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200화 (200/530)

< 정신론 >

"그게 도대체 무슨…."

물론, 이형 혼자서만 웃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의회의 의원들은 물론이고, 막말을 시작한 김가진 본인조차 황제가 웃는 것을 보고서도 감히 따라 웃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의원들은 무슨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고 있느냐는 듯한 기색으로 흘끗흘끗 김가진을 흘겨보았고, 김가진은 김가진대로 웃고 있는 이형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로 입을 앙다물고 있었다.

그만큼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발언이었던 까닭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이래, 그리고 조선이 성리학을 국학으로 삼은 이래 모든 위정자는 겉으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겉으로나마 백성들의 평안한 삶을 목표로 하는체했다. 그를 위하여 노역을 줄였고, 세금을 줄였으며, 백성을 괴롭히는 대외원정도 줄였다.

설령 나라가 조금씩 병들어가더라도, 아무튼 노역이나 무거운 세금으로 백성들을 괴롭히지는 않는다. 그런 원칙을 이름뿐이나마 유지해온 것이 지금까지의 조선 유자들이었다. 그것을 정면으로 부정한 셈이다. 김가진 또한 조선에서 태어난 인물인 이상 아무렇지도 않은 척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마 안동 김씨 놈들도 어지간한 수위의 발언으로는 내 흥미를 끌 수 없으리라 각오하고서 일부러 독한 발언을 골라 김가진에게 시킨 거겠지.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내게 재차 이름이 각인될 테고, 성공하면 대박이니까. 그건 그렇고 정말로 안동 김씨 놈들이나 할 수 있는 발언이지 싶군그래. 하기야 저놈들만큼 조선의 모순에 대하여 잘 아는 놈들도 드물 테지.

세종대왕이 백성들에게 글을 가르치려고 하니까 백성의 천품은 교화될 수 없는 것이라며 지껄였으면서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군이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성벽을 보수하고 전쟁을 준비할 때는 백성들을 고된 노역으로 괴롭힌다며 손가락질하던 게 조선의 유자들이었었으니까. 세도정치로 위선의 끝을 보고 만들고 겪은 놈들이나 가능한 발언이군.'

그 반면 이형은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배를 부여잡고 껄껄거리며 웃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비웃는 것이 아니었다. 속이 시원해서였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더욱 많은 백성들의 피와 땀과 눈물. 그 말대로였다. 되려 작금의 현실 속에서 민생이 어떻고 떠드는 건 걍 귀에 듣기 좋으라고 포장된 위선에 불과하다.

백성들을 고된 노역으로 괴롭히고 싶지 않다면 처음부터 근대화를 시작해서는 안 된다. 낯설고, 이질적이고, 잘 알지도 못하는 서역의 문물을 배우고 익히고 익숙해지라며 강요하는 것이 근대화다. 하물며 산업화는 어떠한가. 산업화는 백성들에게 강도 높은 노동과 적은 봉급, 기나긴 노동시간으로 땀과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는다고 무엇이 나아지던가. 그저 나는 그래도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았다고 자기만족 하는 것뿐이다. 후일 국권 상실과 식민지화라는 보다 끔찍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서도, 당장 백성들이 피눈물 흘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가증스러운 위선을 떨며 고상한 척 하는 것뿐이다. 이형이 산업화와 근대화를 독사과라 묘사한 까닭이다.

결국 산업화와 근대화란 빨라야 다음 세대의 백성들을 위하여 당장 지금의 백성들을 고되게 하는 폭정이고 폭압이니까. 그들 대부분은 그 혜택을 받지 못할 텐데도 말이다. 그게 독사과가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겠는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 짐을 기다리게 할 셈이더냐? 자, 짐은 아직도 너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도다. 계속하여 보아라. 그래, 지금 이 나라에는 대단한 정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필요하다고 했었지. 그리 당당하게 말하였다면 마땅히 그리 생각한 이유도 한가지쯤은 있을 터인데."

"…그야 물론이옵니다, 황상."

