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뇌 >
카네기와 헤이스의 만남은 곧바로 뉴욕 월스트리트의 모건에게도 전해졌다.
"기어이···!"
뿌드득.
그러나 이 무렵 모건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턱에 힘을 주어 있는 힘껏 이를 갈며 분노를 드러내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카네기를 막을 수도 없었고, 마찬가지로 헤이스를 멈출 수도 없었다. 그 둘의 만남을 방해하거나 악의에 가득 찬 거짓 기사로 두 사람을 나락으로 떨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카네기가 이번에 미국에 방문한 것은 개인적인 사업가로서가 아닌 한국 황제의 사절로서 방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영국발 대공황으로 그의 자산구조가 극단적으로 한국과 태평양에 편중되어버린 시점에서 그는 함부로 한국의 황제를 진노케 할지도 모르는 행위를 할 수 없었다. 죽음보다 파산을 두려워하는 금융가의 슬픈 숙명이었다.
물론 그에게 타격을 주려면 한국의 황제 또한 그에 상응하는 출혈이 필요하겠으나, 이제 최소한 어느 한쪽이 작정하면 동반 몰락 정도는 일도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건 일종의 전쟁억제력이라고도 부를 법했다. 상대를 파괴하고자 하는 순간, 자신도 확실하게 파멸한다. 끔찍한 이야기였다.
"회장님, 진정하시지요. 아직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소식이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흥분하시는 것은 자세한 내막이 파악된 다음에라도-."
"진정? 그래,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나는 저 두 놈이 무슨 말을 나누었을 줄 알아. 나의 파멸을 누구보다 바라고 있는 놈들이 만났는데, 그거 하나 모르겠나! 빌어먹을 유대인 놈들이 움직였어. 유대인 놈들이 공화당을 움직였다고! 이 내가 간신히 무릎 꿇렸던 그 개자식들이 또다시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 서쪽으로 도망치려 하고 있다는 말이네!
왜 모르겠나? 어떻게 모르겠나! 저 두 놈이 나의 파멸을 준비하고 있어!"
비서의 격려에 되려 분개하여, 모건은 탁상을 굳세게 움켜쥔 그의 양 주먹으로 있는 힘껏 내리쳤다. 도저히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그의 생명줄을 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한국의 황제에 대하여 결정적으로 정보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황제의 역린과 구체적인 임계점에 대하여 말이다.
그가 지금껏 접한 황제의 모습은 국운을 걸고서 무모한 도박을 하거나, 크게 분노하여 한국에 심어둔 모건의 사람들을 모조리 축출하거나 하는 식이었다. 당연히 정보도 제한적으로 될 수밖에 없고, 한국의 황제는 포악하고 도박을 좋아하는 인물이다-정도의 편견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모건에게는 그를 언제 파멸시킬지 모르는 칼을 거머쥔 인물이 그 칼을 휘두르는 걸 세상 누구보다 좋아한다-라는 증명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한국의 황제에 대하여 알고자 그의 사람을 침투시키자니 한국의 본국인 조선 왕국이 거의 단일민족국가에 가깝다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상해에서 중국인을 동원하건 백인을 쓰건 눈에 띄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인종의 벽을 비집고 침투시켜봐야 한국 내에 백인들 대부분은 이미 카네기와 연이 닿아있어 쉽게 발각되고 퇴출당했다.
"저 촌스러운 하이랜더 전보 배달부가 나를 파멸시키려 하고 있다는 말일세. 나는 그걸 어떻게든 막아내야 해. 어떻게든 알아내야만 해! 이 천하의 모건이 제 목숨이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니··· 오! 하느님 맙소사!"
모건은 거의 악을 썼다. 그를 또 다른 말로 격려하려고 했던 비서도 그의 눈가에 서린 분노를 마주하고서 차마 뭐라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 무렵 모건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난데없는 대공황으로 한국의 황제에게 목숨줄을 붙잡혀 버린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그걸 어떻게 타파하고자 한국의 황제에게 접근해보려고 하면 카네기와 손잡은 미국인 사업가들이 쳐내버렸다.
