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맹상군 >
"그, 그렇지만 전하···."
이하응의 지시에 민머리 청년이 말을 더듬었다. 본래는 구룡반도에서 탁발승 행세를 하면서 살았다고 하더니, 불경 한 번 읽어본 적 없으면서 꼴에 승려라고 이하응이 살수를 쓸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혹은, 이하응이 자신들 때문에 함부로 나서다 잡혀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누구에게 의지해서 살아가야 하나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참으로 어리숙하다며 이하응은 쓴웃음을 지었다. 미주 생활도 이제 고작 3년이 넘어가고 있는 이하응보다 배는 오래 살았다면서, 아직도 이 험난한 미주에서 살아가기에는 모진 구석이 너무나 부족한 청년이었다.
어느 날 늘 신세를 지던 집에서 밥을 빌어먹다 갑자기 눈앞이 컴컴해지더니 다시 눈을 떠보니 미주로 향하는 배였다-라며, 제가 무슨 꼴을 당한 지도 모르고서 헤벌쭉 웃던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일 없다. 내 이 미리견에서는 백성이 스스로 군을 이루어 제 목숨과 제가 사는 마을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되어있다고 알고 있느니라. 하여 우리 백성을 우리가 지키겠다는데 무엇이 문제란 말이더냐."
이하응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이 터벅터벅 그의 교회 창고를 향해 걸었다. 이하응이 언급한 것은 민병대였다. 그가 미국에 정착한 이래로 가장 경악을 금치 못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사병과 역모를 무엇보다 죄악시하던 조선의 왕족에게, 정부에 신고만 한다면 누구나 사병을 꾸릴 수 있다는 이야기는 정말 이래도 나라가 유지될 수 있는가-하는 의문을 품게 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미국에서 산지 2, 3년이 넘어가기 시작하니 이해가 갔다. 미국은 너무나 넓었고, 그에 비하여 사람은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공권력의 힘도 미약했고, 무언가 분쟁 거리가 생기면 으레 조선에서 그랬듯이 당연히 관아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개인이 사사로이 무력을 갖추고서 보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새크라멘토처럼 제법 규모가 있는 도시도 이 부분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더하다면 더했다. 공권력은 허울뿐, 대부분은 도시의 재력가들과 공장주들은 반쯤 사병이나 다를 바 없는 주먹패들을 부리는 경우가 흔했다. 공권력은 도시의 실력가들이 일을 벌이면 그 뒤를 봐주는 역할이지,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이 아니었다.
'천주당 땡중 놀음을 한 뒤에야 양이들에게 이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이제 양이들 틈바구니에서 우뚝 서려면-.'
세력을 모으면 된다. 참으로 알기 쉬운 이야기가 아닌가. 이하응은 웃었다.
만일 이 땅이 조선과 같이 관아가 휘어잡고 있는 형국이라면, 그는 어떻게든 현지의 공권력을 구워삶을 궁리를 해야 했다. 당연히 신입인 이하응과 그 일파들에게는 버거운 일이다. 이미 관아와 연줄이 닿아있는 토착 호족들에 끝없이 견제당할 테니까.
하지만 공권력이 덤이고 도시의 세력가들이 멋대로 쥐락펴락하고 있는 형국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복잡하게 인맥을 만들고, 뇌물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 사병이 당연하다는 듯이 존재하고, 폭력이 권세를 누리는 정당한 방법이 되는 시대라면.
"그럼 맹상군이 되면 그만이 아니던가."
벌컥, 하고 이하응은 창고를 열어젖혔다. 뒤편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하응의 뒤를 쫓아온 두 사람이 내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들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벽장 유리 너머로 어렴풋이 눈에 보이는 것만 스무 자루.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건 사냥에 쓰이는 엽총은 물론이오, 군대에서나 사용하는 기병총이나 소총, 장식용 권총까지 두루 준비된 무기 창고이던 것이다.
"나, 나라를 만드실 작정입니까···?"
침을 꿀꺽 삼키면서 질문을 던져온 것은 역관이었다. 이하응은 힐끗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고서는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아마 이름이 동원이라고 하였던 것 같은데, 차라리 동태라고 이름을 바꾸는 게 나을 듯싶었다.
하지만 굳이 그런 말은 하지 않은 채 이하응은 말했다.
