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선왕, 흥선왕, 우리 흥선왕 >
잠시 눈을 깜빡거리던 이형의 반응은 이러했다.
"그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까지 나왔다가, 이형은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가 카네기와 독대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주변에 엄연히 축하 인파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걸 뒤늦게 자각한 것이다. 이형은 나지막하게 헛기침을 한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험! 허허, 농담이 좀 지나치시구려. 옛 조선은 엄연히 유학을 국시로 내세운 나라요. 시대가 바뀌었기에 짐이 시대에 발맞추어 조금 고쳤을 뿐, 여전히 유학은 우리 한국의 근간이오. 그런데 어찌 흥선왕께서 뭇 유림과 백성들을 속이고 천주학도이셨겠소. 분명 무언가 미리견에서 기연이 있었지 않겠소?"
이형의 대답은 자신의 사견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동시에 또 이 대담을 엿듣고 있는 환영인파들에게 들려주기 위하여서 하는 말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자신이 유학을 내치려는 것도 아니오, 기독교를 숭상하려는 것도 아니라는 걸 보여주어 유림을 안심시키고자 한 것이다.
물론 주된 것은 카네기를 추궁하는 일이었다. 이하응을 곁에서 잘 보고 감시해두라고 카네기를 붙여 보냈던 것인데 막상 카네기가 이하응에게 어떤 기연이 있었기에 이하응이 돌연 기독교도로 전향하였는지 답하지 못한다면 이형으로서는 카네기에게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자 그대로 사람을 잘못 본 격이다.
그러나 이를 카네기는 달리 들었다.
'아차, 그랬지. 이건 함부로 이야기가 새어 나와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다. 조선은 불과 10여 년 전만 하여도 아시아에서 가장 혹독하게 기독교도를 탄압하던 것으로 악명을 떨치던 나라가 아니던가. 조금 전 것은 이토록 많은 청중 앞에서 가볍게 꺼내도 되는 이야기는 아니지. 나도 모르게 실언을 해버렸구나.'
카네기로서는 정신이 번쩍 드는 듯했다. 이형이 모태신앙이라는 의혹을 한몸에 받으면서도 세례를 직접 받지도, 자신이 천주를 신봉한다고 제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는 이유를 뒤늦게 떠올린 것이다. 어느 나라나 신앙에 관련된 사안은 왕권과 직결된 중대한 문제였고, 이형이 공자를 따르는가 예수를 따르는가 하는 문제는 향후 이형의 약점이 될 위험이 있었다.
그렇기에 카네기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형을 만족하게 하면서도 청중들에게 이형이 이 사안에 관련하여 어떠한 연루도 되어있지 않음을 입증해줘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른 것이다. 이형이 알았다면 기가 다 찰 일이었으나, 카네기는 진지했다.
잠시 고민하던 카네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것이 처음 미리견에 발을 디딜 때였습니다. 아니 글쎄 해안선 가득히 아주의 백성들이 마중을 나와 대한제국 만세를 외치지 않겠습니까? 그간 실의에 빠지시어 크게 침체되어있던 흥선왕 전하께서 대한을 찬미하는 아주의 백성들을 보고서 크게 격앙하여 함께 만세를 외치시니, 마중 나온 아주의 백성들도 더욱 크게 만세를 외치며 해안선 가득히 만세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 일은 일전에 신문을 통하여 보았소. 그래, 그 일이 단지 신문에 실린 과장이 아니라 진짜로 일어났던 일이었다는 것이구려?"
"예, 그렇습니다. 그날 이후로 흥선왕 전하께서는 마치 다시 태어나신 듯하였습니다. 그간 배 위에서 침울해하시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매일 같이 아주의 백성들을 걱정하시고 또한 그 곁에 임하려 하시더니, 마침내는 소인에게 미주에 남아 미주에 거하는 아주의 백성들을 보듬고자 하는 큰 뜻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소인은 당연히 황상께서 허하시기 전까지는 결코 아니 될 일이라 말씀드렸으나, 이미 흥선왕 전하께서 아주의 백성들을 생각하시는 정성이 하늘에 닿았거늘 어찌 사람의 업으로서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여 마침내는 미리견에 남고자 하는 의지를 담아 몸소 천주당에 임하시어 주지의 세례를 받으시니, 비로소 흥선왕 전하께서는 이미 대한의 사람이 아니라 미리견의 사람이 되었노라 깨닫고서 이 한국 땅에 홀몸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황상께서 흥선왕 전하를 아끼시는 그 지극한 효심을 저 또한 아는바, 황상께 누를 끼치게 되었으니 이 죄를 어찌하면 좋으리까. 그저 한가지 흥선왕 전하께서는 간신의 간교한 부추김이 아닌 가슴 속에 품으신 큰 애민의 뜻을 실현하고자 미주 땅에 남고자 하였음을 헤아려주소서."
