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226화 (226/530)

< 돼지사냥 >

"저놈도 참, 출세했군. 하다 하다 로열 네이비에게 호위를 받게 된다니."

지평선에서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유람선을 바라보며, 이형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새삼스럽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다 하다 한국의 총리대신이 로열 네이비의 호위를 받으면서 귀국하다니 말이다. 그것도 일부러 기를 눌려주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뭔가 해코지라도 당할까 두려워 먼저 호위를 제안해온 것이었다.

타고 오던 유람선도 마찬가지다. 듣자 하니 수에즈를 통과할 무렵만 하여도 그리 대단할 것 없었던 것이, 영국령 인도에 잠시 정박한 사이에 최신형 쾌속 기선으로 교체되었다 했다. 한국으로서는 아직 자체적으로 선박을 만들 수 없다 보니 열강의 배를 빌려 타고 있었는데, 그 빌려 탄 배의 급수가 한순간 달라져 버린 것이다.

이형은 새삼 그가 무엇을 손에 넣었는지를 실감했다. 기술과 인적 자원조차 부차적 덤이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영국에게 가장 절실한 순간에 가장 절실했던 도움을 주었다는 것 그 자체.

'이걸로 영국은 다른 나라들을 잘라낼 수는 있어도 우리 한국과의 유착관계는 결코 잘라낼 수 없겠지.'

이형은 입꼬리를 뒤틀었다. 흔히 말하는 염치의 문제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 도덕이나 정에 의지하는 것보다 멍청한 짓이 없지만, 여기까지 오면 이야기가 다르다. 가장 절실한 순간 가장 절실한 도움을 줬던 은인을 내팽개치는 배은망덕한 나라를 신뢰할 나라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건 국가 간 관계 이전에, 기초적인 인간으로서의 신용 문제다.

만일 영국이 중국이나 미국처럼 평판에 신경 쓰지 말고서 본연의 힘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나라였다면 또 모르겠지만, 본국이 고작 해봐야 한반도와 비슷한 크기의 자그마한 섬나라라는 태생적인 한계 탓에 언제나 평판을 신경 써야 하는 영국으로서는 죽어도 이 은혜를 가벼이 넘길 수 없으리라.

이형이 그리 마음속으로 흡족해하는 와중, 배는 이미 기관을 멈추고 닻을 내리고 있었다. 곧 배가 멈춰서고, 철제계단이 내려왔다. 이형이 개선식에서 타고 온 호위함이 고작 해봐야 두 발로 걸어서 내려올 수 있는 수준의 높이였던 걸 생각하면, 따로 계단을 내려야만 사람이 타고 내릴 수 있는 유람선의 덩치는 그야말로 격이 다르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간 평안 무탈하셨습니까, 황상."

성큼성큼 계단을 타고 걸어 내려온 박규수는, 뭍에 발을 디딤과 동시에 이형을 향하여 엎드려 절을 올렸다. 피로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뿌듯함이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이번 순방에서 얻어온 것이 많다는 자신감의 반증이리라. 이형은 히죽 웃으며 답했다.

"암, 평안 무탈했다 마다. 경이야말로 참으로 수고가 많으셨소. 대금 지급을 일본에 떠넘긴 다라. 정말 참신한 기책이었소. 정말이지 하나를 가르쳐주면 둘을 배우시는 듯하오, 껄껄!"

"과찬이십니다. 소인은 그저 우리 조선 또한 상국이 되었다면 마땅히 상국에게 걸맞은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을 뿐입니다. 이 또한 북적 오랑캐들에 대처하기 위함일진대, 어찌 저들이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상국에게 걸맞은 마음가짐이라···. 풋, 푸하하핫! 그래, 그렇지! 암! 그간 당하면서 배워온 것이 있는데 조선의 사대부가 그것 하나 모를 리가 없었군그래! 이거 한 방 먹었소이다, 푸하하핫!"

"···애햄."

박규수의 대답에 이형은 배를 붙잡고 웃어댔다. 상국에게 걸맞은 마음가짐이라고 에둘러 말했으나, 결국 그간 청나라에서 조선을 상대로 두고두고 감 내놓아라. 대추 내놓아라. 달달 볶던 걸 그대로 일본에 돌려주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간 청에 시달려온 조선 사대부로서의 해묵은 감정을 드러낸 격이었다. 황후는 그걸 눈치챈 듯 작게 헛기침을 하였다.