"오늘까지 모아둔 화기가 종류를 가리지 않고서 고작해야 서른둘이니라. 고작 서른여 명의 포수로 무슨 나라를 만들겠느냐?"
"하, 하오면···."
"그야 물론 세력을 이루고자 위함이니라. 예로부터 노인에게 재화가 없으면 초라해지고, 권세가 없으면 비겁해진다 했다. 내 비록 노쇠하였으나 초라해질 생각도, 비겁해질 생각도 없으니, 마땅히 재화도 권세도 양껏 취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하응은 입꼬리를 뒤틀었다. 그건 그의 심지였다. 상갓집 개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어떻게든 기회를 엿보아야 했던 지난날의 보상심리인지도 모른다. 좌우지간, 그는 누군가가 제 머리 위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물론 믿는 구석도 없이 이럴 수 있는가-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는 카네기와 거래했다. 그리고 그 덕에 카네기는 이하응을 통하여 미 서부의 아시아인 시장과 태평양 무역을 사실상 독점하게 되었다. 즉, 이하응이 미국에 남으려 할 때야 카네기가 갑이고 이하응이 을이었으나, 이제는 그 반대. 다시 말해, 카네기 휘하의 변호인단을 이하응이 빌려 쓸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여 이하응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마."
히죽 웃으며, 선전포고하듯이.
"호걸들을 모아오너라. 과인이 그들을 이끌겠다."
자신이 이 캘리포니아의 뒷세계를 수중에 넣겠노라고.
* * *
한편, 그 무렵.
"크으, 술맛 좋다!"
새크라멘토의 짐꾼, 로버트는 사과주를 마시며 즐거운 뒤풀이를 보내고 있었다. 아니, 엄밀히는 전직 짐꾼이었다. 그와 같은 백인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값싼 임금으로 일감을 독차지하는 아시아인들 탓에 불과 일주일 전 실직하였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로버트의 하루는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아내는 이제 어떻게 하면 좋냐고 온종일 달달 볶지, 이제 갓 다섯 된 아들은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서 그저 아버지가 종일 집에 있으니 좋다고 웃지.
딱히 일자리가 있는 것도, 부르는 곳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집에 가만히 틀어박혀 있기가 싫어서 텅 빈 배를 움켜쥐고서 거리를 맴도는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오늘따라 너무 달리는데. 돈은 있는 거겠지, 밥? 외상술에 눈감아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로버트의 단골 술집의 주인인 제임스는 벌써 사과주를 넉 잔째 비우고 있는 로버트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실직한 지 어언 일주일째. 이미 그가 어떤 사정에 처했는가에 대해서는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음알음 전해 들은 다음이었다. 벌이가 없을 게 분명한데, 사과주만 벌써 넉 잔째 비우고 있으니 그야 의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제임스에게 너스레를 떨며 로버트는 답했다.
"오, 지미. 우리 사이에 자꾸 그럴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오늘은 운수가 좋았거든!"
짤랑.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던 로버트의 오른손에서 꼬깃꼬깃 접힌 1달러 지폐 넉 장과 동전들이 나왔다. 놀란 제임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있을 수 없는 걸 본 것이다.
"이건 놀라운데. 외상술이 아니었다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 뜨겠어.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밥?"
"별거 아니야. 그저···. 오늘따라 운수가 좋았지."
제임스의 추궁에 로버트는 에둘러 답했다. 그야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밀린 일당을 마침내 받게 되었다며 방방 뛰던 어리숙한 아시아인 청년을 발견하고서 비슷한 처지의 일당 셋과 작당하고 뒤를 쫓아 총으로 위협하여 돈을 빼앗고, 혹여나 이 일이 새어나갈까 두려워 다리를 잘라놓은 건 자랑할만한 무훈담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 건 아니었다. 날로 늘어가는 아시아인들에게 위협을 느끼던 건 그 혼자만이 아니었으니까. 요즈음 아시아인들은 너무 주제도 모르고서 날뛰었다.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여 원숭이들이 사람이 된 것도 아니잖은가. 원숭이 나부랭이가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은 것에 대한 정당한 보복이라고, 로버트는 믿었다.
그때였다.
"저, 저놈입니다요! 저, 저놈이 제 다리를···!"
"엉?"
