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시작 >
"…그랬지. 음,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구려. 미처 생각지도 못했소."
'이거 한 방 먹었군.'
이형은 작게 한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 모습에 황후는 잠시 키득거리며 웃음소리를 내다가, 이내 천천히 손을 입가에서 슬며시 치우고서는 은은히 미소를 띤 얼굴로 허리를 굽혀 예를 보였다. 이형으로서는 헛웃음 밖에는 나오지 않는 모습이었다. 크게 예법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그간 자리를 비우고 있던 이형에 대한 보복과 소소한 즐거움까지 챙기고서는 다시 평소처럼 온후한 황후로 돌아간 것이다.
영리한 황후였다. 새삼 이형은 그렇게 느꼈다. 본인에게 그럴 의사는 없겠지만, 적으로 돌렸다면 어지간히도 피곤할 듯 싶었다. 아니, 사실 적으로 돌리지 않은 지금도 꽤 피곤했다. 반쯤은 자업자득이었지만 말이다.
"어서 오십시오, 황상.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한제국 만세! 승리 만세! 상제시여, 황제를 보우하소서!"""
황후가 나지막이 이형에게 재차 인사를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황후를 뒤로하여 그를 마중하러 나온 문무백관들이 일제히 만세삼창을 하며 하늘 높이 팔을 들어 올렸다. 그것이 신호가 되어 그간 제각각 멋대로 터져 나오고 있던 구경나온 백성들의 함성도 하나로 정리되어 재차 문무백관들과 입을 맞추어 만세삼창을 하였다.
그다음 황후가 앞서 무릎을 꿇고 천천히 절을 올리고, 그 뒤를 이어 일제히 문무백관들이 일제히 이형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서 절을 올렸다. 이에 구경 나온 백성들 틈바구니에서는 혼란이 빚어졌다. 맨 앞줄에 나와 있던 백성들은 그럭저럭 공간이 남아 그 즉시 절을 올릴 수 있었지만, 그 뒤로는 조금의 공간도 없이 빼곡히 가득차있다보니 서로 밀고 밀리면서 난장판이 된 것이다.
문무백관들이 세 차례 절을 올린 다음에도, 백성들은 세 차례는커녕 1차례도 제대로 절을 올리지 못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물론 이형은 구태여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괜히 무리하게 절을 올리려다가 사고라도 벌어진다면 그편이 더 큰 일이었다.
'다음부터는 이런 행사가 있을 때 안전하고 원만한 진행을 위해서라도 매뉴얼을 만들어두라고 경무청에 따로 말해둬야겠어.'
"그래, 다녀왔소. 그간 짐이 부재한 동안 고생하느라 모두 수고가 참 많았소. 이만 일어나도 좋소. 인제 그만 궁으로 돌아갑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황상."
히히힝-.
이 또한 이러한 행사가 처음일 수밖에 없는 대한의 한계 중 하나라 납득하고서, 이형은 환히 웃는 얼굴로 그들의 환대를 받아들였다. 이형의 대답을 듣고서야 황후를 비롯한 문무백관들은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뒤로는 이형과 황후가 타고 갈 이국적인 마차와 악사와 춤꾼들을 비롯한 축제행렬이 이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형은 다른 것보다 마차의 모습에 압도되었다.
한눈에 봐도 좋은 원목을 써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는 새까만 차체나 금으로 화려히 장식된 용 문양도 그랬지만, 무려 9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였다. 당연히 마차 자체의 크기도 평범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아, 작은 집 한 채가 바퀴를 달고서 굴러다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이형은 한눈에 그것이 대한의 황실에서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사륜 마차임을 깨달았다.
구태여 무리하게 9마리의 말을 끌어온 것은 9가 황제의 숫자이기 때문일 터였다. 보통이라면 억지로 9마리나 되는 말에게 마차를 끌게 하지도, 그에 맞추어 차체까지 저렇게까지 비대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비효율적이니 말이다. 따로 양산되거나 할 가능성은 전혀 없는, 이형이 무언가 행사가 있을 때나 사용하라고 준비된 마차임이 분명했다.
'아니 그보다. 한양에서 저만한 크기의 마차가 달릴 길이 생겼다, 이 말이지…? 허, 참. 내가 한양을 재정비하라고 한 거지만 새삼 놀랍군. '
그러나 무엇보다 이형에게 인상 깊었던 점은 바로 저만한 크기의 마차가 한강 부두에서 궁까지 그를 옮길 것이라는 사실 그 자체였다. 저런 다소 무리하게 차체를 키운 마차조차 달릴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널찍하고 단단하게 깔려있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온통 흙길투성이던 개항 이전에 조선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 흙길에서 저만한 마차를 달리게 했다가는 당장에 민가와 부딪히고 마차가 뒤집히는 등 난리가 났을 것이다.
