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202화 (202/530)

< 천성 >

기실, 격무라는 말로도 부족한 혹사였다. 안 그래도 본국 독일에서조차 군인이 읽기엔 너무 철학적이고, 군사 분야와 관련 없는 일반인이 읽기엔 너무 전문적이라는 평가를 받던 전쟁론이다. 보불전쟁의 영웅 몰트케가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그의 애독서였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뒤에야 간신히 유럽 각국에서 번역해 읽어볼 엄두를 냈을 정도로, 독일인조차 읽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던 것이 전쟁론이었다.

그러나 그런 고생을 하며 읽을 가치는 분명히 있었다. 전쟁론을 애독한 몰트케에 의하여 유럽 제일의 강군 프로이센군이 완성되었고, 보불전쟁 후 다시 프로이센군이 유럽 각국의 참고대상이 되며 이를 기반으로 각국의 근대적 군대가 완성되었음을 고려하면 전쟁론은 근대적 군대의 뿌리라고 불러도 과장되지 않았다.

정작 지금의 유럽에서는 보불전쟁이 일종의 세계대전으로 확전되고 프로이센이 패배하면서 그리 유행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이형이 본의 아니게 유럽 전쟁학의 발달에 악영향을 끼친 격이었다. 그들은 이제부터 지난 전쟁에서 참호에 틀어박혔던 경험과 앞으로의 전쟁에서 죽어 나갈 병사들의 핏값으로 좌충우돌하며 전쟁학을 발달시키게 될 터였다.

'하지만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물론 그렇다고 이형이 그 사실에 부채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전혀. 그럴 리가 없었다. 이형의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자면 그냥 되는대로 참호에 틀어박혀서 될 수 있는 한 많이 죽어달라고 빌고 있었다. 유럽의 전쟁학 발달이 늦어지고 좌충우돌하게 될수록 열강이 한국에 개입할 여력도 줄어들 테니까 말이다. 자국민도 아니고 자국이 죽이고 있는 것도 아닌 먼 나라의 병사들이 죽어 나가는 것까지 걱정해줄 정도로 이형은 선인이 못 되었다.

유럽의 전쟁학 발달이 늦춰진다면 늦춰지는 대로 미리 정답을 알고 있는 이형은 굳이 그들에게 의지할 필요 없이 정답만 콕 찍어 고르면 그만이었다. 전쟁론의 보급은 그 첫걸음이 되리라. 전쟁학의 발달과 한국군이 동아시아 기준 상대적 강군에서 벗어나 객관적 강군으로 거듭나기 위한 첫걸음 말이다.

무엇보다 전쟁론은 딱히 전쟁과 별 관련 없는 고관들이라도 읽어두면 나쁠 것 없는 교양서적들이었다. 육도삼략이나 손자병법을 군대와 무관한 투자자들이 읽기도 하듯이 말이다. 철학 서적으로서 유럽의 철학을 소개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할 테니, 이형으로서는 보급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황상께서 이 비루한 서생에게 이와 같은 신임을 주셨으니 어찌 보답하면 좋을지 모르겠나이다. 소신, 이 명이 다한다 한들 맡겨주신 바 소임을 다하겠나이다."

그런 이형의 심기를 읽은 듯, 김가진은 굳은 표정으로 그대로 자리에서 엎드려 이형에게 예를 표했다. 독기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간 이형이 흔히 봐왔던 충심이나 탐욕, 책임감과는 또 달랐다. 세상이 자신을 다시 보게 만들어 주겠다는 굳은 결의가 느껴지는, 그런 강렬한 독기였다.

이형이 김가진에게 기대했던 것이기도 하였다. 정말로 여차하면 사람 하나 정도는 그 자리에서 죽일 수 있을 독기였다. 타고난 이상으로, 그간의 삶에서 축적해 왔으리라. 정신론을 가장 먼저 강조한 건 자신부터가 바로 그러한 인물상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말로만 남들보다 먼저 일어나고 절약하고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인물과 그걸 실제로 실현할 수 있는 인물은 다른 법이었다.

그제야 이형은 김가진이 지닌 분노와 열의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가 가진 분노는 세상을 향한 것이었고, 그가 지닌 열의란 자신을 세상이 다시 보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독기였다. 서자인 것도 모자라 역적의 자식이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에서 발버둥 치고 있던 것이다.