갑자기, 주변이 웅성거렸다. 잔뜩 취기가 돌아 어질어질한 머리로 입구를 바라보니, 그가 오늘 낮에 손을 봐주었던 아시아인이 목발에 의지하여 다리를 절룩거리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을 거슴츠레 뜨고서 유심히 살피니, 한 손은 목발을 지고서 다른 한 손으로는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그제야 로버트는 상황파악이 되었다. 낮에 당했던 일에 보복하려고 제 패거리를 끌고 온 것이다. 절로 머리에 열이 올랐다. 다리를 날릴 총탄이 있었으면 차라리 그걸로 머리를 날렸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로버트는 의자에 손을 뻗었다. 그의 엽총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사실에 안도하며, 로버트는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거 내가 앞으로 내 눈에 띄지 말라고-."
타앙-.
그때였다. 그가 엽총을 꺼내 들기보다 한발 빠르게,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그의 오른손이 튕겨 나갔다. 무엇이 일어났는가, 를 눈치챈 것은 뒤늦게 들려온 총성 덕분이었다. 그는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멍하니 그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오른손에 난 커다란 구멍 너머로,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총구가 눈에 들어왔다.
"끄, 끄아악-!"
상황판단은 그걸로 끝이었다. 격통에 사고가 날아갔다.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은 의식을 붙잡고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의식을 혼미하게 만드는 격통이었다. 저 총은 무엇이고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인가. 미처 그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로버트는 나무 의자에서 미끄러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가 마시고 있던 사과주가 바닥을 나뒹구는 로버트의 안면 위로 흩뿌려졌다.
"이 원숭이 새끼가!"
욕지거리가 들렸다. 여러 명이 달음박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혼미한 의식 속에서, 로버트는 그것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려는 이들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제야 조금이나마 정신이 들었다. 이유는 아무래도 좋다. 그와의 친분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인종적 증오인지, 어느 쪽이건 간에 상관없다.
지금은 그저 저들이 누구건 그를 대신해 복수를 해주면 그걸로 좋다. 격통에 혼미해져 가는 의식을 간신히 부여잡고서, 로버트는 증오를 담아 외쳤다.
"저 원숭이 새끼 죽여! 당장 죽―."
"시끄럽구나."
그런데 어쩐 일일까. 응당 들렸어야 할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되려, 터벅거리는 발소리만 점점 그를 향해 다가올 뿐이다. 그의 머리맡에서 들려온 어눌하지만 무거운 육성에, 로버트는 입술을 깨물며 증오를 담아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숨을 삼켰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노인은 그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로버트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외쳤다.
"와, 왕···!"
"거 혓바닥 굴리는 솜씨 하나만은 쓸만한 놈이로구나."
아시아인 노인은 로버트의 말에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아무래도, 로버트는 뜻하지 않게 눈앞의 노인을 기분 좋게 해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로버트는 노인의 다리 사이로 펼쳐진 광경에 전율했다.
당장 술집 안으로 들어와 노인의 등 뒤에서 진을 치고 있는 것만 열, 입구 너머에서 진을 치고 있을 인원까지 고려하면 스물에서 서른 이상. 모두 하나 같이 적어도 권총, 때에 따라서는 엽총이나 소총까지 완비한 무장집단이었다.
그리고 그 아시아인들을 보고 난 다음에야 로버트는 노인의 다리 사이로 그를 대신하여 복수하고자 총을 들고서 달려나간 그의 동료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숫자에 질려, 하나 같이 총을 바닥에 내려다 놓고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있었다. 비겁한 놈들이라고 내심 욕하면서도, 머리 한쪽으로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야 수적으로 이렇게 밀리면, 어찌 손쓸 도리가 없다.
"자아, 어찌한다."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로버트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입으로는 난처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으나, 표정은 전혀 난처한 기색이 아니다. 되려 즐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로버트는 한눈에 노인이 자신의 처분을 두고서 즐거운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로버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오갔다. 도망칠까, 누군가가 도와주기를 기다릴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총을 쥐고서 반격해볼까. 하지만 어느 쪽도 그리 가망은 없어 보였다.
결국 로버트는 최후의 발악으로 소리쳤다.
"폭동이다! 원숭이 놈들이 폭동을 일으켜-."
탕!
