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사단의 후예 >
건축감독관 쾨넨에게서 한국인들이 프로이센의 문물에 관하여 깊이 알고자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프리드리히 3세는, 그 즉시 의회를 소집하여 국사를 논하였다.
"개회사는 생략하리다."
프리드리히 3세는 상석에 앉음과 동시에 단언했다. 의원들을 둘러보는 그의 시선은 마치 불덩어리가 나올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사자가 포효하는 듯한 그 뜨거운 시선에 의원들은 일제히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패전의 책임을 지고서 물러난 늙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왕위를 물려받은 이래 오로지 조국의 부국강병을 위하여 달려온 젊고 정력 넘치는 왕이었다. 그 타고난 자유로운 성향 탓에 많은 것을 의회에 양보하고 가능한 한 의회를 존중하며 프로이센을 자유화로 이끌고 있으나,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왕이었으며 군대가 곧 나라인 프로이센의 최고사령관이었다.
때문에, 프로이센의 전통적인 지배계층이던 융커 출신의 의원들은 사뭇 패기 넘치는 젊은 왕의 모습에 크게 흡족해했다. 번거로운 겉치레보다는 실리와 패기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원하던 왕의 모습이었으니까.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리고 젊은 왕은 말했다. 짧은 말이었으나, 더없이 무거운 말이었다. 평소라면 그렇게도 입방아를 찧으며 프로이센의 무관들에게 '쓸모라고는 없이 투덜대기만 할 줄 아는 작자들'이라는 비꼼을 듣고는 하던 프로이센의 의원들도, 이날만큼은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마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가 작당하고서 멋대로 선을 그어 잘라 먹어버린 이상 정말로 이제 이 세상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남지를 않았다. 그나마 프랑스에서 신성로마제국 내의 갈등을 일으킬 작정으로 프로이센과 점차 가까워지려 하면서 숨통은 트였으나, 이대로 가면 꼼짝없이 유럽의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될 판이다.
작금의 시대에 그들 나라 안에서 필요한 모든 걸 구할 수 있는 나라는 극히 드물다. 원자재까지는 어떻게 자국 내에서 모두 취할 수 있는 러시아나 미국 등의 광활한 영토를 지닌 나라들도 한쪽은 사람이 부족하고 다른 한쪽은 재화가 부족하여 시장만큼은 어떻게든 해외에서 구하고자 안달을 내고 있다.
그러니까, 프로이센에 있어서 아시아 시장 진출은 그야말로 앞으로 백 년간을 좌지우지할 중요한 국가사업이었다. 이 이상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등에 완전히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구태여 식민지가 아니더라도, 프로이센은 어떻게 해서든 아시아의 광활한 시장과 풍족한 원자재를 얻어야만 했다.
"합스부르크에서는 이번 일에 대하여 어떻게 평할는지요···?"
조심스럽게 입을 연 사내는 살이 뒤룩뒤룩한 부르주아계 의원이었다. 그는 지금 이 자리에서 모두가 피하고자 했으며, 또 모두가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자들의 이름을 말했다.
그들의 영원한 숙적이자, 한때 압도하고 있었으나 뜻하지 않게 독일 통일이라고 하는 위업을 양보하게 되어버린 숙명의 적. 합스부르크의 이름이 나온 것이 젊은 왕은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을 가늘게 치켜뜨고서 미간을 꿈틀거렸다.
젊은 왕은, 일부러 엄포를 놓듯이 차갑게 말했다.
"내 묻겠소. 우리 프로이센 왕국이 합스부르크의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 처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딱딱한 대답이었다. 왕의 엄포를 듣게 된 순간 하지 말았어야 할 걸 깨달은 의원은 그대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왕은 매서운 눈으로 의원을 똑바로 노려 다 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그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어째서요? 우리 프로이센 왕국은 엄연한 자주독립국이요. 그걸 잊지 않기를 바라오."
"물론입니다, 폐하. 소신이 괜한 이야기를 꺼내어 폐하의 심기를 해친듯하여 면목이 없나이다."
