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화주의 >
여기까지 서술하면서 자연히 알게 되었을 사실이지만, 중원에 들끓던 분리주의란 기실 처음부터 끝까지 황제가 의도한 일이었다.
그는 고의로 한족 민족주의와 아시아주의 둘 모두를 부추겼다. 아시아주의만을 지원한다면 한족 민족주의는 자생하여 통제 밖으로 벗어나지만, 둘 모두를 지원하면 서로 대립하는 사상이 모두 한국에 뿌리를 두게 되니 원거리에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치론과 지역주의, 진나라의 국수주의 등도 마찬가지. 범아주 조약기구란 처음부터 끝까지 황제의 계획을 위하여 존재하던 도구였고, 그 도구는 그 역할을 훌륭하게 완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황제의 설계대로 진행되었는가 하면-또 아니었다.
"중원에게는 아홉의 목소리가 있다. 한국에게는 맹주로서의 거부권이 있다. 그런데 우리 일본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을 자처하나 막상 우리에게는 아무런 무기도 없다.
우리 일본국도 아주에서 영향력을 더욱 키우기 위하여 쓰시마와 사도가시마 등의 반자주적 섬들을 독립국으로 승격시켜 못해도 둘에서 셋의 목소리를 추가로 확보해야만 한다!"
"다이칭구룬 만세! 대만주국 만세! 한때 천하를 통치하던 우리 만주가 어찌하여 조선의 보조를 맞춰야 한다는 말인가?
깨어나라 만주인들이여! 만주를 침범하는 가증스러운 조선인들과 구역질 나는 한인들에게서 이 신성한 땅을 지켜내자!"
그 대표적인 것이 일본의 분리주의와 만주의 국수주의였다. 둘 모두 중원에서의 혼란상에 따른 반작용에 해당했다. 일본의 분리주의는 중원의 자치론자가 그러하듯 조약기구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일본계 국가를 늘리려는 발상에서 시작되었고, 만주의 국수주의는 중원계 제후국들의 국수주의에 자극받아 시작되었다.
이는 어느 쪽도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분리주의의 확산은 동군연합 체제의 한국에도 분명한 위협이 될 수 있었고, 만주의 국수주의는 한국 내에서도 언제건 분리주의가 촉발될 수 있음을 암시했다.
누군가를 저주하려거든 무덤을 둘 준비하라는 격언대로, 악의를 흩뿌렸으니 뜻하지 않은 악의를 돌려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 한국의 관료들에게 한국 내의 분리주의보다도 더욱 위험시되는 사상이 있었으니- 바로 공화주의였다.
"미리견을 보라. 혈연 따위가 아니라 인망과 민심으로 8년마다 새로운 천자를 옹립하는 저 아름다운 나라를 보라. 저들이야말로 옛 요순시절의 아름다운 선양 전통을 잇고 있지 않은가?
미리견의 아름다운 전통은 우리가 모두 본받아 마땅하다. 찬탈의 대의명분으로 전락하지 않은, 본연 그대로의 선양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나, 우선 친미주의자였던 경우.
이들의 경우에는 크게 활동을 제약받지 않았다. 가장 공허했고, 가장 그 세력도 미약했기 때문이다. 이들 대다수는 공화주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말로만 전해 들은 미국에 유교적 이상을 겹쳐보고서 멋대로 요순시절의 선양 전통을 부활시키자고 주장하고는 했다. 당연하게도, 이는 시대착오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여져 진지하게 수용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최익현을 위시하여 여전히 한쪽에서 건재한 보수적인 유림 층도 여기까지 시대착오적인 주장에는 싸늘했다. 그들은 조선의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지, 조선이 존재하기조차 이전에 존재했던 수천 년 전의 전통을 부활시키려고 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신진 세력에게 시대착오적이라는 지적을 당하던 그들에게조차 이러한 주장은 시대착오적이던 것이다.
"요즈음 미리견에 한 번 가보지도 않고서 멋대로 미리견이 요순의 이치가 살아 숨 쉬는 원시사회인 양 떠드는 이들이 간혹가다 보이는데, 그저 한심스러울 따름이다. 대관절 그들은 왜 그들 머릿속에 시대착오적인 이상향을 공업선진국 미합중국에 대입시키는가?"
