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국 >
분리주의와 공화주의.
이 범 아주 조약기구와 대한제국의 역린과도 같은 두 사상이 나온 김에, 그렇다면 대한제국은 이 근본적인 문제 두 가지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고 있었는지를 이야기하도록 하자.
하지만 그에 앞서, 분명하게 지적해 둬야 할 사항도 있다. 이 분리주의와 공화주의란, 적어도 이 무렵 물 위로 공공연히 거론되며 탄압될 정도로 힘을 얻고 있는 사상 또한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올해로 황상께서 마흔이 되셨던가, 아니던가? 참으로 시간도 빠르지그려. 막 보위에 오르실 때만 해도 이팔청춘조차 멀고 멀어 보였는데, 어느새 스무 해가 가까워져 가니···."
"이 사람아. 아직도 4년하고도 조금 더 남았네. 뭘 그리 관심이 많은가. 황상께서 어디 가시기라도 하실 것 같나?"
"아니, 내가 언제 뭐라고 했나. 그냥 시간 참 빠르구나, 하는 거지. 참 황상께서 아직도 창창하시니. 적어도 내 증손주 놈까지는 황상께서 지켜봐 주시겠구나, 허허허!"
가장 큰 이유는, 적어도 이 시기는 겉으로만 보기에는 둘도 없는 안정기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안정기를 가능하게 한 건 아직도 창창한 황제였고 말이다.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올라 정권을 쥐었다. 보니, 보통이라면 세자에게 수렴청정을 맡기느니 마느니 후사는 누구로 정하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올 시기에도 여전히 황권이 흔들릴 일이 없던 것이다.
안 그래도 몸소 전장에 나서 병사들을 이끄는 등 정력적인 모습을 보이던 황제였다. 여색을 탐하지도 않고, 즐기던 술도 식사나 정무 중에 흥을 돋우는 정도로 줄이며, 기마처럼 위험한 운동을 자제했다. 대신에 국민체조의 보급을 앞당기는 것을 겸하여 시간이 나는 틈틈이 체조하며 체력을 단련하니, 백성이나 유림은 물론이고 국외의 공사들까지 으레 황제는 장수할 것이다-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이형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개화기 인물로서 장장 만 나이 66세라는 기나긴 인생을 살아갈 예정이었던 몸뚱어리였다. 운동에 취미를 들이고 건강에 해로울 만한 취미들을 멀리하고서 틈틈이 단련한다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는 추측의 영역이었다. 다만 이형이 추측하기를, 못해도 일흔은 넘길 수 있으리라는 것 정도였다.
하물며 이제는 항생제마저 개발되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제에게는 가장 먼저 그 혜택을 줄 걸 고려하면, 추정수명은 더욱 늘어난다. 그런데도 이형은 여전히 만족하고 있지를 못했다. 이유야 간단했다.
"내가 오래 살아야 내 이전 시대는 어땠는가를 기억하는 이들이 나보다 먼저 늙어 죽을 거 아닌가. 또 내가 오래 살아야 태자도 내가 죽기 전에 공무 경험을 열심히 쌓고서 즉위할 수 있을 테고. 내가 단명해버리면 지금껏 내가 이룩해온 일들이 공고히 자리 잡기도 전에 송두리째 무너져 버릴 테니, 내가 못해도 일흔에서 여든까지는 살아줘야지."
요컨대 이형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진시황제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젊은 시절의 왕성한 정복 활동으로 국토를 크게 넓혔으며, 그들이 인식하는 세상이라고 불리던 범주 안에 모든 나라를 정복하여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어 냈으나 막상 통일 이후 오래 살지 못하고 단명하여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형은 때에 따라서 대한제국 또한 이 전철을 고스란히 밟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장에 그가 요절하고, 이제 고작 10대 청소년이 된 황태자가 제위를 물려받게 된다면 그 끝에 기다리는 건 제국의 분열뿐이었다. 최악은, 제정이 붕괴하여 그의 후손들이 살해당하거나 국외로 내쫓길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자식들이 태어나고, 자라나는 걸 지켜보면서 이형이 가장 먼저 생각한 일이 우선 자신이 장수해야 한다는 위기감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이전과는 달리, 점차 대한제국이 제대로 된 열강으로서 성장해가면서 조정에서 어떻게 노력하는가에 따라서 현 세력권의 절반 정도는 무난하게 챙길 수 있게 된 것이 이 무렵 이형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러나 이형은 여전히 이와 같은 위기감을 떨쳐내지 못했고, 그래서 건강관리에 힘쓰면서도 황가를 공고히 만들기 위하여 그가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보게 그거 들었나? 이번에는 공주 전하시라더구먼. 그것도 쌍둥이라고 하시지 뭔가! 이걸로 겨우 이 나라에 공주님이 생겼네 그려, 허허허!"