여기까지 막힘없이 말하고서는, 카네기는 넙죽 자리에 엎드려 이형에게 절을 올렸다. 이형으로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이하응이 이제 와 권력욕을 버리고서 애민에 눈을 떴다는 설명부터가 허구로 들렸을뿐더러, 결국 이하응이 애민에 눈을 떴다는 설명 이외에는 이하응이 미주 땅에 남은 합당한 이유도 제시하지 못한 까닭이다.
이형으로서는 이것이 카네기가 이하응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멋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말하는 거로 밖에는 들리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를 구경하는 환영인파들이나 조정의 관료들이 보고 듣기에는 또 달랐다.
"맙소사. 색목인이 저리도 우리 조선말을 능숙히 하며 조선의 예법을 저리도 충실히 따르다니···! 허어, 갸륵한지고. 비록 생김새는 다르나, 저자는 실로 우리 조선 사람이라 부를 법하다!"
"미리견은 서방 예의지국이라고 하더니 실로 그러하구나. 조선에 왔으니 조선의 예법을 따르는 일이 말이야 쉬우나, 땅이 다르고 말이 다르며 그간 살아온 방식이 다를지언데 이를 흉내 내기가 어디 쉽겠는가?
하물며 오늘 저 색목인은 흡사 우리 조선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조선의 말을 하고 조선의 예법을 몸에 익히고 있으니, 비록 천박한 상행을 생업으로 삼는 상인이되 그 그릇은 실로 서역의 선비라 높여 부를 만하도다. 황상께서 저 색목인을 귀히 대접하시는 까닭을 비로소 알겠구나!"
환영인파로 나선 유림과 관료들은 카네기의 설명에 크나큰 호의를 품었다. 그들이야 이하응이 한순간에 민생을 누구보다 생각하는 참된 선비가 되었음을 믿지 않았으나, 지금 그들이 두 눈으로 보고 들은 놀라운 광경은 믿었다.
사실 그동안 유림은 그간 카네기가 한양에 머물며 사업을 꾸려왔다고 하나 카네기가 대부분 시간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미국인 사업가들과 이형을 비롯한 고관들과만 교분을 나누던 까닭에 카네기라고 하면 그저 막연하게 이형의 총애를 받는 색목인 상인 정도로만 생각하던 차였다. 당연히 그를 고깝게 생각하거나 내심 경계하던 시선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날 카네기가 환영 인파들 앞에서 보여준 모습은 그간 유림의 삐뚤어진 시선을 단번에 교정하고도 남음이었다. 무엇보다 천주의 앞에서만 무릎을 꿇는다며 뻗대던 색목인들이 황제를 향하여 절을 올리며 그 예를 다하는 모습은 예법을 누구보다 우선시하는 유림에 있어서는 흡족함과 동시에 기대를 품게 했다.
"한낱 상인조차 저러할진대, 미리견의 선비들은 또 어떻겠는가? 내 오늘에서야 확실하게 알겠다. 서역의 예법이 낯설지언정 또한 예법이요, 상대를 공경하고자 이치는 같을진대 어찌 배척하고 꺼리겠는가. 내 살아생전에 언젠가 서역의 선비들과 교분을 나누며 배움의 길고 짧음을 견주어 보고 싶구나!"
요컨대 유림은 카네기의 모습에서 마침내 머리로 생각하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서역을 그들과 대등한 문명으로서 인정한 것이다. 이는 그간 팽팽하게 대립해오던 기성세대와 신진세대의 이념대립이 신진세대의 승리로 크게 기울었음을 의미했다.
단지 부국강병을 위하여 서역의 학문과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 그치지 않고서 진정으로 서역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고자 하고 적극적으로 그들과 교류를 나누고자 하는 목소리가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막상 이 자리에 모인 인파들은 물론 이형 또한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가 하면 백성들의 반응은 또 달랐다.
"역시 범을 낳는 건 또한 범인 법이지!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거 평생 살이나 뒤룩뒤룩 찐 게으름뱅이들 밑에서 소작이나 하다 죽을 우리 같은 놈들에게 우리 손으로 개간할 논밭 한 마지기를 마련해주신 게 누구신데 고럼, 고럼!"
"그래, 그렇지! 흥선왕 전하께서 그럼 그렇지! 동녕에서 일어난 변고는 분명 흥선왕 전하의 이름을 함부로 가져다 쓴 간신 놈들 탓에 괜한 소란에 휘말렸음이 틀림없음이라! 음, 음!"