이 사람의 장막을 어떻게 뚫어보려고 애를 써봐도, 거리가 너무 멀다. 모건이 지시를 해봐야 한국에 위치한 그의 끄나풀들에게 그것이 전해지는 건 못해도 3~4개월 이후. 그럼 이미 사건은 종료된 다음이다. 한국에서 언제나 상주하고 있는 카네기와는 거리와 통신의 한계 탓에 싸움이 성립을 못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 방미에서 모건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국 황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걸 우선시했다. 일부러 언론들을 부추겨 카네기에게 달라 붙여서 어떻게든 카네기가 한국의 황제와 한국에 대하여 털어놓도록 끝없이 질문을 던지게 했다. 그 질문에서부터 나오는 정보를 취합하여 한국 내부의 정세에 관한 정보와 한국의 황제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지 파악하기 위하여 말이다.
"하느님? 아니, 아니지. 이 우라질 놈의 하느님! 도대체 나에게 무슨 원수라도 지셨습니까? 왜 하필이면 이런 중요한 시기에 기적 같은 걸 일으키시고 난리란 말입니까. 그 망할 동방의 성자는 대관절 왜 하필이면 지금 내려보내신 겁니까! 이 귀중한 시기에!"
모건은 탁상을 양 주먹으로 연신 두들겼다. 울화가 절로 치밀어 올랐다. 그 빌어먹을 기자라는 놈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자면 받아먹은 돈, 아직 쓰지 않은 원금이라도 당장 내놓으라고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국과 한국의 황제에 대하여 알아보라고 보냈더니 고대 아시아 기독교 문명이 어쩌고, 신앙의 수호자가 어쩌고 하는 소리만 줄곧 캐내 왔다.
그 덕분에 언론들이야 전례가 없는 대호황기를 맞이하여 신문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가고 있지만, 막상 기자들을 움직여 카네기가 곤욕을 치르게 만든 당사자인 모건은 뒷골이 당겨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모건이 도대체 언제 고대 기독교 제국이니 뭐니 하는 걸 캐오라고 했단 말인가. 이쯤 되면 언론과의 거래를 들키는 한이 있더라도 돈만 먹고서는 엉뚱한 정보만 캐내 왔다며 법정에 세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국의 황제에 더욱 큰 적개심을 불러일으킬 걸 감수하고서라도 최후의 방법으로 이하응과 접촉한다는 안도 생각해봤지만, 그보다 앞서 교회가 이하응을 선점해버렸다. 동방의 성자를 자기네 교회에서 모셔가겠다며 눈이 뒤집힌 판국이라 적어도 당분간은 모건으로서도 이하응에 접근할 방도가 없었다.
"···맙소사."
그렇게 한참을 분을 토해낸 다음에야 모건은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겨우 진정이 된 것이다. 혹은, 단지 지쳤을 뿐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건 간에 이는 모건으로서도 다행인 일이었다. 잔뜩 흥분해 날뛰는 것보다야 차라리 진이 빠져 주저앉은 쪽이 냉정하게 현 상황에서의 돌파구를 찾을 방도가 있었으니 말이다.
모건은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부여잡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도 보았듯이 유대인 놈들이 서쪽으로 도망치려고 하고 있어. 서쪽에서 다시 힘을 길러 언젠가 뉴욕을 나에게서 탈환하겠다는 심산이겠지. 자네가 생각하기에 이게 단지 궁지에 몰린 시궁쥐의 시답잖은 발악이라고 생각하나, 아니면 이보 전진을 위하여 일보 후퇴하는 승부사의 마지막 한 수라고 생각하나."
"시간문제일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물론, 과연 회장님의 살아생전에 그것이 이루어질지는 의문입니다만."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건가. 빌어먹을."
비서의 대답에 모건은 이를 갈았다. 사실이 그랬다. 카네기의 자본과 이하응을 중심으로 한 황인종 사회의 단결, 모건에게 잠식당한 뉴욕에서 후퇴하여 서쪽으로 도망치려는 유대인들의 노력, 그리고 서부의 금괴가 합쳐진다면 언젠가는 모건에 대항할 수 있는 금융가가 확실하게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말해서 시간문제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의 서부는 이제 막 개척이 진행 중인 벽촌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서부로 도망치는 유대인 금융가들 또한 대부분은 모건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젊고 경험이 일천하며 자본도 궁핍하거나, 이미 모건에 의하여 몰락하여 빈털터리가 된 이들이다. 사실상 처음부터 쌓아 올려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그러니 모건의 살아생전에는 무리다.
지금 모건이 아는 정보 안에서 판단했을 때, 언젠가는 태평양 금융가가 위협될 수 있어도 단기간에 이들이 모건의 위협이 될만한 여지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모건의 정보가 편중되어 있어 미국 국내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아도 한국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판단이 뒤집힐 비장의 수가 태평양에 없다고 확신할 수가 없는 셈이었다.