"아이고, 금실도 좋으시지. 어쩜 후실 한 분 들이지 않고서도 저렇게···."
당연하게도, 그것은 자식을 얻는 일이었다. 이미 장남 이원철이 정식으로 황태자로서 책봉을 받으며 황제가 세상을 떠난 다음 누가 보위를 잇게 되는가? 에 대한 논의는 끝났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만에 하나의 사태에 제국을 지킬 친족들을 얻기 위함이었다.
또 제국 내 만주족들의 불만을 줄이는 효과도 있었다. 점점 조선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제국에 불만을 품다가도, 황제 부부가 또 새로이 자식을 얻었다는 소리가 들리면 으레 진정되곤 하던 것이 이 무렵의 만주였다. 좌우지간, 황후가 건재한 이상 그들이 아주 노예민족으로 전락할 일은 없다고 위안을 받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번에 황태자 전하께서 미리견에 가신다고 하던데, 그거 사실인가?"
"글쎄, 아직 관보에서 확정된 것은 아니라고 보았던 것 같은데. 참으로 다행이지 뭔가. 일전에 폐하께서 몸소 미리견에 가시겠다고 하셨을 때는 정말이지··· 어휴···."
"허허허. 나도 그때는 정말이지 심장이 철렁하는 듯했네. 그 미리견의 태상황과 약조하셨다며 으름장을 놓으실 때는 정말로 꼼짝없이 반년간은 옥좌가 비겠구나, 싶었어."
"내 말이 그 말일세. 그래도 어떻게든 흥선왕 전하께서 마중 나가지 않으실 거라고 으름장을 놓아주셨으니 망정이지, 그도 아니었으면···."
한편, 태자가 나이를 먹으면서 이형이 할 예정이었거나 할 생각이던 일들을 태자가 대신하게 된 것도 이 무렵 대한제국이 안정되어가는 원인 중 하나였다. 학업에서의 성취는 딱 잘라 말하여 둔재와 범재의 경계라는 것이 공공연한 평가였으나, 태자는 활달한 천성과 황제의 정력적인 면모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천성은 자연스럽게 활달한 대외활동으로 이어졌다. 만으로 14살이 되던 생일 태자 책봉을 알리는 겸하여 한성에서 열린 정기회맹 중 처음 얼굴을 내보인 걸 시작으로, 태자는 단옷날 체육대회를 비롯하여 이런저런 국제행사에 꾸준히 얼굴을 비추었다. 활달하고 정력적인 태자는 쉽게 대중의 호의를 샀고, 학업에서는 다소 뒤처져도 오만방자한 황제와는 달리 사려 깊은 모습을 보여주는 태자는 제후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아직은 정식으로 무언가 역할을 맡기보단 얼굴마담에 가까운 입지였으나, 꾸준한 대외활동은 제후국들에 대한제국의 황태자라는 인물을 똑똑히 각인시켰다. 이는 이미 지방의 소국이 아니라 거대한 영역을 발아래에 둔 패권 국가로서 성장한 대한제국에는 가장 중요한 절차였다.
제후들이 제국을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곧 제국의 흥망과 직결되어 있었던 만큼, 활달하게 대외활동을 벌이며 주변국들에 대한제국의 태자라는 걸 인정받는 것이야말로 후계 경쟁에서 앞서나가는 지름길이었던 것이다.
"태자 전하께서도 조금만 더 진중하셨으면 좋을 텐데···."
이는 병약한 차남 이강이나 장남과는 10년 가까운 터울을 두고서 태어난 삼남 이휴(䝗), 여성으로 태어나 처음부터 왕위계승과는 거리가 먼 두 공주와는 차별화될 수밖에 없는 사항이었다. 대신 병약한 차남 이강은 학업에 힘쓰는 모습을 보여 유림의 호의를 한몸에 받았고, 막내 공주들과 삼남 이휴는 주변의 귀여움을 한몸에 받았으나 이미 제후들과 여러 차례 만난 태자와는 비교될 수 없었다.
