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쿨리 >
'일단 애국당 딱지 달고 있을 자격은 충분하군. 일단 우리 한국의 국익만 따졌을 때는 나쁘지 않은 발상이야.'
김가진의 제안을 듣고서 이형의 머릿속을 가장 먼저 스쳐 지나간 건 그러한 생각이었다. 아무튼, 당장 김가진의 제안에 한국이 손해를 보는 부분은 없다. 이미 신대륙의 여러 나라와 열강들은 흑인들을 대신하여 중국 각지의 중국인들을 납치하여 노예나 다를 바 없이 끌고 가고 있었다. 김가진의 제안은 이미 불법적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을 수면 위로 올려 나라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또 수익을 낼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에 가깝다.
한국의 국익 측면에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다. 갈 곳이 없는 난민들을 수용해서 억지로 먹여 살릴 궁리를 하느니, 당연히 신천지에 이주시키면서 동시에 구아노를 비롯한 이런저런 물산들을 받아오는 게 이익인 건 당연한 이치다. 우선 당장 먹여 살릴 입이 확 줄어드니 말이다. 무엇보다 저들은 한국 국민도 아니다. 저들이 빠진다고 한들 국가 경제에 뭔가 위기가 발생하거나 구멍이 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겉으로 보기에 문제는 없다. 당장 굶주려서 방황하는 난민들에게 신천지라고 널리 선전되고 있는 신대륙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건 대단히 매력적인 제안일 테니, 난민들을 조금 부추기기만 해도 금세 신대륙으로 가겠다며 나설 것이다. 되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딱 한 가지다.
"확실히 지금 당장 구아노를 사 오는 데에 큰 도움이 되겠으나, 그 계책에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군."
"말씀하여 주십시오. 황상께서 교시하시는 대로 수정하겠나이다."
"그들이 다시 아시아로 돌아오고자 할 때, 혹은 그들이 그 나름대로 현지에 정착하는 데 성공하여 본국을 도우려 할 경우는 어떻게 하나. 만일 장차 중원에서 이변이 발생하였을 때 신대륙의 중국인들이 이를 도우려 움직인다면, 필히 큰 골칫거리가 되지 않나."
이형은 일제강점기 시절 재미교포들의 활동이나 중일전쟁 시기 중국계 미국인들의 활동, 그리고 아일랜드 독립전쟁 당시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의 활약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들의 모금 활동과 물자지원은 현지 저항 활동에 적지 않은 이바지를 해왔다. 특히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의 재정지원은 실로 인상적이어서, 아일랜드가 영국에게서 독립하는데 결정적인 이바지를 했다고 평가될 정도다.
신대륙이 자유와 기회의 땅이라 불리는 까닭이다. 제아무리 노예나 다를 바 없이 신대륙에 발을 디뎠다고 한들, 세대가 흐르고 약간의 운과 노력이 겹치면 그 어떤 민족이라도 성공할 수 있다. 그런 신대륙에 아시아의 인구조절을 위하여 무턱대고 중국인들을 밀어 넣다 보면, 언젠가 신대륙 전체에 친중 여론이 조성되어 한국에 맞선 중국계 반군의 활동을 지원하게 될 터이다.
짧게 보면 몰라도, 길게 보면 자충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김가진은 이를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제가 듣기로 미리견에서는 자국의 목화 농사를 위하여 비주 대륙의 흑인들을 대거 노예를 가져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흑인이 노예인 건 아니지요. 더더욱이, 지난 미리견 내전 이후로는 노예 해방령이 뒤늦게나마 선언되어 비로소 저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리견의 흑인들이 비주 대륙의 동포들을 돕는데 열성적이라는 이야기는 미처 듣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미리견과는 달리 중남미의 여러 나라 중에는 아직도 노예제를 철폐하지 않은 나라들이 널렸습니다. 과연 그들 나라에 난민들이 이주한다고 한들, 과연 우리 한국에 위협이 될 수 있을 만한 세력을 갖출 수 있을는지요."
"흐음···."
