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264화 (264/530)

< 금의환향 >

그리고 한창 방미를 위한 여론이 조성되고 있을 무렵, 별안간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시비련 땅에 노서아의 황태자가 총독으로 부임했다, 라···. 이거 성가시게 되었군."

이형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간 시베리아 총독 자리가 한동안 비어있었고, 또 그 빈자리를 메우려면 상당한지와 권위를 지닌 인물이 파견되리라는 것 또한 직감했으나 황태자는 역시 격이 다르다. 그 황태자라는 인물이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을 주도했다는 소문이 파다한 인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 해도 이 기회로 러시아가 더욱 동진하고자 하는 의도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김윤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형의 추측을 부정했다.

"아니요, 되려 잘 되었습니다. 정보원들이 이르기를, 이번에 총독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인솔하게 된 인원이 호위를 포함하여 고작 해봐야 100여 명이 채 넘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제아무리 노국의 법도가 우리 대한과 다르다고 한들, 고작 해봐야 100여 명으로 우리 대한을 탐하기는 어렵겠지요."

"100여 명?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다소 지나치군. 혹 태자가 유배라도 당한 건가? 명색이 한 나라의 태자라면 그보다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할 터인데."

"노국 조정에서 무언가 소란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미처 파악하지 못하였으나, 태자가 행실이 좋지 못하여 질 나쁜 청년들을 친우로 삼아 황제의 노기를 샀다고 들었습니다."

김윤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는 이야기만 대강 전해 듣고서 조선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었던 망나니 왕자를 연상한 모양이었다. 주색잡기 좋아하고, 허구한 날 사냥만 다니고, 공부는 멀리하는 왕자와 그런 왕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왕. 흔하디흔한 이야기다. 조선에는 뒤주에 갇혀 죽은 왕자마저 있지 않던가.

하지만 이형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황태자면··· 분명 알렉산드르 대공, 후일 알렉산드르 3세지. 허, 그 인간이 망나니 왕자 노릇을 했다고? 그럴 리가. 한평생 그 흔한 연분 한번 없이 정부인에게 정절을 다한 양반인데. 고작 해봐야 사냥 좋아하는 거 가지고 뭐라고 하기에는 귀족이 사냥 좋아하는 정도야 유럽에서는 흠잡을만한 일이 아니지. ···그럼 뭔가 구린 일이 있기는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이형은 턱수염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무언가 그가 모르는 구석에서 일이 터졌음을 직감한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이번에는 그 내용이 전혀 짐작도 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알렉산드르 2세와 알렉산드르 3세 두 부자간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들의 관계가 나쁘기로서니 고작 수행원 100여 명을 붙여서 시베리아에 부임시킨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그건 어떻게 생각해도 황자의 격을 깎아내리는 일이다. 아무리 시베리아까지 가는 길이 험하여 너무 많은 인원을 대동하면 되레 위험할 수도 있다지만 지금은 여름이다. 얼음투성이 시베리아도 지금이라면 사람이 전혀 살 수 없는 땅이 아니고, 강줄기를 이용하면 500명 정도는 쉽게 지나갈 수 있다. 좀 억지를 부린다면 1000명도 가능할 테고 말이다.

적어도 그 정도 인원은 대동해야 황태자로서 권위도 살 테고, 또 총독으로서 통치하기도 편리하지 않겠는가. 러시아 제국에 시베리아로 보내버릴 죄수들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이형은 직감적으로 이것이 단순한 황가 내부의 감정싸움이 아닌 정치가 엮인 일임을 깨달았다.

"흐음··· 그럼 그 수행원들의 구성에 대하여는 파악해두었는가? 혹 무언가 고관대작이 섞여 있거나, 이름난 군관이 섞여 있거나 하는 식으로 말일세."

"듣기로는 지난 노국과의 전쟁 중 우리 대한 군과 다투었던 미하일이라는 장군을 함께 대동하였다고 들었나이다. 그러나 그 또한 대동해온 병사는 한 줌도 되지 않아, 침공의 전조라 생각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자를 제외하고서는 이렇다 할 고관대작은 없다고 합니다."

"그래, 그 피부 허연 밍간 놈이 끼었다 이 말이지···."

