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223화 (223/530)

< 기적 >

"그,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원수라니요,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드리리다. 무엇이오?"

"저는 아직 중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느닷없이 2계급 특진이라니요! 그럴듯한 작위 하나 없는 저 같은 천것이 짊어지기에는 너무 커다란 짐입니다! 재고하여 주시옵소서!"

사뭇 느긋한 나폴레옹 4세와는 달리, 루이는 다급했다.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요 몇 년간 그야말로 이례적인 초고속 승급을 거듭해온 루이였다. 프랑스군 내에서도 나폴레옹 대제 생전에 치러지었던 혁명전쟁 아래로 이와 같은 초고속 승진은 처음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연히 군부 내에서 루이를 바라보는 시선도 짜증과 질시가 섞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공훈이란 공훈은 모조리 쓸어 담으며 그보다 작위가 높은 귀족들이나 한참 선배들을 앞질러 가고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그 탓에 이미 루이는 한번 나폴레옹 4세의 도움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군법 재판에 회부될 뻔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계엄령이 선포되어 섭정 의회의 권한이 급격히 축소되고 군부가 다시 정면에 나선 지금 또다시 2계급 승진, 그것도 원수 계급장을 단다? 이제는 단순히 밉보이거나 질투 받는다는 수준이 아니다.

'여차하면 내 목이 달아난다! 내일이라도 누가 쏘는지도 모를 납탄에 맞아 이승을 떠나게 될지도 몰라! 출세할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라, 이건 내 목숨의 문제가 되어버렸다고!'

루이는 절로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동안은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현장을 전전하느라 군부 내의 질시를 피해올 수 있었지만, 이제는 다시 파리로 돌아와 버린 것이 문제다. 파리에 돌아왔다는 건, 곧 군부의 노회한 장성들이 그를 해코지할 수 있는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루이는 파리에 사실상 어떠한 연줄도 없다. 그의 군 생활은 카리브해에서 시작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한국 등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출세와는 연이 먼 한직들뿐이었다. 본디 대단한 집안 태생이었던 것도 아닐뿐더러, 다른 동기들에 비하여 성정이 무르다 보니 뚜렷한 활약을 할 기회가 적었던 까닭이다.

그런 그가 지난 수년간 급속도로 승진하여 마침내 원수라는 계급장을 달았다. 그럼 이제 그를 좋지 않게 보아온 모두가 짓밟으려 들것이다. 파리의 사교계와는 물론이오, 군부 내에서도 이렇다 할 연줄이 없던 루이로서는 살아남을 자신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하! 난 또 무슨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경은 참으로 둔하구려."

그런 루이의 우려에 나폴레옹 4세는 코웃음을 쳤다. 웃기기 이전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이에 어리둥절한 루이는 되물었다.

"둔하다니,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위만 보지 말고 가끔은 아래를 보라는 말이오. 아직도 모르겠소? 경은 우리 프랑스군의 청년 장교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고, 우상이란 말이오. 무엇보다, 지금 파리까지 돌아온 경의 휘하에는 여전히 10만에 달하는 정병이 있소. 작위? 작위라?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는구려. 그 잘난 귀족들이 제아무리 용을 써봐야 몇만이나 모을 수 있을 것 같소?

그런 그들이 경에게 대적한다? 냉정해지시오, 루이 경. 경은 강자이고, 저들은 약자요. 이제는 처지가 뒤집혔단 말이오."

"하오나···!"

"작위에 연연하지 마시오, 장군. 불과 60여 년 전만 해도 여관주인의 아들놈이 내 조부뻘 되시는 나폴레옹 대제를 만나 나폴리의 왕이자 베르크와 클레브 대공 노릇을 했던 게 이 나라 프랑스고 유럽 대륙이오. 그럴듯한 작위야 짐이 지금 수여하면 그만이지. 그럼 영지가 필요할 텐데, 흠."

