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태어나다 >
"그, 그러니까. 이 캘리포니아에 남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캘리포니아? 과연, 그것이 이 땅의 이름이더냐. 양이들의 것답게 요사스럽기 그지없구나. 하지만 그까짓 이름이 대수더냐. 이 늙은이를 찾아주고, 필요로 해주는 백성들이 이 땅에 거하고 있거늘. 내 비록 저들을 고향 땅에 돌려주기에는 힘이 부족하나, 이 미력한 힘이나 보태어 이 땅의 백성들이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도록 여생을 다하고자 한다."
'뭐야. 도대체 뭐가 일어난 거냐. 무슨 사람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 천장 너머 하늘을 그윽하게 올려다보며 읊조리는 이하응의 모습에 카네기는 내심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사흘 전 무슨 일이 있었는가는 그가 직접 봤으니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하응이 상당히 깊은 감명을 받았을 거라는 것도 충분히 짐작했다. 그렇지만 이건 어딘가 이상하다. 시나이산에 올라 십계명을 하사받고 하산하는 모세의 모습이 이러할까.
그날 진을 따 짜내어 만세를 외쳐대다 졸도하더니 겨우 다시 일어나서는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으니까 곧장 동부로 출발해야 한다니까 한다는 말이 자신은 따라가지 않고 대신 캘리포니아에 정착해 보겠단다. 하다못해 동부의 휘황찬란한 도시들을 보고서 그러면 그 심정이 이해라도 가지, 카네기로서는 도통 이하응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그게 그의 방문 목적에 있어서 긍정적인 일임에도 말이다. 카네기가 혼란해 하고 있는 걸 눈치챘는지, 이하응은 어딘가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자네가 무슨 우려를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네. 혹여나 내가 혹세무민하여 이 땅의 백성을 이 한 몸을 위하여 이용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이겠지."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어찌 소인이 그런 망측한···."
"되었네. 이 몸이 살아온 날이 어언 이순이 다 되어가고 있거늘 그런 눈치 하나 없겠는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좋네. 이 늙은이는 지쳤네. 이제 와서 조선에 돌아간다고 한들 개똥이 녀석에 감히 대항이나 할 수 있겠는가? 동녕 땅으로 돌아가면 또 어떠한가. 그 조그마한 개집에 갇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서 죽는 날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겠지.
내 그런 추한 꼴을 당할 바에야, 이 땅의 백성들을 위하여 무언가 하나라도 해주고 가는 것이 고조로부터 이어져 온 우리 가문의 체통을 위하는 길이오, 또 내 한 몸의 명예를 위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네."
이하응은 여전히 혼란해 하는 카네기를 가만히 둔 채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딘가 회한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헛된 줄 알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못하고서 마지막까지 움켜쥐고 있던 마지막 동아줄을 기어이 놓아 버리고 만 듯한 얼굴이라고 카네기는 내심 생각했다. 순간 혹 카네기가 떠나고 나면 이하응이 홀로 남아 스스로 세상을 등질 준비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하응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야 잘 알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는 명백한 부정이었다. 카네기는 내심 오한이 들었다. 아비도 그렇고 아들도 그렇고, 무슨 부자가 사람 속을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읽어내는지 소름이 다 끼쳤다.
이어 이하응은 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 이제야 개똥이―아니. 황상께서 왜 그토록 책임을 짊어지는 것을 즐거워하신 줄 알겠구먼. 허허, 설마 이런 이상한 부분에서 닮았을 줄이야. 이 내 정기를 받으셨던 건 맞았던 모양이구나. 허허허."
"도, 도대체 그게 무슨···."
"신경 쓸 것 없네. 어차피 자네는 황상께서 총애하셔 봐야 우리 조선의 백성이 아니라 미리견의 백성이 아닌가. 그럼 몰라도 그만인 일일세. 아무튼, 이 늙은이는 여생을 조금이라도 이 늙은이를 필요로 해주는 백성들의 곁에서 전주 이씨 종친의 명성과 이 늙은이의 명예를 위하여 쓰고자 하네. 모르는 척해줄 수 있겠는가. 손을 빌려줄 필요도 없으니, 그저 모른 척 눈감아 주었으면 좋겠구려."