최소한 한양 중심부는 자갈길이라도 깔렸다는 것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간 자신이 무언가 조선을 바꾸고 있다는 것은 알아도 직접 느낄 일이 드물던 이형으로서는 가슴이 찡해지는 듯했다. 지금껏 구경한 근대화의 과실이라고 해봐야 흑갈색 제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른 한국군과 함께 전쟁을 치른 것이 고작이던 이형으로서는 비로소 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있다는 실감이 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형은 깨달았다. 저런 마차를 지금의 대한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분명 다른 열강 내지 트러스트가 선물한 것이라는 걸 말이다.
"미리견에서 모건, 모간? 아무튼 그런 이름을 가진 귀인이 황상께 선물하신 마차랍니다. 이번 승전과 중원 평정과 관련하여 축하를 드리는 뜻에서 선물하셨답니다."
"…과연."
'그놈이 저번에 작전 주로 월가를 뒤집어 놓은 놈이군. 그놈이야 뭐, 내 덕에 왕창 벌었고 이거 하나 선물해줘 봐야 지 재산에 비하면 티도 안 나겠지.'
그런 이형의 궁금증을 해결해준 것은 황후였다. 조곤조곤한 어조로, 황후는 다른 문무백관이나 백성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작게 그 사실을 이형에게 일러주었다. 그리고 그 설명을 듣고서야 이형은 비로소 모든 의문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양키 금융가라는 J.P.모건. 그가 지난 작전주를 주도하고 월가를 제패한 트러스트의 제왕이었다.
이형은 새삼 배알이 꼴렸다. 그 작전주 한방에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을까. 그것만 생각하면 아니꼽기 그지없었다. 필시 어지간한 나라 하나는 사고도 남을 거금일 텐데, 마침 그만한 거금을 벌어 재차 투자할 대상인 대한제국도 앞으로 계속 국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면 성장했지 당분간은 꺾일 일이 없다. 결국 돈이 돈을 벌어 앞으로도 계속해서 승승장구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 마차를 선물하면서 직접 그 존재감을 이형에게 알린 것은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청탁의 의미이리라. 그건 곧 한국에 대한 투자도 단기적인 투기로 끝나고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투자로 두고두고 배당금을 타갈 작정이라는 뜻도 되었다. 한국에 있어서는 행운이기도 했고 불운이기도 했다. 모건 같은 든든한 뒷배를 얻었으니 앞으로 승승장구하겠지만, 또 그만큼 모건의 그림자도 짙어질 테니 말이다.
'오냐, 감사히 받아주마. 어차피 근대화나 산업화는 하나도 준비되지 않은 조선에게는 독 사과였어. 이제 와서 독 사과를 뱉기에는 이미 중독되어 버렸으니, 그 씨앗까지 남기지 않고서 씹어 삼키는 수밖에. 이 독마저 온전히 양분으로 삼을 수 있을 때가 이 나라가 진정으로 열강이 되는 순간일 테니까.'
"황상? 어쩐 일이십니까. 혹, 이 마차가 마음에 드시지 않으시는지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그럼 이만 궁으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황후의 물음에, 이형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마차에 올랐다. 황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형의 뒤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전봉준은 마차에 함께 오르지는 못하고, 문무백관들의 뒤를 쫓게 되었다. 이형이 따로 벼슬을 제수한 것도 아니고 공식적으로는 일개 병졸이었던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키가 작은 이형을 배려한 것인지, 마차는 이형의 목까지 오는 커다란 바퀴에도 불구하고 차체가 낮아 지면과 가까워 이형이 손쉽게 문턱의 계단을 밟고 오르기 쉽게 되어 있었다. 이형으로서는 사소한 인적사항까지 노출된 기분이었던지라 그리 달갑지는 않은 배려였다.
그러나 그런 소소한 불쾌함과는 별개로, 마차는 그야말로 돈으로 처발랐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황금과 보석으로 온통 치장된 것은 물론이고, 바닥은 페르시아에서 사 온 것인 듯한 카펫이 깔려있지를 않나 좌석은 붉은 비단에 부드러운 솜뭉치가 양껏 들어있었다. 천장에는 자그마한 흑수정이 알알히 박혀 이 무렵 대한이 국조로 삼고 있던 삼족오를 이룬데다가 두 눈은 각각 붉은 루비와 푸른 사파이어로 만들어져 태극을 이뤘다.
