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266화 (266/530)

< 원석 >

"으으, 아버지. 제발 그만···!"

"그만은 무슨. 이 아비 속 썩인 거 생각하면 오늘에야말로 이 미련한 놈을 장사 지내려던 차다. 아비 말은 듣지도 않고서 총포나 바리바리 싸 들고서 전쟁터에서 구르던 놈이 뭘 이제 와서 약한 소리를···!"

"오, 오해입니다. 아버지! 제, 제가 군문에 자진해서 든 건 사실이어도, 결국 전쟁터는 얼씬도 못했―."

"뭐라? 오호, 그거 잘 되었구나. 하나 생각하니 더욱더 괘씸해. 이놈아. 그럼 그냥 그대로 집으로나 돌아올 것이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멍청한 것이!"

딱!

전창혁은 그대로 전봉준의 머리를 딱밤으로 쥐어박았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절로 핑 돌았다. 이미 혼자서 술을 몇 잔이고 받아마시어 얼굴이 벌겋게 된 전창혁은 그날 밤이 새도록 전봉준을 놓아주지를 않았다. 처음에는 어려운 말이나 퍼붓다가도, 나중에는 알딸딸해져서는 그저 구시렁구시렁하며 전봉준을 면박을 주는 게 끝이었다.

전봉준에게 술을 가르칠 생각은 있는 것인지, 잔이 채워지는 대로 저만 목을 축일 뿐 전봉준에게는 잘 따라주지도 않았다.

"으흐흐, 봉준아-!"

"예, 예에, 아버지."

"그래, 우리 봉준이구나. 우리 봉준이가 왔어! 으흐흐, 으흐흐흐!"

"아이고, 그러게 적당히 좀 마시라는데 사람 말은 듣지도 않고서···. 봉준아, 어깨 좀 빌려다오. 그래도 너희 아버지 방에 누워는 드려야 하지 않겠니?"

결국 전봉준은 그날 밤이 새도록 술에 얼큰하게 취해 사랑방을 나뒹구는 아버지의 상대를 해주어야 했다. 그나마 김씨 부인이 곁에서 도왔으니 망정이었지, 그도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마음 편히 쉬려던 고향 집에서의 첫날밤을 아버지 술주정이나 상대하며 보냈을 판국이었다.

다만 전봉준으로서는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그의 고난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아, 아버지. 이 책들은 도대체···?"

"보면 모르겠느냐? 그간 네가 미뤄둔 학교 공부니라. 고작 해봐야 하루지만, 달리 생각하면 자그마치 하루의 시간이 있는 것이다. 네가 장차 진정으로 군문에 종사하며 나라의 녹을 받게 된다면 마음 놓고서 하루를 편히 공부할 수 있는 날이 며칠이나 되겠냐? 옛말에 배움이란 본디 죽어야지만 끝이 난다고 하였다. 네가 죽는 날 너의 경지가 정해지는 것이지 네가 멋대로 네 경지를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이미 교장 선생님께 내일까지는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좋다는 허가도 받아두었다. 오늘 하루는 내 그동안 밀린 네 공부를 마무리 지어주마. 자, 책을 펴거라."

전창혁은 그리 말하며 자리에 앉아 그의 어깨높이까지 올라오는 두꺼운 책더미를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곧, 전봉준은 쉬기 위하여 고향에 돌아와 어디 갈 수도 없이 이 모든 서적을 모두 읽지는 못하더라도 하다못해 맛보기라도 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미리견에 가기 전에 오래간만에 마음 편히 쉬어도 보고 부모님이나 정겨운 친구들의 얼굴도 보고서 돌아갈 생각이던 전봉준으로서는 그야말로 아닌 밤중의 홍두깨였다.

"아이고, 배야! 어제 술을 마셔서 그런가, 배가···!"

"그래, 그럴 것 같아서 요강도 방 안에 들여두었다. 명심하거라. 넌 이 책들을 겉핥기로나마 한 번씩 읽은 다음에야 이 방에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밥이나 간식도 모두 이 방에서 해결을 봐야 할 터이니, 그리 알아두거라."

"···예."

그러나 도망치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전봉준 나름대로는 필사적으로 배가 아픈 시늉을 하며 도망치려고 해 보았으나, 전창혁의 의사는 실로 결연했다. 그러니 전봉준으로서는 낯이 절로 푸르딩딩하게 죽어갔으나, 차마 힘으로 아비를 뿌리치고서 도망치거나 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서 잠자코 무릎을 꿇고 제 자리에 앉았다.

