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치론자 >
정부에서 지원을 받는 자치론자-분리주의자들은 흔히 분열주의라고 부르는-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이야기해 보겠다.
이러한 자치론자는 다음의 발상에서 착안했다.
"범 아주 조약기구는 수직적인 국제기구인가-하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 일 것이다. 오늘날 대한은 아주의 맹주를 자처하고 있으며, 회맹을 이끄는 황제국으로서 아주의 대사를 논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범 아주 조약기구가 온전히 대한만의 것인가? 다른 제후국들은 어떠한 목소리도 낼 수 없는 것인가? 하면 대답은 그렇지 않다.
간단한 예시로서, 일전에 초나라에서 장강에 댐을 세우자고 하였을 때를 떠올려보자. 이때 왜국에서는 너무나 많은 재화가 들 것이라며 난색을 보였고, 황제 또한 만국박람회 이후로 미루자고 하였으나 결국 진과 위 등의 제후들이 초와 함께 입을 모으니 끝내 채택되어 통과된 바 있다.
물론 이후 불란서는 물론이오. 영길리와 보로서의 기술자들마저 장강의 폭룡에 질려 난색을 보이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으나, 만약 기술적 난점만 해결되었다면 그때 초나라는 장강에 댐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숫자는 곧 힘이고, 아홉의 목소리는 분명한 특혜이다. 우리는 이 힘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또 어떻게 유지해야 할지에 대하여 깊이 있게 탐구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초나라의 장강댐 건설 제안은 1882년의 정규회맹 중 있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범 아주 조약기구를 바라보는 제후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그동안은 단지 한국에서 명하는 대로 따르는 통치기구라 여겼다면, 이때를 기점으로는 단순한 통치기구가 아니라 각국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외교기구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제후들은 조심스럽게 한국의 눈치를 보면서도 하나둘 자신들의 주장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곧바로 이듬해 정규회맹에서 청나라가 만주어학회 설립을 주장하여 채택된 것이 그 첫 번째였고, 진나라의 요청에 따라 그들 영내에 상시주둔하던 합종군이 저수지 공사 등의 대민복지에 동원된 것도 대표적이었다.
일본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아주 통일 화폐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미 원화가 사실상의 통일 화폐 역할을 해나가고 있으니, 원화를 기반으로 통일 화폐를 만들어 공동시장을 더욱 공고히 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는 한국의 거부권 행사로 부결되었으나, 이러한 자유로운 의견제시와 채택은 한족 민족주의자들 내에서도 분열을 일으켰다.
"모든 것은 기만이고 위선이다! 결국, 범 아주 조약기구니 뭐니 해봐야, 맹주인 한국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모든 것이 흐지부지되고 말지 않는가! 아홉의 목소리가 특혜라고? 물론 우리가 뜻하는 대로 그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그것은 특혜일 것이다. 하지만 대한의 아량에 기대어 빌붙어 사는 것이 어찌 자주권을 지닌 독립국이라고 할 수 있는가?
대한은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고 더욱 약하게 만들려고 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마땅히 이 조약기구라는 이름의 족쇄를 스스로 거부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물론 대한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반대로 대한이 마음먹는다고 모든 것이 강제로 이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당장 이 범 아주 조약기구는 대한의 황제가 생각해낸 것이고, 현 아주의 패자는 분명하게 말하여 한국이다. 조약기구를 창립하고 유지하는 그들이 그 정도의 특권도 가질 수 없다는 말인가?
당장에 왜를 보라. 저들은 회맹에서 고작 해봐야 하나의 목소리밖에 내지 못하였기에, 그들의 뜻을 이루지도 못하였다. 반면에 우리는 아홉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대한은 분명 우리의 적이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질서는 분명히 우리에게도 이익이 되는 부분이 있다!"
이는 안 그래도 기득권의 벽에 부딪혀 휘청이던 분리주의 운동을 둘로 쪼개놓았다. 이는 분리주의라 불리는 범중화주의 운동에게 크나큰 치명타였다. 하나로 통일되는 것보다도, 이대로 분열된 편이 회맹에서 더 큰 지분을 차지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기 시작하면서 뭇 청년들이 하나 되어 목소리를 내도 부족할 판에 목소리가 둘, 셋으로 쪼개진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의 축출과 범 아주 조약기구 해체, 통일 중화 국민국가 건설 등을 주창하던 분리주의자들과 달리 그들이 분열주의자라 지칭한 이들 중화 자치론자들은 쉽사리 출세의 길을 걸었다. 현 체제의 종식을 주장하던 과격한 분리주의자들과는 달리, 이들은 현 체제를 수용하고서 그 안에서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자는 온건파였기에 쉽게 주류사회에 편입될 수 있던 것이다.