그리고 이들은 정말로 미국에 다녀와 본 적이 있거나, 친척 중 미국에 이민한 이들이 있는 이들에게 경멸당하고 외면당했다. 그들로서는 엄연히 공업선진국이며 자유민주공화국인 미국을 자꾸만 수천 년 전 나라와 동치시키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 이렇게 미국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제대로 된 친미파는, 되려 공화주의자가 드물었다. 태평양 무역이 날로 확장되면서 크게 한몫 잡거나 최소한 먹고살 걱정 정도는 해결된 이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엄연한 군주국가인 대한제국에서 공화주의를 논한다는 게 얼마나 큰 위험인지를 잘 알고 있었고, 여차하면 가문이 풍비박산 날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우리의 지상 과업은 돈을 버는 것이다. 신앙을 전도하는 것은 그다음이며, 혁명을 전도하는 것은 논외이다. 우리는 폭력과 살육을 위하여 이 험한 태평양을 건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태평양의 번영과 공존이다! 미합중국은 평화를 원하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거래국들을 위협하는 어떠한 행위도 지원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무렵 공화당의 오랜 독주가 끝나고서 새로이 들어선 글로버 클리블랜드의 민주당 정권도 대외관계에는 현상 유지를 선택했다. 태평양 무역과 황인종들의 활발한 이주가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인정한 것이다. 이는 앞으로 미국의 정권변화가 한미관계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신호이기도 했다.
미 국무부는 태평양 무역의 안정적인 번영을 위해서라도 가능한 한 대한제국을 자극할만한 행동을 하지 않으려 했고, 이는 대한제국 또한 그러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 무렵 한국 국내에 들어온 미국인들이 그다지 공화주의를 전도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은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되려, 이 무렵 미국인들은 가능한 한 한국 내에서 공화주의니 왕정주의니 하는 언급 자체를 피하는 경향이 강했다. 함부로 공화 혁명을 선동하다 추방당하는 건 개인의 문제라면, 만에 하나라도 정말로 공화국이 들어섰는데 그 공화국이 지금의 대한제국과는 달리 외세에 적대적이고 폐쇄적인 나라일 경우 감당해야 할 손해는 미국의 문제였다.
"보통선거, 비밀선거, 평등선거, 직접선거. 이것이야말로 선거의 네 기둥이며,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이 선거에 잘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선거에 참여하더라도 비밀선거 원칙을 잘 지키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미성숙하고, 막 걸음마를 시작한 갓난아이와도 같다.
그러나 그것이 이미 성숙한 우리가 아직 미숙한 그들을 비꼬거나 얕보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그들은 아직도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고 있으며 계속하여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땅히 우리 합중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요람으로서 저들이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일깨워야 하지 않겠는가?"
대신 미국은 한국의 입헌군주제 정착에 이바지하려 시도했다. 한국에 의회제도와 민주주의를 전파하고자 한 것이다. 이 부분은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의회제도와 민주주의의 확대는 흔히 태평양헌장이라고 불리던 1881년 율리시스 그랜트가 한국에 방한했을 무렵 서명한 한미우호협정 때부터 명시된 바였으니 말이다.
이에 따라 이 무렵 한국에서 정기적으로 총선이 치러질 무렵이면, 미국에서 자문단을 파견하여 선거구 설정이나 투표 당일의 운영, 개표 등에 대하여 간섭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국민당을 위시한 각 정당도 젊은 당원들을 미국에 유학을 보내 견문을 쌓도록 권했고, 이는 필수적인 절차는 아니었으나 미국에 다녀오면 당내에서 우대받았던 만큼 거의 필수적인 절차라 여겨졌다.
유혈혁명이 없더라도, 한국은 느릿하게나마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무렵의 친미파들은 자유주의를 추종하였고 또 민주주의를 추종하였으나, 공화주의는 가능한 한 언급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이대로 두면 천천히 정착할 한국의 민주주의를 공연히 혁명 따위를 언급해 후퇴시킬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정의와 자유가 살아있던 시절, 로베스피에르는 이렇게 말하였다. 「국민공회가 세울 정책의 첫 번째 원칙은 민중은 이성으로, 민중의 적들은 공포로 이끈다는 것이다. 공화국 내외의 적들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공화국과 함께 죽어야 한다. 혁명 정부는 전 제정에 항거하는 자유의 독재다.」 이 얼마나 가슴 뛰는 말인가? 이 얼마나 숭고한 언변인가?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언제까지 독재자들의 분노는 정의로, 민중의 정의는 야만이나 반란으로 불려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우리가 따라야 할 가치, 우리가 외쳐야 할 구호, 우리의 깃발, 모든 것이 그가 살아생전 남긴 언변에 담겨 있다.
민중이여, 궐기하라! 정의로운 분노로, 저 잔악한 압제자들이 그대들의 팔다리에 채웠던 족쇄를 벗어던져라!"
