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회소집 >
"과연, 미처 그걸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거 맹점이었군요. 이 일을 논하기에 앞서 먼저 배려했어야 하는 문제였는데, 죄송합니다. 정중히 사과드리지요."
이형의 대답에 벨로네 대사는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잠깐 놀라는 행세를 하고서 신속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실, 몰랐을 리가 없었다. 한국과 프랑스가 거래해온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10년간 가장 가까운 우방국으로서 거래해왔는데 프랑스가 미처 한국 해군의 빈약함을 생각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니겠소. 되려 먼저 이런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안배 해두었어야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유감스러울 따름이라오. 모두 짐이 부덕한 탓이오."
이형도 그리 놀라지 않고서 손을 저으며 이 일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구태여 프랑스에 진정으로 몰랐느냐고 추궁해봐야 좋을 것도 없을뿐더러, 프랑스의 고집스럽고 자존심 높은 면모를 생각하면 숙여서 손해가 될 것 없는 부분에서는 알아서 숙이는 편이 좋았다. 아무튼, 객관적인 국력 비교에서는 프랑스가 한국보다 한참 위였으니 말이다. 한국으로서는 아직 당분간은 아직 빌붙어야 하는 처지였다.
이형의 저자세에 만족스럽게 웃는 벨로네 대사의 모습을 보면서, 이형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아무래도, 프랑스에서는 한국과의 관계 변화를 작정하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건 이형이 의도하였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프랑스의 패권전략에 깊숙이 끌어들여졌다는 이야기였다. 이형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벨로네 대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 여기까지는 예정했던 대로다. 일단 프랑스가 영국과 슬슬 거칠게 부딪히려 한다는 건 확실한 것 같고, 그럼 어떻게든 영국의 영향력을 우리 한국에서 빼내려 하겠지. 여기서 관건은···프랑스가 그리는 한국의 역할이 프랑스의 부속품인가, 아니면 프랑스의 협력자 인가하는 부분인데.'
전자가 된다면 프랑스는 한국의 부족한 해군력을 프랑스의 극동 함대로 메우라고 할 것이다. 이는 단기적으로 한국이 동아시아 전역에 미치는 해군력을 가지게 되는 꼴이 되나, 그만큼 프랑스에 깊숙이 의존하게 된다. 육지의 한국, 바다의 프랑스가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장차 범아시아 조약기구를 위시한 한국의 아시아 패권까지 덩달아 프랑스에 종속되게 될 터다.
후자가 된다면 프랑스는 한국에 구식 전투함을 판매하겠다며 나설 것이다. 이 경우 당장 인도차이나 경영 같은 일들은 무리겠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이 아시아에서 수위권 안에 드는 자체적인 해군력을 보유하게 되는 실마리가 된다. 물론 영국처럼 세계 곳곳을 쑤시고 다닐 수는 없겠으나, 최소한 자국의 해상영향권을 수호하는 수준에서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절충안으로 두 가지 모두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면 프랑스는 작정하고서 한국을 우방국으로 삼으려 나서는 것이다. 그야말로 그들이 제안할 수 있는 모든 탄환을 들이밀면서 말이다. 이러면 이형으로서는 부정적인 대답을 주기 어렵다. 엄연한 세계 제2위의 열강인 프랑스가 그들이 줄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퍼주겠다고 나서는데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아닙니다. 어찌 그것이 폐하께서 부덕하신 까닭이겠습니까? 고작 10년에 지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극동의 변경국을 극동의 프랑스라 자부할 응당한 자격을 갖춘 문명국으로 탈바꿈시킨 폐하의 선정은 뭇 한국의 백성들은 물론이오, 우리 프랑스의 자유 시민들에게 있어서도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폐하께 부족한 것은 단지 시간과 적절한 지원일 뿐입니다.
하여, 제 조국 영광스러운 프랑스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귀국에 제안하신 바가 있습니다."
"호오, 제안이라. 그거 반가운 소식이구려.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경청하리다. 자, 귀국의 황제께서 짐에게 제안하신 바라니 도대체 무엇이오?"