이들의 경우에는 크게 두 가지 분파가 있었다. 처음부터 자치론을 신봉하는 이들이 첫 번째였고, 고된 도망 생활과 생활고 속에서 마음이 꺾여 현실에 굴복한 나머지 자치론을 신봉하게 된 이들이 두 번째였다. 그리고 전자는 그런대로 분리주의자들과도 열띤 토론이 가능했으나, 후자는 민족의 배신자로서 배척되었다.
"우리가 왜 한족이라는 말인가? 우리는 장(壯)족이다. 그동안 지리상 중원이라는 대륙 일부였던 것이지, 한족이라는 범주 안에 속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우리에게 왜 함께 목소리를 내 달라고 요구하고 기대하는가? 우리는 황제께 왕을 받아 자치를 허락받았고, 우리 광서국은-아니 고쳐서 장(壯)국은 앞으로 자국의 국익만을 생각할 것이다!"
"알라 후 아크바르! 한국의 존귀한 황제에게 알라의 은총이 있을지어다! 우리 회족들은 신앙의 자유를 다시금 보증해준 대한의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전자의 경우, 대다수는 민족주의자이되 한족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다. 이들은 주로 남쪽 초나라보다 남쪽 내지는 서쪽 진나라 중에서도 더욱 서쪽, 다시 말하여서 되려 한국의 영향력을 극히 드물게 받는 이들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애초에 한족 민족주의자들과는 시야부터가 달랐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고향 땅과 그들 민족의 번영이었지 조약기구를 탈퇴한다느니 통일 중화 국민국가를 건설하자느니 하는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한족이 아닌데 한족 민족주의자들과 뜻을 함께하기를 기대하던 것 자체가 무리였던 셈이다.
"범 아주 조약기구를 탈퇴하겠다고? 오랑캐 황제는 인정하지 못하겠다? 그거야말로 웃기는 소리가 아닌가. 내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너희 족속들이 누구 똥구멍을 그리도 달게 빨았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만주족 황제는 그리도 고분고분 섬기던 놈들이 조선인 황제는 섬기지 못하겠다. 이건가? 양이나 치며 살던 양치기 떼 두목은 섬겨도 명이 망하고서도 수백 년을 지조를 지켜온 고고한 선비는 못 섬기겠다고?
그거야말로 웃기는 소리가 아닌가!"
"저 배은망덕한 놈들을 보라. 어려서는 한국의 보호를 받고, 조금 머리가 두꺼워지고서는 한국에 가르침을 받고, 이제는 한국이 우리를 수탈하고 있다며 한국이 없어야지만 저들 족속이 천하를 웅비할 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 배은망덕함은 차치하고서, 한 가지만 묻자. 그래서, 대청 시절에는? 청나라의 통치가 살아 있을 적 한인들은 만주인들의 아래가 아니었던가.
오늘날 조선이 한인을 그들의 아래라고 하던가? 청을 무너뜨린 건 한인인가, 조선인가? 청의 250년 통치는 반발하려 들면 채찍이 날아드니까 참았고, 한의 20년 통치는 반발하여도 감당할만하니까 못 참겠다. 이건가? 이 얼마나 한심스러운 족속들인가!"
이들은 공공연히 한족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을 비웃고는 했다. 청나라 만주족 밑에서도 잘만 지내던 족속들이 되려 통치가 유해지니까 반발한다는 논리였다. 실제로도 이 부분을 지적당하면 제대로 된 대답을 돌려주는 한족 민족주의자들은 드물었다. 이건 그들에게 있어서 역린과도 같은 지적이었으니까 말이다.
거기에 이 무렵 한족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는 대한이 중원을 수탈하고 있다-까지에는 공감해도, 그 수탈이 과연 어디까지 의도한 것이고 어디까지 의도하지 않은 점이냐는 부분이었다. 아무튼, 지금 이렇게 범 아주 조약기구에 맞서고자 하는 이들부터가 대한에게 교육을 받은 이들이 아니었던가.
정말로 처음부터 수탈하려고만 한 것이라면, 도대체 무슨 연유로 그들에게 배울 기회를 베풀었단 말인가. 한국이라고 그들에게 민족주의를 가르치면 언젠가 검을 거꾸로 쥘 것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조약기구는 해산되어야만 한다. 대한은 축출되어야만 한다. 그리 믿고서, 달려왔으나··· 실로 그러한가? 정말로 그 길밖에는 없는 것인가? 작금의 천하는, 이 땅의 백성을 피폐하게 만들 뿐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이 땅에서는 대한이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저들이 우리를 수탈하고 있다면, 저들이 우리를 핍박하고 있다면, 어째서 우리는 이 땅에서 적들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것인가?"
