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르는게 약 >
L.A에 발을 디디는 순간, 아니 그보다 앞서 그와 방미 사절단이 타고 온 기선이 L.A 연안에 다다르는 순간, 이하응은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아, 아니 저게 도대체 무슨···."
L.A의 번영에 경악한 것은 아니었다. 요즈음 태평양 무역이 본궤도에 오르고 동양인들의 합법적 이민이 활발해지면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으나, 그래봤자 이 무렵 L.A.는 서부에서나 제법 큰 항구도시에 불과했을 뿐 미국 전체를 기준으로 봤을 때는 흔하디흔한 도시와 마을의 경계에 있는 제법 규모 있는 마을에 불과했다.
그조차도 현 대한제국의 인천이나 동래, 남포, 원산 같은 제법 규모 있는 도시들과 맞먹거나 웃돌고 있는 수준이었으나 이미 이하응은 대강 그동안 지내면서 서역의 발달 수준이 동양을 웃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 정도는 이미 예상했고, 되려 미리견이 부유하다고 들었으나 제법 규모 있는 도시가 이 정도라면 그 실상도 알만하다-라며 내심 조소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규모나 번영은 대수롭지 않았다. 되려 가소롭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이하응이 경악을 금치 못했던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기쁘다, 흥선왕 전하 오셨네! 그 은혜와 애민심에 목매어···.』"
"『아주는 하나다! 아주의 빛과 소금, 아주의 희망, 황제 폐하 만만세!』"
"""흥선왕 전하 천세! 대한제국 만만세!"""
"어찌 미리견에 이리도 우리 조선 사람이 많은가···!"
이하응은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하고서 신음을 흘렸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 넓지도 않은 항구부지를 따라 온통 태극기를 휘두르며 환영 문구를 내걸고서 만세를 외치고 있는 황인종들로 가득했으니 말이다. 이하응이 간신히 눈으로 센 것만 해도 100명이 넘었고, 실질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숫자는 못 해도 1000, 어쩌면 3천도 넘을지도 몰랐다.
이하응의 눈에 들어오는 L.A.의 크기를 고려하면, 거의 도시인구의 반 이상이 황인종이어야 가능할 숫자였다. 그러니 이하응으로서는 경악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만세를 부르는 모습이 분명 입고 있는 복식은 양이의 것이더라도 조선 사람임이 분명한데, 이런 도시 하나에 이렇게도 많은 조선 사람이 살면 대관절 이 넓은 미리견 땅에 몇이나 되는 조선 사람이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건 이하응의 착각에 불과했다. 단지 여럿이서 한데 모여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아우성이 되어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뿐, 이들 대부분은 조선인은커녕 중국인이었고 일부는 일본인이었다. 짧은 기간 동안 그들이 배운 조선말이라고는 만세 구호뿐이었고, 그마저도 어색하고 특유의 억양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그 자세한 내막은 이러했다.
"『충격! 노예제도의 재현인가? 참혹한 노동환경에 노출된 황인종 노동자들! 아메리칸 드림은 단지 몽상일 뿐이었던가?』"
시작은 이형이 영국을 통하여 아주-미주 간 자유 이민을 협상하고 있을 무렵 런던 타임스 1면이 미국 내 황인종 차별을 고발하는 기사가 실리면서였다. 이 기사에는 미국이 불과 20여 년 전까지 노예제도가 현역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내전을 겪으면서 모두 철폐되었다고 가장했으나 실상은 흑인 노예를 황인종 노예로 대체했을 뿐 무엇 하나 변한 것이 없으며 미국인들은 기독교 문명의 수치라고 고발했다.
당연히 이 기사의 목적이 미대륙 내 황인종들의 권익을 향상하기 위함은 절대로 아니었다. 이 기사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내용이 아니라, 시기였다. 영국은 한국의 황제와 협상하여 평화롭고 자유로운 이주가 가능해지도록 아시아 대륙 전체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도왔는데 미국은 그사이에 아시아의 황인종들을 이용해 노예처럼 부려먹기나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영국의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고 미국의 도덕적 열등성을 고발하기 위한 기사였던 셈이다. 때마침 한국의 산업화를 돕기 위하여 자문 인력들이 한국으로 향하던 무렵이었으니만큼 특히 그 효과는 배가되었다. 자연히 이 기사를 읽은 영국인들의 반응은 이러했다.
