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263화 (263/530)

< 희망고문 >

'미치겠군. 도대체가 어디까지 시야가 닿고 있는지 감이 잡히지를 않아.'

카네기는 등골을 타고 오싹한 한기가 내려오는 걸 느꼈다. 정말로 황제가 예언자이거나 초자연적인 힘을 빌린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니, 거의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장 그가 한양에 머문 게 벌써 몇 년째이던가. 그러나 그가 옆에서 관찰하기에 황제가 이토록 자세하게 유럽이나 미국에 대하여 알만한 여지는 없다.

딱히 서역에서 들어온 서책을 열심히 탐닉하는 것도 아니다. 읽는 것은 유럽이나 미국에서 건너온 신문들뿐이었고, 그런 신문에 실린 정보들은 한차례 각국 정부에 의하여 걸러진 것들이다. 설령 황제가 언어에 천부적 재능을 지니고 있어서 그 모든 언어를 해석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신문들만으로 앞으로의 정세나 각국의 속사정을 알아채는 건 불가능하다.

이건 더 이상 천재의 경지가 아니다. 천재도 하다못해 주어진 정보 안에서 최선의 통찰을 끌어내는 인물을 뜻하지 사실상 아무런 정보도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거의 모든 걸 알아채는 인물이 아니다. 그러니까 무언가 상식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어떤 힘을 이용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카네기는 불현듯 계시를 떠올렸다. 옛 성인들이 그러했듯이 하늘에 있는 신이 황제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여주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소?"

이형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번 방미가 사실상 선거 개입이 되어버린다고 한들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되물음이었다. 어차피 미국인들은 이 선거 개입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이제 고작 개항한 지 10년이 넘은 극동의 나라가 자국의 선거에 개입하고자 이런 꾀를 생각해낼 거라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할 터. 이로 인해 덤터기를 쓸 민주당에서도 하필이면 시기가 겹쳤다고 분통을 터뜨릴지언정 한국을 의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카네기에게 이형의 말은 다르게 들렸다. 마침 그의 생각이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에 닿았고, 때마침 계시를 떠올리고 있던 까닭이다. 카네기에게 이형의 말은 마치 그의 속내를 단번에 꿰뚫어 본 듯이 들렸다. 등골을 타고 오싹한 한기가 흘러내리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카네기는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맙소사. 설마, 폐하께서는···."

카네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 그게 얼마나 허황한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형은 그에 답하는 대신 어깨를 한차례 으쓱여 보였을 뿐이다. 이형으로서는 그저 선거 개입에 대한 것이라 여기고서 카네기의 추측을 긍정해주려는 움직임이었으나, 그가 생각한 카네기의 추측과 실제 카네기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발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카네기는 제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이형을 향하여 한쪽 무릎을 꿇으며 제자리에 엎드렸다.

"소신이 죽는 날까지 폐하를 곁에서 모시며 그 뒤를 따르고 싶나이다. 허하여 주소서."

'그래, 어째서 내가 미리 눈치채지 못했을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을 당연하다는 듯이 예언하여 이를 준비하고, 극동에서 누구보다 선량한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던 조선에 임하여 기독교인들을 위하여 신앙의 자유를 베풀었으며, 마치 구약에 등장하는 히브리의 전쟁영웅들처럼 전장에 나서면 마치 신이라도 들린 듯 연전연승을 거듭하지 않았는가.

이분은 주님의 총애를 받는 성인임이 틀림없다. 진정으로 주님께서 귓가에 무언가 속삭여주고 계시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주님께 무언가 하나쯤은 권능을 받았음이 틀림없어. 아니, 설령 이분의 귓가에 속삭여주는 것이 악마라고 할지라도 그 악마는 지금 나에게 끝없는 부귀영화를 약속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그 악마는 나에게 있어서는 신과 다를 바 없을 터!'

