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의 부재 >
그리고 러시아와의 재전이 다가왔다는 소식은 이형의 귀에도 자연히 들어갔다.
"황태자, 분명 알렉산드르 대공이라고 하였던가."
작은 도자기 잔에 담긴 청주를 단번에 들이켜며 이형은 말했다. 기억에 있는 인물이었다. 없을 수가 없다. 알렉산드르 대공, 후일 알렉산드르 3세.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가 벌여놓은 갖은 개혁들을 농노 해방을 제외하고서 모두 철회해버린 수구적 인물이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 태어났던 그대로 수구적이고 진취적이고 하는 성향이 정해지게 되던가. 그가 수구적 인물로 돌아선 것은 그의 아버지가 극단주의자들의 손에 살해당하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아버지로서 훌륭한 인물은 되지 못했으나, 알렉산드르 대공은 가족을 아끼는 정이 많은 인물이었다. 알렉산드르 대공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큰 상처로 남았고, 그것이 그의 운명과 러시아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비열하게 놀 줄 아는 애새끼로군."
이형은 그리 말하며 툭 그날 조간신문을 탁자 위에 던졌다. 최익현이 지난달 정식으로 국장으로 취임한 대한일보였다. 지난 수년간 언론 일에 종사하면서 이제는 그럭저럭 사람의 이목을 끌어 여론을 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된 덕분에, 헤드라인은 짧고 인상적이었다.
"『노국의 침략 야욕을 규탄하다. 어찌하여 노국은 승패에 승복하지 못하는가? 노국에서 시비련의 유목민들에게 병장기를 유통해온 정황이 밝혀지다.』"
"아마 이놈은 이번 기회에 영토를 회복할 작정이었던 모양인데, 이게 저놈 아비의 귀에 들어가면 궁둥짝이라도 한대 세게 얻어 터지겠구만."
이형은 히죽 웃으며 황태자의 폭주임을 단언했다. 단지 직감은 아니었다. 오스만과의 전쟁을 마무리 짓고 난 다음, 러시아는 지금 어느 때보다 몸을 사리고 있다. 만에 하나 천에 하나라도 지금 공격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당장에 독일과의 동맹조차 위험한 까닭이다. 아닌 말로, 지난 전쟁에서 러시아는 너무 많은 것을 취했다. 지중해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오스만 튀르크의 허락이 전제조건으로 붙겠지만, 지금의 허약한 오스만 튀르크가 러시아에게 무턱대고 뻐길 수도 없다.
일이 이렇게 되면 당연히 영국이 나서서 러시아를 막는 게 수순이지만, 영국의 혼란스러운 내정이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연이은 조기총선 요구에 다시 치러진 총선에서 대공황과 패전의 책임을 독박 쓰게 된 디즈레일리의 보수당이 완패하였고, 압도적인 지지 아래 자유당이 승리했다. 그것만이라면 대단할 것 없겠으나, 내각에 노동당이 끼어 들어갔다. 자유당과의 연대라는 형태라고 하나, 본래 역사보다 30년은 일찍 노동자들이 노동당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평민원에 입성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노동당은 현재 평민원에서 왕정의 폐지를 부르짖고 있다. 평소라면 반역이라며 당연히 잘라 내져야 할 목소리가, 미약하게나마 평민원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지난 대공황의 여파가 심상치 않았다는 증거다. 겨우 이 정도로 대영제국이 무너지지는 않겠으나,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일어서려면 상당한 노력과 기적이 필요하리라.
"···황상께서 말씀하신 대로라고 생각합니다."
마주 앉은 김홍집은 바짝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대답했다.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한 김홍집으로서도 향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대강 감이 잡힌 것이다. 다시금 주도권을 차지한 자유당 내각은 우선 경제회복과 노동권 개선에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선언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영국은 당분간 국제외교무대에서 침묵을 지킬 것이며, 아래로부터 터져 나오는 불만의 목소리를 마냥 찍어누르는 것조차 힘에 벅찬 지경이라는 소리다.