"우리 대영제국은 힘없고 무식한 극동의 황인종들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안정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아끼지 않고 있는데 돈밖에 모르는 천박한 신대륙 거지 떼가 애꿎은 흑인 노예들이나 괴롭히던 제 버릇도 못 버리고 기독교 문명의 얼굴에 먹칠하고 있다!"
때마침 대공황이 터지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울분이 쌓이던 차에, 일방적으로 물어뜯기 좋은 먹임 감이 생긴 영국 언론계는 그날로 신바람이 나서 더욱 자극적인 기사들을 써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매일 같이 미국의 야만성을 고발했고, 미국의 황인종들이 아메리칸 드림의 핑계로 어떤 끔찍한 처우를 받고 있는가를 지적하며 마음껏 자신들의 도덕적 우월성을 만끽했다.
2차례에 걸친 아편전쟁? 그런 건 이미 기억 속 한쪽에 처박은 지 오래였다. 영국의 언론들은 한국이 얼마나 유럽의 앞선 문물을 배우고자 노력과 열정을 아끼지 않는 훌륭한 학생이며 영국은 그런 한국을 돕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지원을 해주었고 또 앞으로 어떻게 우호 관계를 이어나갈 예정인지를 대서특필해댔다. 영국으로서는 사실 그간 신대륙과 달리 아시아에서의 인력 납치 문제에 비교적 자유로웠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에 존 불 놈들 할 일 없는 건 알아줘야 해. 이 미국 땅에서 내쫓긴 지가 벌써 100년 이 넘었는데 아직도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말도 많아요. 진짜로 이 세상이 지들 것인 줄 아나···. 에라, 차라리 귀를 틀어막고 말지."
"아니 저 라이미 놈들이 뭐가 어쩌고 어째! 아무 데나 쳐들어가서 죄 없는 원주민들이나 잡아 족쳐다가 식민지 운영하는 놈들이 무슨···! 우리 미국이 너희 같은 부도덕한 식민열강인 줄 아냐!"
당연하지만, 이는 영미 해저 전신을 통해서 미국에도 전해졌다. 다만 이때만 해도 미국에서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는데, 이 무렵까지만 해도 독립전쟁 때의 악감정이 제법 남아있던지라 영국이 뭐라 하건 일단 반발하고 보지 진지하게 귀 기울여 듣는 경우는 드물던 것이다.
혹은 아예 이에 격분해서 냅다 들이박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이들이 황색 언론들 대부분을 차지했다. 경제난으로 사회 전반적으로 울화가 쌓이고 있던 건 미국 또한 매한가지였다. 미국인들은 영국에서 먼저 시비를 걸어온 이상 피할 생각이 없었고, 곧 미국에서는 영국의 제국주의와 아편전쟁에서의 추악한 행태 등을 비판하는 기사들이 터져 나왔다. 이 또한 미국의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고 영국의 도덕적 열등성을 고발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판이 커지자 의외의 나라가 끼어들었다. 아니, 의외일 것도 없었다. 이와 같은 도덕성 논쟁에 하루라도 끼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나라가 아니던가.
"『아주 대륙의 눈물! 신시대의 노예무역인가? 물 한 모금 마음대로 마실 자유조차 없이 지옥 같은 노예 노동에 혹사당하는 미국의 황인종 노동자들!』"
"『파리 외방선교회의 고발! 왜곡 당해 버린 선의! 한국의 신대륙 자유 이민 참여가 미대륙 황인종들의 노예화를 가속하다! 피부색만 달라졌을 뿐인 노예의 굴레, 그 끝은 어디인가!』"
"『날로 개선되어가는 아프리카인들의 삶! 혁명의 파종 꾼 프랑스 제국군은 오늘도 자유, 평등, 박애의 깃발 아래 전진한다! 너 위대한 프랑스여, 문명인의 짐을 져라!』"
그 나라는 언제나 그랬듯이 프랑스였다. 이 무렵 한불동맹이 체결되면서 양국 간의 국민감정도 우호적으로 자리 잡았으니만큼 더더욱 그러했다. 이들은 미대륙의 황인종들이 기본적인 인권조차 존중받고 있지 못함을 지적했고, 한국의 예시를 과장하며 황인종 또한 백인보다는 못해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문명인임을 부각했다. 얼마 전 있었던 코친차이나의 매각도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결단임을 주장하면서 말이다.
