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216화 (216/530)

< 격동의 베를린 >

'그래, 우리 대한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국의 대사조차 이리 협력적으로 나서고 있는데 어찌 내가 주눅이 들어 있어야 한단 말인가. 대사의 말이 옳다. 지금은 어떻게든 담판을 지어야만 할 때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헤이스 대사님의 고견을 믿고 한번 부딪혀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리숙한 이 늙은이의 눈을 뜨게 해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과찬이십니다. 귀국 대한에게 부족한 것은 어디까지나 경험일 뿐, 당신들의 지혜가 부족한 것도 박 대사께서 어리숙하신 것도 아닙니다. 저는 제 조국 미합중국이 본디 식민지였음을 기억하며 뭇 세계의 힘 없고 경험이 부족한 나라들을 배려하고 그들에게 부족한 경험을 전수하여주는 선생이 되어야만 한다고 믿습니다.

작금의 제 조국은 날로 부강해지며 본래의 제 처지를 잊고 날로 오만해져 가고만 있으니, 저 혼자만이라도 제 조국이 본디 나아가야 할 길을 관철하고 싶습니다."

박규수의 감사 인사에, 헤이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박규수로서는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안타깝기도 한 말이었다. 그의 언사에서부터 그의 개인적 신념과 그의 조국의 뜻이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암시되고 있던 것이다. 그건 꼭 과거의 저 자신을 보는 듯했다. 세도가의 횡포에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제 주군을 잃고 방황해야만 했던 과거의 박규수를 말이다.

그리고 아마 어느 정도 그 뜻을 이룬 박규수와는 달리 헤이스는 그 뜻을 이루기 어려우리라. 그 뜻은 분명 고매하나, 그 뜻이 고매할수록 아군이 적고 외면받기 쉽다는 것을 박규수는 알았다. 지금의 그가 어느 정도 그의 뜻을 이룬 것도, 반쯤은 이형이라는 특수한 사례 덕분이었으며 그조차 온전히 뜻을 이뤘다기보다 현실에 타협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았다.

박규수는 헤이스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대사님께서 뜻하신 바를 이룰 수 있기를 빌겠습니다. 대사님께서는 제 은인이십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하하!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감사 인사를 해야 한다면 오늘의 만남을 주선해주신 하늘에 계신 주님께 해야겠지요. 저 또한 이렇게나마 제 뜻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걸로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제 정적들과 맞설 좋은 경험을 얻었습니다."

'대통령 선거? 아아, 그렇구나. 미리견에서는 제왕과 같은 대통령을 선거로 뽑는다고 했었지. 허, 그럼 미리견의 다음 대통령이 될 귀인을 만나게 된 것이었구나.'

박규수는 새삼 가벼운 충격을 느꼈다. 차기 대권 주자라니. 한국으로 치면 황태자가 온 격이 아닌가. 아직 선거 결과에 따라 대통령이 될 수도, 되지 못할 수도 있는 처지라지만 말이다. 그와 같은 귀인이 과시하기보다는 딱 격조만 맞추었다는 느낌의 말끔한 양장을 입고서 이렇게 허물없이 찾아오는 것 자체가 박규수에게는 놀랍게만 느껴졌다.

'불란서는 구주의 전쟁으로 바빠 보이고, 영길리는 믿을 수 없다. 그럼 장차 우리 한국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될 것은 미리견이 될 터. 이 친분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건, 장차 미리견을 위해서건. 헤이스 대사가 무사히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다면 좋을 터인데….'

박규수는 마음속으로 그가 무사히 대권에서 승리할 수 있기를 빌었다. 한국의 국익을 위해서건, 장차 미국을 위해서건 말이다. 처음에는 그가 품은 고귀한 뜻이 현실에 부딪혀 좌절될 거라 여겼지만, 만일 그가 정말로 왕-그러니까 대통령이 된다면 또 모를 일이 아니겠는가. 박규수는 과거 그와 같은 길을 걸었고, 어느 정도는 성공했으나 또 어느 정도는 타협한 입장에서 그가 성공하기를 마음속 깊이 빌었다.