"그럼 계속하여 보아라. 그새 말하는 법을 까먹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이형은 턱을 괴고서, 자세를 삐딱하게 잡았다. 도발하는 것이기도 했고, 시험하는 것이기도 했다. 과연 그 발언이 내포하고 있는 무게를 알고서도 뻔뻔히 말을 이어나갈 배짱이 있는지를 보고 싶었다. 그만한 배짱이 없다면 그저 강렬하고 충격적인 발언으로 이형의 시선을 끈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이형이 그렇게 드러내 놓고서 도발을 하자 욱했는지 김가진의 눈썹이 파르르 하고 가늘게 떨렸다. 김가진은 뭐라 소리를 지르려다가 뒤늦게 이형의 신분을 깨닫고서 꾹 화를 눌러 참고서는, 이내 차분한-그러나 어딘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목소리로 똑부러지게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듣기로, 이미 왜국은 우리 조선이 저 서역의 열강과 접촉하기 수백 년 전부터 화란과 교역하며 그들의 지식과 문물을 받아들이고 배우며 또한 익혀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서역에서 들여온 난학(蘭學)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연구하던 학자들을 흔히 찾아볼 수 있던 덕분에, 조선과는 달리 쉽게 이를 백성들에게 가르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정곡이군.'

"그뿐이 아닙니다. 중원은 또 어떠합니까? 이미 명 대부터 서역의 예수회와 긴밀히 협력하며 선교사를 시켜 시헌력을 만들어 청대에 널리 보급하였으며, 서역의 기물들을 널리 연구하여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우리 조선이 청에 서역의 앞선 문물을 배워가는 처지였습니다. 하물며 서역의 열강들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이미 우리 조선보다 훨씬 앞선 기술력을 축적하였습니다.

그 기술을 내세워 구주 바깥의 미개한 나라들을 복속시켜 그들의 것을 빼앗고 나라를 부흥케 하였으며, 작금의 천하에 와서는 이미 그들의 힘이 세계 곳곳에 스며들어 감히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세간의 사람들은 이를 두고 색목인들은 성정이 고약하고 악독하다 손가락질 하나, 어찌 이것이 그릇된 일이기만 하겠습니까? 이는 그저 수박의 겉껍질을 핥는 짧은 식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난 반 천년에 걸쳐 식자를 우대하고 기술을 지닌 자들을 우대하며 상업을 숭상하였습니다. 오늘날 유림에서 서역의 열강이 서역 바깥의 나라들을 착취하는 것만 보고서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단지 그들이 자신을 갈고닦는 동안 헛되이 시간을 허비하기만 했던 자신의 게으름을 탓하기 싫어 그들의 부지런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소 지나치게 열강들에게 호의적인 해석이지만-이것도 정곡이고. 나름대로 조사는 철저하게 하고 왔군.'

김가진이 말을 이어갈수록, 이형은 더욱 헤벌쭉 웃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촌철살인이 따로 없었다. 그 말대로, 불과 10년 전 만해도 근대화에 있어서 조선보다 뒤처진 나라가 없었다. 오늘날 한국이 그나마 서역의 열강과 비교라도 가능한 처지가 된 것은 지난 수차례의 전쟁을 내리 연달아 이겼기 때문이지, 모태가 된 조선이 잘나서가 아니다. 조선은 서역의 열강은커녕 주변국과 비교해도 크게 뒤처진 신세였다.

물론 그렇다고 안동 김씨의 인간이 할 말은 아니었다. 당장 조선이 거기까지 뒤처지게 만든 장본인들이 이제 와서 전면적인 근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으니 우습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물론 지금의 안동 김씨는 김좌근을 비롯한 세도정치기의 거물들이 줄줄이 목이 달아난 다음이지만 말이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촌철살인이라지만, 그것이야말로 제 조상들에게 침을 뱉는 격이었다.

다만 김가진은 되려 한번 말을 하기 시작하자 속이 시원해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 조상들의 낯에 침을 뱉는 격이라는 걸 알면서도-아니 오히려 알고 있기에 더욱 신이 나는 듯한 모양새였다. 본디 서자라는 태생 때문에 그런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서역의 열강은 물론 우리 주변의 열국과 비교하여도 크게 뒤처진 우리 한국으로서는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이를 메우는 수밖에 없다. …그리 말하고 싶은 건가?"

"바로 그러하옵니다, 황상. 장차 우리 대한이 그들을 흉내 내려 함은 지난 세월 세상이 바뀌는지도 모르고서 시간을 허비하던 게으름을 짊어지고서 서역의 열강이 지난 반천년에 걸쳐 부지런히 축적해온 모든 과실을 탐하는 격입니다. 이것이 곧 날강도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아직도 옛 시절의 게으름을 버리지 못하고서 그저 그들이 부지런히 쌓아온 과실이 입안으로 떨어지기만을 기다린다면 그보다 미련한 이는 없을 것입니다.