여기에 대해서는 이형도 뭐라 해줄 말이 없었다. 아직 마땅히 이에 반박하려고 들어줄 예시가 없는 까닭이었다.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에 의한 아일랜드 독립운동 지원 활동조차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전인데, 하물며 신대륙의 인종차별에 대하여 개략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듯한 김가진을 상대로 후일 미국계 중국인들이 위협될 수 있다고 말해봐야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인종차별이 당연시되고, 또 이에 대한 사회적 문제 제기도 드문 세상인 까닭이다. 아닌 말로 김가진의 입장에서는 중국인 저임금 노동자들을 서양인들이 노예나 다를 바 없이 끌고 가고 있으니 아예 난민들을 처리할 겸 국가 차원에서 이를 이용하자는 제안을 하는데 노예나 다를 바 없는 쿨리들이 한국에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으니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이형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 우선 당분간은 그 안에 따르도록 하지. 지금으로서야 먹일 입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이야기는 없을 테니 말이네. 먹일 입을 줄이는 한편으로 식량 생산량을 크게 늘릴 질 좋은 비료를 대거 사들이는 꼴이니, 그야말로 일거양득이 따로 없군."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 이상으로 지독한 놈이야. 국익을 위해서라면 윤리에 다소 어긋나는 사업에 손대도 괜찮다, 이건가. 사실 지금 열강들이 다들 하는 일들인 건 맞지만, 이 조선 땅에서 유자 출신이면서 이런 발상을 해냈다면··· 흐음, 우선 기억해둬야겠어.'
그리 말하며 김가진은 이형을 향해 꾸벅 허리를 굽혔다. 이형은 그런 김가진을 빤히 바라보며 내심 평가를 고쳤다. 단지 의욕이 넘치거나 애국충정에 불타오르는 청년은 아니었다.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이나 할법한 발상을 태연하게 해내고서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없이 공공연히 기책이라며 제시하는 거 보면, 국익 지상주의적 측면에서는 현 한국 내에서 누구보다 서구화된 인물이라고 평가할 여지도 충분했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기도 했으나, 또 동시에 숨겨진 보석을 찾아낸 것과도 같았다. 결국, 누군가는 이러한 일에 종사해야 하는 법이니 말이다. 이형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거야 원, 봉준이 녀석이랑 같이 일을 하게 했다가는 큰일 날 놈일세. 프로이센 놈들이 이 녀석에게 효율 지상주의 하나는 제대로 가르쳤구먼. 그런 놈이 만들어낸 5개년 경제개발계획이라···.'
"계획은 어디까지 완성되었나?"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이형이 물었다. 김가진은 그에 선선히 답했다.
"늦어도 이번 보름 중에는 제출할 수 있겠습니다."
이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시안도 보지 않았으나, 대강의 내용이 이미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그 길은 필히 다른 누군가의 피와 눈물과 진흙으로 더럽혀진 부국강병의 길이리라. 그리고 그 진흙탕투성이의 길을 한국은 장화를 신고서 걸어갈 것이다.
다른 누군가로 만들어낸 장화를 신고서 말이다.
***
"그렇지만 너무 젊어. 아니면 그냥 타고난 성정인지도 모르겠지만-소를 탐하다가 대를 잃기에 딱 좋은 부류야. 아마 고리타분한 선비들에 대한 반감 때문에 저러는 거겠지만, 명분을 완전히 도외시하고서 국익만 추구하고 있으니 원."
"예, 예? 저···말씀입니까?"
"아니, 봉준이 너 말고. 가진이 놈 말이다."
김가진이 떠나고 난 다음. 이형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전봉준을 향하여 빙긋이 웃어 보였다. 전봉준은 처음에는 가진이 누구인지 떠올리지 못하여 눈을 꿈뻑 거리다가, 뒤늦게 그것이 김가진을 의미하는 것이라 깨닫고서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형은 그런 전봉준을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 이런 이야기를 해보자.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으나, 요즈음 중원에서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무지렁이 백성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계약서 하나에 잘못 서명했다가 신대륙으로 납치되어 끌려가는 경우가 흔하다. 그렇게 끌려간 이들은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으며 두 번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지. 사실상 노예매매와 다를 바 없다.
