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秦) >
그러나 황제가 보드카로 연기하여 2천 년 전에 죽은 진시황제를 이용하였건 어쨌건 간에, 그는 여전히 황제였고 적어도 당대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어떠한 징조도 찾아낼 수 없었다. 또 황제가 꿈에서 시황제를 뵈었다는 것이 진실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시황릉을 찾아내 제례를 올렸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그 파급효과는 더없이 격렬했다.
"말도 안 돼! 이건 헛소리다! 날조임이 틀림없어! 애초에 꿈에서 진시황제가 나왔다니, 순전히 미신이 아닌가! 지금은 19세기야! 누구보다 계몽에 앞서던 황제가 이제 와서 무슨 천년 전에나 먹혔을 새빨간 거짓말을···!"
"이건 처음부터 새빨간 거짓말이다! 저 병마용은 대한에서 진국에 시켜 몰래 숨겨둔 가짜 부장품들이다! 저 시황릉은 가짜임이 틀림없어! 애초에 병마용을 찾아내고서 곧장 다시 파묻어 버렸으니, 저게 진짜인가 가짜인가 무슨 수로 판단한다는 말인가!"
"부디 이게 사실이 아니기를! 만일 사실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기를! 오, 제발 천지신명이시여!"
한족 민족주의, 특히 그중에서도 소위 분리주의라고 불리는 반한 통일 중화 국민국가 진영에서는 황제가 시황릉에 제례를 올릴 무렵을 기점으로 하여 사실상 공황상태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했고, 이것이 황제가 억지로 꾸며낸 일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했다.
문제는 이 사람 형상에, 그것도 사람 크기의 병마용을 100기씩 세간의 눈을 피하여 만들어서는 땅에 파묻고서 다시 꺼내는 작업이 어디 쉽겠냐는 점이었다. 하다못해 병마용이 한둘쯤이라면 어떻게 몰래 밤중에 묻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백여 기나 되는 병마용을 일단 만드는 것도 고생스러울 텐데 묻는 건 또 얼마나 고생스럽겠는가?
하나하나 몰래 만들어 하나하나 몰래 옮겨 파묻는다고 해도, 그걸 다 끝내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며 그 와중에 조금도 소문이 새어나가지 않는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는 일이던가? 사람의 입이 얼마나 가벼운데 말이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이 꺾창을 보라! 상방여불위(相邦呂不韋)라 분명히 아로새겨진 이 청동으로 만든 꺾창을! 익히 잘 알다시피 철은 쉽게 녹이 슬고는 하나 청동은 그리 쉬이 녹이 슬지를 않는다. 만일 시황릉이 거짓되었다면, 어찌 이 꺾창이 이리도 녹이 슬었겠는가?"
이 무렵 진나라에서 병마용을 다시 파묻는 과정에서, 바로 이러한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 한가지 물질적 증거를 남겨두었던 것이다. 사실, 그들로서도 황제가 아무리 꿈에서 보았다지만 땅에서 병마용이 나왔다고 한들 그게 언제 적의 유물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그 때문에 진나라에서는 처음 시황릉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병사들에게 전해 들은 다음에도, 병사들을 시켜 그 근방을 파헤쳐보도록 지시하였다. 만에 하나라도 그들이 발견한 시황릉이 시황릉이 아니라 사실 다른 이의 무덤이거나 아니면 애초에 무덤조차 아니라면, 섣불리 황제에게 보고하였다가 사실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을 때 그 뒷감당을 감수해야 하는 건 오롯이 그들의 몫이었던 까닭이다.
"허, 헉! 여, 여불위···!"
"시황릉이다! 진짜 시황릉이야! 마, 맙소사! 우리는 진시황제의 무덤을 함부로 파헤치고 만 거야!"
"부, 부디 용서하여주십시오! 저희는 그저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시황제의 안식을 해칠 생각은 맹세코···!"
이 꺾창을 확보한 것은 황제에게 보고하기에 앞서 물증을 확보하는 과정에서였다. 땅에서 여불위의 이름 석 자가 새겨진 꺾창이 나온 순간 병사들은 제자리에 엎드려서 시황제가 묻혀있다고 추정되는 거대한 언덕을 향하여 재빠르게 이마를 조아렸고, 군관들이라고 그건 다르지 않아 재빠르게 무릎을 꿇었다.
그들로서는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시황제의 능을 함부로 파헤친 꼴이 된 것이다. 혹 시황제의 저주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차치하고서, 우선 황제의 무덤을 함부로 파헤친다는 것 자체가 유교적 사고방식으로 생각하였을 때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악 중 하나였다.