나폴레옹 4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민에 잠겼다. 루이로서는 그저 당황스럽기만 하였다. 모든 것이 너무 급작스럽게, 그의 인지를 넘어서는 속도로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나폴레옹 4세가 왜 이리 다급하게 그를 출세시키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단지 그가 세운 공을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말을 하다 보니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루이로서는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가 이렇게 승진하게 될수록 주변의 질시와 공격을 한몸에 받게 될 것이라 직감하고 있던 까닭이다. 그는 주저하며 물었다.

"폐하, 소신에게 그와 같은 대단한 작위는 필요 없나이다. 저들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것을 헤아려주소서."

"아니, 그럴 수는 없소. 저들은 짐의 적이오. 그리고 장군은 현 상황으로서 짐이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장성이오. 유감스럽지만, 경을 배려해줄 여유 따위는 없소."

나폴레옹 4세는 딱딱한 어조로 답했다. 무시무시한 이야기였다. 계엄령이 내려져 군부가 대거 정치 전면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청년 황제는 군부를 적이라 지칭했다. 그제야 루이도 덩달아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파리를 비운 동안,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위풍당당하고 제 좋을 대로 권력을 휘두를 줄만 아는 듯했던 청년 황제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져 있었다.

나폴레옹 4세는 깊이 한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좋소. 장군은 아무래도 이런 일과는 도통 연이 없는 모양이구려. 만일 그것이 짐에게 신용을 주기 위한 연기였다면 손뼉이라도 쳐주리다. 당장 무대에 올라도 되겠소. 내 솔직히 이야기하리다. 짐에게는 무력이 급하오. 지금 어느 때보다는 말이오. 아바마마께서 미처 짐을 위한 안배를 해주시기도 전에 급히 제위를 물려받은 까닭에 말이오.

지금껏 짐이 뜻대로 선택할 수 있었던 인사가 장군 한 사람이 고작이오. 아시겠소? 장군 한 사람 뿐이란 말이오."

루이에게 정치적 감각이 없다는 걸 눈치챈 덕인지, 나폴레옹 4세의 어조는 전에 없이 차분하였고 또박또박 말하며 루이에게 확실하게 뜻이 전달되도록 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청년 황제의 숨겨진 속사정일 것이라고 루이는 깨달았다. 가능한 한 루이가 알아서 깨달아주기를 바라며, 말하기를 꺼리고 있었다는 것도 말이다.

나폴레옹 4세는 머리를 부여잡고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대로 오스트리아 놈들을 혼쭐 내주고 확실한 승리를 거두었다면 아무런 뒤탈도 없었겠지만-알다시피, 일이 꼬여버렸소. 지금의 파리는 엉망이오. 아시겠소? 사회주의 폭도 놈들은 내가 장성하기 전에 크게 양보를 얻어내 보려고 압박하고, 섭정 의회는 짐을 잇는 듯 없는 듯한 꼭두각시로 만들려고 안달이오. 교회는 우리와 손을 잡자며 은밀히 권해오고 있는 마당이고.

하지만 지금으로서 가장 골치 아픈 건 군부요. 계엄령을 틈타 기업가들과 결탁하여 은밀히 뒷돈을 챙기거나 병사들을 앞세워 국유화하지 않아도 될 건전한 공장이나 상가까지 압류하여 제 잇속이나 채우고 있소. 현장 관료들로서는 병사들을 막을 방도가 없으니 그저 속수무책이고, 그들에게는 내 권위도 소용없으니-그저 온 프랑스가 저들 세상이나 다름없소."

시궁쥐 같은 노괴들 같으니라고. 그리 말하며 나폴레옹 4세는 투덜거렸다. 그제야 비로소 루이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뚜렷하게 보이는 듯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서 나폴레옹 4세에게 물었다.

"···그럼 소신은 이대로 파리에서 개선식을 거행하며 그와 같은 시궁쥐들을 쓸어낼 궁리를 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게 무슨 소리요? 쿠데타라도 벌이겠다는 거요? 그만두시오. 짐은 그런 걸 바라지 않소. 그리고 지금 정세는 그런 걸 논하기에는 지나치게 혼란스럽고."