"귀국 한국과 프랑스의 명예로운 동맹조약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어··· 이거 진짜 작정하고 왔나 본데.'
벨로네의 제안에, 이형은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 여기까지 오면 도저히 기뻐할 수가 없다. 한국의 의사와는 별개로 이제 이 제안은 거절할 수가 없어졌다. 그 자존심 강한 프랑스가 여기까지 이것저것 은혜를 베풀겠다며 접근해오는데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거나 대뜸 거절했다가는 지금까지 프랑스와 구축했던 모든 우호 관계가 무너질 판국이다.
이형은 직감적으로 본 역사의 영일동맹을 떠올렸다. 그때도 영국은 일본에 엄청난 특혜를 베풀어, 일본이 단번에 지역 열강으로 성장하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영국 혼자만으로 아시아에 영향력을 투사하는 데에 한계를 느낀 까닭에, 자국에 호의적이나 국력에서는 크게 떨어지던 일본을 키워주어 자국 대신 아시아를 통치하도록 한 것이다. 지금 프랑스의 구상은 아마 그때 영국과 크게 다르지 않거나 완전히 같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프랑스가 영일동맹을 대신하여 한불동맹을 제안해왔다면, 그 배경 또한 비슷할 터이다. 그때 영국은 아프리카 식민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하게 되고, 이로 인해 기존의 우방들과 척을 지게 된 상황이었다. 누구보다 동맹이 절실하던 상황인 것이다. 그러면 지금 프랑스도 새로운 동맹이 급한 상황일 거라는 예측 또한 가능했다. 그러나 그건 이형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스톡홀름 조약-에서 결정된 것은 사실상 현상 유지였었지. 영국은 독일의 패권을 침해하지 않고, 독일은 영국의 패권을 침해하지 않는다. 그런 내용이었다. 그럼 프랑스로서는 영국이 못 미덥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자기들 멋대로 프랑스의 가상적국과 손을 잡은 거니까. 하지만···그렇다고 프랑스가 동맹이 절실할 만큼 궁지에 몰린 것 같지는 않은데.'
이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생각하기로 프랑스에는 아직 이탈리아나 스페인, 오스만 제국 같은 우방들이 남아있다. 물론 하나같이 못 미더운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다. 스페인은 정치적으로나 치안적으로나 프랑스에 크게 의존하는 상황이고, 이탈리아는 신생국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오스만은 당장 몸을 풀고 있는 러시아에 마지막 쐐기를 얻어맞기 직전이다.
그러니 기존의 우방들에 실망하거나 회의를 느끼는 것 또한 당연하다. 동맹이라는 곳들이 하나 같이 제구실을 못 하고 있으니 믿을만한 우방을 하나쯤은 새롭게 가지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 특히나, 그 상대가 영국이라면 더더욱 더. 이형은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러시아···는 당분간 논외겠지. 크림전쟁에 이어서 이번 대전에서도 수십, 기백만은 서로 죽이고 죽였으니 당분간 프랑스의 우방이 될 수는 없어. 독일? 가상적국이다. 당연히 말도 안 될 테지. 미국? 글쎄.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중 선택해야 한다면··· 흐음, 애매하긴 하네. 그리고 상대가 미국이면 프랑스도 미국이 혹할만한 조건을 제시할 수가 없고. 덴마크 같은 유럽의 소국들은 당연히 논외.
페르시아는 식민지 상태. 나머지 기타 아시아나 아프리카권 국가들도 엇비슷. 일본은 누가 봐도 명백한 영국의 종속국. 그럼··· 으응, 확실히 우리뿐이긴 하군.'
이형은 머릿속으로 열심히 주판을 굴려 보았다. 여기서 한 번 튕겨보는 것이 수지타산에 맞을지, 아니면 반대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로 나서는 것이 수지타산에 맞을지를 말이다. 너무 질질 끌면 당연히 프랑스에서도 자존심이 상할 것이고 이야기도 흐지부지되겠지만, 적어도 한 번 튕겨보는 것 즈음은 외교 간의 관습이라 용인받을 수도 있을 터였다.
