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311화 (311/530)

< 코펜하겐 회담 >

그리고 한국에서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을 무렵.

"그러니까 귀국에는 더 이상 교섭의 의사는 없다. ···그리 생각해도 좋겠습니까?"

코펜하겐에서는 다음 세기의 행방을 좌우할 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다. 소집된 나라만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 당대의 열강이라고 불리던 강국들이었고, 각국에서 파견한 사절단 또한 최저가 후작급에 영국의 경우에는 웨일스 대공 에드워드 왕세자가 직접 참여할 지경이었다.

물론 이는 이 무렵 영국 내에서 위험수위에 도달한 공화파의 세력을 꺾어두기 위하여 왕실의 존재감을 과시할 목적으로 이루어진 극히 예외에 가까운 일이었으나, 또 동시에 그만큼 영국에서 이번 사안을 심각하게 여긴다는 증명 또한 되었다.

이 코펜하겐 회담에서 각국이 논의하는 건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페르시아의 자주권 문제.

하나는, 발칸 반도에 새로이 독립한 신생국들의 정확한 국경 확립과 종교적, 민족적 대립 문제.

하나는, 아직도 상당한 영토가 미개척지로 남아있는 아프리카 미개척지들의 분할 문제.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러시아는 유럽 대륙의 평화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제 와 또 한차례 귀국 영국과 국지적 무력분쟁을 각오하여 또다시 이 유럽 대륙을 불바다로 만드는 것은, 주께 맹세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만일 정말로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대영제국과 귀국 러시아 양국 모두에게 있어서 둘도 없이 기쁜 소식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렇다면 어째서 귀국 러시아는 아직도 우리 영국과 진지하게 교섭하지 않는 건지 의문스럽군요."

"그 또한 오해입니다. 우리 러시아는 귀국 영국과 진지한 마음으로 교섭에 임하고 있습니다. 단지, 아직 양국 모두가 만족할만한 적절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판단하였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귀국에서 유럽 대륙의 평화를 바라고 있다는 말씀은 새빨간 거짓말이로군요. 어찌하여 귀국은 먼저 만족스러운 합의를 끌어내고자 노력하는 대신 단지 우리 영국에게 끝없는 양보만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거야말로 섭섭한 말씀을. 우리 러시아는 인도양으로 남하하여 귀국과 일전을 벌일 수 있었으나, 그것을 포기하고서 군사를 뒤로 물리고 페르시아의 자주권을 존중하기로 하였습니다. 우리 러시아가 이만한 양보를 하였다면, 귀국 영국 또한 그에 걸맞은 양보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 양보라. 농담이 조금 지나치시군요. 진흙투성이의 구두를 신고서 멋대로 우리 대영제국의 정원에 침범해온 불청객에게 이만 퇴거하여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그토록 이치에 맞지 않는, 잘못된 일입니까?"

이 코펜하겐 회담이 진행되는 내내, 러시아-영국 양국의 외교관들은 충돌에 충돌을 거듭했다. 영국은 러시아에 당장 페르시아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고, 러시아는 자신들이 이미 군사를 물리면서 양보하였으니 이제는 영국이 양보할 차례라며 버텼다.

당연히 양측이 만족스러운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영국은 러시아가 페르시아에서 완전히 물러나기를 기대했고, 러시아는 영국이 자국의 페르시아 점유를 암묵적으로 인정해줄 것을 기대했다. 이토록 서로 바라는 것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으니, 양국의 협상은 난항에 난항을 거듭할 따름이었다.

애초에 만일 이곳에서 영국이 밀려난다면 그레이트 게임은 영국의 패배로 끝나는 것이었고, 반대로 러시아가 밀려난다면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을 둘도 없을-어쩌면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기회를 놓치는 격이었다. 영국이 궁하였던 때라면 모를까, 아프가니스탄을 보호국으로 삼으면서 자신감을 회복한 지금 양국의 정면충돌은 피할 수 없는 수순으로 보였다.

"정말이지 귀국은 무례하군요. 어찌 그런 후안무치한 발언을. 페르시아는 자주독립국이며, 우리 러시아 제국의 새로운 친구입니다. 언제부터 페르시아가 귀국 영국의 정원이었단 말입니까? 페르시아가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는 공문서는 접한 기억이 없습니다만."

