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행 >
능력은 있었으되 야심이 앞섰던 피만 이어진 아버지.
그것이 이형의 머릿속 이하응이었다. 아무튼, 능력이 없는 건 아니다. 판단력도 있었고, 결단력도 있었고, 다른 무엇보다 배포가 크고 배짱이 있었다. 적어도 구한말이라는 시대 배경 속에서 활약한 전주 이씨 왕족 중, 가장 독보적인 시대의 걸물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니 이형은 불현듯 이하응의 얼굴이 떠오른 순간 그를 미국으로 보내기로 다짐했다. 아무튼, 그만한 인재를 가만히 놀려두는 것도 지금의 한국에게는 사치일뿐더러, 만에 하나 이하응이 미국에 다녀온 것을 계기로 시야가 크게 열려 이형에 적극 협조하게 된다면 그보다 바람직한 전개는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형은 이하응을 온전히 신뢰하지도 않았다.
'좌우지간, 이 대한에서 이하응을 넘을만한 인물이 없다. 가문에 있어서건, 명성에 있어서건, 능력에 있어서건. 바지사장이라고 해도, 이하응이라면 적어도 어느 정도 눈치껏 행동하는 정도는 해주겠지 다만···.'
만일 이번에도 야심이 앞선다면 어떨까. 우선 카네기가 적절히 제지해주거나 김옥균이 뒷감당 정도는 해줄 테지만, 이번에도 그가 자신의 노욕을 버리지 못하고서 추하게 발버둥 치려 한다면···. 보나 마나, 미국인들이 보는 앞에서 그는 웃음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그건 이형에게도 꽤 껄끄러운 일이었다. 적어도 이형이 생각하기에, 이하응은 그런 대우를 받을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이하응의 한계는 결국 구시대적인 왕가의 권력다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뿐이다. 만일 그가 조금이나마 시야가 트였다면, 하다못해 친아들의 성장을 통감하고서 한 발짝 물러나는 미덕을 보였다면 그 결말은 분명 훨씬 긍정적이었으리라.
이형은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 역사적 걸물을 고작 해봐야 황색 언론이 씹고 뜯고 맛보기 위한 개껌으로 던져주는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이하응에 대한 모욕이었다. 이홍장의 결말은 하다못해 전장에서 도망치기를 거부하고서 마지막까지 맞서 싸우다 죽는 비장한 죽음이었으나, 만일 이하응이 미국에 방문한 일이 웃음거리로 끝난다면 그의 명예는 재기불능 상태가 되고 만다.
'···이제 와 이하응이 나를 흔들기에는 너무 늦었어. 본인도 그걸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을 거다. 단지 그놈의 권력욕이 시야를 흐리게 하는 것뿐이지. 이번 미국 방문을 계기로 무언가 달라진다면, 하다못해 자신의 역할을 확실하게 알고서 그에 맞춰서만 행동해줘도 황색언론 놈들의 비웃음을 받을지언정 한국은 물론 이하응 그 자신도 무언가 얻고서 돌아오는 게 확실하게 있을 거다.
그 결과, 또다시 권력을 탐한다면 그건 뭐 어쩔 수 없지만··· 그 경우에는 또 그 나름의 명예로운 결말을 생각해줘야지.'
그러니 이형은 내심 바랬다. 이하응이 이번에 미국을 간다면 단지 권력만을 탐하다 돌아오는 게 아니라 무언가 하나쯤은 깨닫고서 돌아오기를 말이다. 이제 와 이하응이 저를 흔들기란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조금 나쁘게 말하자면 승자의 여유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형은 그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하응의 명예는 거기까지 나락으로 처박히지 않을 자격이 있다.
적어도 이형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형은 기대했다. 이하응이 무언가 하나쯤은 얻어서 돌아오기를 말이다. 그 끝에 이하응이 계속하여 그의 적으로 남 건, 아니면 그의 아군으로 돌아서건 상관없었다. 아군으로 돌아서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테고, 적으로 돌아선다면 이번에야말로 최소한의 명예는 남길 방법으로 마무리 지어줄 뿐이다.
이형은 허리춤에 권총 홀스터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또 무언가 기기묘묘한 궁리를 떠올리신 건 아니겠지요."
"음, 구태여 기기묘묘하다고 한다면 기기묘묘하다고도 할 수 있사오만."
"황상께서 속에 품으신 뜻을 가감 없이 듣고 싶사옵니다. 문할 수 있도록 허하여 주소서."
