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닷길 >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오늘 이 자리를 축하하기 위하여 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으며, 제게 이와 같은 막중한 책임을 맡을 영광을 허락해주신 우리 공화당의 동지 여러분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당선 연설에서 헤이스는 크게 2가지를 약속했다.
"저는 믿습니다. 건국의 아버지들께서 이 땅에 자유의 나라를 세우심은 단지 힘 있는 일부 소수를 위함이 아니었음을 믿습니다. 우리의 선조들, 신앙의 자유를 갈망하며 메이플라워호가 이 땅에 처음 발을 디딜 적에 우리의 조상들은 압제가 이 땅에 감히 미치지 못하도록 공통된 언약을 맺었었습니다. 이 자유의 땅에서 우리는 모두 존중받아야 합니다. 또한 존중해야 마땅합니다.
이 자유의 땅에 왕은 없습니다. 귀족 또한 없습니다. 그러므로 노예 또한 없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굳건히 맹세합니다. 지금은 세상을 등지신 옛 링컨 대통령께서 약속하였듯이, 인민의, 인민을 위한, 인민의 나라는 결코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이 땅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의 두 손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의 소중한 자유를 선물할 것을 맹세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모두 자유롭습니다. 압제는 감히 우리 합중국을 침범하지 못합니다. 이브가 베 짜고 아담이 밭을 갈 적에 왕과 귀족은 없었듯이, 이 땅에 두 번 다시 노예-혹은 그와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놓인 우리의 이웃들을 위협하는 혹독한 압제가 되살아나는 일은 없어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는 노예제 철폐 원칙에 대한 재확인. 이는 남북전쟁 이후 철폐가 명시된 인종차별의 부활과 유색인종들을 향한 사보타주를 꾀하는 모든 세력을 향한 직접적인 선전포고는 아니되, 간접적인 경고라 할 수 있었다. 단지 노예제의 철폐에 그치지 않고 그와 유사한 대우를 받는 이들을 언급함으로써 노예제를 철폐한 것만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고 다시금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그 노예와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는 이들 중에는 비단 황인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사로운 사적 제재에서는 군정에 의하여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고 하나 여전히 생활고와 차별에 허덕이는 흑인들, 생존을 위협하는 저임금과 노동환경에 신음하는 도시 노동자들, 가축이나 다를 바 없이 부엌에 억류된 여성들 등 소외되고 신음하는 모든 약자를 대변하겠다는 셈이었다.
소외되고 핍박받는 약자들을 위하는 자세야말로 링컨의 공화당인 까닭이다.
"(중략)···오늘날, 우리는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습니다. 대서양을 건너 찾아온 거대한 경제공황은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소비는 위축되었고, 시장은 축소되었으며, 공장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아갑니다. 모두가 하늘에 계신 하나뿐이신 우리 주께 찾아 묻습니다. 이제는 어찌하면 좋을까 묻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대답이 내려왔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합중국의 역사는 동에서 서로 끝없이 뻗어 나가는 개척의 역사였습니다. 우리 선조는 신을 향한 굳건하고 정당한 믿음을 가슴 속에 품은 채 험난한 자연과 적대적인 현지 원주민들과 끝없이 맞서 싸워왔으며, 또한 승리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북미 대륙의 서쪽 끝에 다다랐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제 그만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멈추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주께서는 응답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새로운 친구, 대한제국을 이제는 모두 확실하게 알게 되었을 겁니다. 대한제국의 황제는 우리 합중국에 먼저 화친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대한제국의 황제께서는 자유 무역과 자유 경제를 사랑하며, 누구보다 신심 깊으신 정당한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인 동시에 자유 이민을 보장하여 우리 인간 개개인에게는 자유로이 그들의 조국과 거주처를 자결할 권리가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선조는 분명 유럽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직 서로 다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은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께서 주창하신 우리 미국의 이상을 믿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 미국의 이상을 그들의 대륙에 구현하고자 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진정한 친구가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 알게 될 것이며 또한 닮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이 온다면, 우리 미국은 또 한 번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화합의 장이자 두 대륙을 잇는 징검다리로써 우리 미국은 눈부신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미국은 앞으로도 계속하여 서쪽을 향하여 전진할 것입니다. 우리 합중국의 친구들과 만나기 위하여, 우리는 저 광활한 태평양을 개척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한 아시아-태평양권과의 교류 확대. 여기에 한국과의 관계 심화가 암시된 것은 물론이었다. 우선 대선이 치러지기 직전 이뤄진 방미 일정으로 한국을 향한 국민감정이 대폭 개선되고 미국인들 모두가 '한국'이라는 나라를 확신하게 각인한 것도 컸지만, 한국이 아시아의 맹주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태평양에 진출하고자 한다면 한국을 무시하고서 일을 진행할 수는 없던 것이다.
