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주의 >
신대륙 이주를 독려하기 위하여 시작된 아시아주의 선전은 점차 한국의 국책사업이 되었다. 일찍이 이형이 범아시아 조약기구를 내세워 한국의 패권기반으로 삼았던 걸 점차 본격적으로 국내외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한 셈이었다. 물론 이는 철저히 한국의 국익과 필요에 의한 사업이었다.
무엇보다도, 5개년 경제개발계획에 필수적인 사항 중 하나가 바로 이 아시아주의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전략)···한국의 공업 기반은 실로 일천하다. 서역의 열강이 한국의 전쟁을 돕기 위하여 세워준 무기공장들 정도가 기계화되고 진정으로 근대화된 공장들이라 불러줄 법하고, 그 외에는 미리견의 사업가들이 주도적으로 개발한 광산업이나 이번에 완성된 제철소 정도가 그나마 기계화된 산업기반이라고 부를 법하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같이 서역 사업가들의 소유물이나 다를 바 없으므로 온전히 한국의 경제자산이라 부를 수 없다.
결국, 한국의 산업기반이란 대부분 가내수공업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나마 기계화된 공장들조차도 증기기관을 통한 본격적인 기계화보다는 수력이나 소나 말 따위의 가축을 동원하여 돌리는 게 고작이다. 당연히 이러한 미천한 산업기반으로 국제시장에 나가 열강들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 공업생산품에 맞서는 건 불가능하다. 사람은 누구나 더욱 질 좋고, 더욱 값싼 상품을 선호하게 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수출산업을 중흥시키기 위하여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시아인들의 호의를 빌리는 수밖에 없다. 조금 질이 나쁘고 가격도 그리 값싸지 않더라도 어차피 써야만 한다면 서역의 물건을 쓰기보다 같은 아시아인이 만든 물건을 산다. 그와 같은 무조건적이고 충성스러운 소비자들이 장차 한국의 공업 성장에 필수적인 것이다.
장차 한국 경제는 아시아 대륙을 기반으로 성장하여야만 한다. 아시아는 우리 한국의 시장이 되어줄 것이며, 자원 수급처가 될 것이고, 더 나아가 한국의 안보에 있어서 최우선적인 핵심 이권 지대가 될 것이다. 지난 전쟁 이래로 우리 한국은 아시아의 천명을 거머쥐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천명을 시대의 요구와 우리의 필요에 알맞게 개량하는 데에 있다.』"
위와 같이, 김가진은 한국의 경제성장을 위하여 아시아주의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시아주의를 내세워 한국이 아시아의 맹주가 됨으로써 아시아인들이 한국에 기대게 하고, 그들이 아시아 대륙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우선 한국의 산업화를 지원해야 한다는 인상을 받게 만들어 한국산 제품을 애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다분히 패권주의적인 주장이었다. 아시아 대륙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한국의 산업화를 지원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그러했다. 이는 한국이 산업화에 성공하면 아시아 대륙을 지켜줄 것이라는 논리 전개에 기반하고 있으나, 실제로 그리 진행된다고 한들 한국이 순수한 의도로 그들을 지켜줄 리가 없다. 결국, 이는 한국의 패권 유지와 산업화를 위하여 한국을 무조건 따르는 수준에 가깝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범아시아 조약기구의 이상에 부합하는 주장이었다. 아시아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는 아시아인들의 손에 달려있다는 아시아주의적 이상에 기반하여 생각했을 때, 한국은 현시점에서 아시아의 패권국인 동시에 범아시아 조약기구의 맹주였으므로 범아시아 조약기구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한국을 지원하는 게 옳았다.