이하응은 그리 말하며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카네기로서는 그저 갈수록 산 넘어 산이었다. 이제는 하다 하다 명색이 왕족이라는 고귀한 푸른 피가 스코틀랜드 촌뜨기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였다고 해봐야 살짝 까딱한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 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만일 이게 카네기가 무언가 수 싸움을 거듭한 끝에 쟁취한 승리이고, 굴복 선언이었다면 이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이고 이날은 카네기 인생 최고의 날이 되겠지만, 명색이 왕족이라는 인물이 자신에게 무언가 청탁을 하기 위하여 고개를 숙인 것이다. 기쁘기보다는 부담스럽고, 환희하기보다는 당혹스러움이 앞섰다.
'이건 뭐 뒤로 도망칠 구석도 없구나. 하다 하다 먼저 고개를 숙여버리다니, 이래서야 원···!'
카네기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 일은 이형과 따로 이야기되지 않은 사안이었다. 그건 곧 만에 하나라도 무언가 일이 터지면 카네기가 독박을 써야 하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제 나름대로는 승부사라고 자부하는 카네기지만, 승부도 자신이 따낼 것이 있어야 하는 거지 이익을 볼 구석은 없이 여차하면 독박만 써야 하는 구도는 도통 취향에 맞지를 않았다.
그렇지만 물러나지 않고 안된다고 마냥 뻗댈 수도 없다. 그러기에는 이미 이하응이 먼저 고개를 숙여 버렸다. 왕족의 청탁인 것이다. 함부로 거절하기에는 뒷감당이 두렵다. 돌려서 거절할까도 생각해봤지만, 사람 머릿속을 읽어내는 건 유전인지 조금 전에도 태연하게 그의 속내를 읽어낸 이하응을 상대로 함부로 말장난하는 건 시간 낭비일 거라는 생각이 앞섰다.
카네기가 망설이는 걸 본 이하응은 슬쩍 뒷말을 덧붙였다.
"그럼 이건 어떤가. 자네는 세상에서 돈을 버는 게 가장 중요한 상인이 아닌가. 그리고 내 비록 처지가 궁하여 자세히 살피지는 못하였으나, 지난 10여 년간 우리 조선 땅에서 상행을 이어가는 꼴을 구경하자니 수전노인 건 사실이나 적어도 한 번 약속하면 반드시 지키는 신의가 있는 자라고 보았네."
"수, 수전노···?"
"만일 이 몸이 캘리포···? 아무튼, 이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모른 체해준다면 내 기꺼이 자네의 사업에 한 손 보태도록 하겠네. 이 미리견 땅까지 끌려온 어린 백성들이 무슨 돈이 있어서 땅을 사고 농사를 짓겠는가. 결국 소작을 하거나 도시에서 머슴놀음이나 하는 것이 고작일 텐데, 그때 자네처럼 신의 깊은 상인이 믿을만한 일자리를 소개해 준다면 그보다 든든한 일이 없을 걸세."
순간 수전노가 무슨 뜻인 줄 몰라 어리둥절해 하던 카네기였으나, 뜬구름 잡는 듯했던 이하응의 설득이 이렇게 말이 이어지자 눈이 번뜩 뜨였다. 다시 말하여 황인 이주민들의 일자리 중개역을 맡기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아마도 이하응 또한 알고서 이런 제안을 해온 것이겠지만, 이건 카네기에게 사실상 미 서부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지휘봉을 건네준 거나 다름없었다.
현 대한의 황제 이형은 중원에서 인구가 불어나는 걸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턱대고 죽이거나 억지로 인구를 조절하려는 인상을 줄 생각도 없기에, 신대륙 이주라는 방법을 통하여 이를 처리하고자 한다. 만일 미국에서 이러한 황인종 이주를 금지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중장기적으로 미국 서부 전역이 황인종으로 뒤덮일 공산이 크다.
그런 와중에 이하응이 자발적으로 나섰다. 자신이 캘리포니아에 남아 미대륙의 황인종들을 품에 안겠다고 말이다. 그간 온통 궁하고 천한 이들만 모이던 미대륙에 자그마치 황제의 아버지라는 인물이 등장해버린 것이다. 당연히 이하응에게는 권위와 신망이 모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이하응이 카네기에게 일자리 중개역을 맡긴다면?
