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시절 >
그리고 이러한 점진적 변화에는 몇 가지 부수적 변화가 따라왔다.
"이야, 정말로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 가는구나! 내 살아생전에 한양에 이렇게 벽돌집이 가득해지는 걸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네! 길도 벽돌에, 사람이 모여 사는 집이며 관청들까지 온통 벽돌투성이니 원··· 참으로 작금의 한양은 벽돌의 도시로구나!"
"하하하! 벽돌만 보이는가? 저기 석회 더미가 하늘 높이 쌓인 거 보세. 앞으로도 한참은 더 남은 거야. 벽돌의 도시도 잠시고, 또 나중에는 석회의 도시라고 불릴지도 모르지."
"어이쿠, 그 말대로구먼. 정말 이대로 가면, 이 한양이 황금의 도시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왕왕 드네. 아니, 정말로 언젠가 그럴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르지. 허허허!"
"그래, 뭐든지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나? 지금이야 그냥 망상일 뿐이네만, 진짜로 일이 그렇게 풀리면 그보다 좋은 일도 없지! 자, 그럼 우리의 서울 구경을 위하여, 건배!"
한 가지는 미래를 향한 낙천적인 사고방식. 이는 조선 8도 전역에 활력을 끌어냈다. 안 그래도 연이은 승전으로 자부심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던 와중에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나아져 가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되니 그야 절로 사고방식이 낙천적일 수밖에는 없었다. 사실 이는 그간의 힘겨웠던 나날과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 가는 오늘날의 낙차가 그만큼 컸던 까닭도 있었다.
더불어 이러한 미래를 향한 낙천적인 사고방식은 그동안 굳게 잠겨져 있던 시민들의 호주머니를 열었다. 조금씩 부가 축적되고 경제성장이 본격화되어가던 시기에 이러한 낙천적인 사고방식까지 더해지니 즐거운 오늘을 즐기자는 향락적인 자세가 나타난 것이다. 이 무렵 한양에서는 매일 밤 잔치가 열렸고, 신분의 고저를 막론하고 고된 하루를 술로써 이겨내는 문화가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낙천적인 사고방식과 향락적인 인생관은 필연적으로 연쇄적인 변화를 끌어냈다.
"오오냐, 오늘에야말로 네놈 배때기에 발 도장을 찍어주마! 어제 우리 석이 놈 안면에 무릎을 냅다 찍었겠다? 너 오늘 아주 그냥 죽은 줄 알아라!"
"에헤이, 이 사람아! 이것도 다 놀이가 아닌가, 놀이! 사람이 놀다 보면 다칠 수도 있고 그런 것이지, 원 사람이 쩨쩨하게! 그리고 석이 놈 다친 게 어디 내 탓인가? 공을 몰고 있는데 냅다 얼굴을 가져다 댄 것이 잘못이지!"
"뭐가 어쩌고 어째? 이놈을 진짜···!"
"이보게, 심판! 어이, 박씨! 거 저 두 사람 끌어낼 수 없나? 무슨 축구를 저렇게 살벌하게 하는지 우리가 다 살 떨려서 못하겠소!"
바로 놀이문화의 확산이었다. 이 무렵 해를 걸러서 치러지던 단옷날 체육대회는 한국에 서역의 놀이문화와 아시아의 놀이문화를 전해주었다. 그래 봐야 여전히 시골이나 조금 구석진 도시들에서는 고작 해봐야 씨름과 국궁, 바둑, 석전 정도가 고작이었으나 한양이나 평양, 전주 등과 같은 제법 규모가 있는 도시들은 사정이 달랐다.
이 무렵 한양에서는 축구 문화가 조금씩 퍼져갔다. 규칙이 그리 복잡한 것도 아니며, 경기하는 데에 대단한 준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여럿이서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라는 것이 날로 불어 어가는 공사 인부들과 공장 노동자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게 된 것이다. 이러한 축구 경기는 고작 해봐야 조기축구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았으나, 되려 그 덕분에 아마추어들 또한 쉽게 축구를 접하고 이에 적응할 수 있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이 무렵 한양에는 공터가 많았다. 도시 재개발이 한창 진행되면서 낡은 도시구획들을 밀어내고 그 위에 신식 건물들을 세우거나, 반대로 그간 한양의 영역이 아니었던 지역들이 한양의 일부로 편입되며 그 위에 새로이 건물과 공장들을 쌓아 올리던 까닭이다. 장소도 널찍한 데다가 사람도 있고, 나라에서 적극적으로 보급하려 하고 있으며 공이야 적당히 탄력이 있는 구체이기만 하면 그만이니 그야 인기가 없을 수가 없던 것이다.
