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리주의 >
모든 나라에는 그늘이 있다. 결국, 전능하다는 조물주가 만들어낸 에덴동산이 아닌 이상에야, 모든 이들이 행복하고 어떠한 불만도 없이 모든 이들이 넉넉하게 살아가는 꿈속의 낙원 따위는 단 한 번도 인류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진 적이 없다.
누군가가 취한 부는 언제나 다른 누군가가 잃어버린 부였고, 어느 빈국의 코흘리개 소년가장이 그 조막만 한 손으로 수확한 열대과일은 어느 부국의 중산층 가정이 행복한 생일 만찬을 보내는 데에 사용되었다. 인류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부의 총량은 모두가 부유해지기에는 언제나 턱없이 부족했기에, 우리의 세상은 그렇게 유지되어왔다.
대한제국이라고 이와 다를 수는 없었다. 넘쳐흐르는 듯하던 한양의 부는, 당연하게도 주변에서 끌어온 것일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아주 전체의 이익이니 뭐니 떠들고 있으나, 오늘날 현실을 보라. 그 많던 아주의 부는 다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구주로 흘러가고, 미주로 흘러가고, 한양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부를 탐하는 저들이 진정 아주의 맹주라 할 수 있는가? 아주를 지키기 위하여, 아주의 공통된 번영을 위한다는 말은 결국 공허한 헛소리일 뿐.
결국, 어린 백성의 눈을 속이고 있는 것뿐, 저들 또한 서역의 오랑캐들과 다를 바 없는 제국이다!"
"나는 매일 같이 멋과 낭만을 노래하는 한양의 신사 숙녀들을 보았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장차 나의 고향 또한 이와 같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아직도 나의 고향은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고 있다. 저들은 언젠가는, 가까운 미래에는 이라고 늘 말한다.
나는 묻겠다. 도대체 그 장밋빛 미래는 언제쯤 오는가? 나의 고향의 시골 아낙네, 시골 청년들이 한양의 신사 숙녀들이 그러하듯이 멋과 낭만을 노래하는 날이 언제쯤 올 것인가? 나의 고향이 오늘날의 한양과도 같은 도시가 되었을 무렵에는, 한양은 또 얼마나 더 멀리까지 달아나 있을 것인가?
우리가 뼈 빠지게 일하여 축적한 부는, 저 가증스러운 빛의 도시를 지탱하기 위하여 소모되고 있을 뿐이다!"
분리주의의 근간은 바로 이러한 상대적 박탈감에서 근간했다. 산업화를 막 시작할 무렵, 대한제국은 공통된 번영을 약속했다. 어디까지나 순서의 문제일 뿐, 언젠가 범 아주 조약기구에 속한 모든 나라가 오늘날의 대한제국과 같은 번영을 누리게 되리라고 약속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시아인들은 순진하게도 이를 믿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대한제국이 아주 전역의 재화와 자원을 자유롭게 가져다 쓰며 번영하기 시작하자 점차 이 공통된 번영이라는 선전 그 자체를 의심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조금씩 눈치채게 된 것이다. 설령 한국이 지금 이상으로 발전하게 된다고 한들, 그들에게 내려올 낙수효과는 현저히 적을 거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이는 이미 현재진행형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한양이 빛의 도시를 자칭하며 유럽의 도시들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번영을 구축하는 동안, 여전히 대다수의 아시아 지역들은 10년, 20년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근대문명의 혜택은 오로지 해안가 지대 중에서도 일부 항구지역에 한정되었고, 다만 철제 농기구 등이 조금씩 보급되어가고 있었을 뿐이다.
아시아의 학자들, 특히 한족 민족주의 학자들은 이를 트집 잡았고, 문제 삼았다.
"결국, 모든 건 기만이고, 위선일 뿐이다. 한국은 오늘날 그들의 부국강병은 아주 만민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대관절 작금의 천하에서 아주가 그 어떤 오랑캐들의 위협을 받고 있단 말인가? 영길리도, 불란서도, 노서아도, 모두 파사 땅에서 다투며 우리 아주와는 동떨어진 곳에서 그 힘을 쏟아붓고 있다!
하물며 미리견은 어떠한가? 그들은 함부로 대양을 넘으려조차 하지 않으니 결국 아주에 남은 강도 떼는 딱 하나뿐이고, 그것은 바로 대한이다!"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건 우리 자신뿐이다! 우리를 부유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우리 자신뿐이다! 깨어나라, 민족이여! 궐기하여, 민중이여! 우리의 자유를, 우리의 재화를 되찾자!"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주장을 펼치던 한족 민족주의 학자들 대다수는 바로 그보다 젊은 시절 한국에서 유학 생활을 보내고서 돌아온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한국에서 경험하였던 강렬한 민족주의 체험이, 거꾸로 대한제국에 불평하는 강력한 원동력이자 동기가 된 것이다.