하물며 그들의 진(秦)나라는 바로 그 시황제의 진나라를 계승하였다고 표방하고 있지 않았던가. 실제로 그 선전에 공감하건 공감하지 않건 간에, 진의 천기를 이었다면서 진의 시황제를 욕보인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진왕 이재선이 질겁하여 옥좌에서 굴러떨어진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였다.
"허, 허허허! 진정 사실이었다는 말인가? 황상께서는 오늘날, 이 장안 땅에 임하셨을 적에 시황제께 도움을 받아 옥체를 보전하시었다는 말인가? 진정으로, 시황제는 우리 조선을···."
발견된 즉시 진왕에게 진상된 상방 여불위의 꺾창을 바라보며, 이재선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온종일 그리 중얼거렸다. 이 일을 꾸민 황제야 이용할 수 있으니 이용하였다, 정도였지만 옛 함양 땅에서 시황릉을 발견하고 그 시황릉에서 시황제의 보물을 발견한 이재선과 이 무렵 진나라 조정의 고관대작들에게는 이때 그들이 받았던 문화적 충격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무엇보다 진왕 이재선에게는 이것이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황제가 만일 말한 것이 진정 사실이라면, 황제는 시황제의 도움을 받아 장안에서 목숨을 건졌다. 그리하여 후일 시황제의 뜻을 받들어 천하를 온전히 통일할 기회를 거머쥐고서도 일부러 분열시켜 그와 같은 종친들에게 왕위를 나눠줄 것을 택하였고, 그것이 작금의 천하다.
요컨대, 황제는 시황제의 정신적 계승자나 다름없는 셈이다. 비록 황제가 보았다는 것이 진정으로 시황제의 귀신인지, 아니면 환각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황제는 시황제가 후회하고 있다고 믿었기에 시황제의 넋을 기리고자 하였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그에 합당한 보답을 해준 것이다.
그리고 황제는 그러한 은인의 나라를 다름 아닌 이재선에게 맡겼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그야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재선은 이튿날 동틀 녘 머리를 귀신처럼 풀어헤치고서 황제가 있는 동쪽 땅을 향해 돌바닥에 몇 차례고 머리를 들이받았다.
"황상! 이 미련한 놈이 비로소 황상의 크나큰 뜻을 알았나이다! 이 차마 형제라 불릴 자격도 없는 종놈의 자식에게 이리도 크나큰 총애를 베풀어 주시니, 제가 어찌 보답해 드리면 좋으리까? 폐하, 폐하!"
이마에서 피가 새어 나올 때까지 말이다. 이는 그만큼 감동을 한 것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괜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함도 있었다. 다름 아닌, 중화를 처음으로 통일시킨 시황제의 능이었다. 그리고 마침 그가 하사받은 나라는 진(秦)이었다. 요컨대, 그가 지금부터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에 따라 시황릉을 발견하고서 시황제의 전철을 밟을 야심을 품었다는 의심을 받을 공산이 컸다.
안 그래도 마침 군국주의를 내세워 나라 자체가 하나의 병영에 가까워져 가던 진나라였다. 병사들의 질적 수준은 차치하고서, 그 규모 면에서나마 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제후국이 있다면 그곳은 진나라였다. 이재선은 자신이 천하에 이름을 드높일 기회를 잡았음을 알았지만, 동시에 황제의 의심을 사 숙청될 위기에 처했다는 것도 알았다.
그건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지금 함부로 난을 일으켜봐야 달걀로 바위 치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던 그였다. 하여 이재선은 이날부로 병마용을 다시 파묻고서 제례를 올릴 때까지 몸을 축낼 기세로 황제가 있는 동쪽을 향해 만세를 부르며 절을 올려댔다. 반평생을 서장자로서 눈칫밥을 먹으며 살아온 그였기에 가능한 처세술이었다.
"시황릉, 저것이 진정으로 시황릉이란 말인가? 허, 허허허. 저 언덕이. 저 푸른 초목이, 통째로 하나의 능이라고···? 장엄하는구나. 참으로 굉장하다!. 암, 그렇고말고! 무릇 시황제의 능이라면. 이 대진국의 시황릉이라면! 무릇 저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껄껄껄!"
한편 이 무렵의 진나라 조정은 한국에서 파견된 이들도 있었으나, 날 때부터 옛 진나라 땅에서 살아오다가 태평천국의 난 무렵 군벌로서 세력을 일으켜 후일 진나라가 세워진 다음 공신으로서 합류한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자들에게 있어서 오늘날의 관중 땅은 참으로 불만족스러운 것이었다.