타-앙!.
"『네, 3번마 빠릅니다! 달립니다! 선두로 치고 나가는 3번마 개호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변은 또다시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대로 개호주가 5연승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지! 아아!』"
"껄껄껄! 그래, 가라! 가라 이놈아! 내 너에게 우리 호준이 학비를 걸었다! 네가 이겨줘야 내가 집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서 들어가지! 달려라, 이놈아!"
"저, 저, 저 망할 놈의 망아지 자식! 안 된다! 이게 어떤 돈인데! 우리 후남이 예물 댈 돈이란 말이다! 아이고!"
한편 축구로 대표되는 구기 종목이 조금씩 서민 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었다면, 자영농과 공장주 같은 조금 여유가 있는 계층에게 있어서 이 무렵 각광을 받고 있던 것은 경마였다. 다만 이 또한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말을 보기가 드문 삼남도나 경기권에서야 경마가 그래도 돈이 있어야 낄 수 있는 고급 놀이로 대우를 받았으나, 평양을 비롯한 북방에서는 말을 구하기가 쉽다 보니 지역에 따라서는 구기 종목들보다도 경마가 서민들에게 각광 받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이처럼 경마가 비교적 고급스러운 놀이로 자리 잡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황제가 첫 경기를 관람했다는 상징성이었다. 황제가 몸소 나서서 경기를 관람할 정도이니 얼마나 재미있겠냐는 입소문에 더하여 황제가 경기를 구경할 정도이니 우선 경기장부터가 세련되어야 하고 경마장에 들여오려는 이들도 그 나름대로 격식을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아버린 것이다.
경마가 중산층 이상이 향유하는 고급문화가 되어가면서 자연적으로 경마에 대한 투자도 많이 늘어났다. 질 좋은 말을 길러내는 목장은 그 상금으로 벼락부자가 되었고, 이에 따라 더 좋은 말들을 길러내고자 하는 목장들의 경쟁도 날로 치열해져 갔다. 이형이 의도했던 대로, 한국말들의 품종개량이 날로 가속되어가던 것이다.
"불란서의 명화들은 참으로 아름답소. 우리 대한도 이와 같은 아름다운 명화들을 흔히 구할 수 있게 된다면 좋을 터인데···."
"그럼 화장(畫匠:화가)을 구해보는 건 어떻겠소? 내 듣자 하니 불란서의 명가들은 제 가문의 선조들과 피붙이들을 아름답고 품위 있게 그려줄 화장을 가문마다 고용하고 있다고 들었소. 이를 본받으면 어떻겠소?"
"어허, 사치는 피해야 마땅하거늘···. 그러나 장차 아름답고 품위 있는 그림으로 가문의 명성을 드높인다면 조상들께 바치는 효행이라 할 수 있을 터. 좋소. 우리도 한번 따라 해봅시다."
물론 경마조차 놀이문화의 정점은 아니었다. 이 무렵 한국에서 진정 명가로 불리는 이들은 프랑스로 대표되는 유럽의 문화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근대화는 곧 서구화를 의미하기도 하였던 만큼 이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마침 한국의 우방인 프랑스는 유럽에서도 그 이름을 떨치는 문화강국이었고, 조금씩 바다를 건너오는 프랑스의 문물들은 그들을 유럽의 문화에 심취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들은 누구보다 앞서 유럽인처럼 꾸미고, 또 유럽의 명가들이 향유하는 온갖 고급문화들을 흉내 내고자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럽의 명화들을 흉내 낸 위작들을 긁어모아 집안에 장식하는 것이었고, 아예 낡은 집을 버리고서 새롭게 집을 세우면서 유럽의 양식을 있는 그대로 따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다분히 문화 사대주의적인 추태였으나, 이들이 유럽을 흉내 내며 문화계 종사자들에게 뿌리는 돈은 한국 문화 성장의 단초를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이들이 말로만 들은 오페라를 흉내라도 내보고자 소리꾼들과 광대들을 모으던 것이 한국에 극단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어주었고, 자신들의 가문에 금칠하기 위하여 끌어모은 화가들은 그간 천대받던 화장들에 이름을 날리고 안정적인 수입을 마련할 길을 마련해주었다. 그 의도는 불순했으되, 그 성과는 긍정적이었던 셈이다.