그러나 핵심은 그것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청이 조선에 하던 것을 일본에 돌려주었다는 것.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청에 있어서 조선이 이제 대한에게 있어서 일본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본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지역 강국이라는 측면에서, 청에 있어서 조선이 곧 대한에게 있어서 일본이었으니 말이다.

가장 경계하고 혹여나 편을 바꾸지는 않을까 두려워해야 할 대상 또한 일본이었으나, 동시에 가장 옆에서 두고두고 대한에게 시달리게 될 상대 또한 일본이다. 청이 조선에 러시아와 싸울 병사들을 요청하고 조공품을 요구하며 이리저리 달달 볶았듯이, 이제 한국이 일본에 그리 요구할 처지가 되었다.

"그 치들도 이제는 따로 놀 수 없게 되었으니, 차차 배우게 되겠지요. 상국을 대하는 번국으로서의 자세를 말입니다. 그 나라에도 유생들이야 얼마든지 있으니, 배우고자 한다면 금세 배울 것입니다."

박규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형 또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말대로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일본이 한국을 대하는 태도는 아직 고작 해봐야 조금 강성해진 이웃 나라에 고분고분히 대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간 조공질서에 소속된 적이 거의 없다 보니, 상국을 공경하는 번국으로서의 자세를 익히지 못했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장차 한국이 주도하는 범아시아 조약기구 체제 아래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자처하려면, 중원이 주도하는 질서 아래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서 조선이 감내해야만 했던 짐 또한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리라. 다른 어떤 번국보다 상석에 앉으며 다른 어떤 번국보다 공경을 받는 만큼, 다른 어떤 번국보다 많은 간섭과 공물 요구에 시달리면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동아시아 세계를 구성하던 기본 중에 기본적인 외교철칙이 아니던가. 일본은 아직 번국으로서 상국을 공경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황제를 배알하여 삼궤구고두례를 올리지는 않더라도, 하다못해 상국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순응하는 법 정도는 배울 필요가 있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그들이 무언가 하나쯤은 배웠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그 말대로요. 마음 같아서는 경이 돌아온 것을 기념하여 또 한 번 거창한 환영 행사라도 열어주고 싶은 심정이오만-그건 뒤로 미뤄두도록 합시다. 다가올 정월에는 북경에서 북적 노서아를 상대로 승리하였음을 기념하면서 장차 중원의 제후국들을 통치할 번왕들을 정식적으로 임명할 예정이오. 그때 경이 이번에 구라파에서 거둔 외교적 성과 또한 함께 치하하도록 허리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저 정월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겠나이다."

박규수는 재차 고개를 숙이며 이형에게 예를 표했다. 평소보다도 배 이상은 점잖고 예의 바른 태도였다. 이형은 직감적으로 그가 무언가 청탁하려 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한국에 막 돌아온 직후라고 하나 망나니 황제를 상대로 이리도 저 자세를 보일 까닭이 없었다.

이형은 자못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소? 오늘따라 평소보다 배 이상은 점잖구려. 혹, 무언가 청탁이 있는 것이라면 곧장 말해보시오. 짐이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라면 기꺼이 들어주리다."

"···진정으로 그리하여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오. 얼마든지 말해보시오. 그래, 무엇이 그리도 급하여 짐에게 청탁을 넣게 되셨소?"

이형은 가슴을 쭉 펴며 박규수에게 물었다. 그가 청탁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줄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이자 신뢰의 표현이었다. 그런 이형의 모습에 박규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만 공직에서 물러나 초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한마디로, 사임하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이형은 한순간 할 말을 잃고 있다가, 문득 황후를 돌아보았다. 그가 전쟁 중 자리를 비운 사이 박규수와 가장 자주 정무를 논했을 사람이 그녀였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황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히는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은 이 일에 기본적으로 무관하다는 항변이었다.

이형은 다급하게 되물었다.

"어쩐 일이오? 혹, 무언가 병치레를 앓게 된 거요? 그렇다면 맡겨만 주시오. 내 곧장 솜씨 좋은 의사를 붙여주리다. 서역의 의사들이 고치지 못할 병은 그리 많지 않소. 그대가 원한다면 기꺼이 궁내부에 이야기하여 따로 예산을 마련해두리다."

