회기반 시설을 증축하는 것 또한 포함되어 있다. 철도는 일단 거품경제를 틈타 대폭 늘려놨으나, 솔직히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도 지금처럼 유지될 수 있을까는 의문일 수밖에 없다. 수십만 대군을 운용하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물자가 필요하고, 한국군은 그것을 일부는 현지에서 보급했으나 그럴 수 없는 것들은 철도를 통하여 보급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나면 일단 수십만 대군이 소모하는 물자부터가 확 줄어든다. 우선, 평시에도 전시처럼 마구 탄환을 보급해 줄 필요는 없다. 자연히 군사적 이용은 크게 줄고 그만큼의 사용량을 민간에서 메꿔줘야 하는데, 현 한국 경제에 그만한 역량은 없다. 그러나 사용되지 않는 철도는 이를 통한 수익 대신 유지비만 남아 적자가 되기 마련이고, 무엇보다 이만한 예산을 들여 만든 철도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아깝다.
'지금 철도로 연결된 곳이-일단 한반도, 요동과 만주, 그리고 화북인가. 장기적인 수익은 지금 생각해도 소용없고. 일단 당장에 수익을 창출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그럼 청에서 세금을 거두는 수밖에. 아니, 조공인가. 일단 각지에 부임하라고 왕들을 보내면 먼저 조공부터 바치라고 해야겠어. 조공을 철도로 바치라고 하면 어떤 식으로건 사용량은 늘면 늘었지 줄어들 리는 없겠지"
결국 이형의 결론은 이러했다. 전쟁 중 만들어낸 철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조공무역을 이용하겠다는 발상이었다. 민간차원에서 철도를 유지할만한 수익이 나오기에는 아직 경제적 발전이 미흡하니, 우선은 국가적 차원에서 무역을 밀어붙이는 격이었다. 말이 좋아서 조공무역이지 실상은 세금, 그보다 나쁘게 말하면 수탈이었지만 말이다. 당장에 산업화를 몰아붙여야 하는 대한에 필요한 자금과 자원을 대려면 필요한 조치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마어마한 양의 국채를 발행해서 쓴 것은 사실이나 최소한 총리인 박규수부터가 청렴한 인물이다 보니 그 국채가 지배계층의 횡령을 위하여 쓰인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공적으로 쓰였다는 점이었다. 물론 현장 관료들이야 난데없이 중앙에서 내려오는 어마어마한 예산에 정신을 못 차리고서 공금에 손을 댔겠지만, 최소한 중앙까지 공금에 손을 대지 않은 것만으로 최악은 면한 격이었다.
무엇보다 이 시대의 철도는 사용법이 무궁무진했다. 그나마 이형이 자리를 비운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고, 박규수를 비롯한 조정의 관료들이 화폐경제에 눈이 어두웠을지언정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니었기에 터무니없는 양의 국채를 내다 팔고서도 어떻게든 길이 생길 수 있었다.
'딱히 나쁜 마음을 품을만한 인물이 아니어도 어리숙해서 서구에 당할 수도 있다는 게 이 시대의 개 같은 점이란 말이지.'
이형은 한숨을 내쉬고서 마지막 장을 펼쳤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국경을 넘어온 청나라 유민들에 대한 통계였다. 내용은 이형이 예상한 대로. 현재 경무청에서 파악하기로는 약 20만 명 가까이 있는 청나라 유민이 요서를 비롯한 청과 대한의 국경선을 중심으로 조금씩 정착촌을 늘려나가고 있다는 보고였다. 당연히 밀입국이고, 경무청과 국가헌병대가 협력하여 보이는 족족 때려잡고 있지만,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가고 있다는 소견도 덧붙여져 있었다.
이형이 사족 없이 수치상으로만 보고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런 내용의 보고가 따로 삽입되어있는 것을 보면, 국경지대에서 대거 유입되고 있는 청 유민들 또한 꽤 필사적인 모양이었다. 그 또한 이형의 예상한 대로이기도 했다. 시대의 흐름을 읽어낸 이들은 지는 해인 청나라보다 떠오르는 해인 대한의 국민 이고 싶어 하고, 그 외에도 가난해서 혹은 죄를 저질러서 만주로 도피하는 이들도 수두룩할 터였다.
아마 경무청에서 파악하고 있는 20만 명이 끝은 결코 아닐 것이다. 적어도 그 배 이상의 숫자가 득시글득시글할 터였다.
'무슨 바퀴벌레냐. 하나가 보이면 둘은 숨어있게. 하기야 뭐, 밀입국한 놈들은 바퀴벌레가 맞긴 하지. 우라질, 이거 점점 마적단이 증식하게 생겼군. 둔전병들 훈련 시키는 셈 치고 시간 날 때마다 마적단 토벌하게 시켜야겠어.'
이형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예상했던 거지만, 그리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내무부에서 파악하기를 현 대한제국의 인구는 2000만 명 가량. 20만에서 그 이상이면 전체 인구의 1%에서 2% 가까이가 밀입국자라는 이야기다. 전쟁 중 청과의 국경지대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이 대거 빠지면서 안 그래도 헐거웠던 국경경비가 구멍이 숭숭 뚫려 유민들을 마구 받아들인 것이다.