카네기는 마음속 깊이 확신하게 되었다. 눈앞의 황제야말로 그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가 눈앞의 황제를 실망하게 하지 않는 한, 그가 카네기를 버릴 일은 일평생 없을 터였다. 그보다 기쁜 일이 없었다. 알 리가 없는 정보를 당연한 듯이 알고서 세상을 자기 뜻대로 바꾸어 나가는 반칙이나 다를 바 없는 능력을 갖춘 인물이 자신의 아군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를 따라가면 반드시 부와 명예가 뒤따르게 되어있다. 그까짓 강철의 시대가 대수일까? 어쩌면 후일 역사를 논할 때 지금의 시대를 황제의 시대라 정의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다. 진정으로 이 눈앞의 황제가 하늘에 있는 주의 총애를 받고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좋소. 이번 기회에 내 경에게 우리 대한제국의 명예 시민권을 부여하리다. 혹 그대가 진정으로 이 대한의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또 언제든지 말씀을 하시오. 경을 위하여 언제건 자리를 비워둘 테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형의 대답에 카네기는 이형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려 하다가, 이를 무르고서 반대쪽 무릎까지 마저 굽히며 제자리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그 모습을 확인한 이형은 히죽 웃었다. 누가 봐도, 그건 서역의 예법이 아니었다. 동양의 예법이었고, 곧 조선의 예법이었다. 마침내 카네기가 한국에 완전히 정착하려 한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옳거니, 드디어 겨우 낚였구나! 으흐흐, 너는 이제 내 거다. 앞으로 두고두고 곁에 두고서 쪽쪽 빨아 먹어주마!'

"허허, 갑작스럽게 왜 그러시오? 이거야 원 어색하구려. 내 경에게 이 나라의 예법을 강요할 생각은 없으니, 그저 이전처럼 서역의 예법만으로 족하오."

물론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구태여 입 밖에 내 봤자 산통을 깨는 꼴밖에는 안되었으니까 말이다. 이형은 짐짓 근엄한 체를 하며 카네기를 말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제 자리에 엎드린 카네기는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젓고서는 말했다.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이제 황상께서 이 나라 대한의 신민이 될 수 있도록 황은을 베풀어 주셨거늘, 어찌 대한의 백성이 대한의 황제에 서역의 예법을 행하겠습니까. 청컨대, 황상께서는 뜻을 거두어 주소서."

'그리고 진정으로 주님께서 이 황제의 귓불을 간지럽히고 계신다면, 지금 이 절은 뒤에 계신 주님을 향하여 올리는 절이다. 율법을 어긴 것이 무엇 하나 없으니, 나는 여전히 선량한 기독교인일 터!'

한편 카네기는 카네기대로 내심 필사적으로 지금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이형이 생각하고 있는 이유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내용이었지만 말이다. 큰 갈래에서는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아무튼, 이형을 죽는 날까지 따르겠다는 마음 하나만큼은 진실하였으니 말이다.

"어허, 이것 참!"

'오호라, 이거 각오가 굳어진 모양이군. 옳거니, 그럼 이제 조선 이름을 지어줄 때도 되었으니까··· 뭐라고 지으면 좋으려나? 앤드루가 이름이고 카네기가 성이긴 한데··· 카네기를 조선식 성으로 바꾸자니 영 마땅치가 않군. 그냥 이놈이 훗날의 철강왕이고 이름이 앤드루이니 안철왕이라고 하면 되려나?'

이형은 더 이상 카네기를 말리려 하지 않고서 그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근엄하게 웃었다. 머릿속으로는 카네기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줄까 고민하면서 말이다. 이제 카네기가 진정으로 대한에 귀화하려는 뜻을 품었으니, 이 기회에 아예 황제가 몸소 이름을 지어주면서 입장을 확고하게 만들고자 한 것이다.

'죽는 날까지 이분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 유다가 될 수는 없어. 고작 은화 30냥에 홀려서야 더 큰 기회를 놓치는 격이야···!'

물론 카네기로서는 꿈에도 모를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이형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부르르 떨었다. 눈앞의 황제를 혹여나 적으로 돌릴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만으로 두렵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커다란 오해를 서로가 품게 되었음에도, 큰 갈래에서는 서로의 길이 어긋나지 않았음이 기이할 따름이었다.

* * *

그렇게 두 사람이 방미 일정을 세부적으로 논하고 헤어진 그 날 이후부터, 한국에서는 한동안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오늘날 흔히 통용되는 양이라는 표현은 심히 부적절하다. 어찌하여 서역의 색목인들이 오랑캐라는 말인가? 그들의 물산이 비루하던가? 되려 우리 아주를 웃돌고 있다. 그들이 이룩한 학문적 성과가 보잘것없던가? 만류귀종이라고 본디 뭐든지 극에 달하면 하나에 모인다고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서역 또한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라 여김을 알고, 서역의 선비들이 어린 백성들을 일깨우고자 하고 있음을 아는데 어찌 공맹의 도를 모른다고 그들을 양이라 부르는가?