이는 헤이스의 당선 승리 연설 중 가장 많은 주목과 호응을 받은 대목이기도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정치란 민생과 직결된 경제라는 사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이다. 방미 사절단의 실질적인 대표자 구실을 한 카네기는 의도적으로 민주당과는 어떠한 접촉도 하지 않고서 공화당과만 담론을 나눈 다음 미국을 떠났고, 이는 미국 정·재계에서 이 태평양 무역의 운명이 공화당의 손안에 있음을 깨닫게 하였다.
때문에 헤이스의 당선이 결정되었을 때, 미국 언론은 매일 같이 한국과의 무역으로 대표되는 태평양 경제권의 대두 가능성에 대하여 호의적으로 다루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여기에 헤이스가 아시아와 유럽의 징검다리가 되겠다고 한 점은 또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자아냈다. 바로 파나마 운하 건설이었다.
"지금 대서양 경제권과 태평양 경제권은 사실상 어떠한 직접적인 교류도 주고받지 못하고 있다. 우선 태평양을 건너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은 것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태평양을 건너봐야 대서양으로 건너가려면 남미를 빙 돌아서 가거나 우선 항구에 화물을 내린 다음 철도를 이용해 대륙을 횡단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일 파나마에 운하가 열린다면 태평양과 대서양이 연결되면서 양대 경제권이 자유롭게 교류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면 그 징검다리가 되어줄 미대륙의 경제가 한층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헤이스의 당선 열설에서 시작된 파나마 운하 건설안은 곧장 미국 재계는 물론 미국 정계에까지 긍정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장 경제공황으로 어떻게든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할 시기에 파나마 운하 공사라는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할 대공사가 시작되면 엄청난 양의 일자리가 발생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던 것이다.
사실 파나마 운하 자체는 그 이전부터 지속해서 논의되고 있는 사안이기도 했다. 다만 파나마 운하를 건설할 때 필요한 천문학적인 비용과 인부들의 희생, 그리고 파나마 운하가 열리게 되면 미국의 대서양 함대가 자유롭게 태평양을 오고 다닐 수 있게 되면서 태평양의 해상패권이 미국의 손에 떨어지리라 우려한 영국의 견제로 단지 논의되고만 있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지금은 경제공황이 한창이었고, 어떻게든 정부가 빚을 내서라도 지출을 늘려 경기를 부양해야 하는 시기였다. 파나마 운하를 견제하던 영국은 마침 대공황을 직격타로 맞아 당분간 해외 영향력 투사가 불가능했고, 또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태평양 진출을 향한 목소리가 고조되고 있었다.
"헤이스 씨, 장차 대통령에 취임하시게 된다면 우리 미합중국은 아시아와 유럽의 징검다리로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그렇다면 그 전에 우선하여 무엇이 준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파나마 운하 공사에 대한 논의가 점차 확대되면서, 당선 이후 인수인계를 위한 바쁜 나날을 보내던 헤이스에게도 이 파나마 운하에 관한 논의가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를 취재하기 위하여 찾아온 기자가 우회적으로 파나마 운하의 필요성에 대하여 인식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에 대한 헤이스의 대답은 이러했다.
