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감의 근거 >
그리고 이형이 자신감을 보이는 데에는 무엇보다 확실한 근거가 있었다. 이 무렵 한국은 단지 서류상이 아니라 실제로 일상생활까지 근대화의 여파가 스며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년도 풍년, 올해도 풍년! 껄껄껄!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만 되었으면 좋겠구먼!"
"아무렴 그렇게 되고말고! 그러니까 내일 빠지지 말고서 저수지 공사에 나오게나. 지금부터 시작해야지 내년 날이 풀리기 전에는 마무리 짓지 않겠는가."
"에잉, 귀찮게 시리··· 그래, 알겠네. 알겠으니까 새참이나 넉넉하게 준비해두게나. 사람이 밥을 먹어야 힘을 쓰지!"
가장 크고, 결정적인 변화는 바로 자영농들의 성장과 대두였다. 토지개혁이 시작된 지도 어언 10년이 넘어가며 이 무렵 한반도 내의 모든 농토는 크고 작은 자영농들에 분배되었다. 개중 소지주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백석지기, 천석지기 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들 또한 스스로 농사일에 종사하며 밭을 갈 경우에만 법적으로 토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토지를 가지게 된 자영농들은 나라로부터 적극적인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 무렵 성행하던 새마을 운동이었다. 한반도에 넘쳐나는 몇 안 되는 산업자원인 석회는 이 무렵 국가적 차원에서 개발되어 농촌 근대화를 비롯하여 모든 산업 분야에 걸쳐 분배되고 있었고, 이렇게 농촌에 유입된 석회는 저수지 공사에 대거 동원되며 수자원 확보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렇게 확보된 수자원은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가뭄에 조금이라도 저항할 수 있게 했으며, 또 풍년이 찾아오면 평소의 배 이상으로 많은 수확량을 기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으휴, 냄새가 뭐 이렇게 지독한지···. 쓰면 효과 하나는 직방이다만, 나는 영 손이 안 가는구먼. 도대체 이건 뭐로 만들었길래 이토록 냄새가 나는 건가?"
"아, 그 구아노 말인가? 으음, 내가 도시에서 일하는 친척에게 얼핏 듣기는 들었는데. 듣기로 새똥이 굳어서 만들어진 걸 미주에서 캐온 거라고 그러더구먼."
"새, 새똥···. 으윽, 더럽다. 더러워! 그래도 이놈이 있어서 올해도 무사히 넘길 수 있었으니, 으으으!"
쿨리들과 맞바꾼 구아노의 수입은 새마을 운동에 의한 수자원 확보와 더불어 농업생산량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다. 이미 한반도 곳곳에 밭이란 밭은 모두 개간되어 새롭게 밭이 늘어난 것은 아니었으나, 같은 밭에서라도 저수지에서 공급된 풍부한 수자원과 구아노라는 혁신적인 비료가 더해지며 그 생산량이 이전보다 수배 이상으로 크게 뛴 것이다.
여기에 포항 제철소에서 본격적으로 강철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나라에서 먼저 농기구들을 만들어 보급하게 시킨 것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그간 두꺼운 화강암층에 부딪혀 밭을 갈아도 씨앗이 깊이 박히지 못하던 것이 괭이질 한 번에 땅이 집게손가락 넉 마디가 들어가도록 깊이 파이고, 또 수확할 때에도 몇 차례고 헛손질해야 하던 것이 낫질 한 번에 잘라내면서 농사일에 들어가는 수고 자체가 크게 줄어든 것이다.
그렇게 농사일에 들어가는 수고가 줄어들었다면 일에 나태해질 법도 하건만, 이미 제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돈을 버는 재미에 들른 농민들은 그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이히히! 이게 다 내 거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내 거야! 이 이쁜 것들! 그래, 무럭무럭 자라거라! 어디 나도 고래 같은 기와집에서 매일 같이 쌀밥에 고깃국 먹으며 살아보자!"
"금송아지가 대수더냐? 어디 두 마리, 석마리, 아니 쪼잔하게 그게 다 뭐시더냐. 사내대장부라면 넉넉히 금송아지 10마리쯤은 길러줘야지! 으흐흐, 그래. 금송아지 10마리다, 금송아지 10마리! 난 이 강릉 제일의 소 부자가 될 거다!"
"공부! 공부만이 살길이다! 세상이 날마다 달라지는데 우선 나부터가 눈이 크게 띄어있어야지, 이대로는 깜짝하다가 뒤처지겠어! 아이고, 옆집 영수처럼 똘똘한 아들놈 하나 있었으면 내가 이런 고생 안 했어도 되었을 텐데, 집안에 자식이라고는 힘쓰는 재주밖에 없는 머슴아들 뿐이니···! 에잉!"