'하, 돌겠군. 사람 미치게 하는 것도 부자간에 똑 닮았어. 만일 그대로만 이어진다면 캘리포니아가 뭐야. 텍사스, 워싱턴, 알래스카, 좌우지간 로키산맥 서쪽은 내 손아귀로 떨어지는 격이야. 왕족의 말이다. 그 누가 거절할까? 이 늙은이만 놓아준다면 나는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한 서부에서 황인종들이 어떤 물건을 살지, 어떤 공장을 선호할지, 어떤 마을에서 살지를 내 뜻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된다.
그럼 사실상 나 혼자서 장차 서부를 어떻게 개척할지를 정할 수 있게 될 테고. 저 광활한 아시아에 이어 서부까지 내 강철의 제국으로 뒤덮는다면···!'
"맙소사."
카네기는 한참을 침묵하다 간신히 그 한마디만 내뱉었다. 상상만으로도 황홀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묘한 비린내가 코끝을 가득 채웠다. 익숙한 향기였고, 익숙한 일이었다.
이하응이 걱정되었는지 물었다.
"괜찮나? 지금 자네 코끝에서 육혈(衄血:코피)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익숙한 일입니다."
카네기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체하며 그 즉시 예비 손수건으로 제 코를 틀어막았다. 이전에 헛되이 아끼던 손수건을 버려야 했던 경험에 비추어, 오로지 코를 틀어막기 위하여 준비한 싸구려 공장제 손수건이었다.
카네기는 전에 없이 공손한 태도로 이하응에게 제 자리에 엎드려 꾸벅 절을 올리며 말했다.
"내내 선생님의 옥체 만강하시기를 빌겠습니다. 황상께는 소인이 따로 말씀드릴 테니, 아무런 걱정하지 마시고 그저 만수무강하소서."
"으음, 그래. 그거··· 고맙구려."
이하응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못 미더워하는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는 건 카네기가 고개를 들지 않아도 훤히 보였다. 하지만 카네기는 짐짓 모른 체하고서 조용히 절을 올렸다. 저 또한 지금 제 꼴이 못 미더울 게 뻔했으니 말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날은 지난번과 다르게 빈혈로 쓰러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방미 사절단은 둘로 갈라섰다.
***
결과적으로 이는 호재였다.
"『아메리카 드림은 실재한다! 철강왕의 귀환! 아시아와 합중국의 징검다리가 된 스코틀랜드 출신 전보 배달부 소년!』"
"『철도 공사 현장을 몸소 방문한 프린스 흥선! 이것이 아시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때로 물든 공사 인부의 손을 마주 잡아주며 눈물짓다!』"
사절단이 둘로 나뉘면서 첫날 이하응의 폭주로 상대적으로 그 존재감이 묻히던 카네기가 본격적으로 부각을 받기 시작했다. 그들 각각이 상징하는 것이 분명히 나뉘었던 것도 도움이 되었다. 이하응의 행보가 아시아의 황인종들을 향한 여론과 인식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했다면, 카네기의 행보는 한국과의 무역과 태평양 무역 확대의 기대를 꿈꾸게 하였다.
"『GO WEST! 미국의 미래는 서쪽에 있다! 태평양 무역의 잠재력과 성장 가능성에 관하여!』"
가장 큰 장점은 점차 카네기가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서 동부로 다가서기 시작하면서 카네기에게 이목이 쏠린 점이었다. 태평양 무역과 아시아 진출을 통해서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거부가 된 카네기가 한국의 황제에게 몸소 임명장과 명예 시민권을 받아 양국의 친교를 다지려 한다는 건 미국인들에게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카네기의 성공 사례를 보고서 '나 또한 한국에서 사업을 하면 성공할 수 있다'라는 환상을 가지게 하거나 방미 사절단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카네기를 임명한 것을 두고서 '황제가 이토록 미국인 사업가를 신뢰하는 걸 보니 태평양 무역 확대에 매우 적극적이구나'하는 인상을 품게 해주었다.
이는 미국인들에게 아시아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미국적이거나, 미국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환상을 품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서 미국적이라고 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한가지였다.
"햐, 진짜 이 구석구석까지 다 쏘다니고 있네. 진짜 자기네 백성들이었다고 아끼기는 했나 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시아 녀석들도 그렇게 나쁜 녀석들은 아니었던 거 같아."