"물론 가장 먼저 태평양과 대서양의 바닷길이 서로 연결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물류의 이동에서 육로는 해로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해운이 경제의 대동맥인 까닭입니다. 굳이 지금 당장일 필요는 없겠으나, 운하 공사는 우리 미합중국이 언젠가는 마무리 지어야만 하는 국가적 사업이자 숙원일 것입니다."
요컨대 영국의 눈치 때문에라도 지금 당장 밀어붙이지는 않겠지만,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라도 언젠가는 공사를 진행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대답이었다. 그 필요성에는 긍정하되, 직접적인 공사추진 의지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던 셈이다. 사실 당장 서부 개척과 태평양 경제권조차 완성되지 않은 마당에 벌써 파나마 운하 공사를 의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헤이스의 대답을 전해 들은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사를 냈다.
"『"파나마 운하 공사는 미합중국이 반드시 마무리 지어야만 하는 국가적 사업이다!" 헤이스 대통령 당선인, 파나마 운하 공사에 굳건한 추진 의사를 내보여!』"
터무니없는 오보였다. '언젠가' 공사가 진행되기는 해야 할 것이라는 대답을 지금 당장 파나마 운하가 필요하다고 왜곡해버린 것이다. 이러한 대답은 미국 정·재계를 발칵 뒤집을 만했다. 혹자는 안 그래도 국가재정이 어려운데 헤이스가 무리한 빚잔치를 벌이는 게 아니냐고 우려했고, 또 혹자는 언젠가 마무리 지어야만 한다면 영국의 간섭이 약해진 지금 빠르게 공사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그저 파나마 운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경우 얻게 될 수익에 대하여 주판을 튕기기에 바빴다. 일자리가 대거 늘어나면서 경제가 활성화될 거야 기정사실이나 다름없고, 대서양 방면의 미국 상선들이 손쉽게 태평양으로 건너갈 수 있게 되니 태평양 무역 규모도 단번에 크게 뻥튀기된다.
비용이 문제지 일단 성공하기만 한다면 대단한 이익을 보는 것만은 확실했던 것이다. 막상 졸지에 운하 건설을 떠맡게 된 헤이스의 곤란은 제외하고서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창 파나마 운하 건설에 대한 갑론을박이 오가고 있을 무렵, 의외의 장소로부터 의외의 제안이 들어왔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파나마 운하 공사에 참여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바로 주미 임시공사 김옥균이 미 국무부를 은밀히 찾아가 공사에 참여하겠다는 제안을 해온 것이다.
* * *
그 내막은 이러했다.
"그러고 보니 뭔가 잊고 있는 거 같은데···."
방미 사절단이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형은 기묘한 의문에 사로잡혔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고서 그들을 보낸 듯한 기분이 든 것이다. 헤이스를 당선시키고 태평양 무역을 확대하는 것까지야 진작에 예정해뒀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감돌았다.
문제는 그것이 단지 기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뚜렷한 이미지가 없이 그저 묘하게 빼먹은 듯한 기분만 감돌다 보니, 기분이 다소 나빠졌을지언정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딱 잘라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형은 이 무렵 온종일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어야 했다.
이 묘한 기시감을 해결해준 곳은 전혀 의외의 곳이었다.
"그러니까 불란서의 상선이 경항대운하를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말씀이오?"
"예, 그렇습니다. 폐하께서는 귀국과의 무역 확대에 매우 큰 기대를 품고 계십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통의 불편으로 대부분의 우리 프랑스 자본가들은 단지 해안에 머물 뿐 내륙까지 깊이 진출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장차 양국의 자유 무역을 더욱 확대하고 양국의 국익을 더욱 극대화하기 위하여서는 우선 교통환경의 개선이 필수적이라 확신합니다.