또한, 이들 대다수는 중산층 출신이었다. 적당히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덕분에 세상을 탐구할 시간을 얻어, 미처 더욱 높은 곳까지 닿지 못하던 고통받는 민중의 목소리를 누구보다 재빠르게 포착하여 이 불공평한 현실에 분개할 수 있었던 이들이었다. 이 때문에, 이러한 분리주의 계열 청년들은 대부분은 농촌 계몽운동과 함께 분리주의를 설파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주의 운동은 그다지 공감받지 못했다. 날로 강성해지는 한국의 힘이 무서워서, 라는 이유도 있었으나 그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애초에 아주 만민이 대한에 힘을 실어주었던 까닭은 무엇이었는가? 아주의 일은 아주의 백성이 결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마침내 아주의 운명을 아주인의 손으로 결정지을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이날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아주의 청년들이 같은 깃발 아래 싸우다 목숨을 잃어갔는가?
대한은 언제나 그 선봉에 있었다. 수차례에 걸친 노서아와의 전쟁 동안 그들은 항상 선봉에 있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단지 지금 서역의 오랑캐들이 아주에 함부로 침범하지 못한다고 하여 대한을 내치자는 것은, 도둑이 줄었으니 이제 쓸모없는 경찰을 내치자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렇게 한국을 거부하는 목소리보다는, 여전히 범 아주 조약기구의 이상을 믿고 따르는 학자들이 더 많았던 까닭이다.
"대륙종단철도를 보라. 날로 확장되어가는 우리 아주의 철도들을 보라. 20년 전에는 불과 1만 km에도 미치지 않던 철도가 오늘날에는 장장 14만 km에 육박하고 있으며, 다음 10년 안에는 30만 km를 능가하여 구주를 능가하는 대륙철도망이 완성되려 하고 있다! 이는 오롯이 아주 만민이 함께 땀 흘려 이룩한 성과이며, 기적이다!
만일 아주 만민이 힘과 지혜와 재화를 함께 합치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와 같은 기적이 가능했겠는가? 아주는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해낼 수 있다! 분열된 집안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 우리는 앞으로도 더욱 정진해야만 한다!"
"분열을 논함은 곧 힘없는 백성을 착취하여 제 야망을 채우고자 하는 탐욕스러운 역적들을 이롭게 함이다! 아주 만민은 마땅히 천자의 은혜를 깨닫고서 오늘날의 강건성세에 항시 감사해야 할 것이다!"
대한제국과 범 아주 조약기구에 날 선 비판을 가한 학자들이 한국에서 유학 생활을 보낸 젊은 학자들이었듯이, 이들 또한 한국에서 유학 생활을 보내고 돌아온 젊은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한국에서 민족주의보다도, 그 강렬한 힘과 국제화된 한양의 모습에 감화되어 아시아주의를 신봉하게 된 이들이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한양이 아주의 미래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오늘날 한국의 번영은 아주 만민이 힘을 합한 덕분이라는 한국 정부의 선전을 진심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분리주의를 외친 민족주의 학자들이 한국을 서역과 다를 바 없는 침략자 내지는 이제 쓸모가 없어진 필요악이라 보았다면, 이들은 한국이 앞으로도 아시아의 패권을 쥐고 있는 것이 아주의 최선이라고 확신했다.
당연하게도, 이들 중 출셋길에 가까운 이들은 후자였다. 제후들은 분열을 논하는 민족주의 학자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아시아주의에 경도된 젊은 청년들을 기꺼이 등용하였고, 그들에게 역할을 부여하였다. 거기에 이들은 절대다수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기득권층이었다. 못해도 영주권, 때에 따라서는 한국 시민권을 따낸 이들마저 있었다.
날 때부터 기득권에 가까운 집안에서 태어나 기득권의 이념을 신봉하게 된 그들은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려야 멀어질 수가 없던 셈이다.
"내 고향에서는 무엇 하러 그리도 공부하느냐고 했다. 대대손손 똥이나 푸며 살아온 놈이 공부는 무슨 놈의 공부냐며 말이다. 그러나 나는 운명이란 나의 노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 믿었고, 마침내는 홀몸으로 한양에 건너가 그곳에서 은사님을 만나 대학에 입학하여 학창 생활 내내 단 한 번도 장학금을 놓치지 않고서 졸업하여 금의환향할 수 있었다.
