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유상종 >
"어이, 괜찮나? 죽은 건 아니겠지? 숨은…붙어있군. 우라질, 거 적당히 좀 좋아할 것이지….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네, 황상. 부르셨습니까."
"당장 의원을 불러오라. 한시가 급하다. 이 색목인이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의식을 잃었느니라."
"알겠습니다, 황상. 곧장 의원을 불러오도록 하겠나이다."
카네기가 쓰러지고서, 이형은 곧장 그에게 다가가 맥을 쟀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다소 심장박동이 옅어지기는 했어도 맥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이형은 곧장 내관을 시켜 의사를 불렀다. 한의학을 배운 어의가 아니라 이 무렵 한양에 대거 들어와 있던, 선교사를 겸하는 근대적 의사들을 말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프랑스인이었고, 프랑스인이 아니라면 미국인이었다.
다만 이형은 구체적으로 그런 의사들을 불러오라고 명령하지는 않았다. 그저 의원을 불러오라고 했을 뿐이다. 하지만 잠시 후 내관이 데려온 것은 이형이 기대한 대로 서역의 의학을 배운 서양인 의사였다. 이는 이 무렵 조정이 그만큼 서역의 문물에 대하여 수용적인 자세를 보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일정 부분 선망하게 되기까지 했음을 방증했다.
이미 이형이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조정의 고관들뿐 아니라 일개 내관조차 '서역의 의사가 곧 실력 있는 의사다'라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이형은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조정이 크게 바뀌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잠시 단시간에 너무 많은 피를 흘려 쇼크가 왔을 뿐입니다. 이미 지혈은 끝났으니, 며칠간 요양하며 충분히 영양을 보충하면 금방 떨쳐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흐음, 그 말대로라면 다행이구려. 그래, 보수는 얼마나 지급하면 좋겠소?"
"보수라니 터무니없는 말씀입니다. 이분은 오늘날, 이 한국은 물론이고 제 조국 미국에서까지 명성을 떨치고 계신 앤드루 카네기 회장님이 아닙니까. 폐하께서 저를 찾아주심으로서 저는 이분께 은혜를 판 격이 되었으니, 그것이 곧 저의 보수입니다."
"호오, 재화보다도 인연이 우선이라는 건가. 참으로 현명한 자로구나."
'하기야, 내가 단기적으로 뭘 포상으로 내려주는 거보다야 당연히 카네기에게 은혜를 파는 게 낫겠지. 하는 김에 황실의 호의까지 얻어둔다면 선교 활동에 편리할 거라는 계산도 있을 테고. 하지만 나로서는 이걸로 돈을 아낀 격이니, 구태여 이를 추궁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내관이 불러온 헨리라는 이름의 미국인 선교사 겸 의사는, 이형의 앞에서 정중히 무릎을 꿇으며 위와 같이 말했다. 이형은 그것만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지만, 모른 척 하기로 했다. 돈이 들어오는 족족 나가기만 하는 대한제국의 재정 상황을 고려하면, 구태여 줄일 수 있는 지출까지 자진해서 늘릴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형은 그것만으로 오늘의 만남을 끝낼 생각도 없었다. 의사 겸 선교사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그래, 교파가 어디인가? 침례회인가, 감리회인가, 장로회인가. 미국인이니 적어도 천주교도는 아닐 것 아닌가?"
"황상께서는 참으로 신실 깊은 교인 이시로군요. 이리도 상세히 교파를 구분하는 분은 제가 조선에 온 이래로 처음 뵙습니다. 저는 위대한 스승 존 웨슬리의 가르침을 뒤쫓는 감리회의 사제입니다."
"감리회라…."
이형의 물음에 헨리는 크게 놀라 제자리에 엎드렸다. 이형이 천주교뿐 아니라 조선에 들어와 있는 개신교 종파들에 관하여서도 꿰뚫어 보고 있음을 깨닫고, 혹시나 이형이 개신교회의 선교에 무언가 편의를 봐줄까 하여 자세를 고친 것이다. 실제로도 그것이 옳았다. 이형은 이번 기회에 개신교회의 등을 떠밀어 줄 생각이었다.
물론, 공짜로는 아니었다.
"좋아, 사실 어느 쪽이건 크게 상관없는 일이지. 그래, 감리회라고 했던가? 자네들, 혹시 수의학에 해박한 이들이 있는가? 수의학에 해박한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되는대로 추천하여 주었으면 좋겠군. 마침 필요한 구석이 많아져서 말이야."