서적들은 하나같이 요 몇 년간 명동성당에서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이 조선말로 통역한 서역의 서적들이었다. 그 대부분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니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니 같은 프랑스의 서적들이었으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나 헤겔의 역사철학 강의 같은 다른 유럽국가들의 서책도 있었다.

"가로되 영길리의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선비가 말하건대 오늘날의 선비들은 단지 믿을 뿐 논박하지 아니하며, 고찰하는 수고를 꺼리어 단지 옛 명성과 권위를 추앙하여 학설을 논함에서도 우아한 미사여구만을 추구하며 옛 가르침에 정체하려 할 뿐이니. 이것이 곧 극장의 우상이라고 말하였다. 요컨대···."

"···."

"···곧 옛 선현들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옛 선현들의 가르침은 분명 옛 시대에서는 무엇보다 우수한 것이었겠지. 그렇기에 역사에 남았을 것이며, 오늘날에도 추앙하는 목소리가 방방곡곡까지 퍼져나가고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추앙받아 왔다고 단지 믿는 것이 어찌 참된 선비의 자세겠느냐. 단지 가르친 바를 믿고 외우는 것이 배움의 끝이라면 그자는 더 이상 선비라 자칭할 자격이 없으니 붓을 꺾는 게 옳다.

명성과 권위만을 따르는 건 결국 판소리꾼의 차림새가 그럴듯하고 목소리에 설득력이 있다고 하여 판소리꾼이 이야기하는 극을 현실인 양 곧이곧대로 믿는 꼴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옛 영길리의 선비는 이를 일컬어 '극장의 우상'이라고 한 것이다. 오늘날 이 대한 땅에서 이보다 귀한 말이 또 어디 있겠느냐. 모두가 낡은 권위와 명성을 단지 추앙할 뿐 어찌하여 그리되었는가를 고찰하고자 하는 참된 선비는 누구 하나 없으니, 곧 극에 기반한 잡설만이 난무할 뿐 참된 학문은 메마른지 오래니라.

나라에 참된 선비는 없고 모두가 그럴듯하고 우아해 보이는 잡설만 늘어놓는 소리꾼투성이인 것이다. 자, 그럼 이제 귀로 듣고 눈으로 읽었으니 이번에는 네가 나에게 설명해 보아라."

"예. 옛?"

그 뒤로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전봉준은 그날 종일 전창혁에게 붙잡혀 설명을 들어야만 했다. 단지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 끝났으면 그나마 다행이련만,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고서 전창혁은 설명이 끝나고 나면 매번 전봉준이 방금 배운 것을 직접 입으로 다시 설명해 보라 시켰다.

결국 그날 전봉준은 종일 탁자 앞에 앉아 책만 읽으면서도 전창혁이 가져온 책 중 절반도 채 훑지도 못했다. 읽는 것만으로도 고역인데 그걸 또 잘 이해했는지 설명해 보라고까지 시켰으니 진전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하루는 잔치에서 술을 마시면서, 하루는 공부하면서 전봉준은 귀하디귀한 휴가를 모두 소모하고서는 새벽녘에 겨우 잠자리에 들어 또 수탉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 새벽이슬을 맞으며 기차를 타고서 한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럼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시간 나면 언제건 돌아오거라. 기회가 나면 언제건 서신도 보내고! 정 궁에서 눈치가 보이거든 서신은 보내지 않아도 괜찮다. 이 어미는 네가 무사하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 그저 마음이 놓이는구나···!"

"하하하! 이제 괜찮아요. 궁에서 이것저것 잔심부름도 하고 또 택견도 익히고 하느라 미처 서신을 쓸 시간이 나지를 않았던 거라서, 이제부터는 택견 수련도 슬슬 마무리되었으니 앞으로는 시간 많아요. 언제건 편지 드릴게요."

멋쩍게 웃으며, 전봉준은 열차에 올랐다. 만들어진 지 채 10년도 되지 않은 기차역에는 한양으로 향하는 승객들로 북적거렸다. 누군가는 한양에서 가져가 팔 작정인지 생선비린내가 고약한 함을 등에 지고서 기차에 올랐고, 또 누군가는 멋들어지게 분도 칠하고 지독한 향수 냄새를 뿌리며 화려한 여우 모피와 원피스까지 차려입고서 기차에 올랐다.

차량 안은 온통 영어로 가득했다. 미국에서 수입해온 3등 여객차량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굳이 전봉준이 일부러 삐뚤어지게 보려 하지 않아도, 열차 안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된 표기 옆에 대충 먹으로 칠해진 한문 숫자의 어색함은 물론이요, 장사꾼도 비렁뱅이도 코흘리개 아이도 갓을 쓰고 젠체하는 선비도 있는 대로 멋을 낸 모던보이도 한데 모여 살 냄새를 풍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구별이라고는 고작 해봐야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하여 남성 차량과 여성 차량을 나누었을 뿐. 신분의 고저도 빈부의 격차나 학벌의 길고 짧음조차 상관없이 한데 모여 한양으로 향하려 하는 승객들의 모습은 전봉준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것이 마치 오늘날의 대한을 나타내는 듯하였던 까닭이다.