잠시 생각하다, 이형은 우선 벨로네 대사에게 직접 확인을 구해보기로 하였다.
"동맹이라. 그거 반가운 이야기구려. 우리 한국에 있어서도 귀국 프랑스와 같이 강인하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하는 고매한 나라와 동맹을 맺게 된다면 그보다 기쁠 수가 없겠소. 내 기꺼이 경청하리다. 귀국 프랑스는 어떤 조건으로 우리 한국과 동맹을 체결하려 하고 있소?"
"감사합니다. 그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우선 이번 동맹은 러시아 제국을 겨냥한 동맹임을 명시해두고 싶습니다. 양국이 함께 전쟁을 치를 때에는 공동 작전을 펴고 강화도 서로 간의 합의가 반드시 있는 경우에만 공동으로 치르도록 하며, 양국의 군사적 교류를 확대하기 위하여 매년 1학년 생활을 마친 육군 사관생도 30명, 해군 사관 학도 30명씩을 교환하도록 합니다.
또한, 양국은 관세동맹을 맺도록 하며, 향후 프랑스는 한국과 그 제후국과 자유로이 교역할 수 있되 한국 또한 우리 프랑스의 종속국들과 자유로이 교역할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또, 이번 조약은 15년의 유효기간을 두고 싶습니다. 어떻습니까?"
"···실로 과분한 말씀이로구려. 감사하오."
'단지 군사적 교류를 확장하는 수준이 아니라 관세동맹이라···. 으으음.'
이형은 눈을 찌푸렸다. 분명 관대한 제안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관대하다 못해 과분하기까지 한 협력이다. 그러나 동시에 위험한 제안이기도 했다. 관세동맹까지 체결되어버리면 한국을 포함한 범아시아 조약기구 전체가 프랑스의 산업규격을 따르게 될 것이고, 프랑스 프랑이 아시아의 기축통화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럼 프랑스에 경제적으로 종속당하는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프랑스와 손을 끊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프랑스 또한 한국과 손을 끊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한국 하나면 모를까 아시아 시장 전부를 공유하게 되어버리면 프랑스가 거기에서 얻을 이익은 절대 적지 않다. 프랑스산 공업 제품들의 못 해도 3~4할 이상이 아시아 시장에 배분될 것이다.
이익은 누가 봐도 명확하나, 동시에 부작용도 누가 봐도 명확했다. 이형으로서는 현시점에서 프랑스에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내는 대가로 프랑스와 운명공동체가 되는 것이 과연 옳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건 나 혼자서 결론 내려서는 안 될 것 같군. 지금 프랑스의 손을 잡는다면 얻을 이익과 손해가 너무 크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쯤 되면 앞에 익스트림 하이 즈음은 붙여둬야겠어.'
"잠시만 시간을 주실 수 있겠소? 보름이면 충분하오. 내 의회와 이 일에 대하여 논의하고 싶소이다."
"그야 물론입니다. 폐하, 언제건 찾아와주십시오. 다만, 너무 기다리게 하시지는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그러면 폐하께 대접해드릴 맛 좋은 보르도산 포도주가 시어 버릴 테니까요."
"호오, 그거참··· 험험."
내심 술 이야기에 혹한 이형이었으나, 애써 꾹 눌러 참았다. 제아무리 술을 좋아하는 이형이더라도, 이번 일에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기에는 사안이 너무 컸다. 그런 이형의 모습에 벨로네 대사는 내심 아쉽다는 듯이 작게 혀를 찼다. 역시 그리 쉽게 일이 풀리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이형은 그 이후로도 잠시간 벨로네와 소소한 잡담을 나누고서, 곧장 의회를 소집하였다. 대한제국에 있어서는 처음으로 황제가 의회와 국사를 논한다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그래서 그 역사적 순간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하면.
"-하여, 불란서에서 우리 한국에 동맹을 청해왔소. 경들은 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오?"