봉준아, 너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드느냐? "
"그야 당연히 그 못된 놈들을 때려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 하나 모르는 무지렁이 백성들을 속여 멋대로 납치해가다니, 그게 도적 떼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습니까? 그런 자들은 상인이 아니라 해적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럼 이야기를 바꾸어서-지금 중원 땅에는 난민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지난 대기근에 전쟁까지 이어졌으니 그야 많을 수밖에 없지. 하지만 우리 한국에 저 난민들 모두를 먹여 살릴 재원은 없다. 이제 막 자리 잡은 제후국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럼 저들을 어찌하면 좋겠느냐?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는 게 옳겠냐, 아니면 잘 알지도 못하는 신천지로 떠나도록 두는 게 옳겠냐?"
"그건···."
잠시 전봉준은 머뭇거렸다. 쉽사리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던 까닭이다. 윤리적으로 생각하면 이는 곧 무고한 백성을 국외에 노예로 내다 파는 격이다. 당연히 윤리를 논한다면 이는 부정되어야 옳다. 하지만 이를 부정한다면? 저들을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는 건 논외다. 애초에 윤리를 이유로 들어서 부정했다면, 그보다 더 악한 일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건 말도 안 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저 난민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가? 만주에는 아직 빈 땅이 많으니까 저들을 받아들인다-라는 대안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결국 저들 모두를 수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노예나 다를 바 없는 신세로 내다 팔라는 걸 긍정해야 하는가?
"설령 그렇다고 해도···죄 없는 백성들이 노예나 다를 바 없이 국외에 내다 팔라는 걸 긍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도 저도 아닌 대답이었다. 결국 제대로 된 대안을 내지는 못하고, 그래도 도덕적으로는 올바르지 않다는 걸 재차 지적한 것에 불과하다. 제대로 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 대답은 실패였다. 전봉준 자신도 그 사실에 분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서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렇지. 긍정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들도 너처럼 그게 올바르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 숨겨봐야 언젠가는 들키기 마련이고, 비난을 당하겠지."
하지만 이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 어중간한 대답, 얼핏 무책임하다고 할 수 있는 윤리 의식이야말로 평범한 사람 그 자체이다. 누구나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구체적인 해결책을 낼 수는 없어도, 최소한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정도는 가능한 것이다.
그럼 결국 이 정책은 한국의 평판을 크게 깎아내릴 수밖에 없다. 서역에서 백성을 납치해간다고 거기에 협력해서 백성을 내다 판다는 소문이 돌 테니 한국은 나라 자체가 도적이나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범아시아 조약기구에서 내세우고 있는 아시아주의를 훼손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아무도 범아시아 조약기구가 내세우는 이상을 믿지 않게 되고 만다.
그건 아시아의 제후국들 사이에서 한국의 목소리가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당연히 그래서야 곤란하다. 소를 탐하다 대를 놓치는 격이다.
"하, 하오나 황상. 황상께서도 우리 한국에 저들 난민을 먹여 살릴 역량은 없노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황상께서는 무언가 다른 대안을 염두에 두고 계시는지요?"
"아니, 방안 자체는 옳다. 우리에게 저들을 먹여 살릴 재주가 없으니, 일단 국외로 내보내야 하는 건 맞지. 저대로 두면 어차피 굶어 죽거나 도적 떼가 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될 테니 말이다. 골칫거리를 처리하기 위해서라도 내보내는 게 옳다."
전봉준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신매매를 긍정해서는 안 된다면서 막상 저 난민들을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국외로 내보내는 거라니, 영락없이 모순이었다.
그 모습에 이형은 웃으며 답했다.