왕좌에 걸터앉은 왕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 이미 세상은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침묵을 지키는 부류. 유럽에서는 러시아와 독일이 이에 해당한다. 영국의 부재는 그들에게 있어서 마냥 기쁜 소식은 아니다. 프랑스라는 전통적인 유럽의 폭군이 다시금 야욕을 드러내고 있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영국의 부재는 지금까지의 유럽 질서를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지난 연이은 전쟁에서 이미 제법 많은 것을 취한 그들은 여차하면 끼어들어서 최악의 상황을 막아줄 영국의 부재가 마냥 기쁠 수는 없다. 물론 그들 국내의 모든 세력이 그리 생각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일이 꼬였어."
이형은 재차 도자기 잔에 청주를 담으며 이죽거렸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마냥 기분 나쁘지만은 않은 기색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그의 대한제국은, 그 정반대 위치. 영국의 부재를 틈타 조금이라도 더 많은 걸 취하려는 부류에 끼어있었으니까.
유럽의 폭군, 프랑스는 영국의 부재를 크게 반기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서 프랑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로마에서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3개 나라의 대사들을 모아 멋대로 아프리카를 삼분해버린 것이다. 스페인은 서경 4도선 기준 서쪽 전부를, 이탈리아는 동경 35도선 기준 동쪽 전부를 가지고 프랑스는 그 외 아프리카 전토와 마다가스카르를 가져가기로 했다.
영국이 일단 식민지 블록을 최대한 돌리면서 경제회복을 꾀한다면, 프랑스는 영국이 휘청이는 틈에 정복 전쟁으로 경제를 회복하려고 작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여차하면 나머지 유럽 전부와 적대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폭정이다. 나폴레옹 4세는 놀라울 정도로 고제와 똑같은 길을 걷고 있다. 아니,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루이 14세 이후로 프랑스가 언제나 걸어온 길이다. 유럽의 폭군은 해적이 부재한 틈에 취할 수 있는 모든 걸 취하고자 하고 있다.
"불란서가 강성해지는 거야 뭐 상관없는 일이지. 불란서가 비주에서 저리 막 나가면 막 나갈수록 아주에 손을 댈 위험도 사라지니까. 장차 미리견이 무난히 아주와 맺어지겠어. 거기까지는 좋네. 그런데."
이형은 도자기 잔에 담긴 청주를 들이켜지 않고, 가만히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렇다고 깁홍집에게 마시라고 권하지도 않은 채 말이다. 김홍집이 그에 어리둥절하고 있자니, 이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엇이 문제인 줄 알겠나."
"그, 소신의 미천한 식견으로는 도저히···."
"불란서 놈들을 보고서 슬슬 괜한 흑심을 품은 놈들이 뛰쳐나오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저 황태자인 것이고."
이형은 덧붙였다. 진저리가 난다는 듯이 말이다. 그제야 김홍집의 눈이 번뜩 뜨였다. 한마디로, 영국이 휘청이는 걸 보고서도 우물쭈물하고 있던 각국에게 프랑스의 폭주로 가슴 속에 불길이 댕겨졌다는 이야기였다. 프랑스가 폭주하는 거야 언제나 대로지만, 그간은 영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렇기에 유럽의 균형이 유지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프랑스는 폭주하는데, 영국은 입으로만 프랑스를 비난하고 있을 뿐 정면에서 맞서지는 못하고 있다.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질서가 무너졌다고 해도 좋았다. 그렇다고 지난 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독일과 러시아가 그 질서를 대신하기에는 당장 서로를 믿지조차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강한 해군이 없는 그 두 나라가 프랑스를 견제하기에는 한 발짝 부족하다.
난세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그 선두를 내달리고 있는 건 그간 그래왔듯이 폭주하고 있는 프랑스다. 그러나 그 선두도 조만간 독일에게 발목이 잡힐 것이고, 러시아는 주판을 굴리기 시작할 것이다. 이 틈을 타 새롭게 확장을 할지, 아니면 이 기회에 어느 한쪽과 제휴를 하고서 지중해로 나갈 길을 안전하게 확보할지 말이다.
"이거 한 번쯤 져주려 했더니 여기서 체면이 깎이면 곤란하겠어."
이형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소리에 김홍집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듯했다. 맹호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틀릴 것도 없었다. 눈앞의 황제는 전쟁이 없었던 치세보다 전쟁이 있었던 치세가 더 긴 황제였다. 위압감이 쌓이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영국의 방침은 정해졌다. 프랑스의 방침도 정해졌다. 미국의 방침은 이형이 개입함으로써 확정지었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네덜란드, 포르투칼 등의 나라들은 아프리카에서 어떻게든 제 몫을 취하거나 지키고자 안달이다. 독일은 여기서 프랑스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지 못하면 기껏 독일을 통일하고서도 앞으로도 유럽의 폭군에게 눌러살지도 모르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러시아.
