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제의 끝 >
"그래, 저거지! 저거야! 보았소? 지금 보았잖소! 짐이 전에 말했던 그게 이거란 말이요, 이거! 캬아, 멋져부려!"
"황상, 체통을 지키시지요. 보는 눈이 많습니다."
"체통이고 나발이고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소! '열혈은 태양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니 담력은 단련된 무쇠와 같고, 뼈는 정련한 강철과 같다'! 크으으~!"
"황상."
"…험험."
황후의 나지막한 경고에, 그제야 이형은 주변을 둘러보고서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제자리에 앉았다. 갑작스레 환호를 지르며 제자리에 일어나 소란을 피운 까닭인지, 특석에 앉아있던 각국 귀빈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이형을 향하고 있었다.
유구국왕 상태는 귀신이라도 본양 입을 떡 벌리고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옅게 헛웃음을 흘리며 미적지근한 시선으로 이형을 바라보았다. 프랑스 극동함대의 사르네 제독은 놀란 듯 잠시 제자리에 기립한 이형을 올려다보았지만, 이내 시선을 돌려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이미 전장에서 이형의 성정을 대강 짐작한 그로서는 그보다는 난생처음 보는 동양의 무예들에 더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건, 이형의 모습에 당황하거나 미적지근한 시선을 보내기란 마찬가지였다. 황후의 시선은 전에 없이 날카롭게 이형을 쏘아보았고, 이형은 차마 뭐라 더 변명하지 못하고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그, 이건 그러니까…험험. …짐이 아무래도 너무 흥분했던 듯하구려."
'이 모질이 개똥이 놈이.'
그 모습을 흘겨보며, 이하응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원세개에게서 황제가 저 협객을 총애한다 들었을 때는 이름 모를 무명의 협객을 도대체 무슨 연고로 총애하겠느냐고 흘려들었지만, 아무래도 진짜였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 무술대회 자체가 저 무명의 협객이 이름을 가지게 될 계기를 제공하려 그런지도 몰랐다. 이하응으로서는 뒷골이 절로 당기는 듯했다.
안 그래도 권위와 역사가 부족하던 전주 이씨의 천명이었다. 물론 조선에서야 이미 지난 500년 가까이 통치하며 충분한 역사와 권위를 쌓아왔지만, 그거야 조선 안에서나 먹히는 권위고 조금 확장해봤자 지난 200여 년간 우호 관계를 유지해온 도쿠가와 정권이나 유구, 대마도 같은 작은 섬의 도주들 상대로나 먹힐 권위에 불과했다.
하다못해 만주인을 상대로도 조선의 왕이라는 게 무슨 권위가 먹히겠는가. 그저 아이신기오로의 사위이자 만주에서 가장 강하고 만주인들을 존중해주는 왕이기에 섬김을 받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태산에 올라 봉선의 예를 다하고 북경에 천도하건, 한양에 황제에 걸맞은 거대한 황궁을 세우건 황제로서 그 위엄을 온 천하의 제후들에게 보여야 할 때에 이런 시답잖은 소꿉장난이나 벌이다니.
'그래, 저 개똥이 놈은 분명 나보다 천운은 물론이오, 그릇에서는 한 수 위다. 그러나 힘으로 천하를 거머쥐는 것은 할 수 있어도 진득하니 옥좌에 앉아 우리 전주 이씨의 권위를 드높이며 천하를 통치할 그릇은 아니야. 뭐라도 수를 쓰지 않으면 거저 얻은 우리 전주 이씨의 천하는 어느 운 좋은 놈에게 거저 떠넘기고 끝나겠어.'
이하응은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이 가당찮은 소꿉장난을 구경하고 있을 생각이 싹 가신 지 오래였다. 마침 요즈음 몸이 시원치 않은 것도 있으니, 적당히 몸이 좋지 않아졌음을 핑계로 물러난다면 구태여 억지로 붙잡아 두지는 않을 터였다. 아무튼, 그는 현 황제의 친부였으니 말이다.
만일 원세개가 말한 대로 정말로 저 황비홍이라는 협객이 이형을 암살하려 하고 있다면 지금 시기 좋게 자리에서 물러난 이하응이 가장 먼저 용의 선상에 오르겠지만, 이하응은 그리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굳이 그가 수작을 부린 솜옷 대신 본연의 도복을 입고서 회장에 올랐을 무렵에는 잠시 의심했지만, 몸에 암기를 숨기고서 저렇게 격렬하게 움직일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처음부터 살수를 쓰라 명했고, 실제로도 대련 상대는 시작부터 살수를 사용했지만 움찔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만일 정말 황제 시해를 위하여 암기를 숨기고 있다면 당연히 가장 먼저 암기를 꺼내려 했을 걸 고려하면, 암살모의 혐의는 사라진 거나 다름없었다.