"내 요즈음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그 증기기관이라고 하는 기물이 가만 보면 힘이 대단하단 말이야. 보게나. 저 커다란 철마도 달리게 하지 않는가? 그래서 말인데, 이 증기기관이라는 걸 커다란 새 모형 같은 것에 달아놓으면 사람이 타고서 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 사람이 대낮부터 낮술을 했나···. 아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던가? 그래, 그 기물을 그 위에 올린다고 쳐보세나. 그 무거운 걸 올리고서 대관절 무슨 수로 난다는 말인가? 내 장담하던데 그처럼 무거운 쇳덩이를 지고서 하늘을 날 수 있는 새는 조선 팔도는 물론이요. 이 하늘 아래 어디에도 없을걸세."
"그렇지만 저 기계의 힘이란 놀랍다는 말일세. 생각해보세나. 새들이 하늘을 날기 위해 어디 가만히 있던가? 아니지. 조금이라도 더 오래 날기 위해 열심히 날개를 퍼덕이지 않던가. 비기(飛機)도 그와 같을 걸세. 어디 두고 보게나. 내 장담하건대, 장차 저 증기기관과 같은 기물들이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게 해줄걸세!"
"얼씨구 절씨구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그래, 좋네. 난 그럼 그 반대에 걸겠네. 그러니까 대낮부터 술주정하지 말고 어서 집에나 들어가시게!"
이러한 낙천적인 사고방식은 도전정신을 끌어내기도 하였다 사고의 틀이 조금씩 깨어져 나가면서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 세상을 바꾸어 보려는 도전정신에 가득 찬 이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던 것이다. 이러한 도전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입만 산 허풍선이거나 사기꾼이었으나, 개중에는 분명히 자신의 꿈과 이상을 분명히 잡고서 나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시대는 바로 그러한 도전자들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었다. 서역에서 날로 새롭게 들어오는 서역의 서책들은 이러한 도전자들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보물창고였고, 이 무렵 국민교육에 목을 매고 있던 조정의 정책은 그들에게 자신의 꿈을 구체화 시킬 기회를 안겨 주었다. 5개년 경제개발계획이 진행되어가며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퍼져가고 있던 것은 화룡점정이었다.
서역의 문물을 접하기 편리한 항구지대와 한양을 중심으로 이 무렵 한국에서는 날로 새로운 발명품들이 특허청을 향하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잡동사니에 가까웠다. 애당초 이 무렵 한국의 기술 수준이 대단하지 않았던 만큼 그중 대부분은 잡동사니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중에는 드물게 쓸모가 있는 발명품들도 있었다. 이들의 경우에는 조정의 관료들이 나서 여기에 투자할 투자자와 연결해주어, 더욱 이러한 기조가 퍼질 수 있도록 격려했다.
"그래, 만주로 가자! 이 조그마한 조선 팔도는 나를 담기에는 너무 작다. 사람이 크게 되려면 우선 큰물에서 놀아야 하는 법. 만주로 가자. 대륙이라는 큰물에서 노는 거야!"
"상행이라고 해봐야 뭐 별거 있나. 그저 사람 속이지 않고, 정직하고 성실하게만 하면 되는 거지! 그래, 한번 시작해보자. 실패하면 다 훌훌 털고 고향에나 돌아가서 아버지 도와 땅이나 파면되겠지 뭘!"
"우라질, 어떻게 하지? 사관학교로 들어가? 아니면 사범학교? 지금 꼴을 봐서는 일단, 이 조선 팔도에서 사람 구실 하려면 선생이 되건 군바리가 되건 둘 중 하나는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천하에 이름난 대학이 되느냐, 영웅 활극이냐. 아, 어느 쪽도 포기하기 어렵구나!"
"난 장차 커서 조선 제일의 소리꾼이 될 거야! 황상께서 보시는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조선 제일의 명창이 될 거야. 사람들 앞에서 기가 죽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이러한 도전정신은 특허나 발명에만 한정된 현상이 아니었다. 사회 전반에 퍼진 낙천적인 사고방식은 사람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꿈꾸게 했다. 그리고 이러한 장밋빛 미래는 사람들에게 실패를 향한 두려움 대신 성공할 경우의 영광과 명예를 먼저 머릿속으로 떠올리도록 만들었다.