"그만, 되었소. 착석하도록 하시오. 이번 일은 못들은 걸로 해두리다."
사나운 문답이었다. 왕의 교시가 끝남과 동시에, 의원은 풀이 죽어 제자리에 앉았다. 사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크게 질책을 받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이 붕괴하였을 무렵이면 모를까 제국이 재건된 이상 프로이센 왕국은 엄연히 제국을 이루는 제후국 중 하나였고, 이에 따라 외교권이나 군권에 분명히 제한되는 부분이 있었다.
가령 카이저의 허락 없이 동맹을 바꾸거나 새로이 동맹을 체결할 수는 없었고, 같은 독일계 제후국끼리는 전쟁할 수도 없었다. 같은 이유로, 독자적으로 화폐를 제조하여 유통하거나 제국의 허락 없이 전쟁을 선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여러모로, 제국이 부활하여 그에 귀속된 부작용을 온몸으로 받고 있던 셈이다. 제국이 망한 이래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독일계 백국이나 공국들에게는 독일의 통일이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던 프로이센에 있어서 제국의 부활이란 언젠가 힘을 회복하는 대로 뒤집어엎어 자국이 주도권을 다시 차지하거나 아예 탈퇴해야 할 불공정조약으로 간주할 따름이었다.
"···미안하게 되었소."
그러니 결국 왕이 말하였던 프로이센은 자주독립국이라는 엄포는,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프리드리히 3세의 소망이자 앞으로의 목표였던 셈이다. 그걸 자신도 알았기에, 프리드리히 3세는 쓸쓸한 얼굴을 하고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시선의 끝에는 조금 전 그를 위하여 일부러 합스부르크의 이야기를 꺼내주었던 퉁퉁한 의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국사를 논하는 중요한 자리에서 감히 합스부르크의 이름을 꺼내어 왕의 진노를 샀다는 이유로, 의원은 주변의 융커 의원들에게 경멸과 비웃음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감히 상놈 주제에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함부로 입을 놀려 왕을 진노케 했다는 게 그 이유였지만, 막상 이건 자유주의자이자 의회주의자인 왕이 괜히 사나운 군사 귀족들을 멀리하고 나약한 상인들을 가까이 둔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하여 짜고 치는 연극이었다는 걸 알면 저 귀족들은 과연 어떤 얼굴을 할까.
그리 기쁜 얼굴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왕은 잠시 귀족들의 멸시를 한몸에 받고 있는 그의 충신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가- 이내 낯빛을 바꾸며, 사뭇 비장한 어조로 말하였다.
"우선 이것만큼은 분명히 말해두리다. 우리는 분명히 일류 국가로 나아가는 열차를 한 번 놓쳤을지도 모르오. 그러나 그것이 우리 프로이센이 두 번 다시 일류 열강으로 우뚝 서지 못 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오. 그렇지 않소?"
"""그러하옵니다, 폐하!"""
돌아오는 대답은 우렁차다. 당연한 일이다. 프로이센은 무를 숭상하는 군사 귀족들의 나라이고, 이에 따라 정계에 진출하여 중임을 맡고자 한다면 길건 짧건 군인으로서 복무를 끝마칠 필요가 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의회에도 이런 숭무적이고 남성적이며 위엄을 앞세우는 풍조가 몸에 밸 수밖에 없었다. 국가 전체적으로 상명하복의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있던 것이다.
그 상명하복의 전통 탓에 막상 지금 프리드리히 3세가 의회 전통을 도입하는 데에 크나큰 방해가 되고 있지만 말이다. 프리드리히 3세는 잠시 그 아이러니함에 쓴웃음을 지었다가, 이내 표정을 다시 지우며 소리쳤다.
"신께서는 아직 우리 프로이센을 버리지 않으셨소. 한데 우리가 먼저 포기할 수는 없는 법이오, 그렇지 않소? 우리는 지금 또 한 번 우리가 위대해지기 위한 기회를 눈앞에 두고 있으며, 우리에게는 단지 손을 뻗어 기회를 움켜쥘 용기와 기회를 활용할 지혜만이 필요할 따름이오. 하여 묻건대, 기사단의 용맹한 후예들이여. 그대들은 지혜와 용기를 쥐어짜 낼 준비가 되었는가?"