장차 대한에 필요한 것은 서역의 열강을 뛰어넘는 부지런함입니다. 그 어떠한 기술도 재화도 정책도 우선 구시대의 게으름을 벗어던지고서 신시대의 부지런함을 익히지 않는다면 무용합니다. 우리 대한에게 중원의 재화가 있다고 하나, 서역에는 천축이 있으며 남만이 있으며 미주가 있습니다. 중원의 재화가 아무리 많은들 그들 모두를 능가할 수 있습니까? 정책은 어떠합니까. 이 나라에 아직 박사 한 사람 없는데 무슨 정책이 나오겠습니까. 하물며 기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서역의 열강이 하루 4시진을 자고서 일한다면 우리 대한은 하루 3시진, 아니 2시진을 자고서라도 일하며 따라잡는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대한이 장차 세계에 나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그저 뼈를 깎는 부지런함 이외에 달리 없는 까닭입니다. 단지 나라의 위정자들이 부지런한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지위의 고저를 막론하고서 온 나라가 한 덩어리가 되어 이와 같은 부지런함을 익혀야만 할 것입니다."

"말이야 맞는 말이군. 그러나, 굳이 우리가 부지런할 이유가 있던가. 힘들고 고된 일은 기계를 써도 그만이고 아니면 중국에서 사람을 데려와 시켜도 되지 않은가?"

"기계는 값비싸며, 이처럼 값비싼 기계를 지금의 궁핍한 대한의 재정으로는 그리 넉넉한 숫자를 갖출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중원의 백성에게 이와 같은 일을 모두 떠맡긴다면 장차 이 나라의 부는 안에 쌓이지 않고서 끝없이 바깥으로 흘러나가기만 하게 될 것입니다. 가진 것 없이 부지런해지기만 하다고 한들 모두가 부유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나, 가진 것 없이 게으르기까지 하다면 죽는 날까지 가난하기만 할 뿐입니다.

가난한 이가 게으르다면 그것은 그자의 선택의 자유지만, 온 나라가 가난한데도 여전히 백성들이 게으르다면 그것은 곧 위정자들의 잘못입니다. 장차 이 나라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더욱 많은 백성들의 피와 땀과 눈물인 까닭입니다."

'흠, 정신론이군.'

이형의 머릿속으로 노오력이라는 신조어가 스쳐 지나갔다. 이와 같은 정신론에 반발하여 유행하기 시작한 신조어였다. 이형 또한 정신론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는 수차례 강조했다시피 놀기 좋아하는 천성을 지닌 인물이었고, 당연히 무턱대고 노력부터 하라는 정신론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가 지향하는 삶의 자세는 성실히 일하여 꼬박꼬박 저금해가는 일개미의 삶보다는 하루 벌어 하루에 탕진해버리는 소비 지향적인 베짱이의 삶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21세기의 일이고, 이형이 사는 지금은 19세기였다. 이미 경제 규모가 확장할 대로 확장하여 경제 성장이 둔화한 21세기와는 달리, 19세기는 이제 막 산업혁명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경제성장률이 폭발적으로 수직상승선을 그리던 시대였다. 본인의 노력과 운이 겹친다면 기차역에서 심부름하며 하루 벌어 하루를 살던 소년이 철강왕이 되기도 하는 시대였다.

무엇보다 21세기의 대한민국과 19세기의 대한제국은 다르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이미 지난 세기 부지런히 일한 끝에 OECD에 진입하며 부국의 반열에 진입한지도 10년이 훌쩍 넘은 나라다. 당연히 나라를 위하여 성실히 일해야 할 동기가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19세기의 대한제국은 이제 갓 산업화의 첫걸음을 내딛는 개발도상국이었다. 기계를 쓰기는커녕 스스로 기계를 만들 기술도 설비도 없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인가.'

이형은 내심 혀를 차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대한제국에 절실한 건 바로 정신론이라고 말이다. 정신론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겠으나, 최소한 정신론이 없으면 무엇 하나 시작할 수가 없다.

이형은 우선 안동 김씨에 대한 평가를 고쳤다. 적어도 한 번쯤 기회를 다시 주어볼까 고려할 수준은 된다고 말이다. 당장에 믿고서 쓸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다시 정계에 돌아오고자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아직 대부분의 관료가 조선 시절의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와중에 안동 김씨만큼은 이만하면 그럭저럭 근대적 관념에 적응했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정신론만 지껄여대고서 너희들 혼자서 꿀만 빠는 꼴은 절대로 못 봐주지.'