이형으로서는 마부가 이형을 대신하여 문을 열어준 순간부터 무심코 뒤돌아서서 도로 밖으로 나가고 싶어지는 호화스러움이었다. 그간 예산이 없어서 궁을 새로 짓지도 못하고 쓰던 걸 고쳐 쓰고 그나마 서역의 외교관들을 응접하는 응접실 정도만 서역의 궁전을 본떠 소소하게 장식하던 이형에게 있어서, 이는 그야말로 경험해본 적 없는 호사였다.
'이 녀석 혹시 나를 돈으로 길들일 작정인가? 그래서 일부러 이렇게 요란을 떠나?'
"미리견의 귀인께 받은 선물로 이렇게 불평해서는 안 되겠지만, 천박하군요. 황실의 위엄이 느껴지기보다는 그저 양껏 치장한 것 같습니다. 황상께서 허락해주신다면 북경에서 장인을 불러 안쪽의 장식만이라도 조금 고칠까 하는데, 허하여 주시겠습니까?"
"음? 아, 험험. …음, 부인의 뜻대로 하시오."
전에 경험해 본 적 없는 화려함과 사치에 이형이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당혹하던 반면, 황후는 마차에 오르자마자 태연하게 좌석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인제야 천명을 거머쥐고 사치와 향락을 고려나마 해볼 여유가 생긴 전주 이씨 왕가와 수백 년간 천하를 웅비하던 아이신기오로 황조의 차이였다.
이형이야 북경이나 남경을 함락시킨 뒤에도 업무에 치이거나 전장에서 말을 모느라 사치를 즐기거나 익숙해질 새도 없었지만, 황후는 날 때부터 이와 같은 사치와 향락을 당연하게 몸에 두르고서 살아왔다. 되려 조선으로 시집을 온 이후로 검소함을 배웠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곧장 그저 화려하기만 할 뿐 깊이가 없음을 간파할 수 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막상 마차를 타기 전에는 은은한 웃음을 띠고 있던 황후는 마차에 오른 직후부터 어딘가 언짢은 듯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이따금 시선을 빛내며 천장과 바닥, 벽 등을 노려보는 것이 후일 북경에서 장인을 불러 고칠 구석을 찾아내는 모양이었다. 황후로서는 어쭙잖은 화려함으로 이런 부와는 거리가 멀던 조선의 기를 죽일 의도가 명명백백하다 보니 기분이 상해 날카로울 수밖에 없던 것도 사실이었다.
'천박? 이게 천박하다고? 그러면 여기에서 얼마나 더 돈으로 처발라야 천박하지 않은 거지?'
물론 이형이야 황후가 천박하다고 해봐야 뭐가 천박하다는 것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날 때부터 부유하게 산 자와 졸부의 차이라고 해도 좋았다. 감히 더럽혀서는 안 될 것 같은 부드럽고 푹식푹신하고 고급스러운 좌석에 억지로 걸터앉은 뒤로도, 이형은 이따금 황후가 시선을 빛내는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그저 취향에 맞지 않겠거니-했을 따름이다.
결국 이형은 황후에게서 시선을 돌려 마차의 벽면에 난 창을 통하여 백성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택했다. 익숙하지도 않은 화려함과 부유함에 기가 눌릴 바에야, 힘차게 나아가기 시작한 마차를 향하여 환호하고 있는 백성들을 상대하는 것이 마음 편했다. 당연히 백성들로서는 황제가 창을 걸어놓고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보다야, 창을 열고서 환호해주면 손을 흔들어 대답해주는 황제가 훨씬 마음에 와닿았음은 물론이었다.
"와아아, 만세! 만세! 황상! 이쪽도 바라봐주세요! 황상께서 돌아오신다는 소식에 저어기 천안에서 한양까지 왔습니다!"
"예끼, 이놈아! 어서 엎드리지 못할까! 어전이니라! 감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지르다니, 무엄하도다!"
"하지만 황상께서도 저리 손을 흔들어 주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르신. 그만 고집부리시고-와아아아! 황상께서 이쪽으로 손을 흔들어주셨습니다!"