"몸조심하고! 대단하게 출세하여 우리 전씨 집안을 빛낼 필요도 없으니, 그저 사지 멀쩡히 돌아오거라!"

애타게 소리치는 어머니를 향하여 세차게 손을 흔들며, 전봉준은 짧았던 귀향을 마무리했다.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 새벽이슬을 맞아가며 역까지 마중을 나온 어머니와는 달리 그토록 지난 사흘간 그리도 달달 볶았으면서도 막상 전주를 뒤로하려니 마중조차 나오지 않는 아버지에게 마음 한쪽에 섭섭함이 남았다.

미리견에서 중고로 들여온 낡은 여객차량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동안, 메마른 궐련 연기가 대합실을 자욱이 메웠다.

***

무사히 한양으로 돌아온 전봉준은 그 길로 황궁으로 향했다. 이형이 그를 찾고 있음을 미리 짐작한 까닭이다. 전봉준이 방미를 앞두고서 짧게나마 전주를 다녀올 수 있었던 것도 이형이 그를 배려해준 덕분이었으니, 감사의 인사를 올리기 위해서라도 이형을 찾아뵈야만 했다.

"그간 평안 무탈하셨습니까, 황상."

"···봉준아. 아무래도 그건 내가 너에게 물어야 할 말이지 싶다."

그리고 전주에서 돌아온 전봉준을 마주한 이형의 반응은 이러했다. 이형은 입으로는 전봉준을 걱정해주면서도, 속으로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 다녀오기 전에 마음 편히 쉬다 오라는 마음에서 휴가를 보내줬더니 안구에는 핏발이 서고 눈 밑은 거뭇거뭇하게 뭐가 내려오고 있는 게 한눈에 봐도 피로에 절어서 왔다.

이형으로서는 도대체 그 귀한 휴가를 어떻게 썼길래 이런 꼴이 나오느냐는 말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종일 윤락가에서 음란한 시간을 보냈다고 해도 고작 며칠 못 봤다고 이런 꼴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이형이 아는 전봉준이 그런 곳에서 헛되이 시간을 보낼 인물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그래, 그간 한양에서 지내다 전주로 내려갔더니 날씨가 무더워서 잠을 잘 수가 없더냐? 아니면 미리견에 갈 생각에 잠이 오지를 않더냐. 대관절 무슨 꼴을 당했길래 그런 꼴이 나는 게냐."

"시, 실은···."

전봉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있는 대로 털어놓았다. 그가 그간 한양에서 지내는 내내 바빠서 미처 집에 편지를 쓸 생각을 하지 못했던 일, 그래서 크게 꾸중을 들었던 일, 그리고 그 벌 대신으로 전주에서 머무는 내내 꼼짝없이 붙잡혀 공부하다 돌아와야 했던 일.

이야기를 듣는 내내 이형의 얼굴은 미묘하게 변했다. 그러니까 결국 자업자득이라는 것이었으니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전봉준의 편을 들어주려 해도, 그간 시간이 얼마나 있었는데 그걸 까먹느냐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났던 줄 알고 진지하게 전봉준의 말을 경청하던 이형은, 점차 변명을 늘어놓는 문제아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변해갔다.

"거 쌤통이구나. 잊을 게 따로 있지 그래서야 네 아비로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한 꼴이잖느냐. 엉덩이 살갗이 다 터져서 왔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러니 이형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전봉준도 차마 뭐라고 대꾸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서 고개를 푹 숙였다. 전봉준이라고 해서 제가 잘못한 줄도 모를 정도로 철이 없지는 않았던 까닭이다. 이형은 제 귀를 휘휘 후비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선생이라. 요즘 같은 때에 욕보기 딱 좋은 일을 떠맡은 참된 서생이로구나. 갸륵한지고. 그래, 그럼 어디 무엇을 가르치는가 들어나 보자꾸나. 봉준이 네가 이번에 집에서 무엇을 배워왔다고?"

"예, 그것이-."

전봉준은 풀이 죽어 시무룩한 모습으로 설명했다. 잘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할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설명하고 또다시 설명해 보라고 시켰으니 그야 그 전주와 한양을 오가는 며칠 새에 모두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설명이 이어질수록 이형의 반응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단지 오호-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였다면,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조금씩 고개를 끄덕이는 빈도가 늘더니 나중에 가서는 턱이 빠지도록 입을 찢어지게 벌렸다.

