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327화 (327/530)

< 사회주의 >

사회주의에 경도된 공화주의자들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이야기해야 하는 건 이 당시의 일본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이야기해야 하는 건, 막부의 승리와 도쿠가와 주도의 문명개화는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기를 기대하던 일본의 신진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이도 저도 아닌 실망스러운 결말이었다는 사실이다.

"저들은 일본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고 말한다. 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아주를 웅비하는 대국으로 우뚝 섰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대관절 무엇이 바뀐 것인가? 진정으로 우리는 대한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아주에 우뚝 서고 있는가? 우리 혼자서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무엇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이 좁디좁은 일본 열도에 갇혀있는 우물 안 개구리일 뿐이다! 대륙은 여전히 대한과 중화의 것이고, 대양은 여전히 영미의 것이다. 무엇 하나! 온전히 무엇 하나 손에 넣지 못한 우리가 대관절 어디를 봐서 대국이고 아주에 우뚝 섰다는 말인가!"

"근왕주의자들은 이 일본을 새롭게 만들겠다고 말하였다. 혹자는 이번에야말로 덴노께 모든 권력을 돌려 드려 강력한 중앙정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고, 혹자는 덴노 아래 모두가 평등한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으며, 혹자는 오랜 봉건제를 청산하고 구주의 앞선 귀족문화를 수용하자고 하였다. 모두 생각하는 바는 달랐으나, 모두가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다.

그래서, 그들이 패배한 오늘날의 일본은 어떠한가? 강력한 중앙정부를 세우지도 못하였고, 덴노는 또다시 뒤로 내쫓겨 생사도 알기 어려워졌으며, 쇼군 아래 모두가 평등한 나라를 세우지도 못하였고, 봉건제를 청산하지도 못하였다. 그저 구주의 앞선 귀족문화만 수입하여 에도의 고관대작들이 멋을 부리는 데에 사용되고 있을 따름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인가? 대한에 뒤처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이제 우리는 왕 아래 평등을 선언한 진나라만도 못한 처지가 되었다! 일본은 아직도 중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저들이 국민국가인 줄 착각하고 있는 중세봉건 왕국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은 십수 개의 국가가 어지러이 난립하고 있는 이 저주받은 열도를 가리키는 한낮 지리적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땅에는 국민국가는커녕 민족조차 없이, 그저 도쿠가와 국(國)과 그를 섬기는 크고 작은 소국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무렵 일본의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의 학자들은 작금의 현실에 절규하고 한탄했다. 구시대를 누구보다도 경멸하던 그들에게, 구시대가 고스란히 살아남아 겉으로 보기에 얼핏 그럴듯해 보이는 어중간한 유신은 그야말로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각지의 봉건영주들은 영주의 지위가 박탈된 다음에도 지번사라는 세습 총독으로서 그들의 영지를 다스리고 있었고, 군관은 당연히 무사의 전유물이었으며, 문관 또한 그러했다. 신분에 따라 출세할 수 있는 한도가 정해져 있는 건 당연했으며, 신분에 따라 받을 수 있는 교육에 차등이 있는 것도 당연했다. 하물며, 상투를 자르고서도 무사들이 허리춤에 검을 차고서 으스대며 신분을 뽐내는 일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여전히 폐번치현은 머나먼 이야기였고, 단지 중앙에서 지방의 권한들 여럿을 회수하여 그 힘을 크게 늘렸을 따름이었다. 중앙정부가 지방을 상대로 명백한 우세를 차지하기는 했으나, 압도하지는 못하던 것이다. 중앙에서 각 번의 군권을 회수한 이후에도, 각 가문은 가문의 식솔들이란 명분으로 공공연히 사병을 보유하였다.

이런 와중에 국민국가라는 개념을 일본 국민이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우선 누구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는지조차 모호했다. 점차 숙청의 순서를 밟아가는 덴노인가, 아직 지방을 압도하지 못한 상국 겸 총리대신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인가, 아니면 그동안 충성을 바쳐온 현지의 영주인가.

"끔찍하다! 작금의 일본을 보고 있자면 구역질이 난다! 아직도 무사들이 허리춤에 검을 차고서 거리를 활보하며,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섬김을 받는다! 이웃 대한이 백성에게 중등교육을 의무화하는 동안 일본은 여전히 어리석은 백성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조차 꺼리고 있고, 저들이 봉건 지주들을 숙청하는 동안 우리는 아직도 봉건영주들이 세습 총독으로서 지방을 다스리고 있다!