"무례하다니, 그건 또 끔찍한 오명이구려. 귀국은 진정으로 그러한 인신공격이 지금 이와 같은 석상에서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요? 내 러시아인들은 곰처럼 우둔하며 본능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고 들었으나, 설마하니 그것이 진실이었을 줄은 미처 몰랐구려."

"···과연, 설마하니 그토록 천박하게 역정을 부리실 줄이야. 이 얼마나 후세에 낯부끄러운 일입니까. 좋습니다. 아무래도 귀국과는 더 이상의 의미 있는 교섭은 불가능할 듯하군요. 이다음은, 전장에서 결판을 짓도록 합시다."

"그거야말로 바라던 바요. 내 분명히 말씀드리리다. 우리 대영제국은 더는 한 걸음도 뒤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고, 기꺼이 그대들의 야욕에 맞서 싸울 것이오. 길고 지루하던 교섭이 마침내 귀국의 오만으로 헛된 수고가 되어 버렸으니, 장차 수만의 영령이 오늘 귀국이 보여준 어리석은 행태를 원망하게 될 것이외다."

"뻔뻔스럽기도 하셔라. 이토록 오만하고 후안무치한 선전포고라니. 오늘 귀국이 보여준 행태는 차마 우리와 같은 기독교 문명국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군요. 좋습니다. 그 말씀 그대로 돌려드리지요. 그러나 장차 수만의 영령이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게 된다고 한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페르시아에서 펄럭일 것은 우리 러시아의 깃발이 될 것입니다."

결국 양국의 마지막 교섭 시도는 허무하게 끝이 났다. 영국은 러시아의 야심이 양국을 또 한 번의 전쟁으로 내몰았다며 비판했고, 러시아는 영국의 오만함이 대화로서 평화로이 해결하고자 한 자국의 모든 시도를 헛되이 만들었다며 비판했다.

이미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양국의 입장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양국이 마지막 교섭에 실패했으며, 남은 건 전쟁의 승패로 가려질 것이라는 점뿐이었다.

그리고 뒤이어질 전쟁에서, 아무래도 유리한 고점을 쥔 것은 영국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페르시아의 운명에 대하여 논하던 협상장의 한쪽에서는, 위에서 설명하였다시피 발칸의 운명에 대하여서도 논의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디 이 발칸 땅은 저 극악무도한 튀르크인들이 침략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신실한 기독교 신앙이 우뚝 서 있던 신성한 땅이었소. 그러나 옛 로마의 신성한 도시가 마침내 튀르크인들의 손아귀에 떨어진 이래, 이교도 무슬림 인들이 우리의 신성한 땅을 더럽히고 있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노릇이오? 우리는 반드시 이 땅에 새롭고 정의로운 신앙의 기치를 바로 세워야 하오."

여기까지는 이 회담에 참여한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바였다. 오스만 튀르크는 이미 지난 전쟁에서 이빨 빠진 호랑이임을 또 한 번 증명한 다음이었고, 사실상 이스탄불을 위시한 수도권 일대를 제외한 모든 유럽 영토에서 내쫓기며 사실상 각국의 관심 바깥으로 벗어났다.

하여 최소한 열강들은 신앙적인 명분, 그리고 실리적인 문제에 따라 우선이 발칸 반도를 온전하게 기독교 세계에 다시금 합류할 수 있도록 만들 필요가 있음에는 기꺼이 합의하였다.

문제는 이다음. 기독교 세계에 합류시키는 것은 좋으나, 어떻게 합류시키는가-에 관한 문제.

"그에 깊이 공감하는 바요. 예로부터, 오늘날 영락하였으나, 옛 발칸은 우리 기독교 문명의 시작점이었으며, 심장이기도 하였소. 오늘날 이리도 영락한 발칸의 실정에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소? 장차 우리는 이 신성한 땅 위에 옛 로마 제국의 이상을 재현하여야만 하오."

이탈리아는 기꺼이 로마 제국을 재건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당연히 그들이 아닌, 뒤에서 등을 떠밀어주던 프랑스가 있었기에 가능한 야심만만한 발언이었다. 이 무렵 이탈리아 왕국은 일차적으로 이탈리아반도와 발칸 반도 사이에 위치한 광활한 아드리아해를 자국의 내해로 삼고, 거기에서 더 일이 풀리면 더 나아가 그리스 왕국을 합병하거나 보호국으로 삼고서 동지중해의 해상패권을 주창한다는 몽상에 빠져있었다.