"그야 물론이지요. 요즈음에는 철도가 놓이면서 비교적 쓰임새가 줄었습니다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 조국 미국은 말, 하다못해 나귀가 없다면 감히 도시를 벗어날 엄두도 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수의사라면 얼마든지 구하고도 남지요."
"호오, 말이라. 그거 마침 잘 되었군. 안 그래도 만주에서 바로 그 말을 보살 펴줄 수의사들이 잔뜩 필요하던 참이었는데."
이형이 적당히 맞장구쳐주자, 헨리는 크게 화색이 돌았다. 이형의 말을 듣고서 이 조선의 황제가 무엇을 그들 교단에 기대하고 있으며 또한 이를 받아들일시 파리 외방 선교회가 그렇듯이 자신들 또한 선교에 있어서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아직 조선 8도에서라면 모를까 만주까지 들어가 선교를 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던 차에, 이는 크나큰 기회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이형은 구체적으로 그들을 경마사업 부흥에 쓰기 위하여 끌어들이는 것이라는 걸 언급하지는 않았다. 명색이 신실 깊은 종교인의 앞에서 구태여 경마 사업을 언급해봐야 좋을 것도 없었을뿐더러, 사실 말을 돌봐줄 수의사가 필요하다고 이형이 언급한 시점에서 대강 눈치챘을 공산도 컸다. 유럽도 그렇지만 미국 또한 경마가 유행한 지 반백 년이 넘어가는 나라였으니 말이다.
서로 말을 주고받은 시점에서 대강 눈치챘을 일을 구태여 직접 언급하면서 경마사업에 이용할 거라고 한다면 구태여 건드리지 않아도 될 자존심을 살살 긁는 격이었다. 물론 되려 자신들도 한 손 거들게 해달라고 돈에 반쯤 눈이 먼 반응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수의학으로 따지자면 파리 외방전교회가 더 낫긴 하겠지. 아직 미국은 유럽에 비하면 학문적으로 크게 뒤처져 있는 처지고, 중세시대부터 강인한 중갑기사들을 내세워 명성을 떨친 프랑스라면 당연히 말에 관해서 만큼은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지금 한국에서 사람 돌봐주기도 바쁜 파리 외방전교회에 수의사까지 요구할 수는 없다.
기존 인원으로는 당연히 혹사 문제가 붉어질 테고, 그렇다고 프랑스에서 인원을 확충 받았다가는 안 그래도 지난 강남 대기근 이후로 영국 유학파의 세가 크게 움츠러든 판에 장차 한국을 이끌어나갈 신식 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온통 친 프랑스파로 가득 찰 거야. 경제적 종속도 문제지만 사상적 종속도 가만히 넘어갈 수는 없지.'
다만 이형이 단지 경마사업의 연장선으로 감리회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경마사업의 연장선으로 수의사들을 필요로 했다면 사실 카네기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의 인맥을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편이 훨씬 더 확실했으리라. 미국인인 카네기와 이제 조금씩 미국과의 연계를 늘려 가려 하는 이형 중 누가 더 확실한 인선을 확충할 수 있을지야 뻔한 것이니까.
이형의 진정한 목적은 프랑스에 대한 의존을 줄이는 것이었다. 현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한국 방면 선교사업을 주도하는 건 베르뇌 대주교이고, 그는 분명 선량한 인물이었으나 그의 후임까지 선량한 인물이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안 그래도 이형이 명동 대성당을 미끼로 파리 외방전교회에 국어사전 편찬과 조선어 연구를 맡긴 차에, 만일 베르뇌를 이은 후임이 나쁜 마음을 품는다면 그다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당장에 외교적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지식인들이 온통 친 프랑스계라면 미래의 한국에게는 프랑스와 손을 끊는다는 선택지 그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미국이야 적어도 20세기가 오기 전까지는 북미대륙 바깥에 적극적으로 국력을 투사하려 하지 않겠지만, 프랑스는 엄연한 열강으로서 전 세계에 영향력을 투사하고 있는 마당에 프랑스를 적대한다는 선택지 그 자체가 사라지는 건 그리 바람직하지 못했다.
