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204화 (204/530)

< 부부 >

"어이쿠, 이것 참. 마마께서 어련히 말씀해주실 경사를 제가 새치기한 셈이 되었군요. 험험."

"허허허…."

이형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너무 앞서갔다는 걸 눈치챘는지, 베르뇌 대주교는 험험 하고 연신 헛기침을 하고서는 멋쩍게 웃었다. 이형으로서는 그 모습이 여간 얄밉지 않은 것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추궁하거나 화를 내기도 뭣했다. 아무튼 그에게 악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형은 뭐라 말도 못 하고 헛웃음만 짓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후우. 그래, 오늘 일정은 모두 취소해야겠구려. 당장에 더 급한 일이 생겼으니. 미안하게 되었소. 설마, 이런 식으로 오랜만에 재회를 급히 마무리 짓게 될 줄은 몰랐구려."

"아니오, 그저 송구할 따름이지요. 이 늙은이가 눈치가 없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폐하. 여유가 생긴다면 언제건 찾아와 미사에 참여하셔도 좋습니다. 폐하께서는 이 나라 모든 교인의 은인이시니까요."

"그건 고마운 말이구려. 아 참, 그 전에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게 있는데 괜찮겠소?"

"물론입니다. 무엇입니까?"

다시 서둘러 마차에 오르려던 이형이 문뜩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베르뇌 대주교를 돌아보자, 베르뇌 대주교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환히 웃는 낯으로 응해주었다. 여전히 오로지 순수한 신앙 하나로 이 먼 이국의 나라까지 온 보기 드문 참된 종교인이었다. 이제 명동 대성당 공사가 본궤도에 오르면서 신도의 숫자도 교단 내의 지위도 승승장구하면서도 말이다.

대주교, 어쩌면 머지않아 추기경이 될지도 모르는 처지에도 이토록 새하얀 눈송이 같은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이형으로서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적 순수성이야말로 지금 이형이 부탁하고자 하는 사업에 필요한 일이었다.

이형은 베르뇌 대주교에게 다가가 그의 양손을 꼭 마주 잡으며 말하였다.

"알고 있겠지만, 장차 이 나라가 산업화가 진행되면 진행될 수록 이 나라의 백성들은 고통을 받게 될 거요. 그대의 조국에서도 흔히 봐왔던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고아들, 공장 노동자들, 팔다리 중 하나씩은 부족한 참전용사들, 그런 고통 받는 자들이 늘어날 거란 말이오. 마땅히 이 나라에서 부담해야 하는 이들이겠으나, 향후 20년 안에 그런 여유가 생기기는 어려울 것이오.

그들을 잘 부탁하오. 가능하다면, 다른 교단들이나 불자들과도 잘 협력하여서 말이오. 설령 가는 길이 다르더라도, 믿고 있는 신이 다르더라도 협력하여 가장 낮은 곳에 임하는 것야말로 참된 복자가 걸어야 할 길이라 짐은 믿고 있소. 아직 이 나라가 갈 길이 머니, 그대들이 잘 보듬고 이끌어 주시오."

'기나긴 세도정치로 기존의 구휼제도는 진즉에 맛탱이가 갔고, 지주들을 숙청하고 서원을 철폐했으니 지방에서 알아서 유지하던 민심 유지용 안전장치들도 날아갔겠지. 그런데 그렇다고 벌써 국민보험 같은 걸 만들기에는 나라에 돈이 없어. …그럼 종교뿐이다. 어차피 비참한 현실 때문에라도 종교의 세가 대거 불어날 테니, 하다못해 사이비 교단이 설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해.'

이형은 사뭇 진지한 태도로 베르뇌 대주교에게 부탁하였다. 현재 가장 절실한 부분이기도 하였다. 아직 시민단체들이 대거 등장하여 봉사활동에 힘쓰기에는 너무 이르고, 당장 대한제국은 이런 복지정책을 비롯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유지할 여력이 없다. 지금부터 장대높이뛰기를 해야 하는 와중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러니 남는 것은 종교단체였고, 그들의 자원봉사활동과 각종 사회복지시설이었다. 이런 와중 그나마 이형에게 천운이었던 것은 현 한국에서 개화기에 세를 불릴 수 밖에 없는 기독교 교단 중 가장 큰 교세를 지니고 있는 천주교의 대주교가 베르뇌였다는 점이었다. 가장 큰 교세를 지닌 천주교에서 먼저 움직이기 시작하면 나머지 교단은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덩달아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또한 궁여지책이고, 언젠가는 제대로 된 사회 안전장치들을 준비해야겠지만, 당장은 필요 불가피한 일이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 안심해주십시오. 제가 이 머나먼 한국까지 오게 된 것은 필시 하늘에 계신 주께서 그리 명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저는 안심하고 제 소명을 다할 수 있겠습니다."