요컨대, 이미 태자는 보위를 잇는다고 하는 예정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던 것이다. 젊은 시절의 활달한 정복 활동으로 절대권력을 구축한 황제는 아직도 창창하여 적어도 10년에서 20년은 거뜬해 보이고, 태자는 이미 어렸을 적부터 활발하게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여 후계 구도도 명확해졌는데 제국이 안정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지간한 실무는 의회와 관료들 선에서 대부분 처리되고, 의회에서 처리될 수 없는 사안들은 황제가 대강 방향을 지정해 주면 이제는 그럭저럭 관록이 쌓인 김홍집과 어윤중을 비롯한 장관진이 성균관의 신진학자들과 의논하여 처리했다. 또한, 항생제 개발을 비롯하여 당대의 인물들이 미처 짚어내지 못하는 문제점이나 사안들은 황제가 직접 나서서 해결한다.
"처음 폐하께서 칭제건원을 하시겠다고 하셨을 적에만 해도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했는데, 이제는 도저히 이 나라가 황제국이 아니었던 시절을 떠올릴 수가 없게 되었다."
도성의 백성 사이에서 공공연히 이런 이야기가 나돌 만큼, 제국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야말로 반석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안정적인 국내정세야말로, 이 무렵 대한제국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 * *
잡설이 길었으나, 줄여서 대한제국이 안정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장수할 것으로 추정되는 정력적이고 젊은 황제의 존재였고, 하나는 후실을 따로 얻을 필요 없이 건강히 후사를 생산하여 만주족들의 걱정과 불만을 누그러뜨려 주던 황후였으며, 마지막 하나는 정력적이고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태자가 동생들이 장성하기 전에 후계자 경쟁 구도를 정리해버렸다는 것이었다.
하물며 이 무렵 대한제국은 거듭된 군축에도 여전히 상비군만 30만이라는 거대한 병력을 유지했고, 이 30만 대군 중 60% 이상이 자전거병과 기병으로 기동군단화 되어 있었다. 동화정책의 하나로 이루어진 광범위한 징병은 서류상 그 10배에 달하는 예비군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실제로도 전시에 100만 대군까지는 무난하게 동원 가능하다는 것이 이 무렵의 보편적인 중평이었다.
그뿐일까. 화력을 향한 병적인 집착은 후장식 야포만 1천 문 넘게 보유하는 등 주변 제후국들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동원력이나 훈련도에서는 어떻게 따라갈 수 있어도, 기동력과 화력에서는 이미 주변 제후국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경지를 아득하니 넘어서고 있던 것이다.
안정적인 황권, 안정적인 후계 구도, 주변 제후국을 압도하는 군사력. 전근대였다면 이미 제국의 패권도 안정권에 접어들었다며 평가할 수 있는 경지다. 그런데도 여전히 대한제국은 안심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대로, 분리주의와 공화주의라는 두 잠재적 요소 탓이었다.
"어찌 이 아주 땅에 여러 나라가 필요한가? 이미 국경을 허물었고, 도량형을 하나로 합하였으며,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통화가 아주 땅 어느 곳을 가도 통하고 있다. 그렇다면, 장차 아주를 하나로 합한다고 한들 무슨 문제가 있을까?"
우선 분리주의에 관하여 이야기하자면, 그에 앞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연방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의 경우에는 공공연히 아주 대륙의 통합을 이야기하였다. 지금의 범아시아 조약기구가 아시아 대륙을 하나로 만들어나가고 있으니 가까운 시일 내에, 혹은 먼 훗날에라도 아시아 대륙을 완전히 하나로 합하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주로 조선 중에서도 한양 등 경기권에서 흔히 거론되는 주장이었다. 한양에 들어와서 일하거나 배움을 청하는 외국인들이 흔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이야기가 나오던 것이다.
물론 이 연방주의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붙었다. 바로 당연히 황제가 거하는 한양을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연방주의의 대표주자들은 여흥 민씨 일가와 안동 김씨 등을 위시한 경기권의 명문가들이었다. 장차 정말로 한양이 도읍이 되는 아시아 통일국가가 탄생한다면, 그들이 가장 큰 이익을 보게 될 테니 말이다.
"오늘날 혹자들은 하루라도 빨리 왜인과 야인, 화인 등의 오랑캐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지 않으면 장차 우리 대한이 파국을 맞이할 거라 겁을 주고는 한다. 하지만 이는 결코 아니 될 말이다. 만일 그들 전부를 이 대한 땅에서 내쫓는다면, 그다음은? 도대체 누가 인력거를 끈다는 말인가?"
그 때문에 이들은 공공연히 이 무렵 한국의 이주정책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는 했다. 노비들이 없어지고 난 다음 곤란해하던 것을 이제 외국인들이 들어와 노비 노릇을 대신해주고 있는데 얼마나 편하냐는 것이 주된 논리였다.
