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 도둑 >
그리고 이 파나마 운하 착공은 전혀 의외의 인물을 기쁘게 하기도 하였다.
"드디어 이 나라가 다음 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가고 있구나."
홋카이도, 하코다테시. 신정부의 북방정책으로 출신도 신분도 다양한 인간들이 모여드는 그 격동의 땅에서, 허름한 누더기를 걸쳐 입은 채 부두에 걸터앉아 하릴없이 신문을 읽고 있는 수상쩍기 그지없는 어부가 있었다. 어찌하여 수상쩍은가, 하면 말할 것도 없다. 어부 주제에 신문을 읽고 있다는 것이다. 신정부에서 평민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던 만큼 가나 정도야 일상회화 수준이라면 읽을 수 있어도 이상할 것 없겠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
그 이전에 어부가 읽고 있는 신문부터가 일본어로 쓰인 일본의 신문이 아니었다. 어부가 읽고 있는 신문은 한국에서 발행된 한국어 신문이었다. 어부가 그림이나 보려고 일부러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적어 신문을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하코다테에서 더더욱 구하기 어려운 한국어 신문을 일부러 구했다는 가정도 말이 안 되지만, 그 반대로 일개 어부가 국한혼용문으로 되어있는 한국의 신문을 당연하다는 듯이 읽고 있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부는 태연하게 글을 읽고 있었다.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당연히, 그렇다면 이 사내는 평범한 어부 따위가 아니었다.
"멍청한 아리토모 놈 같으니라고. 고작 이 정도 잇키로 막부가 흔들릴 리는 없을 테고 공연히 끼어봐야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노라고 내가 그렇게 말했거늘. 기어이 아까운 무사들이나 낭비하다니."
신문을 잘게 찢어 바다로 흘려보내며, 어부는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이 무렵 일본 내 최악의 반정부 테러리스트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당연하다는 듯이 성씨조차 아닌 이름으로 불러버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꺼리는 기색 하나 없었다. 그렇게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랬다. 이 어부의 이름은 이토 히로부미.
현 일본 내 반정부 세력의 두 거두 중 한 사람이며- 조선에서는 흔히 이등박문(伊藤 博文)이라는 독음으로 알려진 사내였다.
"가오루 녀석도 기어이 신센구미 놈들에게 잡혀가더니 그대로 소식이 끊겨 알 수 없게 되어 버렸고, 이대로 이 몸도 이 벽지에서 늙어 썩어 문드러지는 수밖에 없나 했으나··· 겨우 또 한차례 난세가 돌아오겠군."
신문을 잘게 쪼개고서는, 이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요 며칠 씻지도 못하여 얼굴에는 묵은 때가 그득하고, 바닷바람에 피부는 다 까지고 피부는 검게 변하여 추레한 몰골이 되었어도 그의 입가에는 득의양양한 미소로 가득했다. 겨우 길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이토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사태는 이대로 일본이 이렇다 할 변화 없이 무난하게 아시아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아 버리는 사태였다. 그 경우, 한창 젊은 시절 영국 공사관을 방화한 전적이 있는 그로서는 무슨 수를 써도 정계에 복귀하거나 하다못해 사면을 받을 기회조차 없다. 만일 그의 고향인 조슈가 주도하여 신정부를 세웠다면 일본의 핵심 인물로 떠오르면서 그런 젊은 시절의 화려한 전적도 무마될 수 있겠으나, 지금 그는 패배자다.
승리했다면 그의 과거는 그냥저냥 일본에서 지나친 애국심에 경도되어 사고를 치기도 했다- 정도로 포장되었겠으나, 패배해 버린 이상 그렇게는 처리될 수 없다. 영국 공사관 방화사건의 핵심 인물이자 반막부 존황양이파 세력의 거두. 어딜 봐도 안팎으로 거부당할 결격 사항밖에는 없다. 그것이 이 무렵 이토가 계속하여 반막부 활동을 이어나가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기면 관군, 지면 반군이라고는 했다지만, 지고 난 다음에도 계속 반군으로 남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없었잖은가."
"나으리, 부르셨다고 하여 대령하였나이다."
그날따라 유독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투덜거리던 이토의 등 뒤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거두어 기른 살수의 낭랑한 목소리였다. 이토는 입가에 띤 미소를 지우며 뒤돌아섰다.
"그래, 때마침 잘 와주었다. 짐을 꾸리거라. 슬슬 이 하코다테를 떠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요즈음 수상쩍은 놈들이 부두를 맴도는 것이, 아무래도 냄새를 맡은 모양이야."