되려 구주는 아주와 달리 공맹의 이치를 습득하지 않고서 스스로 공맹의 이치에 범접하게 되었으니, 오늘날 구주야말로 백가쟁명의 재림이라 부를 법할 것이다. 조선이 지난 500여 년간 유학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아 선비들을 후하게 대접해 왔거늘, 선비라는 자들이 뭇 서역의 선비들과 자유로이 논하며 이치를 논할 궁리는 하지 않고서 단지 아주야말로 천하의 중심이라는 착각에 빠져 서역의 선비를 배척하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장차 우리 아주의 선비들은 서역의 선비들과 논하며 새로운 백가쟁명에 동참하여야만 할 것이다."

"계몽이란 무엇인가. 곧 어리석음을(蒙) 일깨움(啓)을 말한다. 이것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음을 가르치는 유학과 무엇이 다른가. 서역에서 논하는 계몽주의란 곧 서역의 유학이며, 만류귀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끄러워할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공자께서 이르시기를 배움에는 끝이 없으니, 코흘리개 어린아이에게조차도 배울 것이 있다고 하였다. 하물며 서역의 유자들에 배울 것이 없겠는가.

아주에는 여전히 미흡함이 많으니, 그것이 곧 가르침을 구해야 하는 까닭이다. 배울 수 있다면 그까짓 체면이 대수겠는가? 지난날 아주의 유자들은 자신의 경지에 만족하였는지는 않았는가? 공자께서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면 즐겁다고 하셨거늘, 오늘날 아주의 유자들은 배우는 재미마저 잊고서 정체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것이 어찌 참된 선비일 것이며, 참된 유자라 할 수 있으리오?

서역의 계몽주의란 곧 서역의 유학이다. 서역의 계몽주의자들이 서역의 어리석은 백성들을 일깨우고자 하였듯이, 우리 아주의 유자들 또한 그들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서역의 계몽주의자들이 괴력난신을 타파하고 지혜로서 세상을 터득하려 하였듯이, 우리 아주의 유자들 또한 그들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 길이야말로 공맹께서 이끄시며 가르치시던 본래의 유학인 까닭이다."

"오늘날 서역에서 제일로 유자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나라가 어디인가? 노서아와 덕의지는 아니다. 그들은 왕권은 곧 신권이라 하였으니, 공맹의 가르침에 반하고 있다. 영길리는 왕권마저 법치 아래 무릎 꿇렸으니, 곧 법가의 나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태리와 불란서는 백성이 스스로 왕관을 만들어 왕가에 바쳤으니, 실로 유자의 나라라 부를법하다.

그러나 그중에서 단연 으뜸은 미리견일 것이다. 그들은 진정으로 나라의 근본은 곧 백성이며 나라의 주인 또한 백성이니 이것이야말로 참된 민본의 이치라 할 수 있으며, 그들의 법은 위로는 미리견의 통령마저 따르게 하고 아래로는 비주에서 온 토인들마저 보듬고 있으니 참된 법치의 이치라 할 수 있으며 이민자의 나라를 자처하여 만국의 선비들과 어린 백성들을 품에 안고 있으니 곧 참된 백가쟁명의 이치요, 참된 애민이라 부를법하다.

혹자는 그들의 나라에 왕가가 없음을 일컬어 역도의 소굴이라 힐난하나,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어디 옛 요임금께서 순임금을 낳으셨던가? 그런데도 요임금께서 순임금에 천하를 맡기심은 곧 순임금께서 천하를 능히 다스릴 수 있음을 요임금께서 알고 계신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순임금께서 요임금께서 기대하신 대로 능히 천하를 다스리어 태평성대를 이룩하셨으니, 이것이 곧 참된 선양의 전통이오. 참된 군왕이라 할 수 있다.

미리견에 어찌 왕이 없던가. 그들의 나라에서는 대통령이 곧 왕이요, 황제다. 단지 그들은 옛 요임금께서 그러하셨듯이 나라를 다스릴 참된 군왕을 찾아 그를 섬기기 위하여 민의를 수렴해 8년마다 선양의 예를 다하고 있을 뿐이니, 이 어찌 서역의 미담이 아닐 수 있을 것이며 곧 그들이 아름다운(美) 나라(國)인 까닭이 아니겠는가?"