러시아는 이들과 달리 선택의 여지가 있다. 타고난 덩치가 이 선택권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지중해를 안정적으로 취하는 것도 먹음직스럽고, 아니면 이 틈을 타 페르시아를 취하고서 인도양으로 뻗어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문제는 그들의 선택지에 이 기회에 한국에게 그들이 빼앗긴 영토를 되찾아오는 것도 당연히 끼어있다는 점이다.
"이래서야 얕보이면 큰 전쟁이 되겠지. 동시베리아만 빼앗기고서 물러난다면 싼 편이지만, 양면 전쟁으로 싸우면 버거워도 1:1로 붙으면 별 것 아니라는 인상이 붙어버린다면 앞으로도 구주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느냐에 따라 시시때때로 아주를 침범하려 들 거다. 여기서는 이기거나, 지더라도 만만치 않다는 인상을 심어 줘야 해."
"그, 조금 외람되옵니다만. 그와 같은 중한 일을 어찌 저 같은 비루한 서생에게···."
"보면 모르겠나. 김홍집, 그 녀석 다음은 너다. 짐이 그리 정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라의 중대사에 귀를 열어두도록. 짐이 네 녀석을 태자의 스승으로 들인 건 널 후일 재상으로 쓰기 위함이라는 걸 똑똑히 기억해두거라."
이형은 그리 말하며 단숨에 청주를 들이켰다. 한눈에 봐도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아 보였다. 실제로도 그랬다. 가볍게 보고 있던 국경충돌이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따라 제법 큰 전쟁이 될 가능성이 생겼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피차 거리가 있으니 군단 단위 전쟁이 되기는 어렵겠으나, 여차하면 사단 단위 충돌은 가뿐하다.
김홍집으로서는 더욱 안색이 푸르죽죽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직 마흔도 안된 젊은 나이에 황제와 독대하고서 이런 나라의 중대사를 다루고 있다는 것 자체가 도저히 기쁘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제아무리 야심만만한 청년이라도 황제가 눈앞에서 널 재상으로 중히 쓸 테니 이번 전쟁에 대해서도 깊이 알아두라고 말하고 있으면 성취감 이전에 부담감과 책임감에 눌려 죽는다.
하지만 이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장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마음이 급해져 말투부터가 험해졌다. 그런 와중에 김홍집이 동요하는 데에 마음 써줄 적도로 이형은 상냥한 인물은 못 되었다.
"우선 국경선을 따라서 넉넉하게 10만 명 정도는 더 추가로 상주시킬 작정이다."
품 안에서 지도를 꺼내어 탁자 위에 펼치며 이형은 말했다. 프랑스어로 된 지도 위로 메르카토르 도법에 따라 과장된 기나긴 국경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중 대부분은 신장 위구르와 몽골 방면에 배치될 걸 고려하면 북쪽 바이칼 호 쪽은 늘어봐야 수백, 천여 명이 넘기는 어려우리라.
이에 놀란 김홍집이 되물었다.
"혹, 선제 침공을 계획하고 계십니까?"
"쯧, 먼저 생각하고서 말하는 법을 익히거라. 여기서 더 서진하려면 일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은 지금 당장 때려치워야 할 게다. 예산이 그리 넉넉한 형편이 못 되는데 철도도 없는 위구르 쪽에 주력군을 배치하고 침공을 준비하면 당장 산업현장에 돌릴 예산이 부족해. 이건 그냥 허세다. 우리가 이렇게 준비해두고 있으니 함부로 치고 돌아오기 전에 두 번은 더 생각하라는 거지.
뭐, 네 말대로 저놈들이 겁을 집어먹고서 침공당하기 전에 선공을 취한다고 나서면 골치 아프겠다만."