'확실하군. 차르가 눈에 거슬리는 놈들을 황태자와 모아서 시베리아로 치워 버렸어. 그럼 이놈들이 진짜로 사고를 치려 했건, 아니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무언가 소란이 일어날 뻔했건 둘 중 하나인데···거창한 사고를 쳤다면 신문에 실리지 않을 리가 없지. 그럼 후자인가. 흐음, 차르가 위험시할만한 소란이라···.'

직감적으로 이형은 러시아 국내의 식자층이나 계몽주의자들을 떠올렸다. 알렉산드르 2세는 집권 초기에 개혁의 필요성을 실감하여 이런저런 근대화 정책을 추진한 개혁 군주였으나, 후기로 갈수록 날로 격화되는 요구에 지쳐 보수적으로 돌아선 인물이었다. 그 또한 개혁의 필요성은 인정했으나, 그 개혁을 요구하는 세력이 자신의 목숨과 황권까지 위협하는 걸 가만 보고만 있을 인물은 아니던 것이다.

후일 실제로 그 개혁을 요구하는 자들의 손에 그가 목숨을 잃었음을 떠올리면, 그의 판단은 결코 틀렸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렇게 계몽주의자들을 떠올리니 이형으로서는 그림을 읽기가 한결 편해졌다. 알렉산드르 대공이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 이후로도 강경 발언을 쏟아내며 런던 타임스를 비롯한 영국 언론들에서 그를 위험인물로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까닭이다.

강경한 발언은 계몽주의자, 개중에서도 강한 민족주의적 사상을 지닌 자들을 끌어들이기 쉽다. 민족주의자가 아니더라도 강경한 발언은 그 자체만으로도 극단주의자들에게 매력적이다. 좌우지간 무언가 과격하게 변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걸 황태자의 유배나 다름없는 총독 부임과 엮어서 생각하면 결론 도출은 간단하다.

"그럼 그 수행원이라는 놈들은 하나 같이 새파랗게 젊은 놈들이겠구먼. 대부분 귀족일 테고, 나름 학교에서 꽤 공부했다는 놈들이겠지. 젊은 혈기에 취해 사는 놈들이 괜히 황태자를 등에 업고서 날뛸까 봐 깡그리 동쪽으로 몰아넣은 건가."

이형은 피식 웃었다. 결과를 놓고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마 차르는 이번 기회에 찬바람이라도 쐬면서 열을 식히고 오라는 생각이었겠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어디 그렇게 쉽던가. 특히나 젊은 청년들이라면 두말할 것 없다. 자신들의 뜻을 몰라주는 부모세대를 원망하고 더욱 독기를 키울지언정, 고작 해봐야 유배 정도로 머리가 차게 식기를 기대하는 건 미련한 짓이다.

이 경우 반응은 크게 두 가지일 터였다. 하나는 시베리아의 통치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고서 하루빨리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갈 생각만 하거나, 아니면 시베리아를 눈부시게 개발하여 후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향할 때 글자 그대로 금의환향을 하겠다 벼르거나 말이다. 그리고 이형은 아마 후자일 거라 추측했다. 진정으로 그들이 차르가 위험시할 정도로 과격한 작자들이라면, 지금쯤이 한 몸 바쳐 러시아를 바꾸겠다는 우국충정에 타오르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에 김윤식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아마 황상께서 추측하신 대로겠지요. 하면,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습니까?"

"대처라고 할 것도 있나?"

이형은 히죽 웃었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알기 쉽게 러시아 제국에 개입할 여지가 나왔으니 그야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형은 가볍게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한 장군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듬해 봄에 있을 전투에서 우리 대한이 크게 한 방 먹어주는 시늉을 해줘야겠어."

"예, 예? 그러니까, 거짓으로 패하자는 말씀입니까?"

"그렇네. 어차피 고작 해봐야 가볍게 한판 붙는 정도일 테니 그 정도가 딱 좋아. 그 피부 허연 밍간 놈이 끼어있으면 함부로 선을 넘지도 않을 테고. 어디 전쟁 영웅들을 만들어보실까."

"황상께서 정녕 그리 마음을 정하셨다면 따르겠사오나···."