"고맙소. 이것만은 진심이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으리다."

이형의 요청에 베르뇌 대주교는 사뭇 진지한 어조로 답하였다. 신앙적 사명감에 복받친 모습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런 사명감을 제하고서라도 그에게 있어서 손해가 될 것은 없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빈민구제사업은 그들 교단이 오랜 세월 교세를 퍼뜨려온 비법 중 하나였으니, 그저 하던 일을 계속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이형이 황제로서의 후광으로 일을 조금 더 편리하게 만들어준 정도였다. 이래저래 관청과 분란의 소지가 있을 만한 일들을 '황제가 나에게 부탁한 일이다' 한마디로 술술 통과시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이형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래도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사제가 이렇다 할 사심 없이 그가 부탁한 대로 이 나라의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하여 봉사할 타고난 선인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가능한 신뢰이기도 했다. 이형은 새삼 뭉클하여 한차례 마주 잡은 손을 격하게 흔들고서는, 그대로 뒤돌아서서 마차 위에 올랐다.

"실로 놀랍습니다. 색목인이 저토록 능숙하게 조선말을 하다니…. 저래서야 이 조선 땅에서 나고 자란 이라고 하여도 믿겠습니다."

"잘 봐두거라. 이 나라와 아무런 연관도 없으면서도 이 나라와 이 나라의 백성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참된 복자이니라. 아무 사심도 없이 말이다. 본받으라고는 하지 않겠으나, 기억해두어서 나쁠 건 없겠지."

"새겨두겠나이다, 황상. 이런 곳에 믿고 계신 구석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궁으로 급히 돌아가는 길. 전봉준은 베르뇌 대주교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은 모양이었다. 마차가 출발한 뒤에도 한참을 명동 대성당이 있는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 꼭 사랑에 빠진 소녀 같기도 하였다. 요즈음 민생을 희생하려는 듯한 이형의 모습에 불안감을 품고 있던 그로서는 아무 사심 없이 민생을 위하겠다는 베르뇌 대주교의 자세가 여간 인상 깊은 것이 아니었다.

이형 또한 전봉준의 그런 심기를 눈치챘다. 어쩌면 그가 천주 교단에 뛰어들지도 모른다는 것도 말이다. 이미 원 역사에서도 동학에 몸담아 활동하였던 전봉준이었다. 어쩌면 그가 민생을 위하여 종교에 푹 빠져드는 것 또한 타고난 천성의 산물일지도 몰랐다.

'뭐, 봉기만 안 일으키면 되지. 애초에 그럴만한 일도 없을테고. 군사 지도자로서의 전봉준에게 주목해서 굴리려 한 거였지만, 종교 지도자로 빠진다고 해도 그건 그것대로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테니까. …본인의 선택에 맡겨두기로 할까.'

"도착하였나이다, 황상. 개문하려 하오니 잠시 옥체를 피하여 주소서."

"음, 부탁하지."

이형이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이미 마차는 궁에 다다른 다음이었다. 궁의 위병이 조심스레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그는 곧장 달리듯이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마음이 급했다. 그리 내색하지 않았지만, 황후가 회임하였다는 소식은 이번으로 벌써 두 번째인데도 도통 익숙해지지를 않았다.

이형은 그야말로 달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걸음걸이로 황후가 머무는 대조전으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기다리던 소식은 황후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대답이었다.

"황후가 자리를 비웠다고?"

"네, 네에. 그러하옵니다. 황상. 마침, 마마께서 불공을 드리려 하신다고 하여 봉은사에…"

"허, 허허. 참. 진짜인가 보고만. 일발필중이라니, 나 원!"