"『백만대군이 두렵지 않다! 화북에 집결한 범아시아 조약기구의 10만 대군! 「아시아 대륙의 안위가 그대들의 어깨에 달렸으니, 비록 말은 다르고 모국도 다를지언정 그대들 모두가 아시아인임을 항상 기억할지어다.」 황상께서 친히 아시아의 용사들을 북돋아 주시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마주 걷는 용감무쌍한 범아시아 연합군의 용사들! 앞장서는 태극기 아래, 뒤따르는 열두 깃발들! 오합지졸 도적 무리 따위 적수가 되지 못한다! 대한제국 시위군이 재차 그 천하무적의 위용을 떨치다!』"
"『이것이 새로운 아시아 대륙의 연합함대다! 위용 무쌍한 일본국의 부사(富士:후지)급 전함! 영길리의 전 세대 철갑함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거함에 전율하다!』"
이 무렵 본격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한 범아시아 조약기구의 연합훈련은 이러한 기조를 확산시키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육군은 화북과 아직 소소하게 남아있던 도적 잔당을 상대로, 해군은 유구 근해에서 대항군의 형태로 각 함선별로 편을 갈라 진행된 이 연합훈련은 보름간 지속 되었다. 훈련 기간 중 한국군을 포함한 모든 부대는 연합군 총참모부의 지휘를 받았으며, 훈련 중 모든 의사소통은 필담으로 통일되었으나 회화 시에는 한국어가 권장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는 훈련에 참여하였거나 이를 참관한 병사와 장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국이 맹주라고 하나 한국군 또한 연합군이 형성되었을 시에는 아무튼 연합군 총참모부의 지휘를 따름으로써 범아시아 조약기구의 연합군을 향하여 진정으로 아시아 대륙 전역을 포괄하는 중립적이고 아시아인들 모두를 위한 기구라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다.
물론 실질적으로 총참모부는 육군의 경우 대부분이 지난 전쟁에서 참전하였던 한국군 출신 장성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해군의 경우 일단 규모만큼은 점차 비대해져 가고 있는 막부군 출신 장성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나, 기실 이들이 육군 전력과 해군 전력 대부분을 양분하고 있었으니만큼 이해받지 못할만한 조치도 아니었다.
"아시아인이 아시아인을 돕지 않는다면 누가 돕는단 말인가? 아시아인이 서역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시아인끼리 힘을 합치고 서로 돕는 수밖에 없다! 과거의 다툼과 혐오는 잠시 잊어두고서, 이제는 범아시아의 기치 아래 단결해야 할 때다!"
"한국이야말로 진정한 아시아의 맹주라 불릴 자격이 있다! 그들은 아시아 대륙에서 가장 먼저 서구의 열강과 싸워 이기고 근대화를 이룩한 다음에도 서역의 열강과 같이 변절하지 않고 계속하여 아시아 대륙의 보호자로서 남고자 하고 있다! 과연 한국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 아시아 대륙에 그들을 대신할 나라가 있기는 한가?
한국의 이익이 곧 아시아의 이익으로 이어질 것이며, 한국의 성장이 곧 아시아의 성장이다! 아시아의 자력갱생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아시아 대륙 모두가 한국에 힘을 모아줄 때다!"
"모든 나라가 개별적으로 근대화를 진행하여 봤자 혼란스러울 따름이고, 아시아 전역의 힘이 이리저리 분산되어 결국은 어느 나라 하나 뚜렷한 성과를 이룩하지 못하고서 서역의 먹잇값이 될 뿐이다. 분열된 집안에서는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는 법이다! 지금은 각국에서 개별적인 독자노선을 포기하고 국익 일부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에 힘을 모아줄 때다!
아시아 대륙 모두의 힘이 하나로 모인다면 한국은 얼마든지 서역의 열강에게 맞설 수 있을 만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시아 대륙이 서역의 침략으로부터 온전히 안전해진 다음, 그 뒤에 천천히 각 나라의 개별적인 근대화를 진행하여도 절대 늦지 않을 것이다!"
범아시아 조약기구 군의 연합훈련을 목격한 아시아 대륙의 지식인들은 따로 누가 대표적이라 지칭할 필요도 없이 한입을 모아 한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주의를 주창했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한국 조정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루어진 관영여론이기도 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김가진은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을 위하여 아시아주의를 적극적으로 이용할 것을 주장했고, 이형은 이를 받아들였다.