둘, 프랑스 대혁명과 그들이 주창한 가치를 신봉하는 경우.
이들은 친불파 내에서도 이레귤러에 해당했다. 한국이 개화를 결심하고서 가장 먼저 받아들였던 것이 프랑스였고, 가장 많은 것을 배워왔던 곳도 프랑스였던 만큼 이들 친불파는 절대다수가 기득권층이었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대한제국의 부국강병에 힘써온 이들이었다.
친미파가 경제와 무역을 거머쥐었고 친영파가 기술과학계를 거머쥐었다면, 친불파는 조정의 핵심이었다. 요컨대, 개화를 시작한 지 20년이 넘어갈 무렵에 와서는 절대다수의 요직이 친불파의 차지였고 누구보다 권력에 가까웠던 이들이 또 친불파였던 셈이다.
그런 그들이 무엇 하러 그들을 출세시켜준 황제와 황실을 축출해야 하는가-하면 대다수의 친불파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나라가 온전히 그들의 손안에 들어와서 황제는 없으면 그만인 상황이라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고 엄연히 군부가 황제의 손아귀에 있는데 무엇 하러 그런 모험을 하겠는가?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조정 내에서 조금씩 지분을 늘려가는 친독파에 대한 견제였지, 황제를 축출하고 공화국을 세우거나 하는 혁명이 아니었다. 애초에, 지금 대한제국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면 친불파는 타도당할 대상이었지 다른 누군가를 타도할만한 처지가 못 되었다. 때문에, 이들 중 공화주의자는 프랑스에 직접 다녀온 유학파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 해당했다.
"물론 우리도 자유, 평등, 박애가 이 세상 무엇보다 숭고한 가치라는 걸 인정한다. 국민공회의 혁명이 역사를 만들었음을 당연히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째서 오늘날 우리 대한제국의 존귀하신 황제 폐하께서 압제자임을 의미하는가? 그분이 민심을 거슬러 지배하고 계시던가? 그분이 스스로 당신의 권리가 하늘에서 임하였다고 하였던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우리 대한의 존귀하신 황제 폐하께서는 민심 위에 군림하시는 국민의 황제이시다. 오늘날의 불란서가 그러하듯, 우리 대한은 곧 국민의 지지 위에 국민의 황제가 군림하고 통치하는 엄연한 국민국가이다. 이는 우리의 헌법이 보증하고 있다.
우리의 조국이 이러할진대, 감히 혁명을 논하는 이들이 어찌 민중의 해방자일 수 있는가? 민중이 제국의 파멸과 존귀하신 황제 폐하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는 말인가? 그들은 단지 국민의 뜻에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스스로 로베스피에르와 같은 피에 미친 독재자가 되기를 바라는 국적(國敵)일 뿐이다."
따라서, 친불파는 이들 친불파 내 공화주의자 세력을 자신들과 같은 선상에서 보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외적으로는 국민이 지지하지 않는 공화주의가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혁명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실각하게 될 이들이 바로 자신들 친불파였으니 그러했다.
이들 친불파는 혹 저 공화주의자들이 함부로 날뛰게 되면서 자신들까지 덩달아 잠재적 역적이라는 낙인을 받게 되지는 않을까 우려했다. 혹은, 그들의 정적들이 이를 두고서 그들을 공격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리고 이들의 우려와 공포는 대부분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시대착오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진 망상 탓에 친미파 내에서도 고립되어 그 힘을 얻지 못하던 친미파 내 공화주의자들과는 달리, 이들은 프랑스 혁명에 경도되어 있던 만큼 절대다수가 굳은 신념과 행동력으로 똘똘 뭉친 과격파였기 때문이다.
"공화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대혁명 만만세-!"
1886년 프랑스 혁명 기념일.
백성의 얼을 담은 황색, 혁명의 피를 담은 적색, 대한의 푸르른 초목을 상징하는 녹색. 가로 삼색기가 휘날렸다.
범인은 박상호라는 이름의 27세 청년. 그는 남대문을 오가던 도성의 백성 앞에서 삼색기를 휘두르며 공화국과 혁명을 외쳤다. 그는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온 교환학생이었고, 한국에 돌아온 후 곧장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우수한 실적으로 다음 달 승진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이 무렵 한국 사회가 받은 충격은 더욱 강렬했다.