이러한 모순은 많은 한족 민족주의자들이 도중에 중화자치론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보이지 않는 적과 맞서다 지쳐버린 이들이었다. 만일 어디를 가나 한국의 깃발이 흩날리고 헌병들이 몽둥이와 채찍을 휘둘러댔다면 알기 쉬운 표적이 되었겠으나, 그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이 무렵 중원에서는 어딜 둘러보아도 한국의 흔적은 없었다.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대신에 한국을 위하여 일하는 그들의 동포들이었다. 아시아주의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범 아주 조약기구가 내건 이상을 믿고, 아시아 대륙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뻗어 가고 있다고 믿는 순진한 시민이었다. 아무리 그들이 곁에서 소리쳐도 귓등으로 흘려넘기는 한심스러운 동포들이었다.
이들은 민족을 위하여 무고하고 무지한 동포들에게 총을 겨눈다는 자기모순에 빠져 주저앉았다. 아무리 자기 자신을 속이려 해도, 대한이 자신들에게서 무엇을 빼앗아 갔는지조차 모르고서 일상에 충실히 살아가는 이들에게 피를 흘리는 걸 요구할 수는 없었다.
변절자들의 자기변명이었다.
"이런 쓰레기 같은 똥개 자식! 네놈이 민족을 배신하고서 호의호식을 누린다고 한들 그 마음이 편할 것 같더냐! 어째서 모르느냐? 우리가 힘을 합한다면 능히 저 대한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말이다! 어찌 그것을 모르고서 대한의 개 노릇을 하며 만족하냐는 말이다!"
"허, 똥개라고 했느냐? 그래, 네가 그리 부른다면 나는 똥개가 되련다. 고래 같은 기와집에서 매일 같이 고깃국 먹는 똥개가 되련다! 힘을 합한다면 능히 대한을 무너뜨려? 현실을 보란 말이다, 이 답답한 놈아! 현실을 보라는 말이야! 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글공부깨나 했다는 우리 같은 먹물쟁이들조차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는데, 대관절 무슨 수로 이 광활한 대륙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말이냐!"
"이 똥개 놈이 내 귀를 더럽히는구나! 오냐, 그럼 최후의 정이다. 내 더 이상 너 스스로 네 이름 석 자를 더럽히기 전에 이 손으로 숨통을 끊어주겠다!"
타앙-.
당연하게도 변절자들을 둘러싸고 암살시도나 집단구타 등과 같은 유혈사태가 흔히 벌어졌다. 처음부터 가는 길이 달랐던 이들은 용서할 수 있어도, 도중에 길을 달리 걷는 배신자들은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였다. 분리주의자들이 아시아주의자들을 만나면 논쟁을 벌였고, 자치론자들을 만나거든 다투었다면, 도중에 분열주의자로 갈아탄 한때의 동지들과 만나면 총과 칼이 오갔다.
이렇다 보니, 이들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경찰에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찰에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면, 최소한 자신과 뜻이 맞는 이들을 부리거나 재물로 고용하여 자신을 호위할 사병집단을 끌고 다녔다. 이들은 치안 당국의 특별관리를 받았다.
이 무렵 일어나는 암살사건의 절대다수가 이들을 향하는 것이었던 만큼, 이들을 지키고 있으면 일부러 찾을 필요 없이 과격파 분리주의자들이 절로 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치안 당국의 특별관리를 받는 한때의 동지들을 보면서 분리주의자들이 더욱 분개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실로 통탄할 노릇이다! 어찌 이리도 목줄에 묶인 집 개 신세를 자청하는 족속들이 많다는 말인가? 어찌 누구 하나 분개하여 떨쳐 일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서 그저 힘 있는 자들에게 빌붙어 살고자 하는가! 과거에는 만주에 그러했고, 그보다 전에는 몽골에 그러했으며, 오늘날에는 조선에 그리하고 있다. 진정으로 힘 있는 족속 앞에서 꼬리를 흔드는 꼴이 우리 족속의 천성이라는 말인가!"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처음에는 통일 중화 국민국가를 외치며 외세의 배격을 외치다가도 절망에 빠져 절규하다가 돌아서는 이들도 나왔다. 다른 이들이 출세를 위하여, 한국을 따르는 것이 국익에 부합한다고 여겼기에 한국을 따랐다면 이들은 자국 민족에 대한 끔찍한 경멸과 혐오 탓에 한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들은 강자의 앞에서 꼬리를 흔드는 것이야말로 한족이라는 민족의 천성이라고 주장하며 대한이 이끄는 질서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작금의 세계에서 한족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그들은 한족이 스스로 힘으로 자립할 수 있다는 논리 그 자체를 비웃고 혐오했으며, 자신들의 동족들을 노예 족속이라고 표현하기를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이렇게 현실에 절망하여 자국혐오론자로 돌아선 부류는 제국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지는 않았으나, 암암리에 그 활동이 권장되었다. 그들은 언론의 자유라는 대의명분 아래 꺼릴 것 없이 자신들의 사상을 신문의 사설을 통하여 퍼뜨릴 수 있었으며, 문집 따위를 내며 젊은 세대들에게 패배주의적 사고방식을 퍼뜨려 나갔다.