루이의 강경한 태도에 당황한 듯, 나폴레옹 4세는 거듭 손을 저었다. 루이로서는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만일 나폴레옹 4세가 허락하였다면 그 즉시라도 계획하였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의아한 말이기도 했다. 쿠데타를 논하기에는 지나치게 혼란스러운 정세라니. 이미 계엄령까지 시행된 와중에 또 무슨 몸을 사릴 구석이 있단 말인가. 되려 지금으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계엄령을 틈타 제 잇속이나 채우는 시궁쥐들을 쓸어내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을까.

그런 루이의 심기를 읽은 것인지, 나폴레옹 4세는 머리를 부여잡고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는 길에 저지대가 지금 무슨 꼴이 났는지는 들었소?"

"아니오. ···제 부관인 조제프 대위가 결사코 말리는 바람에, 미처 신문을 읽지 못하였습니다."

"그럼 모르겠구려. 이번 개선식은 저지대에 대한 우리 프랑스의 무력과시이기도 하오. 아시겠소? 우리 프랑스가 아직도 충분한 힘을 갖추었음을 유럽 만방에 과시화기 위함이란 말이오."

"···혹, 지금 저지대에서 전쟁이 날 위기에 처한 것입니까?"

나폴레옹 4세의 말에, 루이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고 시작했다. 가장 유력한 가능성은 신성로마제국의 저지대 합병시도였다. 본디 벨기에, 네덜란드 등은 합스부르크의 영지였으니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그동안이야 육지로 단절되어 있었을뿐더러 오스트리아 본령이 동쪽에 치우친 까닭에 섣불리 나서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이제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럼 아무리 영국이 지금 휘청이고 있어도 당장에 움직이려 할 것이다.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신성로마제국의 손에 떨어지는 순간, 런던에서 신성로마제국까지의 거리는 고작 해봐야 40km 남짓. 신성로마제국에서 바람이 잘 불어주는 날에 배를 띄우면 개전 직후 2시간에서 3시간 안에 런던이 함락되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가능하다.

요컨대 영국과 신성로마제국의 재전쟁이다. 이 경우, 프랑스는 당연히 영국을 지원하여 신성로마제국에 맞서 저지대를 지켜야 하리라.

"전쟁이라? 아하, 장군은 신성로마제국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 우려하는구려. 차라리 그편이 낫겠지. 그편이면 차라리 낫소."

"그보다 사태가 심각하단 말씀입니까?"

그러나 나폴레옹 4세의 대답은 달랐다. 단순히 비꼬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영국과 신성로마제국의 전쟁이 일어날 위기인 편이 낫겠다는 어조였다. 깜짝 놀라 루이가 소리치자, 나폴레옹 4세는 신문을 품 안에서 꺼내어 건넸다.

고작 해봐야 하루 전에 나온 조간신문이었다. 그리고 신문의 첫 장은 짤막하게 머리기사가 만들어져 있었다.

"『벨기에 왕국, 42년간의 짧은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레오폴드 2세, 폭도들의 손에 주살.』"

"···멸망?"

"그렇소."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내용에 루이가 멍하니 중얼거리니, 나폴레옹 4세는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이야기였다. 그가 뭐라 되묻기도 전에, 나폴레옹 4세는 말했다.

"바로 어제 벨기에가 멸망했소. 굶주린 폭도들의 손에 의하여 말이오. 그 작은 나라가 견디기에 이번 대공황은 너무 거대했던 거겠지. 벨기에는 사라졌고, 그 남은 땅덩어리는 셋으로 쪼개졌소. 룩셈부르크 주와 독일인들은 신성로마제국에 편입되기를 원하고 있고, 플랑드르주와 네덜란드인들은 네덜란드에 편입을 원하고 있소. 그리고 왈롱 주와 프랑스인들은 우리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고 있지."