이형은 집게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지도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리 말하면서도 이형은 내심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러시아가 선공을 걸어오기 전에 이 10만 명을 배치할 수 있겠느냐는 것도 문제지만, 한성근이 이형의 뜻을 잘못 알아듣고서 이 10만 명으로 러시아를 아주 땅에서 몰아내라는 줄 알고서 과하게 들뜬다면 그 또한 문제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이 10만이 사실상 현 대한제국의 군사력 중 못해도 2할 가까이라는 점. 아직 불안한 중원이나 만주의 통제를 포기하고서 10만이라는 대군을 끌어오는 건 상당한 도박이다. 결국 이형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우선, 이 10만은 제후들에게 채우라고 해야겠군. 대강이라고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조약기구에서 합동훈련도 몇 번 해봤으니 대략적으로는 합이 맞겠지. 그보다 문제는 시간에 맞을 것인가, 이다만."
"그 부분을 걱정 없을 것 같습니다. 시비련의 추위는 혹독하고, 제아무리 노국의 병사들이 추위에 강하다지만 저들 또한 우발적 충돌이 아니라 우리 대한을 시험해볼 목적으로 군사를 일으킨다면 우선 날씨가 따뜻해진 다음에야 가능하겠지요. 그럼 침공은 빨라도 초여름, 늦으면 가을까지도 밀릴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야 더 바랄 것도 없다만···."
이형은 잠시 말을 끊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김홍집의 예측이 맞겠으나, 애초에 인간이란 그리 합리적으로 생각하여 움직이는 동물이 아니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낙천적이고 무책임한 미래예측에 자신의 전 재산을 탕진하는 이들이야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그렇다고 이제 와 이형이 직접 나서기도 곤란하다. 거하게 싸울 일이 있을 때마다 황제가 수도를 비운다는 인식이 남으면 역으로 이용당할지도 모른다. 이번 전투에서는 우선 이형이 한양에서 중심을 지켜줄 필요가 있다. 시위군이 이형이 없다고 하여 싸울 수 없는 건 아니라는 걸 세상에 보이는 것이다. 지는지 이기는지 하는 문제는 그다음이다.
'가능성은 크게 두 가지군.'
이형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하나는 러시아가 한국에 들킨 다음에도 계속하여 시베리아 원주민들과 이주민들에게 무기를 풀면서 치안악화 내지는 반란을 유도한 다음 들이치는 것이고, 하나는 그간 풀어왔던 무기들을 회수하여 병사들을 무장시킨 다음 들이치는 것. 전자는 진지하게 영토를 빼앗을 작정으로 침공하는 것이고, 후자는 시위군의 진짜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가 시험하는 게 목적이다.
아마 전자가 될 확률은 거의 없다. 이번에 무기를 풀던 것도 황태자의 폭주도 있지만 우선 한국의 첩보력이 어느 정도인가 시험해볼 목적이었을 터이다. 즉, 러시아는 지금 탐색전을 시도하고 있다. 그간의 오만함에서 벗어나 우선 신중하게 그간 업신여겨온 한국이 어느 정도까지 따라왔는가를 시험하는 셈이다. 그럼 후자라는 것인데, 단순한 힘의 크기로는 이쪽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이형은 미하일을 떠올렸다. 이는 아마 미하일이 시베리아의 군권을 거머쥐게 되면서 변화한 양상일 거라 짐작한 것이다. 차라리 그때 쏴 죽이는 게 나았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러시아가 향후 자만심을 버리고서 진지하게 한국과 맞서려 한다면, 열세에 몰리는 건 당연히 한국이었다.
'저 기다란 국경선에 일일이 개틀링건을 배치할 수도 없고, 대포도 그리 넉넉하지 못하니 우선 말과 사람으로 메꾸는 수밖에 없는데···.'
그 말도 사람도 질적으로는 러시아가 우위다. 애초에 병사도 말도 체격에서 밀린다. 보병 화력의 한계상 백병전은 필연적이라 가정한다면, 제아무리 프랑스군에게 총검 중시의 보병 전술을 배운 한국군이라도 같은 황인을 상대로라면 모를까 러시아인을 상대로는 체격에서 밀려 필패다.
그렇다고 이번에는 참호도 그리 기회가 없다. 전장은 동토다. 꽁꽁 얼어붙은 땅을 삽으로 파라는 것 자체가 가혹행위에 가깝다.
한참을 고민하던 이형의 결론은 하나였다.
"칼 잘 쓰는 쪽바리 놈들을 불러와야겠구만."
별 쓸모가 없더라도, 최소한 시위군의 피해를 줄여주는 정도의 효과는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