"황송하옵니다. 하오나, 황상. 소신의 병은 의사가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마음의 병이지요."

"마음의 병? 마음의 병이라니.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요?"

이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거듭 물었다. 그에 박규수는 한숨을 내쉬고서는, 차분히 답하였다.

"···소신은 지쳤나이다. 헤아려주소서, 황상. 귀향을 허하여 주소서. 이 늙은이의 단 하나뿐인 바램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언사였다. 그러나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내포되어 있었다. 이형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차마 하지 못했다. 직감적으로, 그의 피로가 막무가내나 다름없는 자신을 대하다가 얻은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 어떤 만류의 언사를 입 밖으로 내뱉으려다가도, 턱 밑까지 올라와서는 굳건히 다물어진 턱에 부딪혀 차곡차곡 가슴에 쌓이기만 할 따름이다. 그래도 이형은 한참을 침묵하였다. 박규수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무수한 말들이 입안을 맴돌다가, 그저 차곡차곡 가슴팍에 쌓여만 갔다.

결국 한참 뜸을 들이던 이형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쉰 다음에야 겨우 입을 열고서 말했다.

"···정월까지만 함께해주시오. 아직 경을 보내주기에는 경의 빈자리가 너무 크오. 하다못해, 우리 대한의 시작까지만큼은 함께해주시오."

그것이 마지노선이었다. 그 이상을 요구하기에는 박규수의 뜻을 거슬러가면서까지 그를 무리하게 붙들어두고 싶지 않았고, 그 이하를 요구하기에는 당장 사정이 허락하지 않았다.

박규수는 선선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하명하신대로 따르겠나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형은 내심 입맛이 씁쓸해져 옴을 느꼈다.

예견해왔던 일이었다. 이미 한번 겪었던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저히 익숙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

한편, 그 무렵 뉴욕.

"이,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다고! 어디에서 뒤틀린 거지? 내, 내 원대한 제국이! 내 원대한 야망이! 도대체 어째서!"

"회장님, 냉정함을 되찾으십시오. 이로써 경쟁사들이 대거 도산하여 우리 JP 모건 코퍼레이션만이 우뚝 서게 됐-꺄악!"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고 있나! 그건 당연했던 거야. 당연했던 거라고! 내 원대한 야망의 고작 해봐야 첫걸음에 지나지 않았단 말일세! 이게 아니야. 고작 이걸로 끝날 리가 없어! 내 돈! 내 채권! 신대륙을 넘어 유라시아 전역을 내 발아래에 두려고 했던 내 원대한 야망이! 고작 이따위 예기치 못한 불운 따위에! 이건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반쯤 정신이 나가 발버둥 치는 광인이 있었다. 머리를 마구 쥐어뜯으며, 손수건을 마구 물어뜯으며, 탁자 위를 어지럽히고 있는 잡동사니들을 이리저리 집어던져 대며, 그를 말리려 했던 비서의 뺨을 후려쳐가며 흥분해 날뛰는 광인이 말이다. 그는 한때 뉴욕 금융계의 제왕이었던 존 피어몬트 모건이라고 하는 인물이었다.

아니, 엄밀하게는 한때라는 표현은 올바르지 않다. 그는 여전히 뉴욕 금융계의 제왕이었다. 그에게 비견될 만한 금융가는 어디에도 없었고, 유대 금융계조차 차마 그에게 대항하지 못하고서 고개를 조아리며 경의를 보였다. 그에게서 뒷돈을 받지 아니한 정치가는 이 미국 땅에 없었고, 그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딱 한 곳. 캘리포니아를 위시한 미국 서부 해안가 지대를 제외하고서 말이다.

"개, 개, 개, 개자식! 그 개자식이 내 제국을 망가뜨렸어! 그 개자식이 내 제국을 침략하고 있어! 개자식, 빌어먹을 자식! 그, 그, 그, 그깟 황인종 황제와 작당해서는! 잘도 이런 짓을! 잘도 이따위 행패를! 요, 요, 요, 용서 못 해! 절대로 용서 못 해-!"

모건은 게거품을 물며 날뛰었다. 이번 대공황으로 대서양 경제권과 그의 직할령이나 다름없던 미국 동부 해안가 지대가 몰락한 만큼이나, 비교적 대공황의 여파를 피해간 미국 서부 해안가 지대가 급속성장을 거듭하리라는 것이 명명백백하던 까닭이었다. 그것은 곧 모건의 단일 패권 체제에서 최소 양극 체제로, 어쩌면 그조차 넘어선 태평양 패권 체제로 이행될 가능성을 암시했다.