이형은 즐겁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이형의 말에 김윤식으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를 않는 모양이었다. 이형의 말대로 저들이 황태자와 그 측근들이라면, 구태여 그들에게 전공을 쌓게 하여 그들의 입지를 강화해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형으로서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러시아에는 영지 귀족들이 많지. 그놈들이 끌고 있는 사병들도 많아. 그리고 그놈들은 누구나 제 밥그릇을 채갈 게 뻔한 자유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사상들에 적대적이야. 농노해방조차 알렉산드르 2세가 양보에 양보를 거듭한 끝에 겨우 따낸 거고 실질적으로는 법적인 취급만 달라지고 처지는 그대로였는데, 저 젊은 놈들이 군공을 세워 금의환향하여 무턱대고 영지 귀족들과 싸워 특권을 빼앗아 나라를 바로 세울 궁리만 하기 시작하면···.'

최소가 황태자를 등에 업은 젊은 중앙귀족들과 교회를 등에 업은 영지 귀족들의 정쟁으로 인한 국정 마비고, 차르와 황태자의 대립으로 인한 혼란이며 최악은 내전이다. 그 와중에 본래 역사에서도 그랬듯이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는 지하저항 세력들이 마구 테러를 일으키며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건 덤이다.

물론 그 진통을 모두 이겨낸다면 분명 러시아는 강대해질 것이다. 그러나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결국 그들 또한 귀족인 이상 제아무리 개혁을 밀어붙여도 한계가 있을 것이며, 그들의 동맹국인 신성로마제국은 러시아가 계몽주의를 받아들이는 걸 결코 바라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러니 그 소란의 끝은 반동세력의 승리이거나 양패구상일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이형은 그렇게 보았다.

아니, 설령 성공해도 상관없다. 러시아 제국이 혼란기를 겪는 동안, 한국은 중앙아시아만 날름 챙겨서 물러나면 끝이다. 그 이상 서진할 이유도 없고, 그럴 여력도 없다. 무기 장사에 나서면서 부차적인 수입을 쏠쏠히 챙기게 될 건 덤이다.

'아주 그냥 걷어차 달라고 제 불알을 드러내 주셨는데, 그럼 바라시는 대로 있는 힘껏 군홧발로 걷어차 드려야지. 아주 그냥 털 한 올 한 올 세심하게 벗겨 먹어주마.'

이형은 조용히 입꼬리를 뒤틀었다.

* * *

한편, 이 무렵 한국에서는 한가지 결정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원(圓)이라."

어스름한 등불만이 초라하게 빛나는 낡고 초라한 사랑방.

전창혁은 그의 손안에 들어온 자그마한 은제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번에 5개년 경제개발계획안이 진행되면서 부차적으로 도입된 새로운 화폐였다. 다만, 온전히 새로운 화폐는 아니었다. 명목상으로는 기존에 쓰던 상평통보 10냥을 모으면 곧 1원으로 통용되었으니 실질적인 명칭은 당십전이라고 부르는 게 정확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나라에서 이 원화를 도입하여 녹봉을 원화로만 지급하게 되고 세금을 거둘 때도 될 수 있는 한 원화로 내도록 명시한 이후로도 관청에서나 원화라 일일이 꼬박꼬박 불러주었을 뿐, 거리에서는 흔히 당십전이라 부르거나 아예 은을 얇게 도금하였다 하여 은전이라고 부를 따름이었다.

그러나 전창혁은 일일이 꼬박꼬박 이를 원화라 따로 불러주었다. 이 새롭게 도입된 원화에는 기존에 쓰던 상평통보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똑같구나. 똑같아. 무게도, 생김새도, 재료도, 모두가 똑같아. 으흐흐!"

전창혁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원화 동전 넉 개를 손에 쥐고 잘그락잘그락할 때마다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것이 이번에 영길리에서 들여온 조폐기로 만들어낸 신식 주화임을 알고 있던 까닭이다. 그건 나라에서 화폐를 만드는 데에 은을 쓸 만큼 귀금속 보유량에 여유가 생겼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전주 제일의 민족주의자임을 자부하던 그에게 이 나라 대한이 한 걸음 한 걸음 진보해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는 일보다 기쁜 일은 없었다. 비록 아직은 생산량이 수요에 미치지 못하여 여전히 옛 상평통보가 주로 쓰이고 있으나, 장차 온 나라가 이 새롭게 만들어진 원화를 쓰게 되리라. 아니, 비단 온 나라뿐일까.