그러나 당분간 귀국에서 이 모든 교통상의 어려움을 해결하기란 어려우리라 사료되는 바, 임시로서 대운하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하여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습니다."
"으음, 유감스럽지만 그건 아무래도 어렵겠구려. 만일 불란서의 상선이 경항대운하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면 다른 나라에서도 그와 같은 특혜를 바라게 되지 않겠소. 아직 지난 대기근의 기억이 남아있을 백성에게 있어서 그건 너무 가혹한 경험이 아닐까 하오."
'그리고 대운하까지 마음대로 쓰면 대책이 안 서. 눈만 잠깐 깜빡하면 중원이 프랑스 경제 식민지 꼴 나고 우리는 냅다 내쫓길 판국인데 내가 미쳤다고 그걸 열어주냐.'
카네기가 자리를 비운 사이 벨로네가 찾아와 중원의 대운하를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 요청해온 것이다. 이는 일단 대외적으로는 열성적인 친프랑스 인사라 정평이 난 이형으로서도 난감하기 그지없는 요청이었다. 중원의 대동맥이나 다름없는 대운하의 이용권을 프랑스에 건네준다면 그 순간 중원은 프랑스의 것이 되는 격이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한국이 철도를 빼곡하게 깔아봐야 수운을 능가하기란 어려운 까닭이다. 그러니만큼 이형은 단호하게 이 요청을 거부하였고, 벨로네 또한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던지 이형의 대답에
"유감입니다. 다소는 협상의 여지가 있었을 줄 알았습니다만, 오산이었군요."
라며 입맛을 다셨을 뿐 크게 추궁하려 나서지는 않았다. 이 대운하 이용권 문제가 불거지게 될 경우 양국의 관계가 극적으로 틀어질 수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 이 문답은 이형에게 새로운 걸 떠올리게 하여주었다.
'잠깐. 프랑스. 그리고 운하라···. 아아, 그랬었군. 1880년에 프랑스에서 파나마 운하를 파려고 나섰었지. 책임자도 수에즈 운하를 뚫어버린 페르디낭드 드 마리 레셉스가 직접 나섰었고. 이 정도는 충분히 뚫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의기양양하게 나선 건 좋은데 말라리아가 돌아서 사람만 잔뜩 죽고 공사 진전은 거의 안 되다가 프랑스 역사상 최대급 비리 스캔들인 파나마 스캔들이 터지고서 결국 프랑스는 빚만 잔뜩 지고 물러났던가.
솔직히 공사 인부들에게 말라리아를 옮기던 게 개미가 아니라 모기였다는 것만 초기에 알았어도 뚫었을 것 같기는 한데···.'
이형은 그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성가시게 만든 그 묘한 기시감이 무엇이었는지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걸로 끝나는가 했지만, 이형은 그 직후 불현듯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놈이 프랑스 대사잖아. 시기는 조금 이르긴 하지만 어차피 지금부터 수주 따내고 계획하고 하다 보면 첫 삽을 푸게 되는 시기는 비슷할 거고. 미국도 앞으로 태평양 정책 확대하려면 우선 파나마 운하가 뚫려야 할 테고 우리와의 교역량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운하가 아쉬워질 테니 끌어들일 수 있다.
가장 큰 문제가 공사하다가 인부들이 2만 명 넘게 죽어 나갔다는 건데, 어차피 인력 수출로 중원 인구 조절하려던 판국에 그 정도야 뭐···.'
이형은 입꼬리를 뒤틀었다. 아직 방미 사절단이 한국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새로운 계획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이형은 천천히 입을 열어 제안했다.
"그 대신 한 가지 제안이 있소."
"기꺼이 경청하겠습니다. 무엇입니까?"
"새롭게 바닷길을 뚫어볼 생각은 없소? 우리 대한이 사람을 대고, 불란서가 기술을 대고, 미리견이 자본을 대서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봅시다."
벨로네 대사는 순간 이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서 그저 제자리에서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