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241화 (241/530)

< 뒤처리 >

"이 바게트 놈들이 기어이 내 뒤통수를 쳐!"

파앙-.

한불동맹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은 곧장 런던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디즈레일리가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분을 참지 못해 토마스 공사가 작성한 보고서를 탁자 위에 내던져버리는 것이었다. 열불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한국이 프랑스의 우방이 되었다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일찍이 예견되어 있었던 일이기는 했다. 프랑스는 한국을 가장 먼저 개항시킨 열강이었다. 당연히 영향력도 다른 열강에 비하여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도 한국은 영국보다는 프랑스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왔고, 지난 전쟁에서도 협력해왔다. 그 천하의 프랑스가 극동 같은 변방의 지역 열강과 대등한 동맹을 맺을 생각을 했다는 게 놀라울 뿐이지, 동맹 그 자체가 놀라운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걸 막지 못했던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문책해야만 옳았다. 예측 가능했음에도 막지 못했다는 건, 결국 어디선가 정해진 업무를 마저 다하지 못한 부서가 존재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입이 뚫렸으면 말해보시게. 나도 가슴속에 새겨두고서 조금 뒤에 여왕 폐하께서 듣는 앞에서 이 사실을 낭독해야만 할 때 변명거리로 쓸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자세하게, 그리고 천천히 말이네. 왜 현지의 공사는 이 사실을 알고서도 사전에 막지 못했던 건가?"

그리고 이때 가장 먼저 추궁해야 할 상대는 역시 로버트였다. 현 내각에서 외교를 책임지고 있는 건 다름 아닌 그였으니 말이다. 충분히 예측된 사태를 막지 못했다는 건 로버트의 씻을 수 없는 실책이 될 공산이 컸다.

"프랑스에서 크게 나왔습니다. 미끼로 코친차이나를 들고나왔다고 들었습니다. 만일 현지의 공사가 이를 저지하고자 했다면 적어도 이보다는 더 큰 미끼를 제시해야만 했을 겁니다."

로버트는 가능한 한 평정을 가장한 모습으로 답했다. 속내까지 편치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 증거로, 그의 아랫입술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오는 길 내내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는 방증이었다. 책임을 추궁당하는 건 피할 수 없겠으나, 그로서는 억울했다. 프랑스가 한국과의 동맹을 원했다는 건 예측할 수 있어도, 그 누가 인도차이나까지 팔아치워 가며 동맹을 맺으려 할 거라 예측한단 말인가.

그것도 나폴레옹 3세 시절에는 그야말로 국운을 걸고서 어떻게든 지키려 했던 소중한 식민영토를 말이다. 이래서야 사전에 예측하더라도 일개 공사로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외교거래일 수밖에 없다. 이를 막으려면 적어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준하는 대가를 제시해야 할 텐데, 이는 일개 공사 자격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맙소사."

그러니 로버트의 대답에 디즈레일리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는 것밖에는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식민영토와 맞바꾼 동맹이라니. 결코, 평시의 프랑스가 내릴 결단이 아니다. 요즈음 왈롱 주를 병합했다고 하나, 식민영토를 팔아치우는 것이 어디 예삿일인가. 디즈레일리는 휘청이며 탄식을 내뱉었다.

"그럼 전쟁성의 예측이 옳았군. 장차 프랑스는 아프리카를 수중에 거머쥘 작정인가."

"예. 아마 틀림없을 겁니다. 아프리카에 집중하기 위하여 한국과의 협력을 더욱 강화할 작정인 거겠지요. 빠르면 올해 안에, 늦어도 다음 해 중에는 새로운 식민영토 확장계획안을 내놓겠지요. 그럼 프랑스의 식민계획은 필연적으로 우리 대영제국과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짧았던 동맹은 이걸로 끝장났군. 하기야, 돌이켜 생각해보면 잠시나마 손을 잡았던 게 이상했었지. 프랑스와의 동맹이라니, 아서 경께서 아직 살아계셨다면 필히 기함을 했을 거야."