물론 그건 필요에 의한 과대망상이었다. 소득은 없이 많은 피만 보고서 끝난 전쟁과 경제적 실패로 당장 시선을 돌릴 구석이 필요하던 이탈리아의 정치인들에게, 로마 제국의 부활이란 이상은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에 넘치도록 충분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이탈리아의 정치인들은 더욱 애국주의를 고취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애국주의야말로, 불만에 찬 시민들의 눈을 멀게 하기에는 가장 좋은 해법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 수면 아래에서 점차 이에 반응한 민중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음을, 그들은 아직 알지 못했다.

"유감스럽지만, 그와 같은 모험주의적 발상에는 동감할 수 없겠구려. 발칸 인들은 엄연한 자유인이요.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야만인들이 아니라, 어엿한 우리 유럽의 일원이며 신실 깊은 기독교인들이란 말이오. 우리는 발칸 인들의 자유와 성서에서 보장한 신성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오."

한편 이탈리아가 확장 주의에 목을 매달았다면, 독일- 정확히는 오스트리아는 사뭇 신중하게 발칸의 문제에 접근했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러시아가 페르시아에 정신이 팔린 사이 이 무렵 발칸 반도는 빠르게 오스트리아의 영향권 아래로 떨어져 가고 있던 까닭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영토확장에 목을 매기보다는 가톨릭 신앙의 수호자이자, 로마 제국의 적법한 후계자로서 움직였다. 오스트리아인들은 발칸의 신생국들에 보호와 자치를 약속하였고, 그 대가로서 가톨릭 신앙과 카이저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처음부터, 오스트리아인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절실한 건 영토가 불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국을 따르는 제후국이 더욱 불어나며 자국의 위신이 한층 더 높아지는 데에 있던 것이다. 이는 근대적 민족국가와는 거리가 먼, 전통적인 전근대적 제국에 가까운 행동방침이었다.

그렇기에 오스트리아는 환영을 받았으나, 또 한편으로는 거부당하기도 했다. 보호와 자치에 맞바꾸기에는, 종교야말로 그들의 민족 정체성인 나라들도 수두룩했던 것이다.

"그 뜻은 분명 숭고하오. 하지만 다소 지나치구려. 혹, 독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이미 발칸의 자유인들은 올바른 기독교 신앙을 지니고 있소. 한데, 일부러 그들에게 재차 신앙을 강요하는 것은 어째서요? 로마의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인이 아니기라도 하는 것이오?"

그리고 여기에 끼어든 것은 러시아였다. 동방정교 신앙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러시아는, 카톨릭 신앙을 발칸 반도에 강요하고자 하는 오스트리아의 움직임이 꺼림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이의제기는 직접적인 충돌이나 갈등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불평 수준에 그쳤다.

당장에 페르시아에서 갈등을 빚고 있던 러시아로서는, 아무래도 오스트리아마저도 그들을 적대하게 될 경우 최소 양면전선, 최악의 경우 삼면전선 이상의 궁지에 몰리게 될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여 러시아는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 슬라브 계열 신생 독립국들을 대신하여 오스트리아에 끝없이 경고를 넣으면서도, 직접적인 대응은 차마 하지 못하고서 피했다.

실로, 이 무렵의 발칸 반도란 러시아에 있어서 계륵이었다. 이미 페르시아라는 창구를 얻은 이상 당장 독일을 적대해서라도 손에 넣어야 할 땅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없는 셈 치고서 물러나자니 당장 지중해로 뻗어 나갈 창구가 아쉬웠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는 페르시아도 발칸도 포기하지 못하고서 갈팡질팡했다.

"귀국의 협력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대영제국은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절실하던 순간, 가장 절실한 도움을 약속해준 귀국 프랑스의 도움을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과분하신 말씀입니다. 만일 오늘 우리가 약속한 이 작은 약조가 진정 양국의 화합을 위한 의미 있는 계기가 되어준다면, 그보다 기쁜 이야기는 또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 프랑스야말로 귀국의 호의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후세는 오늘 귀국이 보여준 용기 있는 양보에 찬사를 아끼지 않겠지요."