내가 도시로 갈 수 있었던 것은 대한이 놓아준 철도 덕분이었다. 내가 한양에 가고자 생각한 것은 한양에서는 누구나 출세할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한양에 갈 수 있었던 것은 대한에서 운영하던 배편 덕분이었고, 내가 한양에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이 이런 내게도 시험을 치를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하여, 나의 염원을 이루어주었으니 그에 보은하고자 함이 그리도 그릇되었을까?"
한편, 전혀 엉뚱하게도 이런 아시아주의 계열 학자 중에서는 최빈층에서 최정상까지 날아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들도 흔했다. 이유는 간단한 것이었는데, 황제가 바로 이러한 인정받지 못하는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교육부에서는 국정원과는 별개의 정보기관을 운영하여 한양 내의 도서관들과 서점들을 감시, 감독했다. 바로 한양에 뜻을 품고서 들어온 가난한 청년들을 건져 올리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운이 좋게도' 그들의 꿈을 믿어주는 은사를 만나 시험을 치르고서 대학에 입학하였고, 대부분은 높은 성취를 보였다.
출세 하나에 목매달며 한양까지 천릿길을 온 이들이 학업이 힘들다고 붓을 놓지는 않던 것이다. 이런 경우는 한해에 많아야 열 손가락 안에 들었으나, 더욱 많은 청년들이 한양으로 향하고자 하는 강렬한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아무리 확률이 낮아도 0이 아니라면, 그 작은 확률에 자신이 들어갈 수도 있다는 논리였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가건 그대로 한양에 정착하건 그 누구보다 강력한 아시아주의 예찬론자이자 공고한 친한파가 되었고,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은 조국에 혐오감을 보이거나 경멸을 내보이는 경우도 흔했다.
"우웩, 저 대한의 지긋지긋한 애완견 놈들! 보지 않으려고 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건가? 이 광활한 중원이 고작 해봐야 경작지 따위로 낭비되고 있는데, 저 조막만 한 반도는 날마다 눈부신 번영을 거듭하고 있다! 저들은 대관절 어느 나라 사람이란 말인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중원의 한족인가, 그도 아니면 조선인인가?
도대체 어떻게 저들의 사료를 받아먹으면서 만족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긋지긋한 분열론자들 같으니라고! 지역으로 나누고, 종교로 나누며, 피로 나누고, 출신으로 나누고! 피에 굶주린 살인귀들. 잔학무도한 전쟁광들! 왜 그리도 난세를 갈망하는가? 왜 그리도 지금의 안정된 천하를 부정하고 싶어 한다는 말인가? 대한이 사라진다면 오늘날의 하나 된 아주도 끝이라는 걸 어찌하여 저들은 모르는가?
대관절 저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건가, 보지 않으려고 하는 건가!"
자연스럽게도 이들은 서로 대립하고 증오했다. 그들이 보는 시야와 그들이 선 입장이 너무나 달랐다. 빛의 도시를 지탱하기 위하여 고통받는 민중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었던 이들과 빛의 도시가 내려준 은총에 구원받은 이들은 필연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권력에 가까웠으며 흔하게 체제선전에 동원되어 유명세를 얻은 아시아주의자들은 「내 생각이 옳았기에 세상이 나를 인정해준 것이다」라고 판단했으며, 의도적으로 출셋길에서 배제되거나 신념을 숙인 다음에야 나설 수 있던 분리주의자들은 「한국보다도 한국에 기생하는 민족반역자들이 문제다」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리되자, 멀리 있는 한국은 더는 알 바가 아니게 되었다. 당장 눈앞에 증오해 마땅할 적이 있는데, 바다 너머의 한국 따위는 처음부터 상관없었던 셈이다.
그들은 서로 배제하기 위하여 기꺼이 칼을 빼 들었다.
"역적들을 때려잡아라! 대한의 천명을 부정하는 역도들을 때려눕혀라! 난세를 종용하고, 이 땅을 전란으로 어지럽히고자 하는 역도들이다!"
"저, 저 빌어먹을 매국노 놈들이···! 야, 이 제나라 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에게 역도라 하느냐? 민족을 등지는 이들은 너희가 아니더냐!"
"허허허! 나를 제나라 놈이라 부르면서 같은 민족이라 하느냐? 나는 한인이기 이전에 아주인이요, 폐하의 백성일진대. 네 어찌 감히 대한의 천명을 부정하느냐?"