"자, 그럼 슬슬 출발하도록 합시다. 대단한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을 겁니다. 괜히 기선제압을 하겠다며 수행원들을 많이 데리고 가 봐야, 다른 열강들의 눈칫밥이나 먹게 되겠지요. 그들은 역사가 짧은 제 조국이나 인제야 막 국제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한국을 마땅치 않게 여기니 말입니다. 러시아도 베를린에서 이국의 대사를 살해할 정도로 난폭하지는 않겠지요."

"과연, 그 말씀대로입니다. 하지만, 노서아는 지금껏 제가 보아오건대 격조와 체면을 대단히 따지는 듯 보였습니다. 그간 업신여겨 오던 한국의 대사가 몸 하나만 믿고서 달랑 찾아간다면 문전박대를 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때를 위해서 제가 있습니다. 안심해주십시오. 요즈음 러시아 제국의 국내 사정과 제 조국의 모 사업가 탓에 급격히 양국의 국민감정이 악화하기는 했습니다만, 본디 제 조국과 러시아는 그리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뭐라 한 소리는 들게 되겠습니다만, 그들도 미국의 대사를 문전박대하지는 않겠지요."

그와 같은 감상을 품으며 두 사람을 방을 나섰다. 마차를 타려 했으나, 그조차 헤이스가 말렸다. 그리 멀지 않을뿐더러 허름한 마차를 타고 가면 허름한 마차인 대로, 화려한 마차를 타고 가면 화려한 마차인 대로 러시아의 심기를 거스를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참으로 복잡한 자들이라고 박규수는 내심 생각했다. 불현듯, 어찌 보면 본디 상국이라 섬기던 청조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한 구석에서 고집을 부리고, 체면과 격조를 무엇보다 중시하며 종종 힘으로 윽박지르려 하는 모습이 특히나 그러했다. 어쩌면 두 나라 모두 대국이기에 그런 공통점을 갔는지도 몰랐다. 대국은 오만한 법이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새로이 대국이 된 그의 조국 또한 그와 같이 되는 것일까.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일 거라며, 박규수는 씁쓸하게 자조했다.

"밤이니 그렇겠습니다만, 유독 인적이 드물군요."

"지난 반란 이후로 민심이 흉흉해져서 그렇지요. 수괴인 마르크스라는 자를 영국군이 너무 섣불리 처형해버렸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죽어서 사회주의의 순교자이자 우상이 되어버렸으니 말입니다. 혹, 길을 가시다가 헌병대를 마주친다면 함부로 따라가지 마시고 대사임을 분명히 말씀해주십시오. 아직도 지하세력이 거미줄처럼 베를린 곳곳에 뻗어있는지라, 헌병대의 심문이 꽤 난폭해졌다 들었습니다."

헤이스는 구태여 동양인인 박규수의 모습이 낯설어서라도 일부러 길을 피하고 있는 이들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박규수 또한 어느 정도 짐작하였으나 모른 체하였다. 굳이 건드려서 좋을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심문이 강화되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러시아 대사가 머무는 숙소로 가는 길에 그들이 마주친 헌병만 오른손가락 다섯 개를 세고도 왼손가락 두 개를 더 접어야만 했다. 그때마다 헤이스와 박규수가 가진 외교관으로서의 특권으로 빠져나왔지만, 지친 얼굴로 순찰을 도는 헌병대의 모습은 거리의 치안이 그리 좋지 않음을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마침내 러시아 대사가 머무는 옛 융커의 저택에 도착했을 무렵.

"러시아 놈들은 꺼져라! 프랑스 놈들도 필요 없다! 독일 민족의 통일을 방해하는 압제자 차르와 보나파르트의 개새끼들은 물러나라! 독일 만세! 통일 만세! 독일 민족이여, 꺠어나라!"

"병사들이여! 그대들도 그대들의 집이 있을 것이며, 집에 돌아가면 그대들을 기다리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어떤 이유로 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그대들의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허비해야 하는가! 자, 떠나라! 그대들의 소중한 이들이 기다리는 그대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베를린의 시민들이여, 당장 해산하라! 그대들의 집회는 법적으로 허용받지 못하였으며, 공공의 안전을 파괴하고 있다! 만일 즉각 해산하지 않는다면 그대들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

"맙소사, 이건 도대체…."