유림이 이하응의 애민정신을 조금도 믿지 않았지만, 백성들은 대단히 간단하게 이하응의 애민정신을 이해하고 또한 받아들였다. 유림과 달리 백성들이 기억하던 이하응은 지주들에게서 논밭을 빼앗아 그들에게 나눠준 은인이오, 이형이 전장에서 말을 모는 동안 조정을 지탱하던 나라의 큰 어른이던 것이다.
물론 이하응 탓에 군포가 사라지고 개나 소나 군대에 끌려가게 된 것에 원한을 품는 이들이 없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이었다. 잇따른 전쟁 중 한껏 끌어 오른 민족주의 정서가 스스로 자청해서라도 군대로 향하는 강한 애국 문화를 만들었던 까닭이다. 거기에 자신들만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꼴 보기 싫던 젠체하는 양반 어르신네들까지 군대에 끌려갔다 왔으니 내심 고소한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니 백성들은 카네기의 모습에 놀라워하기보다도, 역시 이하응이다-라는 반응이 앞섰다. 이형이 아직 어려 이하응의 섭정을 받던 시기에 행해진 개혁들은 대개 이하응이 생각하고 주도한 정책으로 알려져 있던 게 효과를 톡톡히 본 것이다. 그 때문에 백성들은 이하응이 누구보다 민생을 생각하고 있음을 믿었고, 따라서 카네기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으, 음···."
그리고 이런 공기는 당연히 이형에게도 읽혔다. 이형으로서는 성가시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내심 우려하던 대로 이미 이하응에게서 돌아선 유림과는 달리 백성들은 이하응을 그리워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공경하고 있던 것이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지라 그리 놀라운 사실도 아니었지만, 이하응을 향한 호의적인 여론이 이번 자리를 계기로 다시금 부활할 것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형은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겼다.
'자아, 어쩐다. 일단 판이 이렇게 깔린 이상 정면에서 이하응을 욕보이는 건 무리다. 아들이 아비의 명예를 깎아내리려고 안달이 난 꼴이 되니 말이지. 이하응이 애민정신 탓에 미주에 남기를 자청했다는 건 맞는 말이라 치고서 넘어가는 수밖에 없어.
그럼 차라리 이하응이 미국에 남은 건 미국 내 황인종들을 위함이었다를 기정사실로 만들고서, 아예 미국에서 돌아올 여지를 없애버리는 게 최선인가.'
그렇게 판단이 서자 이형은 잠시 말을 골랐다. 카네기의 말에 공감하고, 또 이하응의 뜻을 높이 쳐주면서도 동시에 이하응이 한국에 돌아올 마지막 개연성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내가 눈이 어두워 미처 흥선왕께서 그와 같은 큰 뜻을 품었음을 미처 눈치채지 못하였구나. 이제 흥선왕께서 그리도 아주의 백성들을 아끼고 계심을 온 천하가 알게 되었으니, 비로소 지난날의 불명예가 오늘날의 명성으로 덮어지겠구나.
경은 이만 고개를 들도록 하시오. 흥선왕께서 이미 마음을 정하시었다면 자식 된 도리로서 어찌 그 뜻을 막을 수 있겠소. 흥선왕께서 큰 뜻을 품으심에 비록 두 대륙은 바다로 나뉘어있으나 백성을 사랑하는 지극한 뜻으로서 아주와 미주가 하나로 이어졌으니, 이 어찌 기쁜 날이 아니겠는가!
내 약속드리리다. 장차 흥선왕께서 아주의 백성들을 보살피는 데에 부족함이 없도록 우리 대한제국은 아주의 백성들이 미주에 정착하는 데에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대한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만세!"""
이형과 카네기의 문답이 끝남과 동시에 인천 부두 가득히 환영인파들의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성들은 이하응의 큰 뜻에 감격하여 만세를 외쳤고, 유림은 눈앞의 색목인이 조선의 예법에 따라 문답을 마무리 지었음에 기뻐하며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문답을 주고받은 두 사람의 생각은 완전히 엇갈리고 있었다.
'휴우, 그래도 어떻게든 신앙 운운하는 부분은 애민정신으로 덮을 수 있었구나. 이로써 황상께서 괜한 추문에 곤란을 겪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즉석에서 짜낸 임기응변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카네기는 만족해했다. 자신이 현명하게 대처한 덕분에 이형과 이하응의 신앙 문제가 크게 거론되지 않고서 무난하게 얼버무려졌다고 여긴 것이다. 이번 사안에서 가장 문제시되었던 것이 이하응의 미국 잔류와 신앙 문제였는데, 그 두 가지 모두 이번 문답 한 번에 해결된 것이다.