연합훈련을 통하여 일시적으로 지휘권이 하나로 통일되어 연합군 총참모부의 지휘 아래 집결한 연합군은 현실에 구현된 아시아주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동안은 공상 내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의논만 되던 게, 연합군이라는 알기 쉬운 무력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정립되고 하나로 모이기 시작한 셈이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황제 이형은 그러한 아시아주의를 처음으로 주창한 유력정치인이자 현 아시아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보유한 인물이었다. 자연히 아시아주의 본격적인 확산은 아시아 대륙 일대에 친한 적인 여론과 동시에 그 수장인 이형을 향한 동경 여론의 확산을 낳았다. 이형은 한국의 황제인 동시에 아시아주의 살아있는 상징이 된 셈이었다.
* * *
"이거 재미있게 되었구먼. 뭐 어느 정도는 의도한 거긴 했으나, 여기까지 반응이 좋을 줄은 몰랐는데. 역시 사람은 알기 쉬운 힘의 등장에 끌리는 법인가."
연합훈련 이후 대대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아시아주의 유행은 곧장 이형에게도 보고되었다. 김가진이 제출한 5개년 경제개발계획에서 한국의 공업 생산량 증가에 부합하는 소비시장의 확장은 아시아주의 확산에 기대는 편이 컸던 까닭에, 한국 정부에서도 아시아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한편으로 확산현황에 대하여 시시각각 보고를 받던 덕분이었다.
보고를 받은 이형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그가 기대한 이상으로 술술 잘 풀리고 있는 덕분이었다. 본 역사에서도 이 시기는 한창 아시아 각국의 신식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아시아주의가 퍼져나가던 무렵이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본 역사에서 아시아주의는 일본이 변절하면서 왜곡되고 뒤틀렸으나, 이형은 일본제국처럼 극단적으로 뒤틀 작정은 없었다는 점 정도였다.
"하지만 이래서야 후일에 발목을 잡힐 수도 있겠지. 본격적인 안전망을 만들 필요가 있겠어. 내가 지금 휘두르고 있는 칼이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 더 확산시키기 편할 테니까."
이형은 입꼬리를 뒤틀었다. 마침 참고할만한 구석은 많고도 많았다. 20세기는 온갖 사상과 이념들이 태동하고 사라진 시대였고, 이형은 그 20세기에서 만들어지고 사라진 무수한 사상들을 조금씩이나마 알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이형은 그들을 참조하여 먼저 한국식 민족주의를 정의해 나갔다.
"『(전략)···짐은 민족이란 마땅히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다른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을 정당한 권리가 있음을 믿고 있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민족은 곧 자아정체성이다. 한국의 피를 받았다고 하나 그가 노어를 사용하고 노서아인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곧 노서아인이다. 그러나 반대로 노서아의 피를 받았다고 하나 한국말을 사용하고 한국인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곧 한국인이다.
어떤 피를 받았는가는 결국 그 인물이 자신을 어느 나라 사람으로 정의하느냐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하나일 뿐,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이 한국 땅에서 어떤 피를 받았건 간에 스스로 한국인이 되고자 하며, 기꺼이 한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한국인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곧 한국인이다. 조선인도, 만주인도, 몽골인도, 한인도, 모두가 평등한 한국인인 까닭이다.
장차 한국은 아시아 대륙의 맹주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들 민족의 자주성을 존중하여 그들이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아시아의 큰형으로서 모범을 보이고 그들을 위험 속에서 지켜나가야만 할 것이다. 아시아의 형제국들과 공존을 통한 번영이야말로 장차 우리 한국이 나아가야 할 길인 까닭이다. (후략···)』"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래?"
