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회담 >
그리고 이날의 소식은 곧장 이형의 귀에도 들어갔다.
"김가진 그 녀석이 기어이 집을 나왔다고?"
"예. 도성에 온통 소문이 파다합니다. 제가 듣기로는 본가에서 의원이 된 다음에도 서자 대우를 멈추지 않아 차마 견디지 못하고서 그렇게 되었다 들었습니다."
전봉준은 머뭇거리면서도 또박또박 말했다. 비록 그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거나 김가진에게 따로 말을 들은 건 아니었으니 이 소문이 정확한지에 대해서 검증이 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전봉준이 생각하기에는 충분히 이치에 맞는 말이었다. 안동 김씨와 김가진이 바라는 길이 서로 엇갈리고 있다는 건 이미 한양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김가진이 그의 본가를 욕보이는 학생운동을 지원했을 턱이 없었다. 완전히 동조하는 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학생들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 아니겠는가. 안동 김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와는 별개로, 김가진이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인물이라는 것만은 부정할 여지가 없다고 전봉준은 확신했다.
"그래, 기어이 그렇게 되었나. 그거 잘 됐군. 안 그래도 그놈이 어지간히도 탐이 나던 참이었는데, 설마하니 제풀에 토해낼 줄이야. 일이 술술 풀리게 되었으니 아주 잘 되었어."
이형은 히죽 웃었다. 마침 여흥 민씨들이 슬슬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영 아니꼽고 성가시던 차에 김가진이 사실상 안동 김씨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는 소식은 실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당장 그가 쓸 수 있는 수중의 패가 하나 더 늘어났다는 소식이니 말이다.
안 그래도 이번에 국민당이 크게 약진하고, 당장은 김윤식이 당권을 잡았다고 하나 후일 노쇠하여 정계에서 물러나게 된다면 자연히 김가진에게 당권이 다시 돌아오면서 안동 김씨의 간섭이 더욱 본격화될 판국이었다. 그런 판국에 안동 김씨에서 출신 성분을 두고서 왈가왈부하다 김가진과 안동 김씨의 관계가 파국이 난건 이형으로서는 호재가 되었으면 되었지 악재가 될 이유는 없었다.
물론 그게 사실이라는 보장이 있다면 말이다. 이형은 우선 이 정보가 확실하다는 소식이 그의 귀에 들어올 때까지 본격적인 대처는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놈도 이제 의석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 정당의 당내 간부가 되었으니, 안동 김씨 놈들의 도움이 없어도 당분간은 거뜬하겠지. 어디 어떻게 돌아가는지 볼까. 그래, 도성의 백성들은 뭐라고 하더냐. 도성의 백성들에게도 이 소식은 꽤 흥미진진할 텐데."
"그, 그것이··· 순 근거 없는 낭설투성이라 대답해드리기 부끄럽습니다. 김 의원님의 몸에 매 자국이 있었다는 둥, 몸에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거나, 김병학 대감과 몸싸움을 하다 김병학 대감을 메쳤다는 둥··· 온통 근거 없는 낭설들뿐인지라. 다만 일단 도성의 백성들은 전반적으로 김 의원님께 보다 호감을 보이는 건 확실합니다."
"그 녀석이 김병학이를 메쳤더라. 흐흐흐! 그거 사실이라면 꽤 볼만했겠구먼.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일이 벌어졌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 도성의 민심은 긍정적인가."
이형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유쾌한 광경인 것만은 분명했던 까닭이다. 전봉준도 내심 그러했는지, 이형의 앞에서 애써 웃음을 참느라고 입꼬리를 씰룩쌜룩하는 게 이형의 눈에도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하기야, 이 나라 대한에 안동 김씨와 세도 가문들을 좋게 보는 이들은 그들 자신밖에는 없을 터였다. 하다못해 여흥 민씨도 안동 김씨를 질투해 마지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니 역모죄로 줄줄이 엮여서 풍비박산이 난 다음으로는 여흥 민씨도 안동 김씨와 거리를 두고 있으리라는 건 쉽게 예상 가능했다. 그 여흥 민씨도 안동 김씨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한 족속들은 아니라는 게 문제였을 뿐.