"알겠습니다, 나으리. 그렇다면 다음은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동래로 간다. 아니면 그 옆에 부산도 나쁘지 않겠군. 앞으로도 넉넉하게 10년간은 조선에 머물게 될 게야."
"조선, 입니까?"
"그래, 조선으로 간다. 조선이라면 신센구미 놈들이 쫓아올 일도 없고, 동래나 부산은 우리 일본 사람이 많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고 하였듯이, 사람을 숨기려면 도시가 제격인 법. 그리고 경상도는 내 고향 조슈와도 가까우니 일본을 떠나더라도 내 동지들과 계속 연락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니까, 조선이다."
이토는 말을 늘어놓으며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쫓아 살수는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었다. 날씨가 흐린 것을 두고서 조만간 큰 비가 내리리라 여겼는지 부두에는 그날따라 어부들이 분주하게 나룻배들을 부두에 고정해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물론 이토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이었다. 그간은 어부로 위장하느라 애써왔으나, 이제는 하코다테에서의 자산을 모두 처분하고 일본을 뜨려는 시점이다.
이제 와 조잡한 나룻배 하나 떠내려간다고 해봐야 콧방귀도 뀌지 않을 이토였다. 신정부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서 여기저기 그의 뒤를 봐주는 이들이 널린 덕분이다.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가 궁핍하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나리께서 겨우 결단을 내리셨군요."
"그래, 때가 온 것이지···. 미리견과 불란서가 손을 잡으려 하고 있다. 그럼 영길리도 어떤 식으로건 움직일 터. 조선은 이미 편이 정해진 거나 다름없지만, 우리 일본은 어떨까. 영길리는 지키려 할 테고, 미리견은 빼앗으려 하겠지. 그 사이에서 우리는 이익을 취한다."
'그리고 파나마에 놓인 운하는 영길리와 미리견이 우리 일본을 두고 다투는 데에 필요한 길목이 될 거다. 파나마에 놓인 운하를 누가 차지하느냐로 승패가 갈릴 테지. 난 그때보다 열세에 놓이는 쪽의 손을 잡는다.'
이토는 몰래 주먹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우세한 쪽이 아닌 열세에 놓인 쪽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은 영 내키지 않았지만, 그로서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현 일본의 통치자인 요시노부는 간사한 인물이었고, 그는 눈치를 보다가 우세에 놓인 자들과 손을 잡으려 할 게 분명했다. 그럼 이미 막부와 손을 잡은 그들이 군데군데 점조직으로 흩어진 반막부 세력과 손을 잡을 리가 없다.
이토가 선견지명을 발휘하여 우세한 쪽과 미리 손을 잡았더라도 소용없다. 이미 안정적으로 일본을 통치하는 요시노부와 쥐뿔도 없는 이토를 저울에 올린다면 열강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토를 잘라내고 요시노부와 손을 잡을 것이다. 그러니 이토는 먼저 움직일 수 없었다. 무조건 한발 늦게, 그것도 불리한 측과 손을 잡아야만 한다.
어딜 어떻게 봐도 유리한 구석이라고는 어디 하나 없다. 성공할 확률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높고, 그 전에 이토가 사로잡히거나 죽어서 일이 흐지부지될 가능성도 결코 낮지 않다. 그런데도 이토는 한 가지 믿고 있는 것이 있었다.
"사치코, 네가 생각하기에 나라를 빼앗는 데에 가장 중요한 건 뭐라고 생각하느냐?"
"그야 물론··· 힘이 아니겠습니까. 하오나 나리께서 그리 말씀하실 리는 없으니, 아마 민심이 아닐까 합니다."
"절반은 맞았다. 하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건 지금 나라를 차지하고 있는 놈들의 대척점에 서는 것이다. 지금의 나라를 지지하고 있는 놈들을 끌어들이려 해봐야 소용없다. 그보다 중요한 건 지금 이 나라에 불만을 품고 있는 게 누구냐는 점이다. 그들을 끌어안고서야 비로소 나라를 빼앗을 수 있게 되는 게지."
이토는 계속하여 걸으며 키득키득 웃었다. 저 멀리 그의 허름한 오두막집이 보였다. 그가 매일 같이 궁색하다며 불평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집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저런 허름한 오두막과도 안녕이었다. 장차 조선으로 건너간다면 어부나 막일꾼 대신 무역상 내지는 언론인 흉내를 내게 될 테고, 그럼 이제부터는 나름 그럴듯한 저택을 구할 수 있게 될 터였다.