이형은 입꼬리를 뒤틀었다. 마침, 좌중의 시선은 그에게 쏠려 있었다. 김가진은 이미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모두 끝마쳤으니, 이제 이형이 김가진에게 호평이건 악평이건 돌려줘야 할 때였다. 이형은 슬쩍 의회에 출석한 의원들을 둘러보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작은 호평이었다.

"그래, 제법 날카로운 말이었다. 열심히 공부한 듯하구나. 마음에 들었다."

"과분하신 칭찬이옵니다, 황상."

이형의 말에 김가진은 단번에 얼굴이 환해졌다. 그를 비롯한 안동 김씨가 공들여온 성과를 인정받았다 여긴 것이다. 그리 생각한 것은 다른 의원들도 다르지 않아, 이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곳곳에서는 나지막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역도의 자식이자 종놈의 자식이 황제의 총애를 얻는 것보다 그들에게 있어서 끔찍한 일도 달리 없었다.

그러나 이형의 말은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형은 상쾌하게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러니 내 너희 문중의 노력을 높이 사 한 가지 일을 맡기고자 한다. 어떠냐, 들어보겠느냐?"

"물론입니다, 황상. 말씀하여만 주소서."

"이 나라의 관료들은 기실 이 나라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른다. 그걸 아는 놈들은 너희 문중과 함께 풍비박산이 난 까닭이다. 어디에 어떤 서류가 있는지도 잘 모르는 녀석들이 허다한 판국에 그걸 전부 꿰고 있는 놈들이 있을 턱이 없는 거지. 그러나 장차 이 나라의 산업화를 위해서는 그 모든 걸 꿰고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

이형의 말이 한마디 한마디 내뱉어 질 때마다, 김가진의 얼굴은 점점 딱딱히 굳어갔다. 이형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짐작한 것이다. 분명 중요한 일이었으나, 그걸 지금의 안동 김씨에게 요구하는 것도 너무한 처사다. 이형의 말대로 안동 김씨 중에서도 그걸 꿰고 있을 만한 인재는 이미 조정의 고관대작으로서 콧대를 세우다가 이형과 흥선군의 손에 박살이 난 다음이다.

지금의 안동 김씨는 아무리 좋게 말해도 그냥 잔당 수준이다. 과거의 영광은 온데간데없이 인제야 겨우 정계에 복귀하려는 차였다. 그걸 꿰고 있는 인간도, 그걸 꿰고 있는 인재와 문중을 연결하던 인맥 같은 것도 없다. 물론 노력과 재화를 투자한다면 언젠가 복구 가능하기는 했다. 적어도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만큼 지금의 안동 김씨는 과거의 영광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이형은 10년을 기다려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와서 내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게다. 너희 문중도 내게 무언가 대단한 대접을 받으리라 기대하고서 한양에 돌아온 것도 아닐 테니까. 그리고 짐은 기대를 배신하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한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네, 그러하옵니다. 황상."

"내년이면 포항 제철소에서 쇳물이 나온다. 강철이 나오기 시작하면 이제 그간 밀려있던 모든 사업이 가능해지고, 본격적인 산업화도 가능해진다. 그걸 성공하게 하려면 네가 오늘 말한 대로 백성들의 피땀눈물이 필요하겠지. 그러나 짐은 이 나라 백성들의 피땀눈물을 헛되이 허비할 생각일랑은 추호도 없다.

생각해보니, 후안무치한 서역의 자본가들과 논의하고자 한다면 너희 문중이 제격이렷다. 1년의 세월을 주마. 성균관에 초빙한 색목인 교수들이나 이 나라에 들어온 미리견의 사업가들과 자유롭게 논의할 권한을 주겠다. 원한다면 서역에서 서책을 들여와도 좋다. 지난 반 천년 간 색목인들이 축적해온 요령을 하나도 남김없이 훔쳐 와서 이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향후 5년간의 경제개발계획안을 기획하여 제출하라.

설마 짐을 실망하게 하지는 않으리라 믿으마. 어디 너희 문중의 힘과 지혜를 마음껏 짜내보거라. "

눈에 차지 않는 성과를 보여줄 경우 실각. 아니, 이번에야말로 멸문이다.

이형은 구태여 뒷말까지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뒷말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김가진이 우둔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면서도, 천천히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결코 실망하게 해 드리지 않겠나이다."

이형은 대답 없이 서슬퍼런 눈동자를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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