2천 년 전, 아니 불과 당나라 시절까지만 해도 천하의 중심으로서 번영하던 관중 땅이 거듭된 기후변화로 작금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변방으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중앙정계에 출사하는 것도 어려워졌고, 인구도 크게 줄었으며 땅이 척박하다 보니 물산이 풍족하지도 못하였다. 현실이 이러했으니, 이들은 더욱 과거의 영광에 매달렸다. 관중 땅이 천하의 중심이던 시절, 장안과 낙양이 천하의 중심이던 시절을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찾아낸 시황릉은 마침 딱 그러한 과거를 추억하는 데에 둘도 없이 적합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한 바로 그 시황제다.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시황릉의 발견은, 그간 천하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전락하며 상처 입고 망가진 자존심과 자부심을 충족시켜주었다.
"저 커다란 산이 통째로 무덤이라니··· 허허허. 그간 저 산을 몇 번을 오르고 내렸는데, 어찌 눈치채지 못했을까? 어찌 몰랐을꼬. 내 시황릉을 밟으며 살아왔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아이고, 이거 죄송스러워서 어쩌나. 매번 나무한다고 황릉을 함부로 밟고 다녔으니 이거 정말 죄송스러워서···."
"뭘 그리 벌벌 떠는 건가. 우리 선조가 장장 수천 년을 그리 살아왔으나 한 번도 시황제께 노여움을 샀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네. 참으로 감사하신 분이지 뭔가.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이 함부로 능을 밟고 다녀도 아픈 소리 한 번 내지 않으셨으니 이 얼마나 배포가 넓으신 분인가?"
이러한 관료층의 감동은 고스란히 백성에게도 전해졌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들이 더했다. 선비들은 그래도 분서갱유를 비롯하여 이런저런 오점들을 기억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찬양하는 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나, 무지렁이 백성에게 시황제는 그저 아득히 먼 옛날 그들의 고향에서 태어난 위대한 영웅이었다.
여기에 천하를 쥐락펴락하는 황제가 몸소 시황릉에 찾아와 조신하게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보게 된 이후로 이러한 백성의 시황제를 향한 공경은 점차 더 뚜렷해졌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일컬어지는 그 황제마저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시황제라는 인식이 퍼지게 된 것이다. 하물며 황제가 몸소 시황제가 목숨을 구해줬기에 자신이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다-하지 않았는가?
거기에 황제의 영험한 경험 이야기도 백성에게는 마음에 쏙 들었다. 유림이나 신진학자층에게야 이게 무슨 괴력난신인가 싶었지만, 백성에게는 차라리 이런 영웅설화 같은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황제의 말에 따르자면, 시황제가 죽어서 흑룡이 되어 이 땅에 똬리를 틀었다고 하지 않던가.
아무렴 시황제가 자신의 백성을 저주하고자 이 땅에 머물겠는가? 당연히 죽어서 귀신이 된 다음에도 이 땅에 사는 백성을 지켜주기 위하여 머물던 것이 아니겠는가. 적어도, 진나라의 백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 듣기로 시황릉에 제사를 지내면 만사형통에 오랜 지병이 낫고 가정에 온갖 불화가 없어진다더라!"
새로운 민간신앙의 대두와 확산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민간신앙은 현지 신사 층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다. 자그마치 황제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게 죽어서 흑룡이 된 시황제라고 하지 않았던가. 황제의 은인을 섬기겠다는데 그걸 함부로 막기에도 뭣했다.
다만 혹세무민을 경계하여 항상 감시하는 것이 그들의 한계였다.
"아, 이게 글쎄 보통 진흙이 아닐세! 바로 그 시황릉에서 퍼온 흙이란 말이네! 이거 보세나. 살짝 살에 바르기만 했는데도 주름이 쫙 펴지고 피부가 반들반들해지지 않나?"
또 이런 민간신앙의 확산을 부추긴 것이 바로 시황릉 인근에서 흔히 발견되던 수은이었다. 더욱 정확히는, 흙에 녹아든 수은이었다. 화학적 지식이 있는 이들이야 수은이 유독물질이라는 걸 알았으나, 진나라와 같은 내륙에는 수은이라고 하면 여전히 어딘가 신비로운 금속이라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개중에는 이 흙에서 수은이 배어 나온 줄 모르는 이들도 흔했다. 이들은 수은이 섞인 흙을 살에 바르면 주름이 한순간 펴지는 걸 보고서 「과연 시황제가 묻힌 땅의 흙은 어딘가 달라도 다르구나!」라고 받아들였다. 이러한 인식이 한탕을 노리는 사이비 도사들에게 적극적으로 이용되었음은 물론이었다.