이 무렵 농민들은 조금씩이지만 확실하게 자유 시장 경제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날로 이국에서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고 그때마다 더 큰 돈을 벌게 되니 그야 눈이 돌아갈 수밖에는 없었다. 이러다 보니 저수지 공사가 이미 마무리된 마을들은 따로 관청에서 시키지 않아도 겨울에 마을 장정들을 동원해 석회로 길을 깔면서 도시와의 교통을 개선해나가고는 했다.
그러던 것이 이내 국도사업이 시작되자, 아예 저수지 공사가 끝난 마을들은 석회를 받아다가 저수지 보수나 하면서 썩히지 말고 길을 닦으라는 정식 공문이 내려갔다. 안 시켜도 하던 것이 아예 중앙에서 공문까지 내려오면서 밀어주게 되니 지방 도로 공사는 더구나 가속된 것은 물론이었다. 이러한 지방 도로 환경의 개선은 농촌과 도시의 교류를 편리하게 만들었고, 자영농들이 부를 축적하는 데에 더욱 큰 도움이 되었다.
여기에 정점을 찍었던 것이 이 무렵 이형의 명으로 시행된 농산물가격유지법이었다.
"『옛 선인들이 이르기를 사람이 살아가면서 필히 누려야 하는 세 가지 요소인 의식주 중 식이 으뜸으로 중하다 하였다. 옷이 없다고 사람이 사람을 해치지는 않고, 오갈 곳이 없다고 사람이 사람을 해치지는 않으나 당장 먹을 것이 궁하면 사람이 사람을 해치게 되는 까닭이다. 한데 오늘날 중원에서 쌀이 있어도 돈이 없어 배를 곯는 비극이 일어났으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하여, 이와 같은 비극이 또다시 되풀이돼서는 안 되는바. 장차 나라에서 뭇 백성들이 배를 곯는 일이 없도록 안전책을 마련하고자 하니, 어린 백성들은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대한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만세!"""
대한일보를 통하여 포고된 농산물가격유지법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을 지니고 제정된 법이었다. 하나는 이형이 포고한 대로 가격이 너무 오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유지하기 위하여 조정은 강남으로부터 대량의 쌀을 수입해왔다. 이는 대기근 이후로 되려 쌀값이 크게 내려 곤란을 겪던 강남의 지주들이 반기는 일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쌀을 대거 수입해가면서 시장에 공급되는 쌀의 양이 크게 줄어 가격이 안정된 것이다.
반대로 한국은 강남에서 쌀을 대거 수입해오면서 국내에 유통되는 쌀의 양이 크게 늘어 국내에 대단히 싼 가격으로 쌀을 유통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대단히 싼 가격이라는 표현조차 부족해, 강남에서 쌀을 들여오기 이전과 비교하면 반의 반절 이하까지 쌀값이 크게 떨어졌다. 돈이 없어서 쌀을 못 먹는 지경이 아니라 이제는 개나 소나 사시사철 쌀을 먹을 수 있는 지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쌀값이 떨어지면 손해를 볼 사람들이 있었다. 당연히 국내의 자영농들이었다. 그리고 농산물가격유지법의 진면목은 여기에 있었다.
"아이고, 정말로 요즘 들어 나라 득을 크게 보는구먼. 도시로 가끔 나가서 밥 좀 먹어볼라치면 진짜로 이건 뭐 예전에 비하면 반의 반절도 안 되니 눈앞이 아찔해!"
"참말일세. 요즘같이 쌀값이 바닥을 치는 때에 나라에서 안 사 갔으면 도대체 어디에서 그 비싼 값을 주고 사 갔겠는가? 그래도 덕분에 우리들이 입에 풀칠은 하게 살게 되었으니, 그저 황은에 항상 감사할 따름이여."
"어허, 이 사람이. 입에 풀칠은 무슨 엄살을···. 내 자네가 어제 저잣거리에서 마드모아젤 최랑―."
"쉬잇! 거 참, 그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했을 텐데!"
농산물가격유지법의 진면목은 강남에서 값싸게 들여온 쌀을 그보다는 다소 비싼 가격에 국내시장에 풀고 또 일본에 내다 팔면서, 이를 통해 남긴 차익으로 비싼 값에 국내 자영농들로부터 쌀을 사들이는 데에 있었다. 궁극적으로 국내에 유통되는 쌀의 총량은 크게 늘어 쌀값은 낮아지나, 국내 자영농들은 원 값 내지는 그보다 다소 웃돈을 받고서 쌀을 시장에 팔게 되는 것이다.