카네기로서는 자신도 자신이 대견해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얼씨구, 저놈이 뭘 잘했다고 히죽히죽해? 오냐, 너 어디 당분간 두고 보자.'
이형이 그를 어디 두고 보자면서 빤히 노려다 보고 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이다.
* * *
뜻하지 않았던 촌극이 끝이 나고, 이형과 카네기는 함께 마차에 올랐다. 서울로 향하는 기관차에 오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위병으로서 막 미국에서 귀국한 전봉준 또한 있었다.
"그간 평안 무탈하셨습니까, 황상."
'···얼레, 이놈 봐라?'
이형을 향하여 경례를 올리는 전봉준을 가만히 내려다보면서, 이형은 한눈에 전봉준이 무언가 변하였음을 깨달았다. 다른 무엇보다, 그간의 밝고 천진난만했던 기색이 없어지지는 않았으되 훨씬 가라앉았다.
그 대신 어깨는 마치 온 세상의 무거운 책임은 저 혼자 다 짊어지기라도 한양 축 늘어졌고, 눈빛은 가라앉을 때로 가라앉아 흐리멍덩하기만 했다.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어도 단단히 있었다는 증거였다.
"그래, 다녀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분명 생전 처음으로 낯선 나라에 다녀오면서 보았던 것도 많았을 테고 듣게 된 것도 많았을 터인데, 기회가 되거든 한 번쯤 들려주거라. 내 기꺼이 귀 기울여주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형은 가능한 한 환하게 미소지으며 말을 걸었다. 그런데도 전봉준은 무언가 말하려고 하였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을 따름이다. 그러자 이형으로서는 고개가 절로 갸웃했다.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은 확실한데 보는 눈이 많아서 그런지 도통 말을 하지를 않으니 알아챌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깊게 파고들 수도 없었다. 지금 이형에게 중요한 상대는 전봉준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엇차! 이 인천부두도 그간 못 보던 사이에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기세 좋게 마차 위에 오르며 카네기는 사람 좋은 미소를 만면 가득히 띄었다. 이형은 잠시 전봉준에게서 시선을 떼어 빤히 카네기를 노려다 보았다.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예정에도 없던 촌극을 벌이게 했던 걸 생각하면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형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카네기가 아니라 누구를 붙여 보냈더라도 이하응이 미국에 남겠다. 떼를 쓰면 감당해낼 사람이 없었을 거라는 걸 알고 있던 것이다.
결국, 이형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야 변했을 수밖에. 경이 미리견에 다녀오는 동안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소. 가령, 이 국도 사업이라던가."
이형은 손가락 끝으로 마차 아래에 놓인 마차길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땅을 파 벽돌을 올려 쌓고 다시 석회를 부어 고정한 1급 국도였다. 이 무렵 대한제국은 국도를 크게 두 가지 등급으로 나누어 구분하고 있었다.
기준은 간단했다. 돌이나 벽돌로 닦인 도로들은 1급 국도였으며, 사람이 큰 불편 없이 다닐 수 있는 길은 2급 국도였다. 자연히 1급 국도는 한양과 개성, 평양, 인천, 전주, 동래 등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과 사단 주둔지를 비롯한 주요 군사시설을 잇는 데에 사용되었고, 돌 정도만 골라내어 평평하게 닦은 2급 국도는 그보다 중요도가 낮은 도로망을 유지하는 데에 쓰였다.
이형의 설명에 카네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선을 흘끗 창밖으로 옮기며 물었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건 무엇입니까? 사람이··· 끄는 마차 정도 즈음으로 보입니다만."
"인력거요."
"인력거, 입니까?"
"그렇소. 사실은 내 직접 저 비슷한 걸 만들어 보려 했소만, 나중에 듣자니 이미 일본에 있었더구려. 그래서 몇 대 사들여왔소. 그리 만들기 어려운 것도 아니라서, 우리 장인들도 금세 흉내 내서는 도성 근방에서는 벌써 드문드문 보이더구려."
완성도가 볼품없어서 그렇지. 이형은 나지막이 덧붙였다. 그의 설명대로, 마차의 창밖으로 드문드문 보이는 인천의 인력거는 어딘가 기울어진 듯 보였다.
이에 카네기는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굉장하군요."
"그렇소."
이형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쉽지. 이제 곧 도성이 온통 이국의 문물을 베끼고 흉내 낸 가짜들로 가득 찰 거요.
뭐든지 처음에는 남의 것을 베끼는 데에서부터 시작되는 법."
이형은 조용히 입꼬리를 뒤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