이게, 이게 진정으로 국민국가란 말인가? 이게 대관절 무슨 놈의 나라인가! 일본은 무엇하나 변하지 못했다. 우리는 무엇하나 바꾸지 못하였다!"

일본의 부국강병과 국민국가화를 통한 근대적 제국의 건설을 꿈꾸던 일본의 계몽주의자들에게 이러한 현실이 더 없이 저주스럽게 비쳤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일본은 진보하기는커녕, 되려 부분적으로 쇠퇴했다. 날로 강성해지는 해군력과 활발한 태평양 무역으로 부흥하는 경제에 박수를 보내던 백성과는 달리, 이들은 도저히 봉건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본의 현실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었던 것은 이 무렵 에도 정부에서 소위 일본식 민주주의를 도입하면서였다. 이 일본식 민주주의 원칙에 따르자면 봉건귀족, 하급 무사, 상인층, 일반 서민은 선거 시 제각각 다른 수의 표를 행사했다. 신분이 더 높을수록 보다 많은 표를 행사할 수 있었고, 신분이 더 낮을수록 적은 표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아래 사람 있는 계급주의 사회를 고착화하기 위한 선거법이었다. 이러한 방침은 날로 그 힘을 늘려가는 중앙을 불만스럽게 바라보던 각 번에 만족감과 안심감을 주었으나, 반대로 일본의 계몽주의자들에게는 절망을 안겨다 주었다.

이 무렵부터 일본의 계몽주의자들은 현재의 정부 아래에서 일본이 국민국가를 이룩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완전하게 버렸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그 대안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들에게는 이미 충분한 대안이 제시되어 있었다.

"결국 봉건 막부에는 개화의 과업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것이다! 삿초의 망령이여, 되살아나라! 저 구닥다리 막부를 멸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아직 늦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막부와 저 거들먹거리는 에도의 배불뚝이 무사들을 베지 못한다면, 우리 일본은 언제까지고 과거에 사로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아직이다! 아직 우리는 패배하지 않았다! 아직 계속하여 싸우고자 하는 단 한 사람의 병사라도 남아있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패한 것이 아니다! 다시 시작하자! 이번에는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번에야말로 도쿠가와의 목을 친다!"

첫째는 무진 전쟁에서 패배하여 사라진 삿초의 망령에 기대는 방법.

이는 일본 내에서 가장 거대하고 활발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가장 알기 쉬웠기 때문이다.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과거에 한 번 제시되었으나 시작해보지도 못하고서 끝났던 과거의 이념을 내세우는 게 쉬운 건 당연한 이치였다. 이들은 사츠마, 초슈, 토사 등 과거 막부에 대항하다 패배한 번들에서 특히나 강성했다.

그리고 가장 거대하고 활발했기 때문에 가장 집중적으로 견제를 받았으며, 또 한국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던 까닭에 날로 궁지에 몰려가는 목소리였다. 이들의 패착이 있었다면 외세의 간섭 가능성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서쪽으로 치우쳐 있는 이들 영지는 한반도에 대단히 가까웠고, 이 때문에 흔히 한국인 상인들이 들락거렸다. 그들 중 일본을 염탐하러 온 요원들이 뒤섞여 있음은 물론이었다.

에도 정부는 이러한 한국의 개입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사실상 방관하였다. 한국이 일본 내에 더욱 영향력을 확대하는 건 내키지 않았으나, 현 정권에 가장 큰 위협이 되던 삿초의 망령들에 한국이 공동대응하는 건 체제 유지에 큰 도움이 되었던 까닭이다. 결국,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체제 유지였던 까닭이다.

"이놈이 이거 아주 그냥 지독한 놈이구먼! 코에 고춧가루를 부어 넣어도 입을 다물고 있으니 원···. 당장 배후를 불지 못해!"

"끄으으, 그대들은 조선인이 아니요? 어찌 조선인이 우리 일본국의 법률을 들먹이며 나를 심문한다는 말이오! 우리 일본국이 그대들의 속국이라도 된다는 말이오?"

"아, 글쎄. 그거야 나는 모르는 일이고, 이건 너희 나라에서 요청한 일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나? 우리는 초벌구이 한 번 해주는 거고, 마저 구워서 냅다 삼키는 게 느그 나라 경찰들이 하는 일이란 말이다. 이놈아!"