"맙소사."

루이로서는 그것 외에는 달리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벨기에를 두고서 열강 간 전쟁이 벌어질 것으로 예측했더니, 그럴 필요도 없이 이미 나라 자체가 멸망해버렸단다. 나폴레옹 4세는 나라가 셋으로 쪼개졌다고 표현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귀여운 상황일 가능성은 없었다.

영지를 지키려는 귀족들의 사병과 혁명을 외치는 시민군, 흐릿하게나마 행정력을 유지하는 지방 정부들의 지방군, 그리고 생필품을 강탈하려 날뛰는 도적단까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 속, 그나마 프랑스의 시선에서 보기에 유사 정부로나마 인정해줄 만한 정통성과 규모를 갖춘 곳이 3곳 정도로 추려진다는 이야기리라.

"그럼 우리 프랑스는 왈롱 주를 확보하면 되는 것입니까?"

한참을 고민하던 루이가 간신히 생각해낼 수 있었던 결론은 그것이었다. 아무튼 현지 주민들이 프랑스로 편입되기를 원하고 있다면, 굳이 사양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폴레옹 4세는 답했다.

"그런 셈이지. 편입이 마무리되거든, 내 경에게 왈롱 백작의 작위를 내리리다."

'돌고 돌아서 결국 그것인가.'

그러나 이미 속사정은 들었다. 물론 최선봉에서 시기와 공격을 한몸에 받게 되는 꼴이 되겠으나, 달리 말하자면 지금의 프랑스를 갉아먹는 시궁쥐들을 선별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올라섰다는 이야기 또한 되었다.

그럼 따를 뿐이다. 그리 마음속으로 되뇌며, 루이는 자리에 부복하여 황제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황제시여, 장수하소서. 기꺼이 프랑스의 방패가 되겠나이다."

나폴레옹 4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렇게 말한 것이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

한편, 같은 시각 런던.

"미쳐버리겠군."

대영제국 수상 디즈레일리는 그야말로 울상을 하고 있었다. 이유는 뻔했다. 바로 전날 기어이 벨기에 왕국이 멸망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하였다. 그의 조국 영국은 검은 월요일로 시작된 대공황의 폭심 지로서 힘을 잃었고, 덩달아 사실상 영국이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국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던 벨기에는 이미 검은 월요일이 한창일 무렵 벌써 국가파산을 선언했다.

그 뒤로 영국이 벨기에를 서둘러 되살렸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자유 방임 정책으로 사태에 대처할 적절한 시기를 놓쳤던 것이 뼈아팠다. 영국은 글자 그대로 미래를 위하여 준비해온 적금을 끌어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야 했다. 당연히, 그들 혼자서 살아남기에 바쁜 와중에 다 죽어가는 벨기에 경제를 신경 쓸 여력 따위는 없었다.

그 결말이 이것이었다. 간신히 식민지로부터 적금을 끌어와 구사일생한 영국이 벨기에를 떠올렸을 무렵 이미 사태는 종막에 다다라있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영국으로부터 동아줄이 올 거라 믿었던 레오폴드 2세를 위시한 벨기에 왕가는 폭도들의 손에 주살되었다. 벨기에는 공중분해 되었고, 영국은 그들의 아킬레스건이 하루아침에 어떤 열강의 손에 떨어질지를 두려워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무력개입은 불가능한가?"

"그 경우 프랑스는 무조건 왈롱 주의 할양을 요구할 것입니다. 혹은 벨기에 전역을 요구할 수도 있겠지요. 어린 황제로서는 당장에 시민들에게 과시할 성과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현시점에서, 프랑스를 적대하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그 말은 굳이 하지 않았어도 알고 있네. 그래, 오스트리아는 어떻지? 설마 그들도 전쟁을 불사할 태세인가?"