'이거…굴리는 보람이 있겠는데.'

이형은 입꼬리를 뒤틀었다. 안 그래도 불같은 성정의 인물이 그간의 삶에서 독기를 품었다. 이런 인물상은 옆에서 부추기면 부추길수록 더욱 활활 타오르기 마련이다. 몸을 축내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떠맡은 일은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21세기의 한국에서는 드문 인물상이었다.

이런 인물일수록 출세 지향 주의에 빠져들어 부정한 일에 손을 대거나 삐뚤어지는 일도 많은 법이라지만-그건 이형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일제에 귀족작위를 받고서도 그걸 고사하고서 임시정부와 명운을 함께한 인물이다. 삐뚤어지게 만들거나 꺾을 수 있을 턱이 없다. 그 반골 기질은 타고났다고밖에는 할 수 없다.

불같은 성정의 인물이 독기를 품고, 그르면 그르다고 할 수 있는 반골 기질마저 갖추었다. 이형으로서는 더욱 탐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군침이 절로 넘어갔다.

'하지만 아직 일러.'

"음, 기대하고 있으마. 어디 힘이 닿는 대로 해보아라."

이형은 그렇게만 말해두고서, 김가진을 돌려보냈다. 그와 함께 나란히 걸었던 위병 중 한 명을 붙여서 말이다. 호위의 목적보다도, 감시의 목적이 더 컸다. 김가진은 분명 탐이 나는 인물이었으나, 동시에 안동 김씨에 속한 인물이었던 까닭이었다.

김가진을 조선애국당의 당사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온 위병은 후일 이형에게 보고했다.

"당원들 대부분 아직 전장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언행 하나하나가 절도 있었습니다. 당사는 목 밑까지 오는 높다란 담장에 둘러싸여 있으며 본당은 붉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사온데, 건물이 널찍 널찍하고 3층에 걸쳐 높이 세운 것이 한눈에 봐도 많은 수고를 들인 듯 보였습니다. 또한 양장을 입은 사업가들이나 색목인들이 자주 드나들고 있는 것이, 필시 그들과 어떤 식으로건 협력하고 있는 듯 보였사옵니다."

"흐, 녀석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아니, 아니군. 그래, 한때 이 나라가 본디 그놈들의 것이었는데 이 정도 여력도 없을 턱이 없구먼. 어디 뒷산에 묻어둔 비밀 보따리라도 깐 모양이지. 대단한 놈들이야. 내가 프로이센에 눈독을 들이는지는 또 어떻게 알았는지. 무섭군. 이건 그냥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이형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간 꼼짝없이 망한 줄로만 알고서 까마득히 잊고 있었더니, 또 어디서 이렇게 다시 세를 모아 기어 나오는 것이 놀랍기 짝이 없었다. 아니, 사실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마음 한쪽 어딘가에 그 녀석들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하는 믿음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만큼 안동 김씨의 세력은 곳곳까지 뿌리내리고 있었고, 뿌리 깊었다.

그러나 달리 말하자면 그런 안동 김씨조차 이와 같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만 했을 정도로 이형과 흥선군의 숙청이 철저했다는 이야기 또한 되었다. 그야 세도가에 대한 악감정으로 가득했던 흥선군이 손수 소매를 걷어붙이고서 삭초제근을 하려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안동 김씨로서는 흥선군이 한국을 떠난 다음에야 간신히 숨통이 트였을 공산이 컸다.

이형으로서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였다. 안동 김씨에게는 결국 흥선군보다는 이형이 만만했다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흥선군이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흔적도 없던 이들이 이제 와서 다시 스멀스멀 양지로 기어 나오고 있는 꼴을 보면 그렇게밖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었다.

"그래, 봉준아. 너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마땅히 삭초제근을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필시 지난 일 것으로 황상께 큰 원한을 품고 있을 것이 틀림 없을진대, 그와 같은 이들이 다시금 세를 키운다면 필시 장차 종묘사직에 크나큰 환란이 될 것이옵니다. 소생의 짧은 식견으로 감히 말씀 드리건대, 지난번 일은 황상께서 지나치게 손속의 자비를 베푸신 듯합니다."