"용기 있는 양보라. 하하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이거야 원 겸연쩍군요. 그간 오랜 앙숙이었던 양국이, 이번 합의를 계기로 장차 둘도 없는 친구로서 바뀌기를 기대합니다."

이러한 러시아의 모호한 태도는 외교적 고립을 초래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페르시아에 붙잡혀 있는 동안 발칸에서 러시아를 밀어내고자 했고, 프랑스는 프랑스대로 독일과 러시아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 오스만 튀르크와 이탈리아의 등을 떠밀어주며 어떻게든 발칸을 화약고로 탈바꿈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영국은, 페르시아에서 이뤄질 전쟁에서 프랑스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하여 발칸전략에서는 프랑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사실 영국에게 있어서는 독일이나 러시아, 어느 한 나라가 확실하게 발칸 반도를 통제하는 상황보다는 여러 나라의 이권과 명분이 맞부딪히며 분쟁이 끊이지를 않는 발칸 반도 쪽이 바람직했으니 이는 필연적인 일이기도 했다.

프랑스에도 이러한 상황은 실로 반가운 것이었다. 안 그래도 안정적으로 아프리카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중해가 안전해야 하던 상황에서, 우연하게도 발칸 반도를 엉망으로 만들어 독일과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을 견제한다는 결론에서 영국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 때문에 두 나라는 곧장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바로 아프리카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하는 문제였다.

"우리 대영제국은 귀국 프랑스가 오늘 이 순간까지 정복한 모든 식민 영토를 인정하겠습니다."

영국의 사절단은 먼저 크게 양보하였다. 당장 코앞까지 다가온 페르시아에서의 전쟁에 프랑스를 어떻게든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우선 그만한 대가를 약속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

물론, 아프리카 전역의 영유권을 인정한 건 아니었다. 그 증거로서, 영국은 분명하게 '오늘 이 순간까지 정복한'이라는 조건을 걸었다. 이미 아프리카의 반절 가까이가 프랑스의 수중에 떨어졌어도, 여전히 개척해야 할 땅은 넓고도 넓었다. 그만큼, 아프리카는 광활하던 것이다.

"아직 온전하게 우리 프랑스의 영토는 아니지요. 우리 프랑스는 어디까지나 실효 지배하고 있는 것뿐, 아직 아프리카는 분쟁지역 상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평소라면 희희낙락하며 영국 측의 제안을 받아들일 프랑스 사절단은 되려 아직 아프리카가 자국의 것이 된 것은 아니라며 겸양을 떨었다. 이는 영국을 포함한 다른 모든 유럽 열강들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슬슬 쾌속 진군을 멈추고서 통치기반을 닦아야 할 때, 공연히 너무나도 거대한 식민 영토를 근거로 주변 열강들의 견제를 받게 된다면 지금까지 이룩한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갈 수밖에 없던 까닭이다.

"분명 그 말씀대로입니다. 이거 착각했군요. 아프리카는 마땅히 아프리카인들의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우리 유럽은 어디까지나 아프리카인들에게 주님의 가르침과 우리 기독교 문명을 전파하고자 스스로 국가를 건국할 능력조차 부재한 가엾은 아프리카인들을 대신 통치하는 것뿐, 저들을 정복하거나 침략하려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여기까지 양국의 뜻이 잘 맞아떨어짐을 알게 되었으니, 오늘의 이 만남이 더없이 값지게 느껴지는군요."

그다음부터는 순탄대로였다. 서로 한 걸음씩 양보한 두 식민제국은, 그 자리에서 그들의 아프리카 침략이 정당한 이유에 대하여 합의하는 데 성공했다. 두 나라는 영국에게 남위 5도를 기준으로 북쪽은 프랑스가, 남쪽은 영국이 가져간다는 내용의 밀약에 합의한 다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회담장으로 돌아왔다.

결국 아프리카 분할은 사실상 이들 두 나라가 합의한 그대로 진행되었다. 그나마 독일 정도가 사이에 끼어 카메룬 일대를 가져간 것이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그리고 1881년 6월 초순.

『크림전쟁의 재현인가? 마침내 손을 잡은 영불 연합군! 군대여, 목표는 테헤란이다! 전진 앞으로!』

코펜하겐 회담의 폐막을 알리는 신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영국, 프랑스 양국은 페르시아인들의 자유를 위하여 러시아에 공식적인 선전포고문을 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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