프랑스는 코친차이나 매각 건과 한국의 근대화 성공을 예시로 들면서 프랑스야말로 아시아 대륙의 선진화와 황인종들의 권익을 진정으로 위하고 있음을 과시했고, 자국이 얼마나 모범적인 제국주의 열강이며 아프리카 정벌 또한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아시아의 황인들처럼 문명개화를 일굴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주기 위함일 뿐 어떠한 야욕도 없다며 자신을 변호했다.
"『아프리카의 눈물! 불타오르는 삶의 터전, 총칼에 짓밟힌 아프리카 소년의 행복! 프랑스군의 침략으로 파괴되어버린 가정!』"
당연히 이러한 주장은 영국과 미국에 의하여 반박되었지만 말이다. 이렇게 프랑스까지 끼고 나자 판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전쟁을 치를 것도 아니었고 그저 누가 더 도덕적인가를 두고서 벌이는 자존심 싸움일 뿐이었으나, 이런 감정싸움이야말로 만국의 황색 언론들이 그토록 바라왔던 상황이었다.
한국에서 구세대와 신세대가 극명히 대립하며 서로가 옳고 그름을 논하는 동안이 무렵 대서양에서는 영불미 3개국의 황색 언론들이 어느 나라가 조금이나마 더 도덕적인가를 두고서 다투고 있었다. 미국 내 황인종들의 비참한 처우는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좋은 놀림거리였고, 감정싸움이 이어지는 동안 수도 없이 신문을 오르내리며 조금씩 과장되고 왜곡된 정보들이 실리기 시작했다.
황인들이 집도 없이 마구간에서 수십 명씩 모여 쪽잠을 자면서 구더기들이 득시글거리는 비스킷을 먹으며 폭염 속에서 고된 노동을 반복하다 대부분이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다든가 하는 보도들은 그 예시 중 하나였다.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하고 있으나 명백히 과장되었거나, 극히 일부의 사례를 일반화시키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을 터이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 신문에 실린 기사 중 일부라도 진실이 있습니까? 대답해주십시오!"
"그 사안에 관하여서는 우리 합중국 정부에 문의하셔도 곤란한 것이, 서부는 아직 개척이 한창인지라 연방 정부의 통제가 잘 미치지 않습니다. 혹 황인들이 학대받고 있음이 사실이더라도, 우리 연방 정부는 이를 엄중히 단속하여 현지 황인종 인부들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결코 본의가 아님을 한국 정부에서 알아주었으면―."
"허, 그렇다면 결국, 이 학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라는 것이군요. 좋습니다. 곧장 본국에 보고하겠습니다. 황상께서 이 일을 결코 간단히 넘기지는 않으실 겁니다!"
이 과격한 보도들이 문제가 된 순간은 이 무렵 미국에서 임시 공사로서 머물러 있던 김옥균이 조금씩 영어를 배우면서 대서양을 건너온 영국의 영문 신문들을 읽게 되면서였다. 처음에는 "영길리인들은 역시 모함하고 시기하기 좋아하는군."이라고 가볍게 넘기던 김옥균이었으나, 이런 보도가 반복되자 점차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서 프랑스 신문을 찾거나 스스로 서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 있는가를 조사해보기 시작하니 일이 커져 버린 것이다.
당연히 김옥균은 그야말로 기함을 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한국에서 황제가 나오고 범아시아 조약기구를 통해 아시아 만방의 제후국들을 다스리게 되면서부터는 이들 모두가 대한의 백성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대한의 백성들이 노예나 다를 바 없이 천대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이 이형이 알면서도 모른 체한 것이라는 걸 모르던 김옥균으로서는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김옥균은 그 길로 미국 외교가를 찾아가 이를 따져 물었고, 곧장 본국에 알리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이는 이 무렵 한국에서 방미 의사를 전하면서 태평양 무역 확대라는 꿈에 부풀어 있던 미국으로서는 그야말로 난데없이 발등 위로 떨어진 불덩이였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지극히 사소한 일로 한국과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태평양 무역까지 덤으로 엉망이 될 위험에 처한 것이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소? 만일 이 일로 한국에서 앙심을 품어 방미마저 취소가 된다면 중장기적으로는 태평양 무역 그 자체가 축소될지도 모르오. 이런 사소한 일로 태평양 무역 그 자체가 파탄이 나는 꼴만은 피하여야 하지 않겠소?"