그 생각을 하니 절로 마음이 가뿐해졌다. 이토는 이어서 말했다.
"난 이 나라를 빼앗을 거다. 막부의 노인네들이 차지하게 두기에 이 나라는 너무 아깝지. 그리고 이 빌어먹을 도망자 신세도 나라를 빼앗은 다음에나 끝날 테고. 아마 조만간 너를 중히 쓸 날이 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다오."
"물론입니다, 나으리. 기꺼이 천황 폐하와 황국의 안녕을 위하여 이 한 몸 바치겠나이다."
"그래, 모든 건 황국을 위하여."
'개뿔이'
기쁜 듯 고개를 숙이는 살수를 흘겨보며, 이토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반막부 세력 내에서 천황에 절개를 지키고 있는 충신으로 추앙받는 이토였으나, 이미 그의 마음은 천황을 떠난 지 오래였다. 당연히 황국의 안녕이고 나발이고 관심을 가질 리가 없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미 현 신정부의 대척점은 황국 따위가 아니었다.
'지금 이 나라는 무사의 나라다. 사람 위에 사람이 있는 게 당연하고 전쟁은 무사의 전유물인 귀족들의 나라지. 결국 지난 수백 년간의 일본과 비교하여 무엇 하나 달라진 게 없는 거다. 그걸 뒤엎으려면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대안을 내놓는 수밖에 없어.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황국은 혼란기에 한 차례 제시되었으나 결국 흐지부지된 과거의 낡은 몽상으로 전락할 테고.'
결국 이토가 보기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황국 구상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일단 구심점이 되어야 할 천황부터가 지난 내전에서 막부에 무력하게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무기를 들고서 일선에서 뛰던 반막부 인사들을 배신해 버렸고, 모리고 시마즈고 야마우치고 막부에 맞서던 가문들은 씨가 말랐다.
구심점을 잃었고, 구심점을 뒷받침해 줄 유력 가문들조차 사라졌다. 이토에게 영지가 있어 은밀히 낭인들을 모아 막부를 무너뜨릴 사병을 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장차 상인들과 지식인들을 끌어들여 나라를 뒤엎고자 한다면 황국 구상은 더더욱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지금 신정부에 불만을 품고 있을 지식인들이 바라는 건 더욱 격렬한 변화와 개화이고, 상인들에게 천황 운운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을 끌어들이려면 그들이 기뻐할 이야기를 귓가에 속삭여줘야지, 이미 죽고 없는 자들이 지껄이던 걸 반복해봐야 외면받을 뿐인 것이다.
'지금의 신정부를 뒤엎으려면 그보다 새롭고, 지금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한 대안이 필요해. 무엇보다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상인들은 날로 부강해질 테고, 그러면 단지 다스려지는 것에 만족 못 하고서 직접 나라를 다스려보겠다는 놈들이 나올 터. 그러자면 대안은 공화국, 그중에서도 미리견의 것을 모방한 연방제밖에는 없다.'
이토는 눈을 휘 번득거렸다. 일본 연방 공화국, 혹은 일본 합중국. 그것이 그가 지금 구상하고 있던 새로운 일본이었다. 물론 너무나도 급진적인 주장인 만큼 쉽게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여 그가 정말로 공화국을 세울 수 있을지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는 수밖에 없다. 그가 이 나라 일본의 안녕을 그만큼 생각해서도, 공화주의의 이상에 눈을 떠서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길밖에는 없는 이유는 딱 한 가지.
'어차피 때가 되면 누군가는 정면에 나서서 지껄여댈 이야기고, 그런 놈이 튀어나오면 낡아빠진 황국이나 지껄여대던 내 입지는 한순간에 쪼그라들겠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가 먼저 시작하여 어떻게든 내 이름을 이 나라 일본, 더 나아가 아주 전체에 알리는 편이 후일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정말로 나라를 빼앗을 수 있을 확률이 높다.'
결국, 한마디로 말하여 자신의 권력욕 때문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분명 착안 자체야 제 권력욕에 기반한 것이었으되, 그 안목은 더없이 날카로웠다. 패배자가 되어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고 한들, 난세의 간웅이라 평가받던 그 간사함까지 꺾인 것은 아니었다.