디즈레일리는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공황의 충격도 이제 막 간신히 조금 덜려고 하는 차에 또다시 프랑스와의 경쟁이라니. 독일과 조금 화해를 이룩하자마자 이런 꼴인가. 끔찍하다는 표현 외에는 달리 생각나는 표현이 없었다. 이래서야 나라를 쉬게 할 새가 없다.

디즈레일리는 탁자를 검지로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번 황제는 저번 황제 이상으로 정력적이고 결단력도 상당한 모양이로군.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이 청년 황제의 결단이 우리 영국에 있어서 호재가 될 것 같나 아니면 악재가 될 것 같나."

"장기적으로는 프랑스의 악수가 될 공산이 커 보입니다. 프랑스가 아프리카를 선점하게 되면 뭇 열강의 견제를 받게 될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현실적으로 프랑스의 확장을 견제할 방법이 없으니 우리 영국의 악재입니다."

"내 생각도 그와 같네. 그럼 한국과 프랑스의 동맹은 어떠한가. 이제 한국은 프랑스의 둘도 없는 우방이라 봐야겠나? 그러니 내 말은, 우리 영국이 손을 봐줄 필요가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일세."

"아니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현 한국의 황제는 여우처럼 영악한 인물입니다. 대외적으로는 친 프랑스를 표방하겠으나, 프랑스를 위하여 우리 영국을 적대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아마 지금쯤 프랑스를 이용하려 하고 있겠지요. 무엇보다 한국의 황제는 대공황이 시작되었을 무렵 가장 먼저 우리 영국을 돕고자 했던 이방인입니다.

그런 그가 프랑스를 위하여 우리 영국을 먼저 적대하리라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마 지금 한국의 황제는 프랑스의 접근을 반갑게 생각하기보다는 거북해하고 있을 겁니다. 프랑스에 얻어올 수 있을 것은 이미 모두 얻어온 다음이니까요."

디즈레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의 황제를 직접 만나고서 돌아온 로버트의 말이었다. 영국 국내에 그보다 한국의 황제를 잘 아는 인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연히 신뢰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그 또한 지난 대공황 와중 한국이 보여준 인상적인 행보를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의 황제가 프랑스를 위해 영국을 적대할 생각이라면 그런 행동을 보여주었을 리가 없다.

그럼 현 한국 황제의 대외정책은 철저한 실리주의적 외교관이라고 간주하는 게 옳았다. 좌우지간 자국에 이익을 베푸는 나라를 따라가겠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익을 나눠주는 동안에는 말이다. 머릿속이 정리된 디즈레일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 영국을 위하여 프랑스를 적대하지도 않겠군."

"그야 물론이겠지요. 아마 동맹을 맺은 이상 프랑스를 위하여 이런저런 특혜를 베풀기도 할 테고, 군사적으로 프랑스와 기민한 협력을 유지하기도 할 테지만 그것뿐일 겁니다. 한국은 다소 프랑스에 기울어진, 회색지대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겠지요."

"그럼 정해졌군. 어차피 한국의 황제가 먼저 산업화를 도와달라 요청하기도 했으니, 딱 저들이 프랑스에 아주 완벽히 잡아먹히지 않을 정도만 키워주세나. 지금 저대로 두었다가는 꼼짝없이 프랑스에 종속되어 버릴 거야.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독자적인 축으로 계속하여 움직일 수 있도록 두는 편이 낫겠지.

이제 와서 우리 영국이 집어삼킬 수도 없을 테고, 저들이 우리 영국과 프랑스 모두와 친한 회색지대로 남고 싶어 한다면 그리 두세나."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각하."

로버트는 가볍게 고개를 꾸벅여 디즈레일리에 경의를 표했다. 디즈레일리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피로했다. 전쟁에서 패하고 대공황으로 경제가 엉망이 되었으니 다음 총선은 이미 패배가 확정된 격인데 하루가 다르게 직무만 늘어나고 있으니 피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이 많아도 나중에는 모든 게 달라질 거라는 희망적 관측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그조차도 없었다.