박규수는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군중 무리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족히 수백, 아니 어쩌면 천명 이상의 군중이 모여 길 건너편의 헌병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이미 해가 저물고서도 하늘 높이 횃불을 든 채로 고함을 지르는 독일의 젊은 청년들의 모습은 박규수가 그간 겪어온 세계관을 송두리째 박살 내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고함을 지르는 독일 청년들 대부분이 교복이나 양장을 입은 학생들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성균관의 학생들이 뛰쳐나온 격이었다. 한편 반대편에서 나팔관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헌병대는 제복 하나 통일되어 있지 못했다. 그들이 여러 나라의 군대가 뒤섞여 공동작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라는 증거였다.

상황은 일촉즉발로 보였다. 고함을 지르는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헌병대는 헌병대대로 물러날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박규수는 발걸음을 망설였다. 족히 수천의 사람무리가 아득바득 이를 갈고 있는 곳을 단신으로 헤쳐나간다 생각하니, 절로 오금이 저리는 듯했다.

"실례. 잠시 지나가겠습니다. 건투를 빕니다, 시민 여러분."

"헤, 헤이스 대사님!"

그러니 헤이스가 성큼성큼 태연하게 걸음걸이를 옮기니 박규수로서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 그가 다치기라도 할까 우려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학생들도 헤이스가 이리 태연하게 끼어들 줄은 몰랐는지, 한순간 놀라 뒤편을 흘끗 쳐다볼 지경이었다.

"겁먹지 마십시오. 저희는 겁먹을 것이 없는 입장입니다. 마침 잘 되었군요. 숙소 앞이 이런 상황이라면, 분명 저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을 러시아 대사 또한 위축되어 있겠지요. 어서 서두릅시다."

하지만 헤이스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제야 머뭇거리면서도 박규수는 학생 무리를 지나칠 수 있었다. 태연하게 끼어든 그들의 모습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각각 미국과 한국이라는 지금 이 사태와는 무관한 나라의 외교관이라는 것이 전달되어서인지 독일의 학생들로부터 보복은 없었다. 되려 몇몇은 주춤거리는 박규수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해주기도 하였다.

그들이 열강들에게 뭐라 한방 크게 먹여주기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손자뻘 되는 이국의 학생에게 등을 두들겨진다는 낯선 경험에, 박규수는 얼떨떨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기별을 넣지 않고 온 것이 되려 잘된 일이 되었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괜히 저 헌병들이 이 학생들을 진정시킨답시고 험한 수를 썼을 테니 말입니다."

"『정지! 정지하라! 이곳은 출입통제구역-.』"

"미합중국에서 온 특명전권대사 러더퍼드 B. 헤이스 오하이오 주지사요. 여기 대한제국에서 온 박규수 총리대신과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대공과의 회담을 주선하러 왔소."

"『…잠시만 저지선 앞에서 기다려주십시오. 신분 확인만 끝마치고 바로 들여보내 드리겠습니다.』"

헤이스의 태연한 자기소개에, 당장이라도 그들을 체포할 듯이 달려들던 헌병대의 태도는 한순간 바뀌었다. 당장 나팔관을 들고서 저 먼발치에서 고함만 지르던 지휘관이 나팔관을 내려놓고서 몸소 성큼성큼 걸어오던 것이다. 박규수는 그의 제복이 어딘가 눈에 익음을 깨달았다. 한국의 국가헌병대가 입는 제복과 색만 다를 뿐 모양새는 꼭 같던 것이다. 그것인즉슨 그 또한 루이와 같은 프랑스군이라는 이야기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현장 지휘관은, 잠시 그들의 면면을 빤히 살피더니 헤이스와 박규수가 내민 서류를 빼앗듯이 받아들었다. 뭐라도 흠을 잡으려는 듯 한참을 쥐잡듯이 살피던 현장 지휘관은, 이내 킁-하고 콧방귀를 뀌고서는 집어 던지기라도 하는 양 거칠게 박규수와 헤이스에게 서류를 돌려주었다.

박규수는 그의 머릿속 프랑스군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부서지고 있음을 느꼈다. 문득, 그들이 더욱 강한 나라의 외교관이었더라도 이처럼 난폭하게 대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그렇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하니 확답할 수 없었다. 저 오만함이 그리 간단히 고쳐질 것 같지는 않았다.