이 나라 대한이 아주의 맹주일진대, 어찌 이 원화가 대한에서만 쓰이고 말까. 당연히 온 아주 대륙에서 곧 원화를 받아 쓸 것이다. 그들이 각각 그들만의 화폐를 주조한다고 한들, 영길리에서 직접 조폐기를 수입해와 주조해내고 있는 대한의 원화를 따라가지는 못하리라. 곧 온 아주가 원화만 찾는 통에 아무리 원화를 찍어내도 모자라게 될 터였다.

"좋구나. 이런 경사가 따로 있을까? 내가 복에 겨워 이런 좋은 시대에 태어나 나라와 민족이 날로 부강해지는 걸 나날이 실감하며 나라의 녹을 받게 되었으니, 더 바랄 것이 없구나! 더 바랄 것이···."

전창혁은 차마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제아무리 자신을 속이려 해도 그것만큼은 속일 수가 없었다. 그래, 나랏일은 순탄대로다. 그의 교사 노릇도 마찬가지다. 하나둘씩 학생들이 졸업하여 대학에 진학하고 다시 교생이 되어 돌아와 선생 일을 도우니, 비로소 가르치는데에도 여유가 생기고 더욱 많은 걸 배우고 익히며 학생들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나라에서 국어 교과서를 발간하여 보급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세로쓰기를 더 이상 쓰지 않는다고 하여 이제 와 가로쓰기와 띄어쓰기 따위에 익숙해지느라 된통 욕을 보기는 했으나, 막상 그렇게 익숙해지고 나니 눈도 한결 편해지고 문장을 이해하기도 쉬워지면서 학생들의 학업적 성취도 배는 늘어난 듯했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보람찼다. 이제 비로소 모든 게 본궤도에 오르고, 하나둘씩 결과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 기뻤다.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 것 같아서. 자신의 믿음이 헛되지 않았던 것 같아서 기뻐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차마 온전히 기뻐할 수는 없었다.

"···봉준아. 이 미련한 것아. 그 왜소한 놈이 그러게 왜 괜한 바람이 들어서 제 명을 재촉했느냐. 왜···!"

전창혁은 차마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서 머리를 감싸 쥐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 넓은 전주에, 그가 교편을 쥐고 있던 학교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한 졸업반 학생이 고작해야 셋. 그 셋이 하필이면 그의 아들 전봉준과 그 교우들이었다. 누구 하나 사망 통지 하나 받지 못했으나, 이미 누구나 좋지 않은 일이 닥쳤을 거라 직감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이 끝난 지 벌써 1년하고도 반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정겨운 고향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아내는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으나, 전창혁은 이미 현실을 받아들인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떻게 하필이면 그 셋이었을까. 어떻게 딱 그가 죽어도 안 된다고 말렸던 그 셋일까. 조금만 더 말렸더라면, 조금만 더 철저히 감시했더라면 그 셋을 잃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절로 현기증이 났다.

"어찌 전장에 서는 것만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겠느냐?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고 일자리를 얻어 성실히 일하면 그 또한 나라를 위하는 길이거늘. 이놈아. 이 어리석은 놈아. 네 어찌 이 아비가 널 먼저 묻게 두었느냐. 왜 이 아비 가슴에 대못을 박아!"

결국 전창혁은 더 참지 못하고서 무너졌다. 탁상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전창혁은 흐느꼈다. 운이 좋게도, 그날따라 그의 사랑방 근처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창혁은 누구에게 들킬 걱정 하나 없이 그저 울고 또 울었다.

* * *

"아버지! 이것 보세요. 저도 나라의 녹을 받는 어엿한 군관이 되었습니다! 비록 아직은 병졸들에게 무술시범을 보이는 게 전부지만, 언젠가는 꼭-."

"에라이 미련한 놈아!"

뻐-억.

이튿날 아침, 전창혁은 소리 소문도 없이 해맑게 웃는 얼굴로 고향에 돌아와 교문 앞에 선 전봉준을 냅다 발로 걷어찼다.

기운차게 울부짖는 수탉의 울음소리를 뒷배경 삼아, 이른 새벽 전주에서는 오로지 두 부자의 정겨운 매타작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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