"뭣이? 아이고, 황상! 이 어리석은 서생의 사죄를 받아주십시오! 제가 눈이 어두워 그간 황상께서 큰 뜻을 품으셨음을 미처 알지 못하였습니다! 황상께서 호복을 입으시고 양이의 문물을 받아들여 오늘날 천하를 웅비하셨으니 이는 곧 조 무령왕의 고사에 비견하여도 절대 뒤지지 않는 대업이며 효종 대왕께서 품으신 뜻을 마침내 이루었으니 어찌 이것이 효가 아닐 수 있겠나이까! 대조선국 천세! 대한국 만세!"
"허허, 거 참. 이 어르신이 나보다 더하네! 괜히 엎드리지 말고 어서 일어나요! 그러다가 마차에 치이면 어쩌려고! 아니, 그리고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흐르잖아! 아이고, 어쩌자고 나이도 많으신 분이 돌바닥에 이마를 받아서는!"
"놔라! 놔라. 이놈아! 산에 틀어박혀 천하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 줄도 모르던 이 무지몽매한 서생 나부랭이가 황상께서 품으신 대업에 힘을 보태지는 못할지언정 헛되이 세 치 혀를 나불거려 황상께서 근심하게 하였으니 죽어 마땅하다! 아아, 한심하구나! 내 어찌 일찍이 개안하지 못하고 황상의 뒤를 쫓아 말을 몰며 역도들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지 않았을까! 내가 이 나라의 발목이나 잡으려 평생 경전을 읽었던 것도 아닐진대, 원통하도다!"
그러다 보니 다소 감정이 격해져서 마차의 진로 앞에서 엎드려 절을 하는가 하면 제자리에 주저앉아 마구 울음을 터뜨리는 이들까지 나오기도 했다. 일부의 사례지만 황제와 감히 눈을 마주쳤다는 이유로 혼절해버리는 이들이 나오기도 했을 지경이었다. 감히 눈을 마주치기는커녕 엎드려서 발치를 올려다보는 것조차 상상도 할 수 없던 황제가 거리에 나와 마차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는 것 자체가 백성들에게는 하나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점은 헌병이나 경찰들 또한 비슷해서, 군중들을 제어해야 할 그들이 되려 난동을 부리거나 지나친 충격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서 제자리에 우둑하니 서 있는 경우도 왕왕 나왔다. 본래부터 한양에 거주하고 있던 백성들이야 이미 김좌근의 반란을 진압하고서 소년 왕과 함께 술잔치를 벌이기도 했으니 비교적 충격이 덜했지만, 이번 환영식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백성들이 원체 많았던지라 이런 사례가 마구 속출했다.
마차 안에서 백성들을 향해 손을 흔들던 이형으로서는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어느 정도 반응이 나올 것이야 예상했지만, 여기까지 반응이 격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어쩌면 그냥 조용히 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르겠소."
"그런 말씀 마시어요. 모두 황상을 만나려 먼 길을 달려온 백성들이 아닙니까. 백성을 기쁘게 하는 것이 어찌 그릇된 일이겠습니까."
이형의 자조에, 황후는 다시 은은하게 웃으며 답했다. 굳은 결의가 느껴지는 미소였다. 거의 통째로 뜯어고치는 수준의 대공사를 계획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형으로서는 완전히 문외한이던 만큼, 그저 그런가보다-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모두 황상께서 뜻을 세우신 덕분입니다. 멋쩍어하지 마시고 당당히 받아주셔요."
그리 말하며 황후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서 양손을 모으며 이형을 향하여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이형은 그런 황후의 모습을 보면서 태자가 어떤 아이로 자라나고 있을지 대강 감이 잡히는 기분이었다. 물론 인제야 고작 3살이 된 태자였지만 말이다. 분명 태자도 황후를 본받아 온후하고 조용한 성품으로 자라나고 있으리라.
'아니, 어쩌면 날 닮아 매일 같이 칭얼거리면서 곤욕을 겪게 만들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 그 말대로요. 다시 한번 그간 수고가 많았소, 부인."
확률은 반반. 이 절반의 확률로 황후가 홀로 보낸 1년하고 조금 넘는 시간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리라. 이형은 새삼 그간 자신의 행적을 돌아보고서 쓴웃음을 지었다.
"마땅히 해야만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황상."
두 사람은 마주 보고서 웃었다. 어느새 마차는 서서히 그 속력을 줄이고 있었다. 요란스럽던 환호성 소리도 조금씩 멀어져만 가고 있었다. 궁에 도착한 것이다.
'겉은 그럴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빛 좋은 개살구지. 아직 이 나라는 독사과의 절반도 소화해내지 못했어.'
그리고 그 독사과를 소화해내는 것이 앞으로 이형의 과업이었다.
이형은 옷매무새를 고치고 마차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