이는 강남 대기근 이래로 넘쳐나는 쌀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된 강남의 특수한 정황 덕택에 가능한 정책이었으나, 자영농들의 성장에 있어서는 이보다 좋은 정책이 없었다. 자영농들은 비싼 값에 쌀을 나라에 팔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값싼 쌀을 사들여 마음껏 쌀밥으로 배를 채울 수 있게 된 것이다. 풍년이면 평소보다 다소 낮은 가격에 사가더라도 가뭄에는 또 평소보다 웃돈을 주고 사가니, 전체적인 수입이 안정된 것은 덤이었다.
종합하자면 새마을 운동으로 안정적인 수자원이 확보되고, 구아노 수입으로 생산량이 많이 늘어나며 강철 농기구의 보급으로 생산효율이 개선되었는데 거기에 정부지원금까지 받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 지원이란 지원은 받을 대로 받고서 성장하지 못할 수가 없었다. 이 무렵, 한국의 농민들은 전에 없는 돈벼락에 취해 있었다.
"어제 이걸로 아홉째야, 아홉째! 낄낄낄! 그래, 어디 열 놈마저 채워보자! 어디 내 더 이상 서지 않을 때까지 몇이나 낳는가 보세!"
"아이고, 이 사람이 날 잡네, 날 잡어! 이 철부지가 아주 그냥 나 애 낳다가 죽는 꼴 보고 싶소? 딸만 아홉씩 낳아준 것도 아닌데 이쯤 했으면 많이 했지, 그만 끊읍시다!"
"어허, 부인. 지금처럼 살기 좋은 세상이 또 언제 있었다고 그렇게 점잔을 빼시오? 적어도 우리 애들은 낳아도 배는 곯지 않을 텐데, 무엇이 그리도 걱정만 가득하시오?"
"얼씨구, 절씨구. 우리 애들이 아니라 내 배가 걱정이요. 내 배가! 자꾸 그리 헛소리나 늘어놓으면 내 또 친정집으로 돌아가는 수가 있어요!"
이러한 자영농들의 대두는 크게 세 가지의 변화를 끌어냈다. 우선 첫째로, 부유한 자영농들의 대두는 보건 환경의 개선과 더불어 한국의 인구 성장을 크게 가속 시켰다. 그간은 애를 낳더라도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을까 걱정이 되어 애를 내다 버리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애를 가지던 것을 피하던 게 낳아도 배를 곯을 걱정을 하지 않고서 우선 낳고 보는 풍조가 퍼진 것이다.
이에 따라 이 무렵 조정에서는 해마다 늘어나는 신생아들의 숫자에 장차 나라를 위하여 일할 일손이 많이 늘어났음을 기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저 많은 신생아를 교육할 교사가 턱없이 부족함에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홍집으로 대표되는 교육부가 해마다 국방부 다음으로 많은 예산을 받아가면서도, 매일 같이 예산 부족과 일손 부족, 격무에 시달리는 이유였다.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제발 한 번만! 한 학기만이라도 우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아주십시오! 이렇게 엎드려서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람 한 명 살리는 셈 치고서 제발!"
"어허, 그러니까 그게 어디 제 마음대로 된 답니까. 다 윗선에서 허락이 나와야 하는 거지. 그리고 그렇게 절박하시면 성의를 보이셔야지요. 언제부터 맨입에 고개만 숙이는 게 성의가 되었답니까?"
그리고 이러한 처절한 일손 부족은 사회적으로 교사라는 직종 그 자체가 선망의 대상이 되는 효과를 낳았다. 안 그래도 유교적 영향으로 교사가 존중을 받던 와중에, 전국적으로 교사가 부족하여 이름을 좀 날리는 교사라면 학교에서 제발 와달라 엎드려 청하는 광경이 매일 같이 반복되다 보니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초등, 중등, 고등, 어느 교사이건 이러한 현상은 공통으로 나타났다.
교사임용시험에 합격하는 것 자체가 출세의 상징이 되어버린 격이었다. 이러한 기조는 가르치는 일에 사명감을 품은 이들보다도 출세를 목적으로 교사임용시험에 매달리는 이들과 촌지를 비롯한 각종 비리를 대거 양산했지만, 또 한편으로 이토록 많은 이들이 교사가 되고자 매달리는 통에 날로 폭증해가고 있는 신생아들과 이로 인한 교사진의 수요상승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며 그 격차가 메꿔져 가고 있었다.
"정말이지 국고에 뭐가 들어왔다 하면 들어오는 족족 나가는구먼. 뭐 이렇게 매일 같이 쓸 구석만 새로 늘어나는지, 원."
"그래도 또 쓰는 만큼 새로 들어오고 있으니 그게 어딘가? 언젠가 이 노력이 다 보답받을 날이 오리라 믿고서 함께 힘내세나."
"에잉, 그것도 언제가 될지 누가 아는가? 하여간 국방부나 교육부에서 한 번 쓱 가져가고 나면 남는 게 없으니 원···!"