'멍청한 애송이 같으니라고. 근거도 없이 그저 나불대봤을 뿐인가. 하지만 그런 속물적인 놈이 더 다루기 편한 법이지. 성정은 속물적이고 거칠지만, 몸은 잘 단련하여 탄탄할 뿐 아니라 기골이 장대하고, 귀한 집에서 나고 자라 잘 배우고 본연의 머리도 비상한 듯 보였다. 곁에 두고 키우면 분명 후일 쓸모가 있을 터. 돌아가는 길에 순규 놈에게 언질을 줘야겠어.'
"전하, 어디로 가시는지요? 아직 일정이 많이 남았습니다. 몸이 편찮으시다면 어의를 불러드리오리까?"
"황송하오나, 이 늙은이의 병은 그저 노환일 따름이라. 신농씨의 약재와 서복의 불로초가 아니면 낫지 않을 듯합니다. 날이 무더워 이만 처소에 물러나 몸을 쉬려 하오니, 이 늙은이의 무례를 넓은 아량으로 용서하여주소서."
언제 사납게 쏘아붙였냐는 듯이 간드러진 목소리로 사근사근 말을 걸어오는 황후의 목소리에, 이하응은 태연하게 점잖은 어조로 허리를 숙이며 답하였다. 다분히 계산적인 행동이었다. 실제 궁 내의 권력 구도상으로는 이미 실각한 것이나 다름없으나, 공식적으로 이하응은 단지 장남을 도우려 대만으로 떠났을 뿐 대단한 부정을 추궁당한 바도 없으며 그 치세를 격하 당한 바도 없다.
공식적으로 이하응은 어디까지나 어린 황제를 성심성의껏 돕다가 황제가 장성하여 스스로 국정을 돌볼 수 있게 되니 선선히 물러난 모범적인 섭정이자 황제의 친부였고, 따라서 그가 이렇다 할 부정을 저지르지 않는 한 궁내에서 그의 행동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적어도 윤리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는 말이다.
그러니 황후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의 의사였다.
"그렇습니까.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제가 조선에 시집와 엿듣기로 서복이 시황제 자영의 명을 받들어 다다른 땅이 제주라 들었사온데, 혹 불로초의 탐색을 명하여 드리리까?"
"껄껄껄!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옛 폐주 광해가 제주 땅에서 무력히 죽지는 않았을 터이지요. 마마께서는 그리 괘념치 마소서. 사람의 생로병사 또한 하늘의 업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그 말씀대로입니다. 하오나, 인간 된 도리로서 어찌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봐라, 어서 전하를 처소까지 모시다 드리거라."
"넷! …네, 넷? 하, 하오나…."
황후는 진심으로 유감이라는 듯한 얼굴로 그녀의 곁에 서 있던 위병 원세개를 손가락 끝으로 콕 지목하며 말했다. 처음에는 황후의 명이니 조건반사적으로 따르려 했던 원세개는 그 명령에 당혹하여 말을 더듬거렸다. 그로서는 여전히 황비홍이 황제를 시해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차하면 쏘아버리려 방아쇠에 검지를 걸고 있던 차에 대뜸 황후가 이런 명령을 내리니 어쩔 줄을 몰랐다.
덩달아 이하응의 이맛주름도 꿈틀거렸다. 괜한 의심일 수도 있겠으나, 황후는 오른손잡이이면서도 구태여 그녀의 왼쪽에 있던 원세개를 지목하여 이하응을 모셔가라 시켰다. 번거로울 텐데도 말이다. 만일 그녀가 원세개를 특별히 신임하고 있기에 구태여 원세개를 찾아 지목했다고 해석하기에는, 만일 황후가 자신을 총애하고 있다는 전조를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그 자리에서 자랑을 늘어놓았을 원세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눈치 채였는가? 아직 짐작하고 있을 뿐인가? 그도 아니면 단지 우연일 따름인가. …아니, 우연이라고 생각해봐야 좋을 건 없다. 이 몸이 저 애송이와 만난 지 고작 이틀 만에 모든 걸 눈치챘을 리도 없으니, 지금은 고작 해봐야 짐작일 터. 흥, 개똥이 놈이 분수에 넘치는 총명한 배필을 얻었어.'
"마마께서 그리 이 늙은이를 심려해주시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여봐라, 무엇 하고 있느냐? 날이 무덥구나. 과인은 어서 처소에 돌아가 몸을 쉬고 싶도다."
"하, 하오나…."