위병-전봉준은 그 자리에서 엎드리며 이형에게 고했다. 애초에 안동 김씨가 다시 세를 키운 것 자체가 이형이 물렀던 증거라는 이야기였다. 이형 또한 구태여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아직 개화를 시작하기 전이니, 3족이건 9족이건 멸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이형은 개화를 핑계로 반란에 연루된 당사자들만을 벌하고 마무리 지었다.

어떻게 보면 자비를 베풀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당한 입장에서까지 그와 같이 생각할지는 의문이다. 지금은 당장 세가 미미하고 이형의 세가 강고하니 눈치를 보고 있지만 언제라도 뒤통수를 칠지도 모른다. 전봉준은 그리 말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이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저지르지도 않은 죄악을 벌써 벌한다, 라. 그것은 법치에 어긋나는 이야기지."

"하오나 황상, 한비자가 이르기를 법이란 군주의 치세를 돕기 위한 도구라고 하였습니다. 한낮 법치를 종묘사직보다 위에 둘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아니, 반대다. 법치가 종묘사직의 위에 있어야 한다. 이 몸이 할 말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종묘사직이 무너진들 법치가 살아있다면 그 나라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러나 법치가 무너져 백성의 신뢰를 잃는다면-그 나라는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어."

이형의 말에 전봉준은 당혹한 눈치였다.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전근대적 왕정국가와 근대적 민족국가를 가르는 근간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형 또한 구태여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고,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하지 않겠다는 것만 분명히 했다.

대신 이형은 입꼬리를 뒤틀며 말했다.

"그리고 저건 우리 개새끼다."

"…네?"

전봉준의 표정이 한층 알 수 없게 되었다. 대뜸 튀어나온 육두문자에 전봉준으로서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형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모르겠느냐? 이 나라에는 이미 개새끼가 둘이나 들어와 있다. 하나는 미리견의 모건이라는 놈이지. 이놈이 제일 악질적이다. 몸뚱어리가 미리견에 있으니 제 혓바닥으로 아무리 내 배를 살살 간질러도 뭐 어떻게 대응할 도리가 없다. 그러니 필요한 것이 한양에 들어와 있는 카네기라는 개새끼지. 이놈에게는 짐이 밥그릇을 내주었다. 밥그릇에 한가득 사료를 쌓아뒀으니 그놈은 사료가 남아 있는 한 이 나라를 위해 싸워줄 게다.

그러나 결국 두 놈 다 남의 집 개새끼다. 애초에 상인이라는 놈들에게 애국심을 기대할 수도 없겠지만, 한국은 그 두 놈을 가둬둘 수가 없다. 가둬두려고 하면 당장에라도 가소롭다는 듯 우리를 깨부수거나 잽싸게 도망치겠지. 이게 저 안동 김씨 놈들과 그 두 놈의 차이점이지."

"아니, 황상.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안동 김씨 또한 애국심이 없기로는 매한가지가 아닙니까!"

"다르다. 저놈들은 죽어도 이 나라를 뜨지 못한다. 상놈들의 무기는 돈이지만, 저놈들의 무기는 인맥이다. 이 나라를 기점으로 퍼져나갈 수는 있어도, 이 나라를 아예 떠날 수는 없지. 이 나라를 뜨는 순간 저놈들은 그저 조금 배우고 실력 있을 뿐인 외국인이니까. 그게 아쉬워서라도 저놈들은 절대로 이 나라를 뜨지 못한다. 그리고 언제건 떠날 수 있는 놈과 죽어도 떠날 수 없는 놈은 다르지.

언제건 떠날 수 있는 놈들은 함부로 때려줄 수도 없다. 짐이 몽둥이를 들고 가봐야 그사이에 도망치면 끝이니까. 그렇지만 죽어도 이 나라를 뜰 수 없는 놈들은 날 잡고 언제건 두들겨 패줄 수 있다. 뛰어봤자 벼룩이고 부처님 손바닥 안 손오공이지. 그러니까 저건 우리 집 개새끼다. 카네기 놈도 슬슬 그동안 쌓아놓은 게 아까워서라도 도망 못 칠 테니, 조만간 개집이라도 하나 더 준비해둬야겠군."