'그건 그렇고 감리회라. 칫, 전혀 의외로 루터 회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뭐 어쩔 수 없지. 감리회는 감리회대로 끌어들이고 이다음에 루터 회도 찾아보는 수밖에. 아니, 아니지. 독일이 상대라면 차라리 군사고문단이나 교수들이 이상적인 접근법인가. 어느 쪽이건 영국 유학파가 일찌감치 힘이 꺾인 이상 독일이 되었건 미국이 되었건 되는대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어.
그나마 프랑스와 독일이 화해해준 덕분에 지금 내가 독일과 연계를 늘린다고 한들 프랑스에 의심을 살 공산이 줄어든 건 다행이군. 해군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독일이 극동에서 영향력을 키운다고 한들 프랑스가 경계할 리도 없으니, 마침 베를린으로 가고 있을 박규수에게 이것저것 주문을 넣어보실까.'
"그럼 준비가 되는 대로 언제건 찾아와도 좋소. 알고 있겠지만, 우리 대한은 강인한 기마병들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나라요. 혹 말들에게 전염병이라도 돈다면 그보다 끔찍한 일이 또 어디 있겠소? 내 그대들에게는 기대가 아주 크오."
"물론입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결코 실망하게 해 드리지 않겠습니다. 황상께서 저와 같은 보잘것없는 사제 나부랭이에게 이토록 마음을 써주시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반드시 맡은 바 사명을 다하겠나이다!"
"끄으응……."
"아차, 실례."
이형의 말에 신이 나서 과장되게 고개를 숙이던 헨리는, 뒤늦게 카네기의 신음에 멋쩍게 웃었다. 이형의 말에 온통 정신이 쏠려 막상 환자를 방임하고 있던 것이다. 다만 이형은 따로 이를 책망하지는 않았고, 시종들을 시켜 카네기를 헨리가 일하던 한양의 병원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걸로 그날의 짧은 만남은 끝이 났다.
준비가 되는 대로-라고 하였지만, 그것이 하루나 이틀일 리는 없었다. 이미 개항 초기부터 들어와 곳곳에 학당을 세우고 종두법 접종까지 대신에 해가며 그 세를 크게 늘린 천주교라면 모를까, 이제 막 조금씩 세를 불리고 있는 감리회에 곧장 이름난 수의사를 가져다 바치도록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못해도 수주에서 수개월의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이형은 그전에 마지막 절차를 끝마치려 황후에게로 향했다. 만주인들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함이었다.
"태자가 듣는 앞에서 주고받을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험험."
그리고 이형에게서 경마사업에 대한 설명을 차분히 듣던 황후가 이형이 말을 끝마치자 가장 먼저 입에 담은 대답은 이러한 것이었다. 눈을 가늘게 치켜뜨고 빤히 이형을 바라보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다는 의사를 무엇보다 선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형 또한 차마 뭐라 대꾸하지는 못했다. 그 또한 이것이 그리 떳떳한 사업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이형을 빤히 바라보던 황후는, 이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궁녀들을 시켜 태자들을 돌보게 하고 이형과 단둘이서 마주 보았다. 어딘가 착잡한 눈초리였다.
"아편 다음은 내기입니까. 이러다 황상께서 아편굴을 열자 하시지는 않을지 걱정입니다."
"아니, 그럴 일은 없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그때 약물의 힘을 빌렸던 것은 어디까지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함이었소. 아편의 확산까지 용납할 정도로 짐은 어리석지 않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하나, 이 내기 또한 아편 다음으로 해악이 심각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황상께서 설명하신 대로 서역에서 크게 유행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겠으나, 서역의 문물이라고 좋지 않은 문물까지 받아들이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소. 이미 왜국에서는 경마를 통해 군마를 개량하려 하고 있소. 우리만 이를 외면하고서 고상한 척 해봐야 그저 뒤처질 따름이오. 뒤처지고 싶지 않다면, 우리도 함께 내달릴 수밖에는 없는 일이오."
이형의 대답에, 황후는 잠시간 말을 하지 않고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얼마 동안을 그렇게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을까. 황후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여전히 영 마음에 내키지 않는 듯한 눈초리였다.
황후는 조곤조곤 물었다.
"말씀하신 바는 알겠습니다. 이것이 장차 대한을 강하게 만드는 데에 크나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 또한 알겠습니다. 분명 만주의 제 동포들 또한 기뻐하겠지요. 황상께서 설명을 들으신 것만으로 이를 통해 큰돈을 벌 수 있으리란 건 저조차 알아챌 수 있으니, 그들이라면 보다 구체적인 발상 또한 가능하겠지요.