1882년 정기회맹에서 아주 형사경찰기구가 정식으로 발족하여 각국의 경찰력이 긴밀한 협력을 맺을 수 있게 되면서, 이들에 대한 견제는 더욱 노골적으로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던 탐문과 수사가 국제수사 공조라는 명목으로 공공연히 이뤄지게 된 것이다.

결국 근왕파는 궁지에 몰렸고, 최후의 발악을 시도했다. 바로 덴노의 밀서를 받은 구로다 기요타카의 주도로 가고시마에 모여 최후의 봉기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150여명의 낭인들이 모여들었고, 일본 국가헌병대에 내통자를 잠입시켜 무기고에서 헌병대용 장총을 50정 남짓을 빼돌리는 등 제법 구색을 갖추어갔다.

"어명이다! 너희들 모두 역모를 꾸민 죄로 체포하겠다!"

"그게 무슨 헛소리요! 이 몸이 추레하여도 한때 조정의 녹을 먹던 어엿한 무사요. 어찌 증거 하나 없이 이 몸을 구금한다는 말이오!"

"증거? 허, 증거라. 이미 다 끝났다. 야마구치라는 양조쟁이를 들어본적 없느냐?"

"···내가 일을 그르치고 말았구나! 폐하! 이 머저리가 또 한번 폐하를 실망 시켜드리고 말았습니다! 이 죄를 어찌하면 좋으리까?"

그리고 1885년.

가고시마 봉기는 허무하게도 주청이라는 이름의 인력거꾼 화교가 고발함으로서 사전발각 되었다. 강남 대기근 당시 이들 구 삿초 동맹에 이주한 현지 화교들은 이러한 에도 정부와 한국 정부의 수사에 더 없이 협조적이었다. 그들이 적대적인 현지인들에 맞서 새로운 고향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라도 양국 정부의 도움과 지원이 절실했던 까닭이다.

곧장 한일 양국의 합동조사가 시작되었다. 덴노의 밀서를 운반한 산조 사네토미가 소식을 듣고 음독자살한 것을 시작으로 근왕파는 파멸했고, 혹독한 조사과정 중 16명이 옥사하고 7명이 전향서를 써 그 스무배가 넘는 인원을 옥과 형장으로 보내며 근왕파의 마지막 뿌리를 드러냈다.

봉기를 주모한 구로다 기요타카는 도주 중 할복자살로 생을 마무리 지었고, 총상을 입어 의식불명 상태로 생포 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에도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목이 잘렸다. 덴노가 머물던 궁에는 이제 보안을 이유로 5m 높이에 콘크리트벽이 둘러졌고, 상국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메이지(明治) 연호를 폐하고 서력을 도입함을 선언했다.

유신을 꿈꾸었던 근왕파가 일본 땅에서 완전히 소멸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근왕파가 몰락하자, 이제는 두 가지 대안이 남아있었다. 이대로 현실을 인정하고 도쿠가와 정권에 부역하는 것이 첫째였고, 아예 모든 것을 깡그리 부수고서 잿더미 위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게 둘째였다.

"민권-론자의 눈물이 비처럼 흘러-단련해 낸 야마토 담력~♬ 국리민복 증진하고 민권을 보양하세! 만일 여의치 않다면, 다이너마이트로 쾅!"

이토가 예견한 일본 공화주의 운동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본격적으로 태동하였다. 이들은 자신을 공화주의자라고 자칭하기보다는 민권론자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으나, 기실 거기서 거기였다. 민권을 보양하자면서 폭탄테러를 종용하는 노래를 지어 부르고 다니던 이들이 민권만 증진하고서 끝낼 리가 없었다.

이들은 차마 죽어도 도쿠가와 봉건 정권의 녹봉을 받으면서는 못 살겠다는 과격파 집단이었던 만큼, 한국의 공화주의자들과는 그 궤를 달리했다. 한국에서 고작 해봐야 프랑스 유학생이 남대문에서 깃발을 휘둘렀다는 걸로 소란이 벌어지는 동안, 일본의 수면 아래에서는 이미 공화국 담론과 헌법제정에 대한 논의까지 이루어지던 판국이었다.

에도 거리 한복판에 공화국 수립을 위한 혁명을 선동하는 전단이 흩날린 것은 기본이었고, 기타큐슈에서 학생들에게 공화주의를 가르치던 초등교사가 수업 중 국가헌병대에 체포되어 갇히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이들의 열망은, 그만큼 강렬했다.