그들이 보기에 타국에서 일하려 들여온 외국인 노동자들이란 조선인 머슴들보다 확연히 값싼 돈을 받고서 그들을 대신해 일해주는 이름만 바뀐 노비였던 셈이다.
"오늘날의 한양을 보라. 밤에도 낮과 같이 빛나며, 낮에도 밤과 같이 멋과 유흥이 넘치는 빛의 도시를 보라! 실로 한양은 아주의 파리라 불릴 자격이 있다. 아주의 미래를 알고 싶은가? 한양을 보라! 우리는 아주의 미래를 살고 있다!"
물론 그것이 대다수 연방주의자들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다. 되려, 대다수 연방주의자들은 한양이라고 하는 도시에 자긍심을 품은 한양토박이들이었고 낭만주의자들이었다.
이 무렵 도성의 백성은 한양이야말로 아시아의 미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주 대륙 곳곳에서 들어온 이국의 문물들과 서역의 발전된 기물들로 가득하며, 도시 곳곳에 들어선 가로등이 밤에도 낮처럼 환하게 비추며 멋쟁이 신사 숙녀들이 화려한 테라스 아래 무도회를 여는 낭만의 도시라고 말이다.
낮에도 밤에도 끝없이 굴뚝 위로 피어오르는 매연은 한양의 미래를 상징했고, 유구 같은 소국의 1년 치 예산이 하루에도 왔다 갔다 하는 동대문 거래소는 한양의 번영을 상징했다. 황제의 엄명으로 명동 땅에 들어선 어용백화점과 할인점은 각각 한양의 부자들과 서민들의 생활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프랑스에서 유학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유학생들이 주도하여 도입된 프랑스의 갖은 유흥문화들은 안 그래도 낭만과 멋으로 가득했던 한양을 더욱 기품있게 해주었다. 카페에서 커피잔을 기울이며 조국의 미래를 의논하는 젊은 성균관 대학생들의 모습은 이미 하나의 명물로 자리 잡았고, 세계 곳곳에서 들여온 다양하고 지독한 향수 냄새는 처음 한양 나들이를 온 촌뜨기들의 후각을 마비시키고는 했다.
"한양은 아주의 중심인가? 물론 그렇다. 아주의 제후들이 한양에 찾아와 회맹에서 고견을 주고받으며 대륙의 앞날을 논하고, 아주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한양의 시민이 되기를 꿈꾼다. 「나는 한양의 시민이오」, 이 짧은 문장 한마디가 오늘날 우리에게 얼마나 큰 자긍심을 느끼게 하는가! 그러나 나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이 오늘날의 한양이야말로 인류의 미래였노라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장차 온 나라의 제후들이 한양을 찾아와 회맹에서 고견을 주고받으며 인류의 앞날을 논하고, 이 지구 위의 모든 백성이 한양의 백성이 되기를 오매불망 꿈꾸는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더욱 소리 높여 사랑과 낭만을 노래하며 춤추어야 할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연방주의자들은, 대부분은 사해동포주의자들이기도 했다. 엄밀하게 말하여 연방주의자가 곧 사해동포주의자인 것은 아니었지만, 반대로 사해동포주의자라면 곧 연방주의자였다.
이들은 기꺼이 낭만을 노래하였다. 내일은 분명 오늘보다 나은 하루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언제나 그들 시대의 평화를 노래했으며, 끝없이 번영하는 제국의 수도를 찬미했다.
분명 언젠가는 한양을 넘어 아주가, 그다음에는 아주를 넘어 세계가 그들과 같은 멋과 낭만을 즐길 수 있을 거라 믿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빛이 찬란하게 빛날수록 드리우는 어둠 또한 깊은 법이 아니던가.
"단 하루도 배를 곯지 않은 적이 없다. 단 하루도 배곯는 소리를 내며 울부짖는 자식들을 때리지 않은 적이 없다. 단 하루도 이 세상이 하루빨리 망하기를 바라지 않은 적이 없다.
이 탐욕과 위선으로 점철된 황금의 제국에게, 언젠가 천벌이 내려지기를."
한양의 낭만주의자들이 사해 동포와 아주 통합을 논하고 있을 때, 그들의 낭만을 위하여 짓밟히던 음습하고 어두컴컴한 곳에서는 작금의 현실을 저주하는 목소리가 알음알음 그 어둠을 키워가고 있던 것이다.
분리주의는, 단지 그 어둠을 표현하는 무수한 이름 중 하나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