이형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어차피 조만간 날 잡고서 똥개 하나쯤은 키울 작정이기는 했다. 급속한 산업화를 위해서는 일감을 특정 기업에 몰아줘서 작정하고 재벌가를 육성하는 것이 싸고 확실하게 먹히니까. 일단 국제시장에 나가 경쟁하려면 덩치부터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다. 일본이 그러했고, 한국이, 중국이, 비단 모든 개발도상국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동 김씨가 이번에 보여준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흥선군이 악감정을 품고서 그토록 자근자근 짓밟아 뒀는데, 사실상 0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여 불과 몇 년 만에 여기까지 세력을 회복했다. 근성이나 실력보다도, 한번 파괴되었다고 하나 안동 김씨의 인맥이 여전히 조선 8도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걸 고스란히 거래처로 바꾼다면, 재벌가 하나는 당장에라도 뚝딱이다.

'이놈들도 결국 독 사과군. 과실을 보기도 전에 너무 독을 많이 섭취해서 중독되지나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무튼, 짐은 저놈들에게 한번 이번 일을 맡겨보려고 한다. 만일 놈들이 이번에도 능숙하게 해낸다면, 한 번쯤 더 기회를 줘도 괜찮겠지. 극악무도함에 있어서건 근성에 있어서건 실력에 있어서건, 지금 조선 8도에 저놈들을 능가할 놈들은 없을 테니 말이다."

"황상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전봉준은 영 못마땅해하면서도, 이형의 말에 수긍했다. 이형의 뜻을 이미 꺾을 수 없음을 알아챈 것이다. 그간의 행적으로 이형이 한번 뜻을 굳히면 결코 꺾을 수 없음을 알게 된 전봉준이었다. 그저 자신만이라도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을 수밖에 없다며, 그렇게 수긍하고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

'황상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역도 놈들을 다시 쓴다면 분명 금세 인재들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인 것도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분명히 이 나라를 위한 길일지는 몰라도 민생을 위하는 길은 아닐 터인데….'

전봉준은 일말의 위화감을 품었다. 이내 금방 털어내려 했지만, 머릿속 한 쪽에 자리 잡고서 잘 사라지려 하지 않았다. 어딘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생각하는 위정자가 지향해야 하는 길과 지금 이형이 걷고 있는 길이 어긋나고 있다는 위화감이었다.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는 못했다. 지금껏 전봉준이 알아 왔던 것보다, 배워왔던 것보다 많은 것을 보여주던 이형이었다. 이번에도 이형이 더욱 먼 곳을 바라보고 있기에, 차마 전봉준의 시야가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리 생각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머릿속 한 쪽에 새겨진 의문은 사라지지 않고서 언제까지고 전봉준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집고 다녔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했다.

'민생은 차선이지. 우선 산업화를 밀어붙인 다음에나 삶의 질을 논할 수 있을 테고. 기술력이 축적되지 않은 초기 산업화 단계에서는 결국 값싼 노동력, 기나긴 노동시간, 처참한 노동환경이 개발도상국에서 해외투자자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패 전부다. 적어도 이 나라가 자체적으로 노급 전함을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의 공업력을 획득하기 전까지 민생은 논외야.

문화산업으로 하루의 피로를 합법적으로 해소할 구석을 제공하는 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다. 스포츠 산업이라도 없으면 단번에 매춘이니 마약이니 이런 음습한 거로 빠져들 테니.'

당장에 이형이 구상하고 있던 미래계획부터가 전봉준이 이형에게 기대하던 이상적인 성군은 거리가 멀었으니까. 애초에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태평성대를 구축할 수 있었던 전근대적 향촌 경제의 이상적인 지도자상을 이제 막 산업화를 시작한 개발도상국의 군주에게 기대하는 것부터가 근본적으로 어긋나 있었다.

백성들을 상냥하게 끌어안아도 알아서 경제가 성장할 만큼 근대는 상냥한 시대가 아니다. 되려 폭발하기 직전까지 몰아붙일수록 그 나라는 부강해졌다. 미국이 그러했듯이, 영국이 그러했듯이, 일본이 그러했듯이. 그것이 근대라고 불리는 시대가 강요하는 세계에 뒤처지지 않고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형에게 민생은 차선이었다. 전봉준에게 민생은 최선이었다. 그건 지식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테고,이념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을테지만, 그 이상으로 천성의 차이였다. 아무리 낮은 곳에 서도 어쩔 수 없이 머리 위를 바라보는 자와, 아무리 높은 곳에 서도 어쩔 수 없이 발밑을 바라보는 자의 차이였다.

두 사람이 자각하지도 못한 사이, 두 사람의 길은 어긋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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