'보자. 그럼 지금 확실하게 여흥 민씨를 상대로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게 김홍집, 김가진, 김윤식 이렇게 인가. 봉준이는 내 수족이지 뚜렷한 기반이 있는 녀석은 아니니까 함부로 쓰기 곤란하지. 김옥균은 당분간 미국 구경이나 하게 두어야 할 테고, 한성근은 군인인데 이럴 때는 쓸 일이 없는 게 최선이야. 그렇지만 이걸로도 아직 부족해. 차라리 안동 김씨를 여흥 민씨와 싸움을 붙이는 게 좋겠는데···.'
이형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생각에 잠겼다. 문득 김가진이 안동 김씨와 돌아선 김에 처지가 난처해진 안동 김씨에게 김가진과의 화해를 주선해주는 대신 여흥 민씨를 견제하는 데 써먹을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리 상책이라고는 하기 어려웠지만 말이다. 안동 김씨와의 연이 약해진 김가진과 다시 연결하는 꼴이었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그보다 나은 안이 딱히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제 막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여흥 민씨 하나에 전주 이씨 종친을 움직이는 것도 꼴이 우습고, 그렇다고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여흥 민씨를 이형에게 밉보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구 때려잡기도 그러했다. 결국 그럼 함부로 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다른 가문을 키워줘 견제하는 게 최선인데, 그 가문으로는 안동 김씨만 한 곳이 없었다.
이형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생각하기에 김가진 그 녀석을 찾아가 다시 안동 김씨 놈들과 잘 지내보라고 하면 따르겠느냐?"
"예? 그, 그건··· 일단 황명이니 따르겠으나 역시 김 의원님도 심경이 복잡하시지 않겠습니까? 다시 찾아가 숙이는 꼴이 되어버리니까요."
"그렇지. 쯧, 그렇지만 지금 김가진 녀석이 젊은 나이에 여기까지 올라온 건 안동 김씨 놈들의 덕분이 큰데 말이야. 어쩔 수 없군. 안동 김씨 놈들이 먼저 궁해서 다시 움직이려 할 때 즈음이나 개입해야겠어."
이형은 작게 혀를 찼다. 곤란한 일이었다. 가장 이상적인 그림은 여흥 민씨와 안동 김씨, 그리고 그 외 기타 유력 가문 두어 곳 정도가 더 붙어서 서로 견제하고 다투는 구도겠으나, 어느 가문 하나 마음에 두는 곳이 없었다. 여흥 민씨는 능력도 없이 제 잘난 맛에 날뛰는 인상이 너무 강했고, 안동 김씨는 당장 여론에 두들겨 맞고 있을뿐더러 내적으로도 갈등이 한창이라 함부로 손대기 곤란했다.
그럼 새롭게 키워줄 유력가문이 어디가 있을까. 이형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전 세도 가문이었던 풍양 조씨였다. 안동 김씨도 필요에 따라 키워줄 생각이라면, 풍양 조씨라고 고려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형은 내심 위기감을 느꼈다. 여흥 민씨와 안동 김씨, 풍양 조씨의 과도체제가 만들어지면 그게 세도정치 시절과 다를 게 무엇이던가.
'그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법이지. 이 기회에 차라리 가문 하나를 새로 무대에 끌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문제는 그럼 어디 가문이 적절하겠느냐가 문제인데···.'
이형은 방침을 고쳤다. 여흥 민씨와 안동 김씨의 세력을 그대로 두되, 차라리 아예 새로운 가문들을 끌고 와 싸움을 붙여 버리려는 것이었다. 일단 키워주고자 한다면 당연히 상인들이 되어야 할 터였다. 잇속이 밝아 여차하면 주인을 물 거나 버릴 수도 있다는 게 난점이지만, 그것도 때에 따라 다르다. 특히 금융처럼 신용이 필요한 경우에는 더하다.
금융에 있어서 중요한 건 신용이고, 가장 높은 신용도를 가진 곳은 당연히 국가이며 왕정국가의 경우에는 왕가이다. 대영제국의 시티 오브 런던이 왕실의 개 노릇을 하는 것만 봐도, 그 어떤 배후가 있어도 왕가가 몸소 금융가의 뒤를 봐주는 것보다 강력한 신용을 안겨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 조선 땅에서 제일 약삭빠른 게 송상이었지. 다른가?"
"예. 저도 그렇게 전해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개성의 상술은 유명했으니까요."
"그럼 정해졌군. 잠시 궁내부에 다녀오거라. 긴히 전할 말이 있다고 말이다. 조폐와 관련된 일이라고 하면 그럭저럭 알아들을 게다."