그 존재가 세상에 밝혀진 지 채 5년이 되지 않아, 민간에서 시황릉은 흑룡이 임한 영험한 땅이 되고 말았다
"우리 진나라야말로 천하제일이다! 항상 자신의 몫에 감사할 줄 알며, 함부로 도둑질하지 않고, 제 몸을 단련하기를 멈추지 않으며, 항상 외적을 향한 경계를 놓지 않는 우리 진나라야말로 진정 위대한 나라다!"
"분서갱유가 무얼 그리 잘못되었는가? 당장에 청도 천하를 통일한 다음 똑같이 하였고, 그보다 전에도 천하를 통일한 천하인이라면 규모에서 차이는 있어도 모두 똑같이 그러했다. 시황제께서는 단지 그 시작을 알렸기에 선구자로서 그 오명을 뒤집어썼을 따름이다!"
"물러터진 유가 놈들이야말로 오늘날 중원이 평화에 찌든 근본 원인이다! 법치주의와 부국강병을 내세워 천하의 패자로 우뚝 서게 하였던 우리 진의 법가가 계속하여 중원을 지배하였다면 달랐을 것이다!"
이러한 시황제 신앙은 필연적으로 민족적 자긍심을 기폭 시켰다. 시황제는 그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고, 옛 진의 영광은 그들의 자긍심을 지탱하는 뿌리가 되었다. 이들은 단지 시황릉을 신성시하는 걸 넘어, 시황제의 행보 하나하나를 모조리 정당화시키고자 시도했다.
이는 한족 민족주의 세력에게는 또 하나의 악몽이었다. 하다 하다 이제는 한족 내부에서 새로운 민족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세력까지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여불위의 꺾창이 발견된 다음에도 한족 민족주의자들이 기를 쓰고 어떻게든 시황릉의 존재 여부에 딴죽을 걸려고 하는 근본 원인이기도 했다.
"초는 지주들의 부패에 찌들었다! 제는 재화에 눈이 먼 상놈들이고, 청은 산송장이나 다름없으며, 그 외는 논할 가치조차 없다! 시황제께서 보유하시는 우리 진이야말로 중화 제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황제께서 잘못하신 것이 있다면 장수하시지 못하였다는 점밖에는 없다! 시황제께서 단 10년만 더 사셨더라도 그 우라질 항적이라는 놈을 산채로 회를 뜨셨을 거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의 자긍심이 단지 자긍심으로 그치지 않고서 인근 제후국들을 적극적으로 깎아내리려 들었다는 점이었다. 이는 미성숙한 시민의식과 거침없이 폭발하는 민족 자긍심이 일으킬 수 있는 최악의 결과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진나라의 군국주의도 문제였다. 멀쩡하던 청년도 훈련소에 끌려갔다가 전역할 때 즈음이 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전투적인 국수주의자가 되어 나오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합동훈련이니 뭐니 하여 다른 나라에 방문할 일도 흔하니 더욱 문제가 심각해졌다.
"뭐 항적이 어쩌고 저째? 이놈들이 뚫린 입이라도 못하는 말이 없구나! 오냐! 그 시황제라는 놈이 10년을 더 살았다면 서초패왕께서 그 시황제라는 놈의 생간을 꺼내다 씹으셨을 것이다!"
"푸하하하! 군기 하나 똑바로 못 드는 강남 약골 놈들이 잘도 그러겠구나! 시황제께서 10년을 살았으면 너희 초나라 원숭이 놈들은 지금쯤 씨가 말랐을 거다!"
"뭐가 어째? 이놈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1888년 늦가을.
합동훈련이 끝나고서 주어진 휴식 기간 중 술에 취한 진나라군 병사들과 남경 시민들이 시비가 붙어 패싸움을 벌인 끝에 싸움이 크게 번져 100명이 가까이가 죽고 천여 명 넘게 다친 남경 폭동은 이러한 민족갈등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태 이후로 합동훈련이 끝나고 나면 곧장 각국으로 돌아가도록 규정이 변경되었고, 진군에서는 사건을 일으킨 병사들을 군사재판에 기소하고 해당 부대를 영구해산. 반년간 전군의 휴가를 동결하고 간부진의 재교육을 하는 등 재발 방지에 힘썼으나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시황제의 이름 아래, 시황제의 꿈은 산산이 부서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