본디 영국과의 해운동맹을 체결하여 수출길을 연 것을 시작으로 세계 곳곳에 황금으로 이루어진 그의 제국을 세우려 했던 모건으로서는 그야말로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하다못해 뭔가 금융사기를 당하거나 그가 초대형 작전을 벌였듯이 다른 누군가가 벌인 작전에 당하여 이런 꼴을 당한 것이라면 차라리 더 나았으리라.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실수한 것이고, 실력이 부족한 것이니 말이다. 그럼 모건은 차라리 세계 경제를 손에 거머쥐기에는 자신의 그릇이 부족했다며 씁쓸하게나마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대공황은 그것과는 다르다. 그건 글자 그대로 불운이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천재지변과도 같은 일이었다. 신이나 악마에 준하는 초자연적인 존재의 농간이었다.

"빌어먹을 놈! 내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헌금을 쏟아부었는데! 내가 금은보화로 네놈의 교회를 도금시켜 주었을 텐데! 어째서 이런 짓을! 어떻게 이런 만행을! 이이익, 이익···!"

"거 적당히 좀 하시오. 사람이 기품이 있어야지, 쯧."

바로 그때 그의 성질을 벅벅 긁어오는 용감한 인물이 있었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목소리의 출처를 확인하니, 그곳에는 시가를 뻑뻑 피우며 술배가 토실토실 오른 동양인 남성이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지난 수년에 걸쳐 모건이 온갖 향락을 퍼부어 가며 타락시켰던 민치상이었다. 술도, 음식도, 육욕과 아편을 포함한 온갖 향락에 절다 보니, 이미 향수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장사치로서 살다 보면 돈을 잃는 것 정도야 일상다반사잖소? 쫄딱 망하여 저잣거리에 주저앉게 된 것도 아닌데, 소란을 부리기는, 쯧."

"역시 대감이셔요. 어찌 그리도 기품이 넘치시는지, 어쩜!"

"흐흐흐! ···에헴, 에헴!"

그런 민치상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모건이 보는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아니, 사실 어쩐 일인지야 뻔히 보이었다. 옆구리에 낀 애첩이 간드러진 목소리로 속삭이는 아첨에 얼굴을 실없는 웃음소리를 흘리는 꼴만 봐도 뻔했다. 그나마 저도 부끄러운 줄은 아는지 헛기침을 해대고 있지만, 그래 봤자였다.

"저, 저, 저···!"

'돼지 새끼! 죽일까? 총으로 쏴버릴까? 저 애완돼지 놈이 하다 하다 내 손을 물어뜯어···!'

평소라면 모건도 옆에서 아무렴 그렇고 말고요-하고 떠받들어줘야 하겠으나, 오늘은 달랐다. 모건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가뿐하게 수십, 수백만 달러의 자산이 증발한 와중에 눈앞에서 웬 꼴 보기 싫은 돼지 놈이 애첩을 끼고서 거드름을 피워대고 있으니 그야 기분이 좋은 턱이 없었다.

그러나 탁상서랍에 숨겨둔 엽총을 꺼내려다가도, 그는 몇 번이고 손을 멈췄다. 눈앞의 돼지가 한국의 외교관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그의 마지막 인내심을 지탱해주고 있었다. 만일 눈앞의 돼지를 모건이 총으로 쏴버리는 순간, 한국과 연루된 그의 나머지 자산들까지 동결-압류 순서를 밟게 되리라. 그것만은 안된다는 마지막 이성이 모건을 간신히 붙들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또 한 사람의 용감한 직원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간신히 민치상을 향한 살의를 억누르던 모건의 귓가에 속삭여 왔다.

"회장님, 긴히 드릴 말씀이···."

"또 뭔가! 내 시간을 낭비할 셈이라면-."

"한국에서 민 대감의 수사를 위하여 재외 무관을 파견하였다고 합니다."

그제야 모건은 활짝 웃었다.

얼마 후, 재외 무관으로서 부임함과 동시에 김옥균은 민치상의 신병 인도와 더불어 그를 기소하기 위한 모든 결정적인 증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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