"네. 그럼 곧장 다녀오겠습니다. 황상."
이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봉준은 부리나케 달려나갔다. 전봉준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며, 이형은 웃었다. 이형의 말 한마디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게 퍽 귀엽게 보였던 까닭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구체적인 구상이 차곡차곡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동안이야 일단 운산 금광에서 금이 나오는 대로 황실 재산으로 쌓아두었고 당장은 산업화 자금을 벌기 위해 해외에 팔아치우고 있지만, 애초에 금을 그렇게 쓰는 것 자체가 낭비야. 금값이 오른 동안에는 이 정도로도 문제없지만, 금값이 진정되는 대로 은행에 금괴를 채워 넣고 슬슬 금융을 굴려야 해.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금융가 노릇을 할 수 있을 녀석들이 송상 밖에 더 있나.
금은 그대로 금고에 저장해두고서, 은행이라는 놈들이 금을 담보로 돈을 빌려 투자를 하고 배당금을 받아오고 하면서 돈을 불려야 금융이 돌고 돈이 돌면서 나라 경제가 돌아가겠지.'
이형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로서는 이 정도가 생각해낼 수 있는 경제 지식의 전부였다. 이 이상을 논하기에는 당장 그가 경제에 대하여 알고 있는 바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 경제란 자유시장을 가능한 한 존중하면서 정부는 시장이 공정하게 운영되도록 감시하고 보호하는 게 적절하다 정도의 인식이 고작이었다.
그럼 결국 경제에 대하여 더욱 잘 알고 있는 인물이나 인물들에게 맡기는 게 적절했다. 이형은 송상들에게 기대를 걸어볼 작정이었다. 송상이라면 이형의 믿음직한 꾀주머니가 되어줄 터였다. 그리고 동시에 이형은 머릿속으로 한 인물을 떠올렸다.
"그래, 어윤중. 어윤중이 있었지. 원 역사에서도 김홍집 내각에서 재무부 대신 노릇 해봤던 녀석이고, 본인도 조세개혁에 열성적이었고 말이야. 프랑스에 4년간 유학을 다녀왔으니 그럭저럭 서역 물도 먹었을 테고, 머리도 트였겠군. 이제 박규수도 물러났겠다, 슬슬 젊은 놈들을 끌어올려 보실까."
이형은 히죽 웃었다. 송상에 황실 재산을 운용하도록 맡기고, 송상이 상공부의 꾀주머니 역을 맡기되 어윤중과 같은 신진 관료들에게 감시와 실무운영을 맡기는 구도였다. 1876년부터는 이제 슬슬 영국에서 파견된 경제고문들과 산업화 지원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할 테니, 그들의 조언을 받아가며 송상과 어윤중을 주도로 한 신진 관료들이 주도하게 한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는 카네기와 미국인 사업가들도 있다. 지난 전쟁 중 군에 물자를 납품하며 그럭저럭 부와 경험을 쌓은 민족 자본가들도 있다. 시장도 있고, 원자재도 있다. 남은 건 기술을 쌓고 공장을 세워 하나둘 완성해 나가는 것뿐.
비로소 모든 게 순탄대로에 올랐다는 생각에 이형은 소리 내 웃었다.
***
그리고 이형이 웃고 있을 무렵, 지구 반대편.
"다시 말하여, 한국은 태평양에 진출할 의지가 추호도 없다는 것이로군요."
"예, 그렇습니다. 우리 한국으로서는 지금 중국만으로도 매우 벅찹니다. 적어도 향후 50년간 한국이 태평양에 진출할 의사는 추호도 없다는 걸 미국에서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거 낭패구먼. 이놈의 영어가 통 귀에 익숙해지지를 않아. 저 역관 녀석이 제대로 전달해주고 있는 거 맞나? 도대체가 양놈들은 하나 같이 무슨 저런 괴이한 말을 하고 사는지 원. 저 역관 녀석, 평생 양놈 말이나 배우다가 혀가 꼬이거나 하는 거 아닐지 걱정되는군.'
김옥균은 주미 임시공사로서 이형의 지시를 받아 미국 부통령 헨리 윌슨과 회담을 진행 중이었다. 한국이 태평양 진출 의사가 없음을 재확인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가능하다면 비교적 아시아 대륙에 치우친 섬들을 확보해오라는 지시도 덤으로 붙어있었으나, 실제로 확보할 수 있을지는 사실상 전적으로 미국의 관용에 달린 문제였다.