이형에게 덜덜 떨면서도 또박또박 답하는 내관의 모습에, 이형은 웃음을 터뜨렸다. 기쁘기도 하였고, 황당하기도 하였다. 무슨 후사가 합방을 할 때마다 순풍순풍 나온단 말이던가. 이래서야 그가 마흔이 넘고 지천명을 넘으면 몇이나 되는 황자와 황녀가 나올지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아직은 고작 해봐야 둘째였다. 개항 이전에 비하면 훨씬 의료수준이 개선되었다고 하나 어린 나이에 병에 걸려 요절할 위험이 높은 시대인 만큼, 아직은 웃어넘길 만 했다. 이형은 히죽 웃으면서 내관에게 물었다.

"그래, 황후가 나간 지 얼마나 되었는가? 이제 슬슬 돌아올 때인가?"

"아니오, 아직 반 시진도 되지 않았나이다. 혹…."

"음, 그럼 가봐야겠지. 마침 불자들과도 만나려 하던 차에 잘 되었군그래. 어디 보자. 지금 출발한다면 시간에 맞겠느냐?"

"마마께서는 불심이 깊으시어서 한번 불공을 드리러 가시면 종일 불공을 드리시는 경우도 왕왕 있나이다. 금일은 특히나 중요한 불사라 하였으니, 아마 오래도록 머무실 것입니다."

그거면 되었다, 하고만 말하고서는 이형은 곧장 돌아섰다. 다만 이번만큼은 일전에 모건이 선물하였던 마차를 쓰지는 않았다. 아직 길이 모두 정비된 것이 아닌지라 봉은사까지 가는 길에 그런 대단한 마차를 쓰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함이 클 수 밖에 없었다.

대신 이형은 마차의 맨 앞에서 답답한 듯 푸르륵 울고 있던 말의 족쇄를 풀어주고서는, 곧장 그 위에 올라타 말을 몰기 시작했다. 덩달아 그를 호위해야 할 위병들 또한 급히 마차에서 말을 풀어주고 그 위에 올라타서는 냅다 달릴 수밖에는 없었다.

"이랴, 이랴! 하핫, 그래 모건 놈이 마차는 몰라도 말 하나는 잘 가져다주었구나! 어디 간만에 바깥바람이나 원 없이 쐬어 보실까!"

"화, 황상! 기다려주십시오! 황상!"

"이럇, 이럇! 뭣들 하고 있느냐? 황상께서 홀몸으로 다니시도록 둘 작정이냐! 다들 어서 기운 좀 써보자꾸나! 이랴-!"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위병들에게는 여전히 이형을 모시는 일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까닭이었다. 불경한 생각이었지만, 그들은 내심 좋아라 하고서 제멋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것이 마치 눈밭에 풀어놓은 견공을 보는 듯 하다는 감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 위병들의 노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형은 그대로 궁에서 봉은사까지 말을 몰고서 냅다 달려갔다. 지나가는 길 난데없이 황제가 이렇다 할 수행원이나 마차도 없이 위병들과 냅다 말을 모는 모습에 기겁한 한양의 백성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또 무슨 변란이 일어났는가-해서 말이다. 물론 그런 일이 있을 턱이 없었다. 이형은 낄낄 웃으며 말을 몰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처음에는 무거운 마차에서 벗어나 기분 좋게 달리던 말이 후들후들하는 다리를 주체 못 하고 제 자리에 주저앉을 무렵이 되어서야, 이형은 봉은사에 다다랐다. 시간으로는 그리 길지는 않았으나, 마차를 몰던 역용마에게 수십 분을 전력 질주하게 시켰으니 그야 다리가 후들후들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형은 수고해준 말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서는, 냅다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직후, 착지 도중 뒤늦게 자신의 오른 무릎이 성하지 않았음을 상기하고서 발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격통에 폴짝폴짝 제자리에서 뛰어댔음은 물론이다.

""오셨나이까, 황상.""

"…커흠. 음, 다들 수고가 많소."