"그래, 옆집 밥그릇이나 빌어먹는 개새끼도 제 집주인은 알아뵈는구나! 그까짓 아주가 동포들보다 소중하더냐, 이 우라질 놈아!"
그리고 대부분은 이들의 대립은 농촌에서는 소작쟁의를, 도시에서는 파업과 폭동을 종용하는 분리주의자들과 이를 진압하고 체포하는 아시아주의자라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극히 드물게 암살이나 폭탄테러 활동이 시도되는 예도 있었으나, 이는 예외에 해당했다.
이들 분리주의자를 관리하는 경찰력은 고의로 다른 제후국에서 차출된 이들인 경우가 많았다. 대외적인 명분은 같은 고향 출신이라고 봐주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이었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당연하게도 각국의 민족주의자들이 서로 다른 나라 사람으로 인식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문에 이를 역이용하여 고향에서 활동하는 대신 이웃 제후국에서 거주하며 활동하는 분리주의자들도 흔했다. 그들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이웃 제후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며 일체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한국··· 아, 조선말인가? 우리 넷째가 거기서 일하고 있지. 그놈이 꼬박꼬박 용돈을 부쳐주는 덕분에 우리 집 가세가 일어섰지 뭔가. 듣고 보니 내 막내 놈 소식 들은 지도 오래됐구먼. 거기 잘 빼입은 청년, 혹 한양에 가게 되거든 왕중영이라고 소식 좀 알아봐 줄 수 있나?"
"글쎄. 그보다도 우리 큰 어르신께 올해 소작료를 조금만 낮춰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나? 요번에 나라에서 둑을 놓겠다느니 뭐라느니 해서 온통 청년들이 씨가 말랐어. 어떻게든 이걸 사정을 봐주셔야 살 텐데···."
"아이고, 쌀값이 날로 떨어지고 있으니 원···. 하여간에 제나라 상놈들 지독한 건 알아줘야 한다더니, 쯧쯧."
대부분의 경우, 백성은 한국에 어떠한 감정도 품고 있지 않거나 아예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에게는 분리주의도 아시아주의도 남의 일이었다. 삶이 팍팍하여도 그걸 눈앞에 보이는 지주나 관아의 탐관오리들, 이웃 나라의 악덕 상인들 탓이라고 생각했지, 그 뒤에서 재화를 있는 대로 쓸어 담고 있던 대한제국을 의식할 수도 없었다.
아무튼 대한제국이 그들을 직접 통치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당연하게도 직접 수탈하는 것도 아니었고, 애초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더 드물었다. 그들을 징용하거나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는 건 각 제후국의 조정이었고, 한국에서는 그들이 직접적인 반역 의사만 보이지 않으면 각 제후국이 무엇을 하건 용인하였고 방관하였다.
이렇다 보니 제후국별로 목표로 하는 바도 달랐다. 서쪽으로 치우친 진나라는 안보를 원했고, 만주족-한족 간 감정싸움을 진정시키기도 바쁜 청나라는 안정을 택했다. 초나라는 태평양 무역에 국운을 걸었고, 위나라 등은 종단철도망 확대에 국운을 걸었다. 제나라는 광업에 투자하여 한국과 일본 다음으로 빠르게 산업화의 길을 걸었다.
"왜 구태여 조약기구를 배척할 필요가 있는가? 우리가 작금의 정세에서 불편함을 겪고 있는가? 국경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여전히 필담은 통하고 있다. 혹자는 작금의 아홉 제후국이 우리 민족을 약하게 하고자 저들이 이간책을 펼친 것이라 하나, 도리어 넓디넓던 대륙이 각자의 사정에 맞게 번영할 계기를 맞이한 것은 아닐까?
숫자는 곧 힘이고, 회맹에서 자그마치 아홉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우리 한인들은 분명히 말해서 크나큰 편애를 받고 있다. 이러한 작금의 정세 속에서 아홉의 목소리를 하나로 줄여 우리 한인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대관절 무엇이란 말인가?"
이 때문에 아시아주의를 배격하는 분리주의자더라도, 작금의 대륙이 분열된 상태를 긍정하는 또 다른 형태의 분리주의자가 나오기도 했다. 이들은, 초나라가 지나치게 거대하다며 둘이나 셋으로 나누어 지역 발전에 공헌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분리주의자더라도, 이런 부류의 지방 자치론자들은 제국 정부의 지원을 받았음은 물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