"아니요. 그들은 지금 독일 제후들과 제국의 향방을 논하느라 바쁩니다. 되려 범게르만주의에 경도된 일부 민족주의 혁명가들이 독단적으로 의용군을 구성하여 개입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는 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디즈레일리는 골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미 사태는 시시각각 위험수위로 다가가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다행히 독일을 통일한 이후 서진을 멈추고서 내부를 추스르고 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의용군의 개입은 충분히 가능하다. 당장 이탈리아 또한 가리발디가 이끄는 의용군의 손에 통일되지 않았던가. 비슷한 규모의 의용군과 독일의 민족 영웅이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제 발칸의 소국들을 윽박지르며 그들의 영향력을 공고히 만들고 있는 러시아에 신경 쓰기도 어렵게 되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상, 어떻게든 저지대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면 영국은 주변 열강들의 영향력 아래에 떨어지게 되리라.

그 열강이 프랑스가 되었건 오스트리아가 되었건 말이다. 디즈레일리로서는 그저 악몽 같은 현실에 눈을 질끈 감았다.

"벨기에 재건은? 가능하겠나?"

"함께 독립을 보장하였던 프로이센 왕국이 오스트리아에 귀속된 지금, 우리 영국이 저지대 사태에서 확실하게 주도권을 잡지 않는다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한마디로 어림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평상시의 영국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영국이 프랑스와 네덜란드 전부를 압도하여 벨기에 재건에 합의하도록 할 수는 없다. 디즈레일리는 이를 악물었다.

"맙소사. 그래, 그럼 차라리 네덜란드가 구 벨기에 왕국령 전부를 차지하도록 만드는 건?"

"그것이라면 가능합니다. 네덜란드 왕국은 현재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대비하여 총동원령을 내린 상황이니, 네덜란드군과 영국군을 합한다면 병력 자체는 충분합니다. 다만, 프랑스군이나 독일 의용군이 움직이기에 앞서 서두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움직이지 않고 무엇 하는 건가?"

"···장교들의 급료가 벌써 3달째 밀리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육군이 출병에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

결국은 돈, 돈, 돈이었다. 디즈레일리는 천장을 올려다보고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런 지경에 몰렸단 말인가. 그 천하의 대영제국이 런던 코앞에서 대혼란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섣불리 출병을 결심할 수 없게 되다니 말이다.

디즈레일리로서는 사비를 털어서 출병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고작 그 한 사람의 사비를 턴다고 하여도 그만한 돈을 마련하기가 쉬울 턱이 없다. 적어도 보수당 당원들 전부의 자산을 털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 그것이 쉽겠는가.

'인도에서 이 이상 세율을 높였다가는 또다시 봉기가 일어날 거다. 캐나다의 충성스러운 신민들에게는 이미 받아올 만큼 받아왔다. 아직 자립조차 불가능한 오세아니아는 논외지. ···또 어딘가 없나? 급히 돈을 끌어올 것이, 지금 당장에 돈을 끌어올 곳이···!'

없다. 없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이 이상은 없다. 네덜란드는 언제 낡아빠진 영유권을 들먹이며 오스트리아가 침공해올까 두려워 총력을 국경방위에 쏟아붓고 있는 형국이다. 프랑스에 돈을 꾸어서 프랑스의 확장을 견제하는 건 미친 짓이다. 미국도 영국의 여파로 덩달아 뉴욕 증시가 공중분해 되어버렸다. 홍콩? 어느 세월에 돈을 모아 어느 세월에 실어나른단 말인가.

글자 그대로 이제는 돈줄이 메말랐다. 더는 쥐어짤 구석도 없다. 덕분에 간신히 해군은 유지할 수 있었지만, 육군까지는 건져내지는 못했다. 그게 지금 발목을 잡고 있다. 하다못해 각국의 파견된 외교공관에 금붙이라도 모아서 국고에 보탰다. 여왕조차 그녀의 보석 장신구들을 기부하고 있다. 절망스러운 현실에, 디즈레일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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