"낸들 아나? 황상께서 말씀하시는 거니 우리 같은 놈들은 그저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겠남. 너무 마음 쓰지 말고 아침 작업이나 하러 가세."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이형은 자기 생각을 정리하여 이를 관보에서 적극적으로 홍보하도록 명하였다. 평소에는 어깃장을 놓거나 이형의 정책에 군소리를 늘어놓던 대한일보도, 이날만큼은 모든 장을 이형이 손수 저술한 한국식 민족주의와 한국의 아시아주의 역할론에 할애했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대한일보에 실린 이 장문을 읽고서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는 백성들은 거의 없었다.
언문으로 풀어썼다고 하나 그 날짜 대한일보의 전면을 빼곡히 가득 채울 만큼 기나긴 장문이었으니, 그야 함부로 읽을 엄두를 낼 수도 그 내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러니 백성들은 그저 막연하게 황상께서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구나-내지는 그도 아니고 황상께서 말씀하시니 그런 줄 알고 있으면 되겠지-정도의 감상을 넘어서지 못했다.
되려 이러한 이형의 글이 본격적인 영향을 끼친 건, 이 무렵 장차 아시아 패권국으로서 한국이 어떠한 역할을 떠맡아야 할 것인가를 두고서 갑론을박이 이어지던 유림이었다. 애초에, 이형부터가 유림에게 읽으라 써내란 글이었지 무지렁이 백성들에게 읽으라고 내린 글이 아니기도 했다.
"옳다! 황상께서 이 비루한 서생에게 길을 보여주셨구나! 그래, 이 길밖에는 없다. 중원에 비하면 이 조선 땅의 물산이 비루하다는 걸 모르는 선비가 이 조선 8도 어디에 있겠나? 하나 이제 우리 조선이 장차 중화의 천자를 대신하여 서역 오랑캐들에 맞서 천하를 지킬 소명을 상제께 받았으니, 서역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북적 야인 놈들의 손이라도 잡아야 할 때다!"
"「민족이란 마땅히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다른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을 정당한 권리가 있음』이라··· 오호라, 내 어찌 진즉에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였을까? 실로 그러하다. 장차 우리 대한이라고 또다시 서역의 군홧발 아래 밟히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그때 이 민족의 자결성을 들어 이러한 압제가 옳지 않음을 천하 만방에 알린다면, 능히 우리 대한이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황상께서 장차 아시아의 큰형으로서 모범을 보이리라고 하시었다면···. 군신의 예가 아닌 형제의 예를 우선하겠다는 건가. 황상께서는 진정으로 각 민족에 스스로 명운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로구나. 그렇다면 민족이란 타민족에 간섭받지 않고서 주권을 가질 수 있는 최소단위라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
조선의 힘만으로는 지금의 천하를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알고서도 그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길을 헤매던 유림에게 있어서 이형의 글은 일종의 해답지와도 같았다. 기실 민족자결주의, 문화 민족주의, 형제애와 일치 등 20세기에나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주장과 사상들을 혼합하여 만들어낸 글이었으니만큼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한편으로 유림은 이형의 글이 이제 슬슬 조선의 왕다운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화해의 손길이라 해석하기도 하였다. 일전에 궁궐 앞으로 몰려가 시위를 하였을 때 이형이 선선히 이하응을 내치는 유화적인 행보를 보여준 데에 이어 누가 봐도 유림에게 전하는 장문의 글을 내리고 있었으니, 그렇게 보일 법도 했다.
그리고 망나니 황제가 이제 비로소 왕다운 왕 노릇을 해보고자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면, 조선의 선비들이 취할 행동은 하나뿐이었다.
"이 사람아, 붓이며 먹이며 바리바리 싸 들고 어딜 그렇게 가나? 언제는 평생 초목에 묻혀 살겠다더니!"
"황상께서 부르시네. 어찌 이를 모른 체하고 황실을 욕보일 수 있겠나. 나는 가겠네."
"어, 어! 이 사람이, 기다리게! 원, 사람 말도 끝까지 다 듣지 않고서··· 같이 가시게나!"
유림이 다시 조정에 출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