이럴 바에야 공연히 조기 총선을 실시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후회만 머릿속을 감돌았다. 모든 실패의 책임은 보수당과 그가 짊어지게 될 테니 향후 십수 년간은 계속 자유당이 압승을 거둘 텐데, 그럼 결국 그의 정적인 글래드스턴만 좋은 일이 아닌가. 이대로 그냥 모든 뒤처리를 글래드스턴에게 떠넘기고서 모든 책임을 통감한다며 사임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하여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모든 책임을 글래드스턴에게 떠넘기고 신세 좋게 시골로 내려가는 건 결국 도망이었다. 그것만은 있을 수 없었다. 모든 일에 성공을 거둘 수는 없을지언정, 책임을 회피하고서 도망치는 건 도저히 그의 성정에 맞지를 않았다.

"각하, 라. 그렇게 불릴 날이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까."

"각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지나치다, 라. 글쎄, 지나친 건 하늘에 계신 분이시라 생각하지 않나. 전쟁에서는 패하였고, 대공황으로 백성은 굶주리고, 공화주의 역도들은 그 어느 때보다 기세를 올리고 있는데 여왕 폐하께서는 내게 총애를 거두시려 하고 있네. 간신히 독일과 화해하여 유럽의 평화를 되찾으니 이제는 프랑스가 말썽이야.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 이런 고난만 내게 주신단 말인가.

이래서야 앞으로 남은 임기를 다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여왕 폐하께서 날 해임하시는 게 먼저일지, 분노한 백성들이 날 형장으로 보내는 게 먼저일지, 아니면 내가 내 입에 총구를 쑤셔 넣고서 방아쇠를 당기는 게 먼저일지. 허허허."

디즈레일리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두려움이 들었다. 대공황과 여왕의 아집으로 시작된 전쟁으로 그 어느 때보다 공화주의자들이 힘을 얻고 있는 현실이었다. 만일 지금 여기에서 무언가 하나라도 추가 쐐기가 꽂힌다면, 그때야말로 장대 위에 목이 걸릴지도 모른다. 아직 그런 징조는 없으니, 대공황은 어디 그런 징조와 함께 시작되었던가.

그저 답답하고 암울했다. 낭만이 그리웠다. 흔들의자에 앉아 다리에는 담요를 덮고서 위대한 선현들의 족적을 읽으며 난롯불을 쬐는 소소한 여유가 그리웠다. 디즈레일리는 그의 담뱃대에 불을 붙인 다음, 그 매캐한 연기를 있는 힘껏 빨아들였다. 그 뒤에야 디즈레일리는 입안 가득히 매연을 내뿜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아프리카 확장야욕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옳다고 생각하나. 이탈리아가 우리 영국을 위하여 움직여 주겠는가?"

"아니요, 지난 대공황 때의 여파로 이탈리아인들은 우리 영국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 프랑스의 손을 들겠지요. 독일과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프랑스의 협력이 필수적일 테니까요."

"스페인···도 지금 프랑스 놈들이 나라를 유지 시켜주고 있었던가. 훌륭해. 그럼 또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로군. 언제나 대로의 얼굴들이야. 이제는 지긋지긋해. 하나 정도쯤 더 끌어들일 나라가 달리 없는가?"

"딱 한 곳, 이 남아있기는 합니다만··· 사실, 이 또한 지금으로서는 가능성에 불과해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디즈레일리는 말없이 로버트를 바라보았다. 어디 설명해보라는 것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로버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독일은 아마 급한 불은 껐으니 당분간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는 데 총력을 다하겠지요. 미국도 대공황에 직격타를 받아 당분간은 바다로 나올 수 없을 테니, 남는 건 하나뿐입니다."

"그러니까 어서 말해보게. 그들이 아니라면 어디란 말인가?"