'이제부터라도 민주당을 밀어줘서 어떻게든 이번 사안을 고꾸라트려야 하나?'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링컨 사후 북부 자본가들과 유대인 금융가들과 결탁한 공화당의 부패는 미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터뜨릴만한 건수는 무궁무진하고, 굳이 과장할 필요도 없이 터지는 것만으로 정계에서 매장될만한 건수도 얼마든지 있다.
헤이스 본인이야 워낙에 공화당 주류 정치에서 밀려나 있던 아웃사이더이고 가능한 고결하게 살고자 평생에 걸쳐 노력해온 인물이니 이제 와 낙마시키는 건 불가능하겠으나, 그 혼자만 깨끗해 봐야 당이 통째로 썩어 문드러진 판국에 대단한 의미는 없었다. 작정하고 발목을 잡고자 한다면, 못 잡을 것도 없었다.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온갖 잡음을 만들어 재임 기간 내내 벙어리로 전락시키는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닌 말로 모건 입장에서야 민주당이 이겨도 큰 상관은 없다. 어차피 그는 WASP, 요컨대 앵글로 색슨계 백인 개신교도니까. 민주당이 이긴다면 이기는 대로 그의 사업을 위하여 이용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제가 있다면.
'적어도 내가 파악하기로 한국의 황제는 이번 대선에서 공화당을 이기게 만들고 싶어 한다···. 그 민가 놈 때문에 역량을 잘못 재서 한 방 먹었지만, 요즈음 보여준 행보를 볼 때 포악하고 과격할지언정 멍청하지는 않아. 그런 자가 하필이면 대선 준비가 한창일 때를 골라 합중국에 발을 디뎠다면··· 당연히 대선에 영향을 주고자 수를 쓴 것임이 틀림없어.'
모건은 눈살을 찌푸렸다. 성가시고 번거롭기 그지없지만, 목숨줄을 잡힌 입장으로서는 언제나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대서양 경제권이 부활하기 전까지는 한국과 아시아에 관련된 자산이 그의 재산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한국의 황제가 노하여 자산을 압류하거나 무언가 규제를 하려고 달려든다면 모건은 꼼짝없이 파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태평양 경제권 또한 산산조각이 날 테지만 말이다. 모건으로서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황제의 역린은 아닐까? 일을 방해한 것에 앙심을 품고서 달려들지는 않을까? 그런 불안 요소들을 말이다. 그의 살아생전에 위험이 되기도 힘들 위험요소를 짓밟기 위하여 자본가로서의 삶을 베팅하는 게 과연 옳은지, 모건은 고뇌에 고뇌를 거듭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모건은 결론을 내렸다.
"이보게."
"예. 말씀하십시오, 회장님."
"···이번 대선에서는 우선 공화당을 지지하도록 하지. 공화당 선거캠프에 연락을 넣게나. 선거자금에 관련된 사안이라고 하면 어련히 저쪽에서 연락선을 마련해올 테지."
"알겠습니다. 곧장 착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적어도 대서양 경제권이 회복하기 전까지는 있는 힘껏 숙인다.
다소 비굴할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라는 것이 모건의 판단이었다. 눈에 거슬린다고 보이는 족족 주먹을 휘둘러봐야 제 손도 아플 터이니 말이다.
다만.
"아, 그래. 그렇군. 한 가지만 더."
"예, 말씀하십시오."
"그 전에 런던에 연락을 넣어두게나. 우리에게 그들의 상선이 필요한 만큼이나 그들도 우리의 돈이 필요할 테지. 이번만큼은 피차 대서양이 궁해지면 곤란한 처지가 되는 건 매한가지이니만큼 거절하지는 않을걸세.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주춤거리고 있다면 또 모를까.
당분간은 서쪽에서 그 스코티쉬 촌놈과 유대인 놈들이 무엇을 하건 우선 괜히 손을 대는 일 없이 대서양 경제권의 회복에 주력하겠네. 어차피 아시아라면 모를까 미국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이 모건의 눈을 피할 수 없을 테니, 분기별로 보고를 받는 정도로 족할걸세."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회장님."
그것도 시간문제일 뿐이다.
모건은 남몰래 이를 갈았다.
* * *
그리고, 이 무렵 남몰래 홀로 고뇌에 잠겨있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제기랄 놈들 같으니라고. 우리가 무슨 이 미주 땅을 침략하기라도 했나? 무슨 사람을 적이라도 되는 양···!"