사실 김옥균으로서는 이번 회담 자체가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사건이었다. 과연 자신이 이 일을 맡아도 될지 확신이 들지 않던 까닭이다. 그나마 민치상은 연배나 되었지, 김옥균은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애송이에 불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와 같은 중요한 회담에 나설 인물이 아니던 것이다. 김옥균으로서는 되려 이런 애송이를 내보냈다고 미국에서 불쾌하거나 하지는 않을지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거 정말로 다행이로군요. 그렇다면 앞으로도 우리 미합중국은 귀국 대한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합중국은 아시아인들이 그들의 손으로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귀국의 입장에 적극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우려와는 달리, 미국에서는 김옥균의 등장에 그리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김옥균이 본래 조선을 좌지우지하던 명문가였다는 안동 김씨의 일원이라는 걸 알고 있는 덕분이었다. 미국의 관점에서는 후작가 내지는 백작가의 적자가 회담에 나선 격이던 것이다. 격에 있어서 부족함이 있을 리가 없었다. 미국인들이 주목한 부분은 김옥균의 가문이 어디였는가지, 나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미국으로서는 한국의 확답이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한국이 아시아에서 단기간에 엄청난 성장을 이룩하면서 이러다가 한국과 태평양 패권을 두고서 경쟁하는 거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던 차에, 한국이 먼저 나서서 그럴 일은 없을 거라 확답을 준 것이다. 그건 미국에 있어서 쾌재를 부를만한 일이었다.
한국과 태평양에서 다툴 걱정이 없다면, 한국과의 무역을 꺼릴 이유도 없는 것이다. 당장 영국발 대공황 아래로 대서양 무역이 크게 위축된 오늘날, 한국과의 태평양 무역은 꼭 미국이 이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어줄 터였다.
"그렇게 말씀해주신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요. 우리 한국 또한 미국의 신대륙 인들이 그들의 손으로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귀국의 입장에 적극 공감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서로 뜻이 맞닿고 있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으니 이거 경사로군요. 이걸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으음, 잘 생각나지 않는군요."
"우리 한국의 황제 폐하께서 이번에 모든 민족에게는 그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자결권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국가, 대륙에도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자결권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대륙자결권이라고 부르면 좋겠군요. 으음, 대단히 인상적이기는 합니다만 이거 유럽인들이 들으면 꼭 경기를 일으키겠는걸요. 이건 언론에 나가서는 곤란하겠습니다."
"과연 그렇겠군요. 조금 전 잡담은 없었던 거로 해두지요."
김옥균의 말에 헨리 부통령은 당황해하는 기색으로 덧붙였다. 물론 유럽을 걱정해서만 그런 건 아니었다. 미국도 라이베리아를 필두로 하여 아프리카에 확장하려는 행보를 보이려던 차에 괜히 이 대륙자결권 원칙이 퍼져나가기라도 하면 곤란하던 까닭이다. 김옥균은 그런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였으나, 우선 수긍했다. 서역과 괜히 척을 지지 말라는 지시가 있던 까닭이다.
그 뒤로도 소소한 잡담이 이어졌다. 빙빙 돌려 말해봐야 결국 모두 양국의 우호 관계가 계속 이어졌으면 한다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내용이었다. 김옥균으로서는 절로 진이 빠지는 듯했다. 아직 젊은 그에게 노쇠한 정계의 여우를 상대하는 건 도통 성미에 맞지를 않았다.
그렇게 한참 빙빙 돌리던 헨리 부통령은, 마지막에 가서야 본론을 꺼내 들었다.
"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우리 미국의 새로운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게 너무 즐거워서 그만 잊고 있었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양국 간의 친애 선물을 이야기해 보도록 할까요."
"마지막이라, 이거 아쉽군요. 무엇입니까?
"귀국 한국에서 요즈음 산업화에 여념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마땅히 좋은 벗이라면 필요할 때 서로를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국에서 우리 합중국의 하와이 진출을 묵인해주신다면, 합중국에서는 향후 태평양 무역 활성화를 위한 항만 재개발 사업에 1000만 달러 상당의 차관을 빌려드리겠습니다."
김옥균으로서는 순간 말문이 틀어막힐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