다만 내쫓을 생각은 없었다. 안 그래도 인구가 부족하던 대한이다. 군역을 지건 노역을 지게 하건, 좌우지간 그들을 부려먹을 방법은 많았다. 모조리 잡아들여서 광산이나 터널 공사처럼 위험한 곳에 밀어 넣는 것 또한 선택지에 넣어둘 만했다. 정식으로 입국하여 한국인이 되기로 마음먹은 이들이나 일하러 온 파견근로자라면 몰라도, 전쟁 중에 혼란을 틈타 밀입국한 이들까지 오는 대로 받아 줄 정도로 이형은 자비롭지 못했다.
아직 인권이라는 인식이 희미한 시대였다. 헌병대를 시켜 밀입국한 이들을 내쫓거나 아니면 수용소에 한데 모아 두고두고 노역을 할 때 부려먹는다고 한들 비난을 들을 걱정도 없었다. 다른 열강들은 소매치기들 같은 경범죄자까지 저 멀리 바다 건너 오지까지 강제이주 시키기도 하던 시대였으니까.
"우라질, 전쟁할 때는 차라리 나았는데…이제 내정하려고 하니까 더 지독해지는 기분이야. 어떻게 하면 사람을 더 잘 쥐어짤까나 고민하고 있으니 진짜 우라질 놈이 된 기분인데."
이형은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21세기에는 사람을 굴리는 대신 기계를 굴리면 되지만, 19세기는 험한 일에 사람을 밀어 넣지 않으면 기계가 굴러가지 않는 시대였다. 현대과학의 힘을 빌릴 수 없는 이형이 제아무리 의식하여 고치려고 한다고 한들, 결국 그 또한 19세기의 황제가 되어버린 이상 기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험한 일에 사람을 밀어 넣을 궁리나 어떤 사람을 써야 할지에 대한 궁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형으로서는 그리 기분이 좋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그가 지난 생에 그토록 뒤에서 몰래 욕하던 사회의 높으신 분들이 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바로 그 사회의 높으신 분들이 된 게 맞았다. 그것도 지금의 이형이라면 사회의 최정점에 올라서 있었다. 당연히 이런 고민을 해야만 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황상께서는 실로 하늘에서 내리신 귀인이십니다. 오늘날 황상께서 이토록 힘을 써주지 않으셨다면 도대체 어떻게 우리 대한이 오늘날 이와 같은 대국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이형의 투덜거림에 놀란 전봉준은 서둘러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며 말했다. 아첨이 아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온 솔직한 속내였다. 조금의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곧장 말할 수 있었던 것이 그 증거였다. 이형이야말로 진정 하늘에서 내린 인물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이형은 그런 전봉준을 내려다보다 피식 웃고서는, 손에 쥐고 있던 서류들을 갈가리 찢어 한강에 던져 버렸다. 괜히 다른 곳에 퍼지면 위험한 국가기밀에 해당하는 서류이고, 어차피 이형 혼자서 보려고 만든 자료였을뿐더러 그 스스로가 이런 자료를 다시 볼 리도 없으니 파기해버린 것이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하늘에서 내려준 인물이라. 그거 분수에 맞지 않는 칭호를 얻었-."
"폐하. 곧 부두에 정선하려 하오니, 우현으로 와주시옵소서. 백성들이 폐하께서 배에서 내리시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음, 곧장 가마."
그리고 사념에 빠지는 것도 거기까지였다. 뒤늦게 이형은 배가 점점 느려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미 맨눈으로 배가 정박할 한강 근교에 자그마한 부두가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형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급히 보수한 것인지, 나무로 된 부두임에도 아직 물기를 거의 머금고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배에서 내리려던 이형은, 도중에 무심코 발을 멈췄다. 저 멀리에서 이형을 향해 아직도 고래고래 만세를 지르는 백성들을 뒤로 한 채, 조정에서 마중 나온 환영인파의 제일 앞줄에 그에게 한없이 익숙한 인물이 서 있던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어쩌면 너무나도 갑작스럽게도, 그간 조용히 궁에서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황후가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황상. 그간 옥체는 강녕하셨사옵니까."
"…험."
얼떨떨한 기분으로 배에서 내린 이형의 앞에서, 황후는 차분히 몸을 굽혀 예를 표하였다. 언제나처럼,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기뻐서 웃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이형은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전히 옅게 웃음을 띄운 채로, 황후는 천천히 다시 몸을 일으키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이형에게 물었다.
"박 대감께서 부탁드린 바를 잘 전해 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음, 으음. 그래. 잘 전해줬지. 잘 전해줬소. 음, 과연 난제였소이다. 뭐라 대답하면 좋을지 한참을 고민했지."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이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셨는지요?"
황후는 이형을 향해 조곤조곤 차분히 말하였다. 이형으로서는 되려 섬뜩한 어조였다. 여러모로 찔리는 구석이 많던 까닭이다. 그러나 사실 정답은 생각해내기 쉬웠다.
'황후가 만주인이고 황후의 최측근이라고 할 법한 궁인들도 만주인이다. 그렇다면 내가 태자를 황후에게 맡기고 떠난 이상 태자가 가장 먼저 배웠을 말은―.'
"만주말이요."
"틀렸습니다. 조선말입니다. 아무렴 조선의 태자가 조선말부터 배워야하지 않겠습니까?"
황후는 입가를 손으로 가린 채, 자그맣게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이형으로서도 처음 보던, 황후가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