또 한 번 격통이 흘렀다. 이번에는 오른쪽 발목이었다. 뼈가 부서지는 듯한 끔찍한 감각에, 로버트는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서 제 발목을 왼손으로 감싸 쥐고서 소리 없는 괴성을 질러댔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난처하다는 듯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좀 있어 보게. 그렇게 움직이면 내 실수로 다리가 아니라 머리를 쏴 맞혀 버릴지도 모르잖는가?"
"이런 개···!"
로버트는 욕지거리하려고 했다. 저 뒤에 총을 든 놈들은 몰라도, 제가 비록 상황은 이래도 이까짓 노인 하나 상대하지 못하겠느냐는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도중에 멈추었다.
노인도 총을 들고 있었다.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6연발 콜트권총이었다. 그리고 그 총구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건 이번에 총을 쏜 것은 다름 아닌 이 노인네라는 이야기였다.
로버트는 망연자실해 중얼거렸다.
"미, 미친 새끼···."
"상놈이 못하는 말이 없구나."
타타타탕!
그것이 신호였다. 눈을 찌푸린 노인은 발끝으로 로버트의 손을 걷어차 걸리적거리는 걸 치우고서 남은 다섯 발 전부를 로버트의 오른 다리에 박아넣었다. 개중 두 발은 첫발과 마찬가지로 발목에 꽂혔으나, 나머지는 허벅지나 장딴지 같은 전혀 엉뚱한 부위들을 꿰뚫었다.
로버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비명을 지르려 입을 벌려도, 꺼어억하고 바람이 빠져나오는 소리만 흘러나왔을 뿐이다. 이제 분노도 들지 않았다. 그저 공포만이 그를 사로잡았다.
로버트는 덜덜 떨며 목숨을 구걸하려 했다.
"사, 살려―."
우지끈!
하지만 노인은 그의 비참한 몰골에도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노인은 마지막으로 그의 오른발을 천천히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내리찍어 쇳덩이로 된 구두 굽으로 로버트의 발목을 짓밟았다.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피가 튀겼다. 이미 첫 번째로 발을 구르던 순간, 로버트는 의식을 잃었다.
그러건 말건 노인-이하응은 그 뒤로도 몇 차례고 발을 굴렀다. 노리는 건 양놈의 오른 다리, 더욱 정확히는 발목이었다. 이하응은 의식을 잃은 로버트의 발목을 몇 번이고 발로 짓밟아 짓이겼다.
한 번, 두 번, 세 번···구두 굽으로 발목을 짓이기기를 모두 합하여 스무 번.
퍼억!
마침내, 로버트의 오른발이 힘없이 제 몸에서 튕겨 나왔다. 잔뜩 짓이겨져, 본래 어떻게 몸뚱어리와 이어져 있었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 모양새로.
"이 다리는 가져가마."
이하응은 그리 말하며 바닥을 나뒹구는 로버트의 오른발을 주워들었다.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로버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지 오래였으니까. 그제야 이하응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나 같이 얼어붙어 있었다. 영락없이 겁에 질린 모양새였다. 비단 색목인들뿐 아니라, 그를 따라온 장정들까지 덩달아 겁에 질려 있었다. 이하응은 흡족해했다. 그가 바랬던 대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데에 성공했다.
"이 청년은 아직 숨이 붙어있으니 시기적절하게 의원의 조처를 받는다면 살 수 있을 거요. 그리고 이건 그리 많은 돈은 아니지만, 사죄의 의미라 생각하시고 받아주시오. 참으로 수고가 많소. 앞으로도 번창하기를 빌겠소."
"예, 옛!"
이하응은 술집 주인에게 다가가 품에서 봉투를 꺼내어 건넸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봉투를 받아든 술집 주인은 이내 실망하여 울상을 지었다. 봉투가 그의 기대보다 훨씬 얇았다.
이하응은 그런 술집 주인에게 빙긋이 웃어 보였다. 걱정은 없었다. 저 안에는 빳빳한 녹색 100달러 지폐가 들어있었으니까. 돈이 귀한 줄 알고 제 목숨이 귀한 줄 안다면, 알아서 입단속을 시켜줄 터였다.
하여, 이하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자신만만한 걸음으로 술집을 나섰다. 그리고 말했다.
"가자."
긴말은 필요 없었다.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장정들은 일제히 허리를 굽혀 이하응에게 예를 표했다.
"""옛!"""
그에, 이하응은 빙긋 웃었다.
후일 미 서부 전역을 공포에 떨게 한, 검계(劍契)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