"마땅히 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 10년간 불란서가 천하의 백성들을 도운 바는 옛 주명이 조선을 도왔던 바와 비교해도 결코 뒤처지지 않습니다. 마땅히 동맹을 맺는 것이 옳은 줄 아뢰옵니다."
"실로 그러합니다. 소신이 보고 듣기로 영길리는 금수와 다를 바 없는 도적의 무리이나, 불란서는 군자의 나라라 하였습니다. 하나 지난 공황으로 구주의 천하가 어지러운 가운데 영길리를 돕는데 정신이 팔려 불란서를 소홀히 하고 말았으니, 어찌 이것이 참된 군자의 도리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란서에서는 이 일을 괘념치 않고 먼저 손을 내밀어 왔으니, 마땅히 이를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불란서는 구주의 대국입니다. 우리 한국이 동방의 대국이 되었으니, 두 대국이 응당 손을 마주 잡고 천하를 논한다면 천지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엎드려 청컨대, 황상께서는 망설이지 마소서."
순전히 프랑스에 호의적이거나 찬양하는 반응이 일색이었다. 의원들은 프랑스를 군자의 나라라 부르기를 망설이지 않았고, 프랑스가 먼저 동맹을 제안해왔다는 말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 당연히 손을 마주 잡아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 대부분이 개국에서부터 강남 대기근, 천명 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사건 속에서 불란서에 은혜를 느끼고 있던 까닭이다.
이형으로서는 떨떠름한 일이었다. 물론 지난번처럼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보다 지금처럼 뭐라도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낫지만, 그것도 때에 따라서지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서 그럴듯해 보이니 우선 받아야 한다는 식의 모습은 그리 높이 평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저번에 의견을 제시해보라고 닦달한 것은 다름 아닌 이형 본인이었던 만큼, 이를 두고서 뭐라 불평하기에도 곤란했다. 한참을 말없이 잠자코 의원들의 의견을 경청하던 이형은, 총리대신으로서 의회에 출석한 박규수를 흘끗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 경의 생각은 어떻소. 경이 생각하기에도 이번 불란서와의 동맹을 받아들여야 옳다고 보시오?"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오나, 그 또한 상책이겠지요."
"흐음, 어째서 그렇소?"
"군비가 날로 부풀고 있는 까닭입니다. 지금과 같은 군비를 계속 유지하고자 한다면 장차 나라 살림은 궁핍해질 것이며 백성은 언제나 고된 노역에 시달려야만 할 것입니다. 하오나 불란서와 동맹을 맺어 우리 한국의 위신을 천하 만방에 떨친다면 불란서가 두려워서라도 감히 우리 한국에 대적하는 이가 크게 줄어들 테니, 장차 나라 살림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나마 지금껏 나온 대답 중 가장 한국의 국익을 생각하여 내놓은 답안이었다. 이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규수의 말대로, 프랑스와 동맹하게 된다면 지금도 여전히 한국이 휘청이는 틈을 노리고 있을 중원 각지의 군벌들도 섣불리 행동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여차하면 프랑스가 개입한다는 증표가 되니 말이다.
그건 곧 한국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프랑스에 의존한 권위에 의존하게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이 동맹 자체가 프랑스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형은 마음이 기울고 있음을 느꼈다. 의회는 물론이오, 박규수 또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만큼, 여기서는 프랑스에 의존하게 되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 듯 보였다.
이형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좋소. 그렇다면 표결을 시작하리다. 모두 투표지를 나눠 받고 나면 찬성인지 반대인지를 적고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때였다. 돌연 문이 활짝 열리며 숨을 헐떡이는 남성 두 사람이 뛰쳐 들어왔다. 느닷없는 난입에 혹 암살자인가 하여 허리춤에 손을 댔던 이형은, 그 얼굴을 본 순간 경계를 풀었다. 익히 알고 있던 인물이던 까닭이다.
"참조연설을, 할 기회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힘없이 손을 들어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건 영국의 토마스 공사와 그 수행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