"""바로 그렇사옵니다, 폐하!"""
씩씩한 대답이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그제야 마음이 조금 풀려 옅은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 경들을 믿으리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음 약한 의원들이 함부로 합스부르크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마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제국의 충신이 되어버린 양 행동하자 그에 노하여 엄포를 놓으며 신하들에게 재차 다짐을 받아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의 충신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부탁하여 거짓된 분노로 의원들을 동요시킨 다음 기강이 해이해졌음을 지적하여 국왕으로서 단호하게 엄포를 놓으며 재차 충성을 맹세 받는 연극이다.
처음부터 프리드리히 3세는, 이번 사안을 자기 뜻대로 끌어가기 위하여 자리에 모인 의원들을 가지고 논 것이다. 특히, 때마침 이런 국왕으로서의 단호함과 군대식의 퍼포먼스에 굶주려 있던 군사 귀족들을 만족하게 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개회식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였으나, 이게 개회식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일까.
젊은 왕은 잠시 만족스럽게 그의 턱을 쓰다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날 짐이 보건데, 작금의 시대에서 뭇 유럽의 제후들이 으뜸으로 여기는 것은 식민지라 보았소."
여기에 반발하는 의원은 없었다.
"탁월하신 혜안이옵니다, 폐하."
의원들은 잠자코 고개를 숙여 왕에게 아첨하였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다. 오늘날 식민지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가 곧 국력의 척도라는 것쯤은, 삼척동자라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가장 넓은 식민영토와 식민지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영국이 세계 제1위의 열강이며, 그다음으로 넓은 영토와 식민지인들을 부리는 프랑스가 세계 제2위의 열강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들에게는 단 한 뼘의 식민지도 없지만 말이다.
비록 이번 아프리카 분할에서 독일이 카메룬 일대를 받아냈다고 하지만, 그건 프로이센의 몫이 아니다. 신성로마제국을 다스리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몫이다. 비록 발칸에 관심을 기울이느라 그 국력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자그마한 영토 밖에는 취하지 못했으나, 이걸로 제국은 식민열강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과연 오스트리아가 식민열강으로서 얻는 혜택은 프로이센과 공유하고자 할까. 그럴 턱이 없다. 당장 오스트리아의 부르주아들에게 나눠주기도 부족할 저 자그마한 식민영토를, 무엇 하려 언제건 제위를 노리고 있는 프로이센에까지 나눠주겠는가.
그렇기에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자신의 힘으로 식민지를 가지지 못한 프로이센은, 결국 어떻게 해도 저 식민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그러나, 애초에 식민지란 무엇이오? 결국은 돈벌이를 위하여 정복한 땅이 아니겠소. 자재를 구하고, 우리의 물건을 내다 팔며, 이익을 취하기 위한 국가사업인 것이오. 한데, 그것을 반드시 타국을 침략하고, 정복하여 구할 필요가 있겠소? 펜으로서 취할 수 있는 것이라면, 칼로서 취할 것까지는 없는 법이 아니겠소."
하지만 프리드리히 3세는 상석에 앉아 그것을 부정하였다. 식민열강이 되지 않더라도, 분명히 길은 있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한, 언제나 길은 열리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한때는 폴란드의 지배에 치이고 제국의 지배에 치이던 프로이센이라고 하는 작은 나라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바로 밑까지 우뚝 선 것이 아니겠는가.
"하오나···."
그리고 왕의 낙관론을 들은 의원들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그들로서는 왕의 낙관론이 과연 실제로 그러할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식민지가 그렇게 필요 없는 것이라면, 왜 작금의 열강들이 그토록 식민지배에 목숨을 걸고 있겠는가. 하다못해 인도를 비롯하여 기름지고 부유한 지역들도 아니고, 아프리카 사막 한구석처럼 지배해봐야 어떤 이익이 있는 것일까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땅들까지 남김없이 수집해가고 있는 판국인데 말이다.