"어허, 네 이놈! 네놈이 어리다고 하여 궁정의 법도를 업신여기고서도 무사할 성싶더냐! 황후께서 네놈을 신임하여 일을 맡기시지 않았느냐! 어서 길을 안내하지 못할까!"
이하응은 버럭 소리 지르며 원세개를 재촉하였다. 그제야 원세개도 뒤늦게 사태파악이 되었는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면서도 순순히 이하응을 앞질러 걷기 시작했다. 황후는 옅게 잔잔한 미소를 띤 얼굴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하응은 미소짓는 황후를 잠시 빤히 바라보았다가, 빙그레 미소를 돌려주고서는 사뿐한 걸음걸이로 걷기 시작했다.
공적인 자리라서인지, 지난번 회맹과는 달리 이번에는 원세개를 제하고서도 여러 궁인과 내관, 위병들이 이하응을 섬기려 따라왔다. 회장을 나서며 이하응은 그의 등을 향하여 쏟아지는 무수하고도 날카로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야인의 공주 나부랭이가 종잡기 어려운 궁궐의 마음을 사로잡다니. 역시나, 분수에 넘치는 배필을 손에 넣은 모양이었다.
"전하, 어찌 순순히 물러나셨습니까? 황-."
"시끄럽다. 듣는 귀가 많다는 걸 모르겠느냐. 어리숙한 놈. 모든 것에는 차례가 있는 법이고, 순리가 있는 법이다. 자신을 갈고 닦기를 게을리하며 그리 반짝 활약하여 반짝 출세해봐야 샛별처럼 지는 일만 기다릴 게다."
이하응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원세개를 낮게 쏘아붙였다. 그 서슬 퍼런 추궁에, 원세개는 차마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서 고개를 수그렸다. 분노한 농군들에 의하여 고향에서 내쫓겨 한국에 이주한 이래, 가문의 연줄과 재력으로 만주의 유력자들을 건너고 건너 간신히 위병이 되어 조정에 출사한 원세개였다.
비록 인맥을 악용했다고 하나 타고난 강골과 조직의 실력자를 재빠르게 파악하는 심미안으로 위병의 지위는 확고하게 되었지만, 경험이 부족하고 출세에 조급하다는 이하응의 평가는 전혀 틀린 바가 없었다. 당장 이하응과 만나지 못했다면, 대회 중 황비홍을 쏴버리고 그대로 격노한 이형에 의하여 그 명이 다했으리라.
"아직은 때가 아니니라. 어차피 중화의 백성이라는 족속들은 힘 하나로 찍어누를 수 있을 만큼 어리숙하지 않으니, 황상께서도 지금은 아집을 부리고 계시지만 언젠가는 중화의 백성들 앞에서 내세울 권위가 급히 필요하게 되 실 터. 설령 황상께서 필요하시지 않더라도, 조선과 가까운 하북과 산동이라면 모를까 장강 이남으로 갈수록 우리 전주 이씨의 번 왕들에게는 내세울 권위가 필요하도다.
그때 가서 뒤늦게 태산에 올라 천자가 되어봐야 늦다. 중화의 백성들은 사태를 수습하려 억지를 부리는 거로 밖에는 보지 않을 테지. 네놈도 앞으로 내 뒷수발을 들려면 똑똑히 기억해두거라. 힘이란 미래를 읽고 앞서 준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법이니라."
"저, 전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모르겠다면 스스로 알아보거라. 그거 하나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놈이라면, 네 녀석의 그릇도 고작 해봐야 그것뿐이었다는 이야기겠지."
원세개의 물음에 퉁명스럽게 답하고서는, 이하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성큼성큼 걸음걸이를 옮겼다. 자세한 내막까지 밝히기에는 듣는 귀가 너무 많은 까닭이었다. 설령 이하응이라도 이 이야기까지 하면 성한 턱이 없다.
'쫓겨난 천자라. 흥, 이제 와서라서지만….'
이하응은 코웃음을 치며 얼마 전 영국 공사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그들은 쫓겨난 청의 천자가 중앙아시아에서 도망쳐 영국의 지배 아래에 놓여있는 티베트에 은신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어째서 하필이면 이하응에게 이 소식을 전해줬는지는 뻔했다. 이하응과 이형 사이의 알력을 아는 그들이라면 이하응이 이를 이용해 일을 꾸미리라 확신했을 터였다.