"···그래, 그걸 누구에게 배웠다고?"

"제, 제가 알기로는 아버지께서 여유가 나는 대로 책을 사서 읽으시며 독학하여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거로···."

"독학? 독학이라고? 허, 허허허! 으하하하핫! 그거 굉장하구나! 아니, 굉장할 뿐일까! 호랑이는 호랑이만 낳는다더니, 딱 그 꼴이야! 내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게 귀한 원석을 하나 주웠구나!"

이형은 배를 부여잡고서 폭소를 터뜨렸다. 이형이 왜 그러는지 모르는 전봉준만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형은 따로 설명하지도 않았다. 이형은 연신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혼자 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학자라 할 수 있지. 부끄러워할 줄도 알고, 나라를 위할 줄도 알고, 배우는 재미도 알고! 딱 하나 부족한 게 있다면 혼자 책을 읽어가며 배웠으니만큼 여기저기 지식이 편중되어있을 거라는 점인데, 어쩔까. 유학을 보내서 한번 큰물에서 놀게 해주어야 할까?"

"저, 황상? 조금 전부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아니, 아니지. 그러다가 내가 못 보는 곳에서 이상한 물이나 들어서 돌아오면 그건 또 골치 아파. 이제 슬슬 성균관에 외국인 교수들도 모았겠다, 성균관까지 불러와 배우게도 하고 가르치게도 하면서 무르익혀야겠어."

"예, 예? 그, 그럼 제 아버지께서 성균관에 학생···이 되시는 겁니까?"

어리둥절한 얼굴로, 전봉준은 물었다. 그제야 이형은 전봉준을 바라보고서는, 너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얼굴로 답했다.

"인문학 교수를 시켜볼 작정이다만."

"···예?"

전봉준은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

한편, 그 무렵.

"개똥이 이놈이 누굴 놀리느냐! 미리견? 미리견에 다녀오라고! 이 몸을 양이 놈들을 즐겁게 할 광대로 쓰겠다는 게냐! 영길리도, 불란서도, 하다못해 노서아도 아닌 미리견이라니! 그따위 근본도 역사도 없는 나라에 감히!"

"아이고, 어르신 진정하시어요! 천자의 국휘를 어찌···!"

"천자? 천자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천자! 그래, 차라리 그놈이 천자라도 순순히 되어주었으면 내 차라리 마음 편히 관에 드러누웠지! 아비 말은 듣는 체도 안 하고서 제 할 일만 해대더니, 이제는 하다 하다 이 개똥이 놈이 아비를 광대로 출사시켜!"

방미가 공식적으로 발표되기 이후까지도, 이하응은 결정에 순응하지 못하고서 노발대발하고 있었다. 미리견에 가봐야 환영받지 못할 것이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왕족도 양반도 노비도 없는 상놈들의 나라. 경박하고, 불경하고, 천박할 것이 뻔하지 않은가. 보나 마나 이하응을 공경할 줄도 모르고서 그를 웃음거리로나 쓰려고 들 게 뻔했다.

그럼 가봐야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결국 체면만 상하고 돌아오는 꼴이다. 하다 하다 이제는 종친이 상놈들 보는 앞에서 광대놀음이나 해야 할 걸 생각하니 절로 눈앞이 껌껌해졌다. 처음부터 개똥이 놈에게 아비 대우받으려는 기대는 해 본 적도 없었지만, 이건 뭐 말이 채 나오지를 않았다.

"오오냐. 그래 어디 두고 보아라. 광대놀음? 광대놀음이라고 하였느냐! 그래, 기꺼이 해주마. 이 지긋지긋한 섬을 나올 수만 있다면 광대놀음쯤이야 기꺼이 해주마! 상갓집 개 놀음도 해봤는데 고작 해봐야 광대놀음을 못 하겠느냐. 내 네 생각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이하응이 간신히 제 처지를 받아들인 건 이미 억지로 배에 올라탄 다음이었다. 사실 받아들였다고 하기도 뭣했다. 그저 악에 받쳐서 어디 엿 되 보라는 심정으로 독기를 품은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뜻대로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하면서 이제 광대놀음까지 시키겠다고 하니 그야 독기가 절로 쌓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하응은 다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아주 그냥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말이다. 어차피 비웃음당할 처지라면, 저 자신도 있는 힘껏 상놈들의 천박한 나라를 비웃고 오겠다는 생각은 덤이었다.

그리고 이하응의 삐뚤어진 다짐은 L.A.에 발을 디디는 순간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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