"이하응···이 아니라. 엣헴! 짐이 미리견에 방문할 수 없다면, 그 대신 흥선왕을 미리견으로 보내어 양국의 친선을 다짐받고자 하오."
황후는 제 아비 이름 석 자를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이형을 경악에 가득 찬 얼굴로 바라보았다가, 뒤이어진 설명에 묘한 얼굴을 했다. 기뻐하는 것과는 달랐고, 놀라는 것과도 달랐다. 알 수 없는 안타까움과 분함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이형은 이를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설명을 이어갔다.
"미리견인들도 흥선왕이 몸소 미국으로 간다면 짐이 몸소 미국에 찾아가는 것이나 다를 바 없이 여겨 크게 기뻐할 것이 분명하오. 짐의 양부께서는 물론 문조 폐하이시나, 흥선왕은 짐을 낳고 기른 친부요. 그 의미를 미리견에서 모를 리가 없지. 필시 이번 방문으로 미리견에서는 우리 대한이 그들과의 관계를 중히 여기고 있음을 알게 될 터이니, 이는 장차 양국의 친선을 다지는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오.
우리 대한이 불란서와 동맹을 맺었다고 하나, 불란서는 미리견에 비하면 작은 시장이오. 장차 대한이 부강해지고자 한다면, 마땅히 미리견과의 친선을 다지어 저 광활한 태평양을 우리 대한과 미리견의 상선들로 빼곡히 채워야만 할 것이오."
"말씀하시는 바는 알겠으나···."
황후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나 이형은 황후가 본디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한눈에 눈치챌 수 있었다. 겨우겨우 유폐시키는 데에 성공한 이하응을 또다시 풀어주는 게 마음에 걸린다는 이야기일 터였다. 이형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시오. 이제 와 짐이 죽는다고 한들 늦었소. 만일이라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곧 태자가 용상에 오를 것이며, 부인이 나를 대신하여 태자가 장성할 때까지 곁에서 수렴청정하겠지. 그걸 이하···흥선왕이라고 한들 모를 리가 없소. 흥선왕은 누구보다 사리에 밝은 인물이오. 그가 이제 와 짐을 죽여봤자 권력을 다시 쥐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모를 리가 없지.
고작 해봐야 미리견의 사업가들과 내통하여 새로이 제 기반을 얻고자 발버둥 치는 게 고작일 것이오. 그러니 너무 심려할 것 없소."
"분명 황상께서 말씀하시는 대로일 것입니다. 하오나···."
황후는 말을 끌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걸 망설이는 듯 보였다. 이형으로서는 의아한 일이었다. 그가 생각하기로 황후가 구태여 여기까지 망설일만한 비밀이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이형이 황후에게 무슨 일인가 캐묻기에 앞서, 황후는 입술을 검지 끝으로 매만지고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잊어주소서. 그저 대자대비하신 석가께서 대한의 앞날을 보우하시어 만사가 황상께서 뜻하신 대로 이뤄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음, 고맙소. 부인이 그렇게 말해주니 내 든든하구려. 한데 요즈음 태자가 보이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이오?"
"보름 전에 우연히 시위군의 군도를 손에 쥐어본 이래로 매일 같이 시위군을 쫓아다니며 병졸들을 귀찮게 하고 있사옵니다. 장차 용상에 앉을 국본이 서책에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매일 같이 무학에만 목을 매고 있으니, 그저 곤혹스러울 따름입니다."
"허허허! 녀석, 거 내 핏줄을 이어받은 게 확실하구먼! 부인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본디 그 나이 또래의 사내아이라면 곰팡내 나는 서책보다는 병장기의 화려함에 이끌리는 법 아니겠소? 아무래도 요즈음 태자에 너무 무심했던 모양이오. 녀석이 벌써 그럴 나이가 되었던가."
이형은 기분 좋게 헤실헤실 웃었다. 제 핏줄을 받은 친아들이 저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행태를 보여주고 있으니 그야 이형의 눈으로 보기에 귀엽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다소 말을 떼는 게 늦어져 걱정하게 하기도 했으나 얼마 전에 보았을 적에는 또 제대로 또박또박 말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런 걱정도 이미 던 지 오래였다.
이형은 껄껄 소리 내 웃으며 말했다.
"혹, 지금 태자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소?"
"일전에 보았을 적에는 황상께서 총애하시는 봉준이라고 하는 병졸과 함께 태극정에서 공차기 놀이를 하고 있더이다."