전봉준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씨익씨익 거렸다. 사절단을 호위하려 따라온 호위병임에도, 이 무렵 그의 일정은 상당히 여유로운 편이었다. 그의 호위대상인 이하응부터가 이형이 보낸 사람들인 전봉준을 비롯한 시위군을 신뢰하지 않았을뿐더러, 현지 주 방위군 또한 그들을 그리 내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지 주 방위군에게는 군복을 차려입고 소총으로 완전무장한 유색인종이 공공장소를 활보한다는 것 자체가 그리 내키지 않던 것이다. 아직 미국-인디언 전쟁이 한창이던 무렵이었고, 반 유색인종 폭동이 간헐적으로 일어나던 서부였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고작 해봐야 10명이 조금 안 되는 시위군이라도, 혹여나 백인들을 상처 입히려 들지도 모른다 여긴 것이다.
따라서 주 방위군은 될 수 있는 대로 시위군을 무장해제 시키려 했으며 공공장소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숙소에서도 주 방위군이 대신 경비를 서겠다 자처하면서 어떻게든 시위군이 무장하고 있을 여지를 없애고자 했다. 막상 이하응과 방미 사절단은 명백히 한국 측 인사들임에도 말이다. 결국 전봉준을 위시한 시위군이 호위를 위하여 최종적으로 허락받을 수 있었던 건 총검뿐이었다. 당연히 미국이 총기 소유가 합법화된 나라임을 고려했을 때 턱없이 부족한 무장이었다.
"시건방진 것들."
전봉준은 나지막이 뇌까렸다. 성질이 났다. 어떻게든 시위군을 밀어내고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막는 통에 이 무렵 시위군은 사실상 실직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해야 할 직무도 하지 못하게 하면서 어디 함부로 오고 다니려면 주 방위군의 인가가 있어야 했고, 외출 와중에도 이따금 현지의 보안관들이 대뜸 불러 세우는 경우가 왕왕 벌어졌다.
전봉준으로서는 불쾌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간 조금씩이나마 개선되는 듯했던 양이 들을 향한 인식이 이번 방미 기간 중 단번에 다시 악화하여가고 있었다.
'이 미련한 것아. 네 어찌 강국의 강군이 되어 도적놈이 되기를 자처하느냐. 아이고···.'
"강국의 강군, 이라···."
전봉준은 머릿속으로 그의 아버지 전창혁이 한탄하였던 바를 떠올렸다. 피식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과연 강국의 강군이 받을 대우일까. 그럴 리가 없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한국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강국이며, 강군일 미리견은 어떠할까.
"마침 이 근방에 박물관이 있었지."
구경해보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더욱 웅장하고 수집품들도 다양할 미 동부의 박물관들에 비하면 보잘것없겠으나, 그래도 박물관이 아닌가.
그가 듣기로 박물관은 전시할 가치가 있는 역사적 유물이나 이런저런 희귀한 수집품들을 모아두는 곳이라고 했다. 그럼 박물관에 간다면 미리견군의 역사에 대하여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터.
전봉준은 그 길로 박물관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입장료는 그리 비싸지 않았다. 고작 해봐야 1층 높이, 아마도 마구간을 개조하여 만들어진 듯한 작은 박물관이었으나 그 덕분에 전봉준은 들어서는 즉시 군사 부문을 구경할 수 있었다.
"I, n, d, i···. 인디언이라···."
전봉준은 떠듬떠듬 푯말을 읽었다. 그곳은 온통 미리견에서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야만 부족과의 전쟁에 관한 유물들로 뒤덮여 있었다. 노획한 원시적 활과 반쯤 탄 움막, 날카롭게 깎은 돌로 날을 만든 나무창까지.
"어느 대륙이나 포악스러운 야인 오랑캐들 탓에 고심하는 건 매한가지로구나."
전봉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전시된 유물들을 보고서 옛 조선이 야인 부족들 탓에 골탕을 먹었듯이 미리견 또한 똑같은 고충을 겪고 있노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런 웃음도 어느새 멈췄다. 뒷짐을 진 채 천천히 박물관 구석구석을 거닐던 전봉준은 눈앞에 흉물스러운 유물 앞에서 얼이 빠져 그만 걸음을 멈추고야 말았다.
그것은 박물관장이 최고의 수집품이라며 푯말을 달아둔, 주름이 자글자글한 어느 인디언 노인의 가죽을 벗겨 만든 박제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