"···현지 아프리카 국가들입니다. 라이베리아, 트란스발 공화국, 에티오피아 제국, 메리나 왕국 등이 이에 속하겠지요. 현 영국의 제한적인 국력 투사로는, 이들을 지원하여 프랑스의 아프리카 정벌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도록 하는 게 최선···이라고 여겨집니다."

머뭇거리며 로버트는 답했다. 그 또한 확신이 없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이를 제외하면 달리 대안이 없었다. 도저히, 여력이 나오지를 않았다. 적어도 5년에서 10년 후라면 그럭저럭 개입할 여력이 나오겠으나, 당장 빠르면 올해 중에 늦어도 이듬해라는 시간제한이 붙어버린 이상 이 수밖에는 없었다.

디즈레일리도 그저 헛웃음을 흘렸다. 기가 막혔다. 본래라면 식민지로 삼으려 예정이 잡혀 있던 나라들과 손을 잡으라니. 웃다가 눈물이 다 나올 것 같았다. 그나마 트란스발 공화국은 아프리카 남단에 정착한 네덜란드인들이 세운 나라기라도 하지, 나머지는 순 흑인투성이가 아닌가. 라이베리아는 미국의 자유 흑인들이 세운 나라라지만, 그래 봐야 거기서 거기였다.

디즈레일리는 체념한 듯 말했다.

"그들이 하다못해 바게트 놈들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질 수 있기를 빌지."

어처구니가 없는 현실이었다.

***

정월, 북경.

"드디어 이날이 왔구나."

한성근은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그러나, 그것이 지난 수 년여간 겪었던 모험과 고난으로 가득 찬 여정을 모두 설명해주지는 못하리라. 위기도 있었다. 방해꾼들도 많았다. 하지만, 실패는 없었다. 그렇기에 오늘이 왔다.

북경성 가득히 펄럭이는 태극기들이 세차게 펄럭이며 울부짖는 것이 들렸다. 오와 열을 맞추어 나란히 마주 선 10만의 청년들이 발하는 뜨거운 열기는 정월의 추위마저 녹여내고 말았다. 흑갈색의 제복은 심연과도 같아 천지의 빛을 훔쳐내고, 하늘 높이 치켜세운 총검은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가시나무 같아 감히 제국에 대항하려는 자들에게 죽음을 느끼게 하리라.

그 앞을 걷는다. 말 위에 올라, 장군의 정복을 입고서 걷는다.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그리고 하늘 높이 쌓아 올려진 제단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황제를 올려다보며.

'내 이날이 오기만을 얼마나 고대해왔던가?'

한성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율이 일었다. 제단 위에서 그를 무심히 내려다보는 황제의 시선에, 한성근은 무심코 탄성을 지르고 싶어 하는 저 자신을 어떻게든 억눌러야만 했다. 황제의 뒤로는 이미 번왕으로서 책봉 의식을 마친 이씨 종친들이 보였다. 하지만 신경 쓸 거 없었다. 어차피 저들은 보기 좋으라 갖춰둔 간판에 지나지 않는다.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심만 한한 세력가들에게 대한에 복종한다는 상징물을 내려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오늘의 주인공은 저 자신일 것이다. 적어도 한성근은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전주 이씨의 종친들조차도, 10만의 장병들조차도, 그 배를 족히 넘는 인파도, 결국 모두 자신을 돋보이게 해주기 위한 덤이다. 그리 생각하니, 절로 눈앞이 아찔해졌다.

한성근은 술을 마시지 않았음에도 취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의 현실이 언제까지고 계속되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조급한 말은 어느새 그를 황제의 바로 앞까지 데려다주고 말았다. 그 즉시 한성근은 말 위에서 뛰어내리며 그의 황제를 향하여 엎드려 절을 올렸다.

"황상! 옥체 건강하신 듯하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지시하신 바 소임을 다하고 이렇게 다시금 황상을 뵙나이다!"

무심한 황제는 그제야 슬며시 웃으며 답했다.

"그래, 수고가 참으로 많았소."

한성근은 뜨거운 전율이 정수리에서부터 꼬리뼈까지 타고내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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