조사결과 단독범행이었고, 황제가 선처를 지시한 까닭에 거제도로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되었으나 이는 도성의 치안을 담당하던 한양중앙경찰청의 얼굴에 먹칠하고 조정의 관료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공화주의가 본격적으로 조정의 관료들에게 금기시되기 시작했던 것도 이날이 계기였다고 해도 좋을 만큼, 이 사건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한양중앙경찰청의 치안총감이 책임을 지고 불명예 사퇴해야 했고, 이 당시 남대문 일대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현장인력 전원의 진급이 영구히 동결되었다. 거리에서는 일주일간 통행이 제한되어 불시검문이 이뤄졌으며, 이날 이후로 8대문과 보신각에는 항시 태극기를 의무적으로 게양하게 되었다.
"참 별일도 다 있지. 앞날도 창창한 청년이 그런 짓을··· 쯧쯧."
"난 솔직히 왜 그 청년이 역적이라는지도 잘 모르겠구먼. 그 청년이 누굴 해치기를 했나? 포졸들이 오고 난 다음에는 순순히 오라를 받들었다고 하지 않은가. 그 청년이 도대체 뭘 했길래 거제도로 유배를 간단 말인가?"
"누굴 해치지는 않았더라도, 해치게 하라고 혹세무민을 시도하였지 않은가. 그럼 역적인 거지 별거 있나."
"에휴, 그냥 모두 잊으시게나. 잊도록 하세. 광인의 광증을 범인이 무슨 연유로 이해하려 시도한단 말인가? 미칠 거면 곱게 미칠 것이지, 역모라니. 에이, 쯧."
물론 이는 한양의 백성에게는 단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몇 달간 한양을 달구었던 그의 범행동기와 인물상에 관한 시답잖은 평론은 이내 시간이 흐르면서 잊혔고, 도성의 백성은 언제나 그래 왔듯이 모든 걸 잊고서 살아갔다.
조정의 관료들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직접적인 책임자인 치안총감과 현장인력들의 처벌은 시작일 뿐이었다. 이 이후로 장장 반년간을 의회는 덤터기 쓸까 두려워 몸을 사렸고, 관료들은 이를 두고 서로의 책임이라 다퉜다.
"애초에 당신네는 뭘 한 거요! 당신네 후학이 도성 한복판에서 제국을 부정하고 그 해괴망측한 깃발을 휘두르는 동안 대관절 뭘 하고 있었다는 말이요? 혹, 그자의 범행에 공감하고 있었던 건 아니오?"
"말조심하시오! 우리는 온 힘을 다하여 존귀하신 황제 폐하를 보필해왔소. 우리 대한을 부국강병의 길로 이끌고자 내 청춘을 바쳐왔고, 나의 후학들 또한 그러할 것이오. 이 대한에 이보다 헌신적인 충신들이 또 어디 있다는 말이오!"
"하지만 실제로 댁들의 후학이 도성 한복판에서 감히 혁명을 논하며 백성을 혹하게 하였잖소? 현실이 그러한데, 어찌 당신네에게 책임이 없다는 말이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때의 책임추궁은 변명하는 친불파와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여타 세력으로 정리되었다.
처음부터 책임을 회피할 여지가 없었다. 박상호라는 청년은 분명 프랑스 유학파였고, 그가 범행을 감행한 프랑스 혁명 기념일은 프랑스의 축제일이었으며, 그가 외친 구호는 분명하게 프랑스 대혁명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 무렵 친불파는 거듭된 책임추궁에 구석에 내몰렸고, 대표적인 친불파의 거두이던 어윤중이 몰래 비상을 구해와 자결을 준비할 지경까지 내몰렸다. 그동안 친영파와 친독파의 세력이 미미한 틈을 타 독주를 계속해온 친불파를 곱게 바라보지 않던 시선이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그래, 저 정도는 되어줘야 천하대장부라고 부를 법하지 않겠는가? 누구를 다치게 한 것도 아니고, 의기 있는 청년이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서 그 뜻을 만천하에 알린 것이 아닌가. 그만. 이 일은 없었던 거로 해두게."
이러한 혼란이 진정된 것은 보다 못한 황제가 나선 다음이었다. 황제는 이듬해 정월 사면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사건에 연루된 이들도 모두 정상적으로 복직할 수 있었고 진급동결도 해제되었다. 친불파는 겨우 파멸의 위기에서 벗어났으나, 대신에 적지 않은 요직을 내주며 독주체제의 끝을 알렸다.
그리고 거제도에서 풀려난 박상호는, 얼마 뒤 산을 타던 중 범에 물려 죽었다. 물론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자들은 드물었다. 이미 한반도에서 호랑이는 극히 드물게나 보이는 멸종 위기종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들 친불파 공화주의자들조차도, 사회주의에 경도된 공화주의자들의 과격성과 행동력에는 감히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