"요는 명분이 중요하다는 거다. 국가가 선을 행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선을 행하는 시늉은 언제나 해두고 있어야 하는 법이지. 방향성은 나쁘지 않았으나, 그 녀석은 역시 장사꾼 체질은 아니야. 장사하려면 평판 걱정을 먼저 해야 했던 건데. 자, 봉준아. 저번에 빚을 팔아두었으니, 이번 기회에 영길리 놈들이나 부려 먹어보자꾸나.
가서 토마스 공사를 불러오거라."
"옛!"
이형의 발언을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전봉준은 이형의 말에 고분고분히 따랐다. 그러나 이형은 그의 얼굴에 얼핏 의문이 서려 있음을 쉽사리 읽어낼 수 있었다. 그 의문이 어떤 방향성일지도 훤히 보였다. 분명, 국가가 선을 행할 필요는 없다는 폭언이나 다를 바 없는 선언에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이리라.
"뭐, 그럴 만도 하지. 봉준이 녀석은 천성이 너무 유순한 게 문제야. 가진 이 그놈은 너무 지독해서 문제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중간 즈음 되는 놈이 있으면 딱 좋은데-."
유감이게도 현 대한제국 조정 내에서 그런 역할을 맡을만한 적임은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이형은 턱수염을 연신 쓰다듬으며 토마스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폐하."
토마스가 도착한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찌나 빠른지, 이형으로서는 혹시 그가 그동안 계속 이형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의문을 품게 될 지경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추측이 옳을 공산이 컸다. 토마스로서는 저번 한불동맹을 막지 못한 이래로 절치부심하고 있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이형은 입꼬리를 뒤틀었다. 그건 좋은 징조였다. 상대가 먼저 몸이 달아오른 상황이라면, 앞으로 협상을 이끌어 가는 데 있어서 여러모로 유리한 구석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형은 자못 과장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시오, 공사. 저번에 본 이래로 마음고생이 많이 심하였던 모양이구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주시오. 우리 한국은 노서아와 맞섬에서는 언제까지고 불란서의 우방으로 남겠으나, 그렇다고 불란서를 위하여 영길리를 적대하는 우행을 범할 생각이라고는 추호도 없음을 말이오."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저도 마음이 조금 놓이는군요. 참으로 다행입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요?"
이형의 확답에 기뻐 입꼬리를 느슨하게 풀면서도, 토마스는 다급한 어조로 이형에 되물었다. 어지간히도 공적에 목이 마른 모양이었다. 사실, 한국과 프랑스의 동맹을 알고서도 막지 못하였으니만큼 그 실패를 덮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공적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었다.
이형은 과장되게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비극을 멈추기 위하여 그대를 불렀소.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불공평한 계약서에 억지로 서명하게 되거나, 납치되어 노예나 다를 바 없이 신대륙에 끌려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소. 참으로 끔찍하고 야만적인 일이 아닐 수 없소. 도저히 문명국에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고는 믿을 수가 없구려."
"그 소식이라면 저도 물론 전해 듣고 있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성경에서도 노예가 있어서는 안 된다며 분명히 가르치고 있음 데도 이와 같은 비극이 반복되고 있으니, 참으로 신대륙의 야만스러움에는 통탄을 금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
이형의 과장된 어조에, 토마스는 곧장 맞장구를 치며 책임을 신대륙의 여러 나라로 돌렸다. 이형으로서는 내심 기가 찬 광경이었다. 물론 미국이나 페루를 비롯하여 신대륙의 여러 나라가 이에 가담하고 있는 건 사실이나, 국제해운의 지배자인 영국이 이를 막으려 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이 벌어지기나 했겠는가.
영국 또한 때로는 방조하고 때로는 동조하면서 인신매매 사업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받아 챙겼으면서 태연하게 모든 죄악을 신대륙에 떠넘기는 모습에 이형으로서는 기가 찰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형은 내색하지 않고서 말을 이었다.
"실로 그렇소. 이와 같은 비극은 당장에 사라져야만 할 것이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자유의사로 신대륙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백성들을 강제로 막는 것 또한 옳지 않다고 확신하오.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하여서라도, 귀국의 도움이 필요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