그런 이형의 추태를 보고서도, 봉은사 앞에 나열해있던 대조전의 궁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숙이며 이형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들 모두 제법 긴 세월 이형을 곁에서 봐오며 그 성정을 대강 파악했을뿐더러, 이미 황후에게 이형이 올지도 모른다고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대조전의 궁인들이 놀란 기색도 없이 인사를 올리니, 되려 이형만 멋쩍을 따름이었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이형을 뒤쫓던 위병들까지 하나둘씩 다다르고 나니, 궁인들이 좌우로 갈라서며 길을 열어주었다. 종종 호위도 없이 아무 때나 아무 곳이나 쏘다니는 이형을 향한 배려 아닌 배려였다. 이형은 재차 헛기침하고서, 봉은사에 들어섰다.

"흐음…?"

그리고, 묘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누군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듯한 위화감이었다. 등 뒤가 아니라, 머리 위에서 말이다. 딱히 적의가 있는 시선은 아니었다. 마치 조부가 손자를 바라보는 듯한 선한 시선이었다. 인자하게 손자가 하는 일을 지켜봐 주는, 그런 시선이었다.

그런 묘한 위화감에 슬쩍 시선을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언제나 와 같은 푸른 하늘만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을 따름이었다. 참으로 의아한 기분이었다. 그리 빤히 구경거리가 되고 있음에도, 딱히 불쾌한 기분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이 말이다. 되려 묘하게 가슴이 홀가분해지기도 하였다.

"이곳이 사찰이니, 석가께서 돌봐 주시고 계신가 보군. 그럼 난 석가 손바닥 위 손오공인가?"

잠시 실례하리다. 그리 장난스레 덧붙이며 이형은 저 멀리 보이는 대웅전을 향하여 합장하였다. 그러자 그 묘한 시선도 사라졌다. 어쩌면 단지 익숙해져서 더 이상 자각하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형은 그리 개의치 않았다. 이미 빙의니 환생이니 같은 오컬트를 경험한 입장에서 이런 소소한 신적 경험은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이형은 성큼성큼 걸음걸이를 옮겼다. 미리 이형이 올 거라 고지를 받은 듯, 절 안의 승려들은 느닷없이 이형이 나타났음에도 그리 놀라지 않고서 이형에게 합장하며 예를 표할 따름이었다. 이미 동자승 한 사람이 이형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그가 안내역이라고 짐작하고서, 이형은 잠시 걸음걸이를 멈추고 동자승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음, 그렇겠지. 어디 안내해주시게나."

동자승의 안내에 따라, 이형은 다시 걸음걸이를 옮겼다. 그리 오래 걸을 필요도 없었다. 황후는 이형이 조금 전 합장하였던 대웅전에 있던 까닭이었다. 곧 문이 열리고, 안에서 그를 기다리던 황후는 방석 위에 무릎을 꿇은 채로 조용히 이형을 향해 절을 올려 그를 맞이하였다.

새삼스레 그 격조 있는 모습에 헛기침하면서, 이형은 걸음걸이를 조심스레 옮겼다.

"오셨나이까, 황상."

"음, 소식을 듣고서 곧장 달려왔소이다. 그 모습을 보니 비로소 확신이 드는구려. 회임이라니, 참으로 축하할 일이구려."

"아직 나흘을 걸렀을 뿐입니다. 정말로 그리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일이겠지요. 그보다 황상, 드릴 말이 있나이다."

'흠, 불교계의 청탁인가?'

어딘가 잔잔한 황후의 청을 듣고서, 이형이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이었다. 이미 전례가 있는 일이기도 하였다. 명동 대성당을 보고서 황후를 통하여 한양에 사찰을 세우려 하였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형은 웬만하면 그 청탁을 들어줄 의향도 있었다.

어차피 조선의 농민들에게 더욱 친숙한 것은 불교와 사찰일 수밖에 없는 이상, 이형이 제아무리 파리 외방전교회를 밀어주어도 도시를 중심으로 유행하는 수준을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종교계에 최소한의 안전망 역할을 부탁하려면, 도시에서 벗어난 향촌일수록 불교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래저래 앞으로 신세 질 일이 많을 테니, 청탁 하나쯤은 그리 기분 나쁘지 않게 들어줄 의향이 이형에게는 있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였다.

"그럼 물론 들어주리다. 한번 말해보시오. 이번에는 어쩐 일이오?"

"비구니들을 모아 한양 변두리에 여아를 가르칠 학당을 열고자 합니다. 허하여 주소서."

"허하리다."

즉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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