"음, 그럼 그리 멀지도 않구려. 고맙소. 내 금세 다녀오리다!"
그렇게 말하고서 이형은 휙 뒤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조금 전까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던 모습이 거짓말 같을 정도로 유쾌한 모습이었다. 아니, 사실 이쪽이 그의 본성일 뿐이다. 놀기 좋아하고 술 마시기 좋아하는 한 사람의 인간. 그게 본디의 이형이었고, 이원철이었다.
그런 이형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황후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앞으로 보름."
무엇이 보름이라는 것일까. 황후는 입에 담지 않았다. 궁궐은 언제나 듣는 귀가 많았다. 그녀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를 유추하게 둘만 한 여지는 가능한 한 적을수록 좋다. 그것이 궁에서 태어나 궁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사고방식이었고, 생존법이다. 감정을 표하는 것도 절로 조심스러워지고, 당장에 웃고 즐기기보다는 당장에 어떻게 살아남고 어떻게 제 적을 죽일지부터 고민하게 된다.
그러니 황후는 말할 수 없다. 어찌 말하겠는가. 제 적에게, 부친에게 무른 황제에게 무슨 낯으로 전하겠는가.
"아직 태자가 세상을 알지 못할 적에 마무리 지으려 했거늘, 일이 꼬이는구나. 하면, 서둘러 말리는 수밖에. 황상께서 나와 뜻을 달리 품으셨다면, 황상께서 뜻하신 대로 일이 이루어져야 옳을 테니."
앞으로 보름만 더 기다렸다면, 이하응은 검은 피를 토하고서 세상을 등졌을 거라는 걸 말이다.
* * *
고뇌는 길었으되, 일이 성사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미리견··· 그러니까 제 조국, 미합중국에 다녀오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이형의 말에 카네기는 가만히 턱을 쓰다듬다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이형이 자신에게 이렇게 직접 명령을 내리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은 대부분 주고받기였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형을 상대로 사업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 일은 자세한 내막을 말하기에 앞서 우선 다녀오라는 지시가 앞섰다. 단순히 신경이 곤두서서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만, 카네기는 묘하게 이형이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를 분명히 하고자 수를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따지고 보면 내가 지금 이렇게 사업을 벌일 수 있는 거 자체가 이 황제 덕분이다. 당연히 어지간해서는 양보하는 게 맞고, 기분에 거스르지 않게 해야겠지. 하지만 하라면 하고 죽으라면 죽는 맹목적인 충성은 영 내키지를 않는데···.'
"그야 저로서는 좋지요. 요즈음 한국에만 머무느라 제 고향이 어땠는지도 까먹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때마침 폐하께서 이렇게 당당히 고향에 돌아갈 기회를 주시니, 이 은혜를 어찌 보답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허어, 그렇다면 다행이구려. 이렇게 시기가 잘 맞아떨어지다니, 아무래도 짐에게 진정으로 신통력이라도 있는지도 모르겠소! 허허허!"
그러나 카네기는 구태여 그의 속내를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형의 앞에서 구태여 그런 감정을 드러내 봐야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던 까닭이다. 단지 허풍으로 끝날지도 모르던 카네기의 도박을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는 배짱과 추진력, 그리고 대공황을 사전에 예견하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던 황제가 아닌가.
카네기는 내심 느끼고 있었다. 좌우지간 눈앞의 황제가 하는 말에는 가능한 한 기쁘게, 제 감정을 속이지는 못하겠다면 하다못해 기쁜 시늉이라도 하면서 따르는 게 옳다는 걸 말이다. 대공황마저 알아맞힌 이래로, 카네기는 눈앞의 황제가 그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뼛속 깊이 실감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니 카네기는 내색하지 않고서 웃었다. 이형 또한 마주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카네기는 돌연 웃음을 멈추고서 여전히 입가에는 은근한 미소를 띤 채로 물었다.
"그렇지요. 분명 하늘에 계신 주께서 도우심입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만 여쭐 수 있겠습니까."
"음, 경이 부탁한다면 얼마든지 들어주리다. 무슨 일이오?"
"시기가 공교롭군요. 분명 지금부터 준비를 시작하여 준비가 끝나는 대로 출발하면 빠르면 10월 초순, 아무리 늦어도 10월 말에는 도착하게 되겠지요. 11월에 있을 대선에 영향이 없을 수가 없겠는데, 혹시 의도하신 바입니까?"