"딱 잘라 말하여 국력의 낭비가 아니겠소. 오늘날 유럽의 지성들은 우리 백인들이 저 이교도들에게 문명을 전파하기 위한 운명을 받았다고 하나, 그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진정으로 주의 뜻을 받들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우선 먼저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이교도 무슬림과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기독교 신앙을 숭상하는 정의로운 기독교인들만의 하느님의 나라부터 재건하는 것이 옳잖소.
아직도 성지 예루살렘 하나 오롯이 수복하지 못했으면서, 무슨 주의 뜻을 받든단 말이오. 결국, 저들 모두가 주의 신성을 빌어 제 탐욕을 채우고자 하는 속된 자들일 뿐이니, 우리 평화를 사랑하며 신실 깊은 프로이센인들까지 저 나약하고 무지몽매한 이교도들을 괴롭힐 필요는 없지 않겠소."
프리드리히 3세는 그런 의원들을 향하여 어깨를 으쓱거리며 능청을 떨었다. 오롯이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대답은 아니었다. 전면에서는 은퇴하였으되 아직 그림자 뒤에서 젊은 왕의 고문역을 맡아주고 있는, 철혈의 총리 비스마르크에게서 전해 들은 지혜였다.
비스마르크는 프리드리히 3세에게 식민지는 딱 잘라 말해서 지금의 프로이센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프리드리히 3세 또한 거기에 공감하였다. 애초에, 이제 와 식민지를 개척하려고 해도 깃발 하나 꽂을 빈 땅도 없었을뿐더러-. 이를 유지하고자 해군을 육성하는 것도 지금의 프로이센에는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이어 비스마르크는 아시아와 더욱 깊은 관계를 맺으라 조언하였다. 장차 미국과 아시아가 눈부시게 성장할 것이며, 미국은 공화주의 역도들의 소굴이라 장차 성장하고 나면 언제건 유럽의 왕국들을 전복시키려 할 것이나 아시아는 이교도라도 전제군주제를 신봉하는 왕정주의자들이니 상대적으로 위협이 덜하다는 논지였다.
프리드리히 3세는 공화주의와 왕정주의라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 설명에는 공감할 수 없었으나, 적어도 아시아와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는 비스마르크의 식견에는 공감하였다.
"온 유럽이 재화에 눈이 멀어 신앙을 팔아치운 위선자 투성이오. 한데, 우리 프로이센마저 재화에 눈이 팔려 신앙의 이름을 더럽힌다면 죽어서 무슨 낯으로 신앙의 이름 아래 우리 왕국을 지켜오신 대왕들을 뵙겠소? 짐은 장차 아시아와의 평화로운 상행을 통하여 우리 프로이센이 지켜왔던 숭고한 정의와 다시 일어서는 데 필요할 소소한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오."
그렇기에 프리드리히 3세는 한국과의 관계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와중 이번에 쾨넨을 통하여 한국에서 먼저 프로이센에 관심을 보여주었다는 소식은 둘도 없는 호재였다.
비록 아프리카를 비롯한 크고 작은 식민지들을 취할 기회는 놓치고 말았으나, 이를 기회로 장차 아시아와 자유로이 교역할 수 있게 되는 걸 넘어 약간의 편애를 받을 수 있다면 그 손실을 너끈히 메울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물론, 그 편애를 받고자 하는데 맨입으로 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하여, 프리드리히 3세는 확신에 차 말했다.
"내 듣자 하니 한국의 황제는 곰팡이를 배양하여 이를 연구하는 걸 삶의 낙으로 여긴다고 들었소. 하여, 이번 기회에 양국의 우호 관계를 위하여 우리 베를린 국립 위생원의 로베르트 코흐 박사를 파견하고자 하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오해로 가득한 정보였으나, 그 잘못된 정보를 토대로 내린 그의 판단만큼은 더없이 정확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