결과만 따지자면 그들의 판단은 옳았다. 그에 앞서 마지막 기회 삼아 이하응이 회맹에 참여하면서 은근슬쩍 이형을 떠보았지만, 이형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아마도 진심으로 중원의 천명을 부수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아집이고 망상이다. 시황제 자영이 통일 중화를 만들 이래로 도중에 수백여 년간 흩어진 적은 많아도, 단지 그것뿐 금세 다시 뭉치던 것이 중원이다. 이하응은 구태여 그것을 거스르고 부정하려 하는 이형의 속내를 이해할 수도 이해할 생각도 없었다. 무엇 하러 구시대의 권위와 그것이 가진 이용가치를 부숴야만 한단 말인가. 새로이 권위를 만드는 것보다야, 당연히 구시대의 권위를 이용하는 것이 한결 편할 텐데.
'스스로 천자가 되는 길은 개똥이 놈이 제 발로 걷어차 버렸다. 묘한 아집에 사로잡혀 제 복을 걷어찬 격이지. 이제 남은 건 꼭두각시 천자를 세워 그를 대신하여 패자로서 중화의 제후국들을 이끌어가는 길뿐. 그럼, 일이 터지기에 앞서 꼭두각시 천자를 손에 넣은 놈이 앞서갈 수밖에. 이대로 늙어 썩어 문드러지는 일만 남았다 생각했으나, 하늘이 아직 이 몸을 버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크크크.
이하응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듣는 귀가 많았다. 원세개와의 대화를 엿들은 귀도 분명 상당할 터였다. 오늘의 일이 전해진다면 안 그래도 좁은 입지가 더욱더 좁아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이를 듣게 될 귀 또한 전주 이씨의 천하를 위하고 있는 자일 테니까.
그가 성공하건 실패하건 결과적으로 전주 이씨의 천하는 유지될 것이라는 예감에, 이하응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
"…그래, 그렇단 말이지. 수고하였다. 슬슬 대회도 마무리되어가니, 이만 들어가서 쉬도록 하여라."
조용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물러나는 궁인들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황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은은히 퍼져 나갔다. 그 혈향에 간신히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말끔히 정돈되는 듯했다.
'조선은 다룰 줄 알았거늘, 결국 우리 만주와 꼭 같게 되었구나. 중원의 천명이란 참으로 저주나 다름없도다. 무엇이 하늘의 뜻이란 말인가. 탐욕으로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그토록 살갑던 부모와 자식이 서로 시기하고 증오하게 만드는 것이 진정 하늘의 뜻인가.'
참으로 잔혹한 하늘이었다. 그녀가 조선에 시집와서 조선과 사랑에 빠지게 하였던 평화롭고 정적인 생활은 조금씩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고작 해봐야 말다툼, 고작 해봐야 기 싸움. 친족은 뒷전에 권신과 유림과의 말다툼이 전부이던 한양에 비하면 신하는 물론이오 친족과 혈족끼리도 궁중 암투와 골육상쟁이 난무하던 북경은 무간지옥이었다.
그토록 사이좋던 부자가 기어이 갈라서게 되었을 때, 대만이라는 피난처가 나타나며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평화롭게 마무리되었을 적에는 얼마나 기뻤는지도 모른다. 친족끼리 죽이고 죽이는 골육상쟁 따위 그간 북경에서 보아온 것만으로 족했다. 그러나 기어이 피를 보아야만 하게 되었다. 흥선왕이 품은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몰라도, 그가 좋지 않은 것을 꾸미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니까.
'아무리 늦어도 태자가 철이 들어 내막을 알기 전에 마무리 지어야 하겠지. 조선이 우리 만주의 전철을 밟게 둘 수는 없다. 내 자손들에게 천명의 저주를 짊어지게 할 수는 없으니.'
황후는 치맛자락을 쥐어뜯듯이 움켜쥐었다. 황제는 이런 궁중 암투와는 인연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간 자라온 경험도 경험이지만, 성정부터가 어울리지 않는다. 전장에서 적을 죽이는 데에는 타고났어도, 조정에서 정적을 죽이는 건 도통할 줄 모른다. 장차 나이가 들고 원숙하여 경험이 쌓여도, 능숙하게 국정을 돌볼 수는 있어도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궁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궁중 암투는 할 수 없을 터.
그럼 그녀가 나서는 수밖에 없다. 제 시아비를 죽이는 꼴이 되겠으나, 상관없다. 북경에서는 이보다 더한 일도 많았다. 천연덕스럽게 해치우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황제와 태자의 앞에서는 미소지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번에 뜻대로 마음껏 즐기시게 두었으니, 이제부터라도 황상께서도 체통을 지켜주셨으면 좋으련만….'
"암! 과연 들끓는 열정으로 온 세상에 빛을 밝히는구나! 내 장차 천하의 뜻있는 자들이 의술을 익히고 베풂에 있어 부족함이 없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정말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상!"
어딘가 지친 시선으로, 황후는 한걸음에 황비홍이라는 협객의 진언에 즉답하는 이형의 뒷모습을 흘겨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