'따르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로 줄곧 휘둘리다가 내가 가진 모든 걸 토해내고서 버려지는 건 질색이지. 자아, 속내를 털어주시지요. 하다못해 내막 정도는 들려드려야 저도 의욕이 나지 않겠습니까, 주군.'
카네기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의 황제가 이리저리 빙빙 돌리는 걸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던 까닭이다. 당연히 순수한 호기심 때문에 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딱히 이형에 대적하려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이형에 휘둘리더라도 내막 정도는 알고서 자기 뜻대로 주도적으로 움직이고 싶다는 의사의 발로였다.
이형은 히죽 웃으면서 답했다.
"바로 그렇소. 가능한 대로 화려하게 준비해준다면 고맙겠구려. 배도 으리으리하게 고르고, 언론들도 대거 끌어들여 그대의 귀향을 마음껏 화려하게 보도해주시오. 미리견인들은 상인들의 성공에 관대한 나라라고 들었소. 다소 과하게 일을 벌인다고 해도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줄 것이오."
"하하하! 폐하께서 저를 이리도 생각해주시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저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하지만 제 귀향식과 대선이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간단하오. 그대가 모든 관심을 끌어모으면 필히 대선에 관심이 크게 줄겠지. 그럼 그런 소란과는 별개로 늘 성실하게 선거에 임하는 자들만 남게 될 것이오. 그대가 생각하기에, 지난 내전 아래로 군정을 받고 있으며 인구도 더 적은 남부를 표밭으로 삼은 민주당과 산업도시들로 빼곡하여 인구도 많은 북부를 표밭으로 삼은 공화당이 온전히 그들의 골수 지지자들만을 두고서 맞붙는다면 누가 이길 것 같소?"
'도대체 이 황제는 생전 태어나서 한 번도 아시아를 벗어난 적이 없으면서 왜 이런 걸 알고 있는 건가···?'
카네기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도대체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정보를 저 황제는 어째서 알고 있는가. 어째서 그게 보이는가. 태어나서 한 번도 아시아 대륙을 벗어난 적이 없는 황제가 왜 미국의 속사정을 그렇게도 꿰뚫고 있는가. 유럽의 열강이라면 모를까 미국은 세계적으로 보면 그리 깊이 있게 관심을 가지고서 연구할만한 나라도 아닐 텐데.
"하, 하하하!"
카네기는 억지로 웃음을 짜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니 우선은 그저 웃는 것이다. 하다못해 웃으면 인상이라도 좋게 남을 테니까. 그렇게 카네기가 억지로 웃음을 짜내는 동안, 이형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아 참, 그리고 이번 방문은 그대 혼자서만 가지 않을 것이오."
"예?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음, 요즘 흥선왕께서 적적하신 듯 보이니 이번 기회에 효도도 할 겸 미리견 관광을 시켜드리고, 겸사겸사 미리견과 우리 한국의 친선을 재차 다짐받으려 하오. 명목상 흥선왕이 방미를 이끌게 되겠으나,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실권은 그대에게 맡길 테니 말이오. 오랜만에 귀향을 즐기는 김에, 흥선왕께서 잘 즐기시다 올 수 있도록 부탁드리리다."
"···."
카네기는 이번에야말로 웃지도 못하고서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할까. 그걸 스스로 하지 왜 자신에게 맡기는 것이냐고? 왜 하필이면 이하응이냐고? 아니면, 그것참 대단하겠다고? 무수한 말이 생각났으나, 모두 카네기의 입 밖까지 나오지는 못했다.
한참을 입을 다물던 그의 입에서 간신히 흘러나온 말은 이거였다.
"···압승이로군요."
한국에 머물며 직접 사업을 이끌어 대성공을 거두며 미국 재계 창업신화의 역사를 다시 쓴 카네기의 귀향과 현 범아시아 조약기구의 맹주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이형의 친부 이하응의 방미.
황색언론은 물론이고 주류 언론과 재계, 하다못해 대선을 준비해야 하는 정계까지 한순간에 신경이 쏠릴 거다. 분명 그것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겠으나, 그 한순간이 대선 동안은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 이형의 구상대로 공화당과 민주당은 사실상 골수 지지자들만을 이끌고서 맞붙어야 할 테고, 그 결말은 정해져 있다.
공화당의 압승이다. 유권자 대다수는 선거마저 잊고서 방미 행사에 낄낄대거나, 기분 좋게 집권당에 한 표 던지고서 놀러 나갈 것이다.
"그래, 그렇겠지."
이형은 입꼬리를 조용히 말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