하나 이와 같은 내기를 나라에서 권장하여 백성들이 이를 당연하다는 듯이 즐기게 된다면 그것은 곧 나라를 좀먹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황상께서는 이를 세간에 널리 퍼뜨리지 마시옵소서."
"그야 물론이오. 나라의 허락을 받지 못하고서 함부로 경마장을 여는 이들은 필히 엄벌할 것이며, 한사람이 구매할 수 있는 마권에도 제한을 두어 가산을 탕진하는 일을 없애도록 하겠소."
'그럼 수익이 줄어들 테지만…으음, 맞는 말이긴 하지. 온 나라에 경마 중독자가 득시글거리면 그야 나라가 골병이 든 꼴이니. 하지만 의외인데. 조선인 유생이라면 모를까 만주인 황후가 이를 지적할 줄이야.'
이형은 내심 놀라움을 감추고서, 황후의 말에 수긍했다. 이형이야 당장에 돈이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 보니 다소의 부작용을 감수하고서 경마사업을 육성하려 한 것이지만, 황후의 걱정대로 경마가 너무 흥하게 된다면 그 또한 문제였다. 군마의 품종개량과 말을 기르는 목장들의 생계를 돕기 위해 시작된 사업이 단번에 나라를 좀먹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황후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황상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참으로 안심이 됩니다. 하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황상, 어찌 이와 같은 내기를 백성들이 좋아하겠습니까. 놀기 좋아하는 것은 모두가 같은 법입니다. 내기를 좋아하는 것이 어찌 백성들의 잘못이겠습니까? 이는 곧 백성들이 함께 모여 할 놀이가 마땅치 않은 까닭입니다. 제가 알기로 조선의 백성은 참으로 흥이 많은 이들이라 들었습니다.
한데 오늘날 서역의 문물이 들어오면서 다들 일하기 바빠 백성들이 놀이를 즐길 시간도 여유도 마땅치 않게 되었으니, 만일 경마와 같은 내기가 크게 유행하게 된다면 날로 백성들은 음습한 놀이만을 즐기게 될 것입니다."
"…흠, 그 또한 맞는 말이구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소.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겠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역시 바둑이나 씨름인가? 양반들은 서예 같은 거로 경연을 열면 좋아할 테고. 각 지방의 마을 축제들을 지원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경마로 번 돈을 문화산업으로 돌린다고 치면 꽤 상당한 자금을 투자할 수 있을 테니까.'
이형이 이형 나름대로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구상을 하고 있을 무렵, 황후는 잠시 아무 말 도 하지 않고서 가만히 이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황상, 황상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경마를 일으키려 함은 곧 이 나라의 국방을 위함이라고. 분명 말을 두고 내기를 하게 된다면 다들 좋은 말을 만들려 노력을 아끼지 않겠지요. 그러나 말이 제아무리 강인한들 결국 전장에 나서 싸우는 것은 사람의 업입니다. 천하 명마를 얻은들 그걸 부릴 병사가 보잘것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호오, 그렇다면?"
'국민체조를 말하는 건가? 확실히, 프로이센을 시작으로 열강이라면 어디나 한창 체육사업 육성에 여념이 없을 때긴 하지.'
황후의 설명을 듣고서, 이형이 가장 먼저 연상한 것은 국민체조와 현대 한국인에게는 익숙한 공원의 운동설비들이었다. 그러나 황후의 대답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백성들은 땀을 흘리고 피를 보기를 좋아합니다. 그리 큰 피해를 내면서도 조선 8도에 여전히 석전이 유행하는 까닭입니다. 온 나라의 백성들에게 택견을 가르치고, 또 택견에 능한 이들을 모아 도시에서 큰 대회를 열도록 하소서. 그들이 스스로 땀을 흘리고 피를 보게 하소서. 그보다 백성들에게 즐거운 구경거리는 없을 것입니다."
"…과연."
'그야 피가 튀기고 이빨이 날아가고 뼈도 부러지고 난리가 나겠지. 석전보다야 덜 위험하니 석전을 금지하고 대신 택견으로 대련하라고 부추기면 되겠군. 부부는 닮는다지만 정말로 유생들 싫어할 것만 생각해내고 있구먼, 피차.'
이형은 히죽 웃었다. 황후 또한 히죽 웃고 있었다.
유유상종이 따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