"통과하셔도 좋습니다. 안 그래도 요즈음 대공 전하께서 언제쯤 오느냐고 신경질을 내고 계시더군요. 어서 오십시오."

현장 지휘관은 그리 말하고서는 휙 하고 돌아섰다. 노골적이기까지 한 오만함이었고, 무시였다. 박규수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했다. 청나라에 온 것도 아닌데 이런 푸대접을 당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것이다. 헤이스도 이번만큼은 가만 넘어가기 어려웠던 듯, 눈을 찌푸리고서는 품 안에서 시가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아, 아니지.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곧장 안으로 모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서 안쪽으로 오시죠!"

그러나 그런 푸대접과는 별개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마 협상에 몸이 달아있던 러시아의 의향이 가장 컸으리라. 그들이 숙소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러시아군 장교 한 사람이 부리나케 달려오는 것만 봐도 그러했다. 누가 봐도 고귀한 가문 태생의 장교가 허둥지둥거리고 있으니 되려 우습기도 하였다.

저택은 요란한 음악 소리로 가득했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귓청이 떠나갈 듯해, 풍미나 격조를 위하여 연주하는 가락 같지가 않았다. 박규수는 숙소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학생들의 외침을 지워버리기 위한 가락이라는 걸 눈치챘다. 분명 연주자들의 기량은 대단할 것임에도, 어딘가 천박하게만 느껴지는 가락이었다.

그리고 장교의 안내를 따라 알렉산드르 대공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응접실에 발을 디딘 순간, 그들은 왜 그 장교가 그리도 몸이 달아있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고작 해봐야 이형보다 조금 더 연배가 있어 보이는 거구의 미청년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손등에 핏줄을 세우고 있던 것이다.

"인제야 오셨구려. 목이 다 빠지는 줄 알았소. 한국의 황제는 이 전쟁을 끝낼 생각이 있기는 한 거요?"

지루해 미치겠다는 듯이, 알렉산드르 대공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실로 위압감이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화려한 제복으로 옷 아래를 감추고 있음에도, 온몸이 근육으로 알알이 차 있음이 눈에 선명히 보였다. 그리 작은 키도 아니었던 헤이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에 멋들어지게 수염을 기르고 근육질의 몸까지 지니고 있으니, 성정이나 재능이 어떤가와는 별개로 겉모습만큼은 제왕의 상이라 부를 법했다.

하지만 헤이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답하였다.

"급한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부터는 광대한 시베리아가 방벽이 되어줄 텐데 말입니다. 급한 것은 이제부터 시베리아를 건너야 할 귀국이 아닐는지요."

"흥, 무례하기 짝이 없구려. 하기야 천박한 신대륙의 자유주의 폭도에게 예의범절을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겠지. 그래도 뭐,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해주리다. 덕분에 겨우 과인도 아바마마께서 명하신 바를 끝마치고 귀국할 수 있게 될 테니 말이오."

대공은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무렵 외교가의 공용어였던 프랑스어로 이루어진 대화였기에, 박규수는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모두 새겨들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헤이스 대사의 말이 맞았다. 노서아는 구주에서의 전쟁을 끝낼 생각이 조금도 없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우리 한국과의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하여 이 도시에 왔을 뿐이다…! '

"긴말은 하지 않으리다."

성큼성큼 걸어와, 알렉산드르 대공은 박규수의 앞에 섰다. 소파에 앉아있을 때도 위압적이었지만, 족히 190이 넘는 거구가 근육질 몸을 과시하며 빤히 머리 위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절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듯했다. 뭐라 말을 시작하면 좋을지 이런저런 말을 생각해두었음에도, 막상 대공의 앞에 서니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박규수가 긴장했음을 눈치채고서, 나지막이 코웃음을 치고서는 말했다.

"얼마에 사시겠소?"

"…예?"

"캄차카 말이오. 이제 우린 그 얼음덩어리 땅에 흥미 없소. 장차 우리 러시아는 기관차를 타고서 아드리아해로 나가게 될 테니까. 그러니 말해보시오. 얼마에 사시겠소?"

급작스러운 말에, 박규수는 순간 말문이 막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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