당연하지만 흔하디흔한 선전이었다. 방미에 앞서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하여 조정에서 관영언론을 동원하여 총공세에 나선 것이다. 선전이 흔히 그러하듯이 그 내용은 현실과 괴리되거나 아니면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은 불편한 진실들투성이였으나, 그런데도 이 선전은 이형이 기대했던 대로 시원스럽게 먹혀들었다.

그것이 유학을 근간으로 하여 서양을 해석한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한국의 사상적 근간은 유학이었고, 이는 대다수의 개화파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는 서역에서 유학을 다녀온 이들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아예 어렸을 적부터 서역에서 살았다면 모를까, 이들도 어느 정도 머리 심지가 굳고 난 다음에야 유학을 다녀왔으니만큼 아무리 서역의 사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그 뿌리에는 유학이 깔려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어찌 선비가 선비에 배웠음을 부끄럽게 여길 수 있겠는가? 참된 선비라면 더 배우지 못하였음에 한탄하고 부끄러워할지언정, 배우게 되었음을 부끄럽고, 한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조선은 아주에서 제일로 유자를 후대하는 나라였으니, 대한은 세계에서 제일로 계몽적인 나라가 되어야 한다! 붓과 먹의 검은 빛이 장차 아주를 찬란히 빛낼 터이니, 우리 대한의 선비들은 유자된 자로서 언제나 붓과 먹을 가까이하고 서역의 계몽주의를 익히고 이해하며 논쟁하여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조정의 선전은 사실상 어떠한 반발도 없이 있는 그대로 사실인 양 받아들여졌다. 서역의 사상을 받아들인다고 한들 공맹의 도리를 버리는 게 아니다. 서역 또한 공맹의 도리를 익히고 있다. 얼마나 반가운 이야기인가. 얼마나 달콤한 이야기인가. 근대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유학이 서게 될 입지도 좁아질 거라 불안에 떨던 유림에게 그보다 반가운 소식은 없었다.

이러한 긍정적인 반응은 이 무렵 한창 서로에게 누런 이를 드러내고 있던 신세대와 구세대를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조정의 선전을 사실로 받아들였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친미적 선전 또한 사실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한국의 선전은 곧 한국을 중심으로 범아시아 조약기구에 속한 제후국들에까지 퍼져나가기 시작해, 그간 개화에 반대하던 이들도 한 번쯤 서역의 서적을 찾아 읽어보는 지경이 되었다.

"우라질 놈 같으니라고."

그리고 이는 이 무렵 별궁에 갇혀 조용히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이하응의 귀에까지 금세 들어갔다. 쓰디쓴 소식이었다. 그가 무대 뒤편으로 물러난 다음에도, 세상은 이렇다 할 문제 없이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불쾌한 현실이었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되었기로 서니,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단 하루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워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덕에 이하응은 알고 있었다.

"차라리 죽일 것이지, 이 노괴가 세월에 짓눌려 죽기를 바라느냐. 허허허."

그가 죽을 날이 머지않았었음을. 그러나 우연한 기회로 살아남고 말았음을 말이다.

이하응은 쓰게 웃었다. 참 너무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하응의 성정을 뻔히 알고 있을 거면서,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음을 뻔히 알고 있을 거면서 이번에도 죽이지 않고 살렸다. 차라리 죽이려 들었으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피를 토하고 죽었을 텐데, 그건 너무 편한 결말이라는 건지 그조차 막아버렸다.

"죽으면 편했을 것을."

그저 그 한마디만이 흘러나왔다. 이하응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여기서 도망쳐봐야 조선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니 도망치려는 시도는 바보 같은 짓이다. 그렇다고 조선이 그를 바랄만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결국 그는 여기서 죽을 운명일 터. 편히 죽지도 못하게 만들었으니, 앞으로 십여 년간을 별궁에 머무를 생각에 그저 눈이 절로 질끈 감길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이하응은 후일 생각했다.

"축하드립니다, 전하! 이번에 미리견에 가시게 되었-."

"헛소리!"

죽지도 못하게 하더니, 이제는 애까지 태우는 고얀 놈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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