본래는 누구보다 열정적인 민족주의자였던 까닭에 이런 자국혐오론자들의 글은 더욱 강렬했으며, 대중의 야유와 모멸을 뒤집어썼으나 그러기에 이들은 삐뚤어진 명성을 얻었다. 이 삐뚤어진 명성에 혹하여 그들을 따라 하는 어리석은 이들이 나타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순서였다.
"모두가 조국과 민족을 위하였을 텐데, 어찌 그 말로가 이럴 수 있다는 말인가? 누군가는 어둠 속에 파묻혔고, 누군가는 빛에서 태어나 세상의 어둠을 모르고서 거짓된 빛만을 이야기하며, 누군가는 어둠에 굴복하였고, 누군가는 어둠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우리 민족의 앞날이 너무나 어둡구나! 우리 민족을 구할 백마 탄 귀인이 이 땅에 임할 날은 대관절 언제란 말인가?"
이런 한탄이 공공연하게 나올 정도로, 이 무렵 중원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은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있었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것만으로 끝났다면 그나마 사정이 더 나을 수도 있으나, 여기에 지역감정과 각 제후국 간의 이해관계까지 얽히기 시작하니 일이 더욱 꼬여갔다.
통일 중화 국민국가를 논하는 이들 중에서도, 어떤 제후국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가로 싸우던 것이다. 초나라가 고향인 이들은 당연히 인구도 많고 부유한 초나라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했고, 제나라가 고향인 이들은 가장 산업화하였으며 대학진학률도 가장 높은 제나라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청나라가 고향인 이들은 명 대 이후 전통적인 중화의 도읍인 북경이 청에 있으니 청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했고, 진나라가 고향인 이들은 진나라가 가장 군사력도 강하고 장안과 낙양이 진나라에 있으니 진나라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혹자는 새로운 천자를 옹립하여야 한다고 하였고, 혹자는 공화국을 주장하였고, 이 공화주의자들 내부에서도 다툼이 벌어져 중앙집권 공화국인가 지방자치 연방국가인가를 두고서 또 다투었다.
아예 통일 중화 국민국가를 부정하고서 자치론을 주장하거나 아시아주의, 연방주의를 논하는 이들까지 꺼내 들면 더욱 끝이 없었다. 한자를 그대로 쓰는 게 옳은가 줄여 쓰는 게 옳은가 그도 아니면 부분적으로 한글을 도입한 국한혼용문이 옳은가. 나라의 근본은 백성의 행복인가, 안보인가, 경제인가.
9개의 목소리 안에서도 수십 갈래로 나뉘어, 목소리가 끝없이 얽히고설켜 하나의 함성이 되지 못하고 소음이 되고 말았다.
"멀구나. 너무나 멀어. 천지가 열리고, 이토록 천하가 하나가 되기 위한 길이 멀게만 느껴졌던 적이 또 있을까? 차라리 단칼에 잘라 흑백이 분명히 가려진다면 편할 것을··· 허허허!"
이는 이형이 중원의 제후들이 서로 다투게 하는 대신 평화로이 공존하도록 강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피로서 피를 닦으며 서로 끝없이 다툰다면 언젠가 힘으로서 다른 힘을 짓누른 패자가 등장하여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가려줄 수 있으나, 말로서 다투게 되면 언제까지고 다투기만 할 뿐이었다.
설령 논리로 압도해도 절치부심하여 새로운 근거와 주장을 갖추고서 맞서려 든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하물며 자연과학이라면 모를까, 이러한 사회적 가치판단에 의한 논쟁은 처음부터 누구 하나가 깨끗이 승복하지 않는 한 결론이 날 수가 없는 뫼비우스의 띠였다.
결국, 논쟁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없었고, 그때마다 기존의 주장들은 수십 수백 갈래로 나뉘었으며, 이 수십 수백 개의 주장이 서로 대립하는 이상 분열은 더욱 가속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이형이 설계한 분열의 첫 단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