그간 자신의 꿈을 위하여 나아가도 될까, 혹 실패하지는 않을까 망설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선뜻 자신들의 꿈을 위하여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설령 실패하여도 나락까지 치달을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인식에 시시각각 성공을 거두어가는 이들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던 것이 더해져 나도 저렇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기대가 사회 전반에 퍼져갔다.
자연히 이들 대부분은 현실의 벽에 정면으로 맞선 쓰디쓴 대가를 받아야 했지만, 실패하는 이들만큼이나 성공하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이들은 또 새로운 도전자들을 끌어냈고, 그럼 더욱더 많은 실패사례와 더욱더 많은 성공사례가 나타났다. 그들 대부분이 성공사례만을 바라보고서 계속하여 도전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우리 대한은 아주의 맏이요, 곧 아주라고 하는 집의 가장이라 할 수 있다. 가장의 역할이 무엇이던가. 안으로는 가정을 평안케 하고 밖으로는 감히 가정을 위협하는 도적무리들에 맞서 단호히 집안의 평화를 지키는 데에 있다. 장차 우리 대한이 더욱 부강해진다면 그것은 아주를 수호하기 위함이지, 단지 우리가 배를 불리기만을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곧, 대한의 군은 아주를 지키는 방패이다!
이는 황상께서 우리 군부에 교시하신 황명이기도 하니, 제군들이 장차 우리 대한의 장교가 되고자 한다면 결코 가볍게 흘려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대한의 군은 아주의 방패요, 제국의 검이니라! 알겠느냐!"
"""예!"""
"잘 들리지 않는다! 어머니께서 밥을 부족하게 주시던가? 배에 힘이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들어가나? 더욱 크게 외치지 못하겠는가!"
"""아닙니다!"""
곳간에서 정이 난다고 하였던가. 한편으로 이러한 분위기는 사회 전반적인 포용성을 크게 늘리기도 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를 주도한 것은 군부였다. 이형이 제1기 사관학교 졸업식 당시 거듭 강조하였던 역할론이 제국군을 상징하는 표어이자 뿌리로 남아 이 무렵 후진들을 양성할 적에도 거듭 강조되던 덕분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철저히 위에서부터의 시선이라는 한계점이 있었으나, 그렇다고 그 의미가 퇴색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 무렵 한국에는 외국으로부터 다양한 민족이 계속하여 유입되었다. 이웃한 청나라에서 건너오기도 하였고, 바다 건너에 제나라나 초나라, 일본, 드물게는 미국이나 프랑스에서도 끝없이 새로운 피가 계속하여 들어왔다. 이들을 교화시켜 하나 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군부의 역할이었고, 징병제의 몇 안 되는 긍정적인 역할이었다.
더불어 조정에서도 이러한 이민자들에게 지속해서 포용적인 기조를 유지하기도 했다. 가장 큰 이유는 드넓은 강토를 가득 채우자면 사람이 턱없이 부족했던 까닭이다. 이를 위해 조정에서는 매일 같이 한민족의 근본이 핏줄이 아닌 문화에 있음을 거듭 강조했고, 이민자들에게 어떻게든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불어넣고자 최선을 다했다. 역설적이게도, 이 또한 사회 전반적인 포용성이 대폭 개선되었기에 무난히 진행될 수 있었던 주요사업 중 하나였다.
"우리 대한이야말로 아주의 배꼽이다. 천하의 중심인 것이다! 우리야말로 아주의 으뜸 민족이요, 아주의 정당한 지배자일지니, 마땅히 아주는 대한의 깃발 아래 복종하여야 할 것이다!"
"대한국 만세! 해동성국 만세! 오랑캐 놈들을 몰아내자! 양이 들의 천하를 분쇄하고 우리 손으로 아주를 경영하세!"
"천하의 민족에 서열을 나눈다면 한민족은 개 중 으뜸이다! 성실하고, 신의 깊으며, 강인한 우리 민족이 장차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면 세상천지에 있어 그보다 좋은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고 한편으로 낙천적인 사고방식은 다소 지나치게 낙천적인 외교관을 낳기도 하였다.
물론, 이들은 대부분은 무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