"그럼 서두르자. 미안하구나. 내 탓에 너까지 이런 떠돌이 생활을 전전하게 되다니."
"그런 말씀 마세요, 나으리. 지난 전란에서 부모·형제를 잃은 이래로 제게는 오직 나으리 뿐이십니다."
이토의 말에 살수는 정말로 아니라는 듯 세차게 손을 저었다. 이토에게는 그 몸짓이 어딘가 교태 있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이제 슬슬 여자로서 농익기 시작할 나이였다.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것이, 살수로서 쓰고 버리기 전에 한 번쯤 맛을 봐두지 않으면 그 또한 꽃을 낭비하는 꼴이라는 생각이 문득 이토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토는 그의 눈앞을 어른거리는 여체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서 몰래 입맛을 다셨다.
* * *
한편, 그 무렵 한양.
"이, 이 빌어먹을 노친네가! 제 등만 믿고 따라오라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미리견에 남겠다 고라! 날 버렸겠다! 날 속였겠다!"
한양의 병사 숙소 구석, 길길이 날뛰며 분노를 토하는 청년 위병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말할 것도 없이 원세개였다. 이하응이 미리견에 아주 정착해버렸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이는 원세개에게 있어서는 배신 그 자체였다. 대만에 꼼짝없이 발이 묶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 다음에도 어떻게든 희망을 버리지 않고서 언젠가 풀려날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서 기다리던 그를 버리고서 미리견으로 혼자서만 도망쳐 버린 것이다. 혹 그가 이하응과 내통하고 있는 건 아니냐는 의심만을 남긴 채로 말이다. 원세개로서는 이보다 난처할 수가 없었다.
"고약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어디 두고 보자. 양이놈들이 무슨 의리가 있어서 너 같은 볼품 없는 늙은이를 살갑게 대해주겠냐! 네놈이 가봐야 거리에서 동냥질이나 하다가 석 달도 안 되어 쌀밥 하나 얻어먹지 못하고서 굶어 뒈질 거다!"
원세개는 거리낌 없이 이하응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래도 한때나마 그의 뒤를 봐주겠다며 나선 후원자였을 텐데도 말이다. 그리고 사실 그의 저주는 딱 하나는 들어맞았다. 쌀밥을 얻어먹지 못하던 것만은 말이다. 다만 쌀이 없으면 빵을 먹으면 되었을 뿐.
하지만 그걸 알지 못하는 원세개는 신문에 나온 이하응에 관련된 소식들도 그저 조정의 날조라고 여기며 코웃음을 쳤다. 이하응이 성공을 거두었을 리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이하응의 성공을 믿을 수 없었다기보다는, 그를 버리고 떠난 이하응이 파멸하기를 바라는 못된 마음이 더 컸던 까닭이다.
"젠장, 이제 어쩌지?"
겨우 진정한 원세개는 탄식했다. 이 무렵 그는 사실상 궁을 나가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유야 당연히 이하응이었다. 애초에 화교인 그가 위병으로서 성공하기란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이렇게 출세에 불리한 낙인이 여럿 붙었다면 그냥 군을 때려치우고서 다른 길을 알아보는 것도 방법이겠으나, 원세개는 차마 출세만큼은 포기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야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하는 수 없지. 북방으로 가는 수밖에. 노서아 오랑캐 놈들을 잡아 죽이면서 그 군공으로 출세를 노린다. 그 길밖에는 없어."
그리 결단한 원세개는 그 길로 북방으로 보내 달라는 청원서를 써냈다. 일개 사병이 출세를 위해 제 근무처를 바꿔 달라는 요청 자체가 주제넘은 일이었으나, 청원은 의외로 간단하게 받아들여졌다. 이유는 물론, 장차 러시아와 머지않아 국경에서 크든 작든 군사적 충돌이 이뤄질 것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병사 한 사람이라도 더 북방에 보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시베리아에 새롭게 총독으로 부임한 러시아의 황태자가 한국 측의 상정 이상으로 성실하게 총독 업무에 종사하며 전력을 확충하는 게 감지된 것이다. 이 경우, 이형의 지시로 단지 패하는 체하고서 물러나려 했던 시위군이 정말로 패하여 내쫓기는 일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래, 애초에 그런 영감탱이에 의존하려고 했던 게 물렀다. 으흐흐! 그래,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이 몸의 출세가도가 북방에서 시작되는 거야!"
그러나 원세개는 그런 줄도 모르고서 웃었다.
어쩌면 모르는 게 약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