"장차 우리는 미리견과 같은 공화국을 세워야 한다.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하여 헌신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우리의 새로운 헌법 아래, 우리 일본은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조차도 미적지근하다! 그리고 미리견과 같은 나라를 수립한다고 했는가? 그럼 그 끝은 결국 자본가들만의 지상낙원이 아닌가. 혁명이 오롯이 민중의 손에서 이뤄져야 하듯이, 새로이 수립될 우리의 공화국은 오로지 민중을 위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사회주의만이 핍박받는 우리 일본 인민을 위한 유일한 대안이다!"

이들 공화주의자는 크게 두 부류가 존재하였다. 하나는 미국을 본받아 자유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한 연방제 공화국을 세우자는 이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카를 마르크스와 베를린 시민의 정신을 이어받아 사회주의 혁명 공화국을 수립하자는 주장이었다. 그 숫자에서는 전자가 압도하였으나, 활동력과 존재감에서는 후자가 단연 압도하였다.

이는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미국과 같은 연방제 공화국을 지지하던 상인계층은 아무래도 잃을 게 많았다. 공공연히 에도 정부를 적대하고서 공화주의자들을 지지해주기에는 만에 하나 발각되었을 때 잃게 될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자연히 지원은 조심스럽게 이루어졌고, 후원자들의 목소리를 배격할 수 없었던 이들 공화주의자는 점진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 무렵 일본의 산업화로 희생되고 있던 민중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이러한 해당 사항이 전혀 없었다. 활발하게, 아니 조금 과격하게 말하여 미쳐 날뛰는 것이야말로 이들이 지지를 얻고 그 이름을 각인시키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늘날 저 부유한 자들은 우리가 가난한 것이 우리가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현실에 찌들어 내일을 볼 생각도 지혜도 없이, 집에 돌아오면 그저 잠이나 퍼질러 자고 도박에, 여자에, 술이나 들이키며 허송세월하면서 부유해지기를 바라는 건 미련한 짓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말한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우리가 가난한 것은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버겁기 때문이고, 매일 같이 잠이나 자는 건 그날의 일이 고되기 때문이고, 술과 도박 따위로 허송세월하는 것은 이 자그마한 집에서 고작 해봐야 한 시진도 안되는 짧은 휴식 시간 안에 즐길 유흥거리가 그 외에 달리 없기 때문이다!"

"왜 저들은 항상 우리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가? 저들이 부유한 건 그저 저들이 잘났기 때문이고, 우리가 가난한 건 그저 우리가 못났기 때문인가? 진정으로 그러한가? 그럴 리가 없다. 저들이 신불도 아닐진대, 이 더러운 속세에 태어난 일개 인간이 더러움 하나 없이 잘못 하나 없이 승승장구할 수 있는가?

우리 솔직해지자. 작금의 이러한 불공평한 현실은 잘못된 세상 탓이라고! 약자에게는 자신을 지킬 무기 하나 가질 것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강자에게는 무제한의 군비증강을 허용해주는 작금의 잘못된 현실 탓이라고!"

"너희 저주받은 자들아, 단결하라! 혼자서는 저 탐욕스러운 강자들에게 맞설 수 없는 힘없는 약자들이여, 단결하라! 함께하였을 때 우리는 비로소 저들과 맞설 수 있다! 함께하였을 때 우리는 비로소 저들을 이길 수 있다! 단결하라! 조합의 붉은 깃발 아래 모여라! 함께하였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몫을 저들에게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사회주의자의 주장은 이 무렵 일본 도시노동자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른거리던 간지러운 곳을 누구보다 시원하게 긁어주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도시노동자들과 빈민촌이 모여있는 곳이면 어디나 붉은 깃발과 공산당 선언을 품에 끌어안고서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에게 힘을 합쳐 맞서 싸울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처음 알음알음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함과 동시에 일본에서 제일가는 위험분자들로 등극했다. 하다못해 근왕주의자들도 덴노 중심의 나라를 다시 일으키자는 것이었고, 연방제 공화론자들도 상인들 중심의 나라를 일으키자는 것이었으나 사회주의자들은 그들 전부를 숙청하고서 최하층 공장 노동자들에 의한 지배를 주장했다.

누가 봐도 가장 이질적인 세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많은 배척을 받았고, 그들의 주장은 위험시되었으나- 그들에게는 딱 하나 다른 이들에게 없던 이점이 있었다.

사회주의 세력은, 일본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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