"아니 그렇다면 뭘 어떻게 하자는 거요? 저 저열한 황인종들의 협박에 굴복이라도 하자는 거요? 그거참 놀랍구려. 검둥이들 다음은 노랑이라니. 우리 합중국이 인종의 팔레트인 줄은 미처 몰랐소!"
"말조심하시오! 알겠소? 돈은 돈이요. 당신 말대로 노랑이의 돈이건, 검둥이의 돈이건 돈은 돈이란 말이오! 당신의 인종론 따위 알 바 아니나, 합중국의 국익이 걸린 자리에서 또 한 번 그따위 말을 지껄인다면 내 지금 이 자리에서 그대를 총으로 쏴버리겠소!"
"정숙! 정숙하시오! 링컨 대통령께서 이런 꼴을 보시려고 노예해방이라는 숭고한 결단을 내리셨겠소! 우리는 그분의 유지를 이어 앞으로도 더욱더 많은 이들이 자유와 평등의 단 꿀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하오!"
"하, 링컨 대통령 각하라. 웃기고 있군. 북부 배금주의 돼지 놈들의 애완 고릴라겠지!"
"당장 그 입 다물지 못하시겠소!"
김옥균의 엄포는 미국 정계의 혼란과 충돌을 일으켰다. 돈은 돈이라는 자본주의적 논리를 내세우는 이부터 링컨의 이상을 이어야 한다는 이상론을 펴는 이, 지극히 감정적이고 과격한 감정론을 내세우는 이와 원색적인 인종론을 내세우는 이까지. 논쟁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노예제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 잘못된 것은 무엇 하나 없소! 이름만 달라진 노예제 또한 마찬가지요. 주께서는 죄 없고 무고한 자들의 봉사를 받으며 제 배를 불리는 자들을 위하여 당신의 나라를 준비하시지 아니하셨으니, 심판의 날 무고한 황인들은 구원받을 것이며 추악한 백인 노예주들은 주께서 준비하신 가장 깊은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오!"
이는 이 무렵 한창 열기가 끓어오르던 대통령 선거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정치의 부패를 두고 논쟁을 벌이던 양 후보는 이제는 황인종들의 처우에 대하여 논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판세가 뒤집히자 우위를 거머쥔 것은 공화당이었다. 이미 흑인 노예제도를 끝장낸 공화당으로서는 관성적으로 황인들의 처우 개선에도 호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시장 자리를 돈으로 사고, 포커로 대법원장 자리를 사들이고, 이 나라의 모든 것이 한 푼의 돈으로 결정되고만 있소. 이것은 단지 개인의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당장 잘라내야만 하는 우리 합중국의 환부요! 부패한 나라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법이요. 이 악습을 당장에 끊어내야만 하오!"
반대로 흑인 노예제도를 긍정한 민주당은 황인 노예들 또한 긍정하거나 아예 외면하는 수밖에 없었다. 민주당은 가능한 황인종의 처우 문제에 대하여 발언을 삼가고 공화당 정권의 부패 문제를 지적했다. 이는 퍽 효과적으로 보였다. 이하응의 방미가 임박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가능한 한 많은 황인종을 모아야 하네! 저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해! 분명 지난 일로 앙심을 품고 있을 테니, 이번 기회에 만회해야만 하네!"
"한국의 국기를 되는대로 그려오게! 국가도 연주하고! 환영 문구도 한국어로 큼지막하게 써둬!"
공화당으로서는 이 방미 행사를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김옥균이 엄포를 둔 만큼 한국에서 지금쯤 대단히 성이 났을 거라 짐작했던 까닭에 더더욱 그러했다. 정작 한국에서는 이형에게 보고가 올라온 즉시 그냥 못 들은 체하고서 묻혀버렸지만 말이다.
여기에 현지 황인종들의 자발적인 호응도 더해졌다. 그들도 눈과 귀가 있던 만큼 자신들의 처우가 큰 화젯거리가 되고 있음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우가 공화당의 승리와 이하응의 방미에 걸려 있음을 알았고, 그렇기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환영인파에 합류하여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그 성과는 이러했다.
"""흥선왕 전하 천세! 대한제국 만만세!"""
"아···."
이하응은 그만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절로 빠져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저 볼을 타고서 한줄기의 뜨거운 물줄기만이 흘러내렸다.
"아직도 이 늙은이를 필요로 해주는 백성들이 이리도 많았다니···!"
무엇을 숨길까.
이하응은 제 눈가를 가린 채 나지막이 흐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