"흐음, 지금 문득 떠오른 건데 말이지. 그러고 보니 한국의 황제가 기독교인이고 또 모태신앙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럼 저 황제의 아버지라는 사람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독실한 기독교인인 건 아닐까?"
"호오, 그거 일리가 있네. 그럼 저 황제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저 황인종들을 잘 다독여주면 저 녀석들도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온순한 기독교인이 될 수도 있는 건가?"
"흐흐흐! 그렇게만 되면 20세기에 길이 남을 기적이지. 그래, 피부색이 중요하나? 다 똑같이 예수님 믿으면 그걸로 된 거지 뭐."
바로 종교였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이었다. 아시아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기독교에 친화적이거나 친화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미국인들은 저 악독하고 미련한 이교도들이 어쩌면 숨겨진 기독교인이었던(?) 이하응을 만나 교화되어 개종을 결단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물론 말할 것도 없는 오해였으나, 이는 미국인들의 여론을 단번에 호전시켰다.
이 무렵 미국은 피부색의 차이도 차이지만, 그 이상으로 종교가 무엇이냐 또한 중요한 나라였다. 설령 영어를 못 하고 피부색이 다소 거무칙칙해도 일단 꾸준히 교회를 다니고 예배에 꼬박꼬박 얼굴을 비추면 기꺼이 곁에서 도우려 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나라였다. 대부분의 노예 해방론자들 또한 기독교적 도덕 관념에 따라 흑인들을 도우려 나섰던 걸 생각하면 이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런 미국인들에게 이하응의 존재는 흡사 성경에서 나오는 이교도들을 교화하여 기름 부음을 받도록 설득한 성자들과도 같았다. 제멋대로 이하응이 기독교에 배타적인 조선에서 생활하느라 조용히 하고 있었을 뿐 누구보다 독실한 신자이며, 그렇기에 이와 같은 애민정신을 보여주고 또 미국의 황인종들을 개종시키려고 온 것이라고 제멋대로 믿어버린 것이다.
"『한국의 성 패트릭인가, 그도 아니면 단지 선량한 이교도일 뿐인가. 프린스 흥선의 정체란!』"
"허, 그러니까 이 몸을 두고서 천주쟁이라고?"
"전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역시 헛된 기대를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을까요?"
당연하게도 이는 이하응의 귀에 곧바로 들어갔다. 사실 들어갈 것도 없었다. 방미 사절단에는 당연하게도 영어를 익힌 역관들이 대동하였고, 갇혀있는 동안 신문을 통해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탐하던 이하응은 미국에서도 매일 같이 역관들을 통해 아침 신문들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관들은 당연하게도 이하응이 이를 불쾌하게 여길 것이라 확신했다. 제아무리 지난 조청전쟁에서 프랑스가 조선을 도운 이래로 비교적 인식이 나아졌다고 하나 여전히 절대다수의 유자들은 천주학을 꺼렸고 자신이 천주쟁이라 불리는 걸 수치스러워했다. 그러니 이하응 또한 그럴 것이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막상 이하응의 반응은 이러했다.
"못할 이유도 없지."
"···예?"
"무엇을 그리 놀라는가. 이 몸이 이대로 조선 땅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건 분명 대단한 수치일 것이며, 죽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하나 이 몸은 이미 이 미주 땅에 뿌리를 박고자 마음먹은 지 오래이니, 이를 통하여 미주의 백성들이 우리 아주의 백성들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보다 호재가 어디 있겠는가?"
애초에 이하응은 유교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기는 했으되, 그렇다고 유교에 뼛속 깊이 빠져든 인물도 아니었다. 되려 자기 뜻을 펼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이용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하응이 알기로 미리견은 천주학의 나라였다. 그건 즉 조선에서 살고자 한다면 마땅히 유학을 익혀야 하듯이, 미리견에서 살고자 한다면 마땅히 천주학을 익혀야 한다는 뜻이었다.
조선에서야 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했으니 유자가 되어야 했지만, 이제 미리견에서 살며 미리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한다면 마땅히 미리견인들과 비슷해지려는 시도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하응은 결단했다.
"내일은 가까운 천주당으로 가보세나."
그날, 새크라멘토의 장로교회에서 이하응과 이하응을 따라온 환영인파 1000여 명의 합동 세례식이 열렸다.
이튿날 미국 내 모든 일간지의 제1면이 이 합동 세례식으로 장식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