두 번째로 한국 재정이 크게 개선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자영농들은 우선 지주들과는 달리 대대적인 탈세를 시도할 만큼 대단한 위세를 지니고 있지도 못할뿐더러, 탈세가 일어나더라도 소규모로 끝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반도 전역의 농지 면적과 농업 종사자 인구는 그대로더라도 징세 효율은 늘어나니 전체적인 세입은 크게 불어났다.
물론 조정으로서는 이 늘어난 세입에 기뻐할 여력도 없었다. 세입이 들어오는 족족 관료를 확충하면서 양적으로건 질적으로건 늘어난 관료들의 임금, 천년대계라 불리는 교육예산, 거대한 군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군비, 사회기반시설 확충과 유지보수에 들어가는 비용에 5개년 경제개발계획까지 더해지면 결국 예산은 매일 같이 적자였던 까닭이다. 사정이 이러니 재무부로서는 매일 같이 울상을 지을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덕분에 재무부에서는 이 무렵 한국의 성장을 시시각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분기마다 세수가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늘어나던 것이다. 이는 그만큼 소비가 활성화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이 무렵 재무부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어윤중 또한 시장에 돈이 돌고 돌고 있음을 강조하며 이와 같은 성장추세를 거듭 강조했다. 곧 재정 상황이 크게 호전되는 날이 오리라 예측하던 것이다.
"그래, 간다! 더러워서 가고 만다! 이 빌어먹을 놈의 고향! 내 또다시 돌아오면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가는데 배웅 나오는 놈 한 놈 없으니···카악, 퉷! 으흐흐! 그래, 만주로 가서 크게 한몫 잡아주마! 고래 같은 기와집에서 되놈 시종들 부려가며 떵떵거리면서 살아주겠어!"
"어머니, 아버지! 그럼 불초 소자, 다녀오겠습니다! 도시에 가거든 꼭 편지할게요! 돈 조금씩 부쳐 드릴 테니, 소소하게 살림에 보태세요!"
세 번째로, 평생을 고향 땅 근방에서 머무는 자영농들의 대두는 역설적으로 도시화와 만주 개척을 가속했다. 제아무리 한반도의 농토란 농토는 몽땅 가져다가 분배했다고 하지만, 결국 땅을 받지 못한 이들도 나올 수밖에 없던 것이다. 옛 지주들이 그 세를 유지하고 있을 적에는 이런 잉여인력도 제 가문의 힘이 되는 까닭에 어떻게든 쟁여두는 경우가 많았지만, 스스로 농사를 짓는 자영농들은 이러한 농촌의 잉여인력을 돌봐줄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소소한 잡일도 구하지 못하고 먹고 살 방법이 없어지면서 추방되다시피 제 발로 고향을 떠나거나, 아니면 형은 고향에 남아 농사일을 잇고 동생은 도시로 나가 공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왕왕 늘어났다. 이렇게 농촌에서 풀려난 잉여인력들이 만주 개척과 도시화를 대거 가속 시킨 것이다.
이러한 잉여인력들의 확산에는 농산물가격유지법으로 크게 낮아진 쌀값이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하다못해 만주나 도시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잡일이나 전전하는 처지라 해도, 그런 소소한 잡일을 해서 번 돈만으로도 일단 부족하게나마 배를 채울 수 있어 굶어 죽을 걱정은 없던 것이다.
"그래, 어차피 가서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그게 그거지···! 가서 용준이 형님만 믿고 죽어라 쫓아다니면 절반은 하지 않겠어?"
"어휴, 밭은 그대로인데 자꾸 먹는 입만 늘어나네. 그래. 밭일은 맏이나 둘째가 어련히 할 테고, 너는 집에서 학비를 대줄 테니 도시에 나가서 큰 인물이 되어 보아라!"
그리고 이런 선례가 생기면, 농촌에서 그 뒤를 쫓아 하나둘씩 상경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마침 국내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던 만큼, 이러한 추세는 당분간 날로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일은 없었다. 도시에 연줄이 있거나 그럭저럭 기반이 있는 이들은 도시로 나아갔고, 연줄도 기반도 없이 맨몸으로 처음부터 시작하고자 하는 이들은 만주로 나갔다.
물론 어느 쪽이건 힘겨운 생활이 예정되어 있는 건 매한가지였다. 도시로 나아가면 소위 민족자본가라 불리는 공장주와 사장들에게 시달리고, 만주로 나가면 만주족이 운영하는 목장에서 가축을 치건 맨손으로 땅을 파서 씨앗을 심건 모피 사냥꾼이 되건 고난은 마찬가지였다.
그저 조선 팔도의 도시라면 어느 곳이건 매일 같이 곡소리가 끊이지를 않았으나, 그들의 피와 땀 위에 한국은 조금씩 근대적 산업국가로 변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