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328화 (328/530)

< 두 갈래 길 >

이 시대의 사회주의에 대하여 말하기에 앞서 먼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이 시대는 모두가 '서투른' 시대였다는 사실이다.

인류 문명은 역사상 처음으로 산업혁명 이후의 기계문명을 경험하고 있었다. 보통은 수백 년에 걸쳐서 일어나던 크고 작은 변화들이 이제는 길어봐야 수십 년 안에 일어났다.

1830년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은 대륙을 횡단하는데 수년이 걸리던 시절을 상상하지 못했고, 1850년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은 전등이 없는 밤을 상상하지 못하였으며, 1870년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은 연락을 주고받는데 반년 넘게 걸리던 시절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은 분명 인류사를 위한 위대한 진보의 시작이었다. 가히 혁명이라고 불러도 좋은 변화였다.

그러나 더없이 유감스럽게도- 인류는 그들이 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격렬한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극빈층의 인구증가율이 너무나 폭발적이다. 과거에는 자연적인 질병, 기아 따위의 이유로 조절되던 것이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고 말았다. 품위 있는 문화생활을 즐기고, 관계를 맺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기본 예의를 갖추는 중산층 이상의 시민계층과는 달리 이들 빈민층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종일 짐승과도 같은 교미에 몰두하거나, 그렇지 않은 시간에는 폭력과 도박 따위의 크고 작은 범죄에 힘쓰는 이들 빈민층이 장차 더욱 증가하여 식량을 낭비한다면 인류 문명은 자멸과 쇠퇴의 길을 걷고 말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이들 거지의 갓난아이들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 인위적으로 이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

"왜 우리 보다 부유한 자들이 더욱 가난한 자들을 책임질 필요가 있는가? 저들이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신의 뜻이나, 저들이 가난하게 죽는 것은 스스로 게으름 탓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본 적이 있는가? 난 저들이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채찍을 들지 않으면 일하려 하지 않고, 매일 같이 불평하기 바쁘며 다른 누군가를 탓하기 바쁘다.

참으로 한심한 족속들이 아닌가! 왜 저들은 자신을 바꾸고자 하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두드리면 열린다고 성서에서도 말하였을 진데, 저들은 두드리기는커녕 매일매일 문 앞을 나뒹굴며 하루를 허비하고 있을 따름이다. 난 저 거지들에게 봉급이라는 이름의 헌금을 바쳐야 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너무나 저주스럽다!"

"공장주는 실직한 노동자에게 보상할 이유가 없다. 그 가장이 일하지 못하게 되어 일가족이 굶어 죽는다고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예로부터 질병과 기아는 흔히 존재해왔고, 그 덕분에 인구는 언제나 적정선에서 유지됐다. 질병과 기아를 극복해가는 작금의 시대에서, 이와 같은 실직에 의한 기아는 인구를 적정선에서 유지하고자 하는 창조주의 가호이며-.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사회적 약자들의 자연도태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자연도태는 장차 강자생존을 낳아 우리 사회가 더욱 강인해지는 결과를 끌어낼 테니, 오히려 정기적인 해고를 통한 사회적 약자의 숙청은 더욱 권장됨이 바람직하다."

힘의 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였다. 그것은 열강과 그렇지 않은 나라들 사이에서도 성립하였으나, 일정 수준 이상 산업화를 달성한 모든 나라에서도 공통으로 성립하였다. 약자는 약한 게 죄였고, 강자는 강했기에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 그것이 국가 간의 논리가 아닌 사회구성원 간의 관계로 넘어가면, 흔히 말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되는 것이었고 말이다.

도시 빈민은 중산층 이상의 시민에게 흔히 인간의 형상을 한 무언가 즈음으로 취급되었다. 과거에는 노예가 그러했으며, 이제는 그들의 차례였을 뿐이다. 그리고 시민은 이들 노예의 대체재를 멸시했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공공연히 이들을 죽여서 숫자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도 했다.

"프롤레타리아의 피고름 위에 군림하는 저 자본 귀족들을 죽이자! 피로서 굶주려 죽어간 우리 형제들에게 보상토록 하자!"

"민족에 속지 마라, 동무들! 민족이란 프롤레타리아 간의 분열을 꾀하는 부르주아들의 이간책일 뿐이다! 지구 위에 모든 핍박받는 프롤레타리아들은 조합의 붉은 깃발 아래 하나이며, 인터내셔널의 붉은 깃발 아래 국경은 저 당장에라도 무너지려고 하는 낡아빠진 집과 함께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저 가증스러운 위선자들을 보라! 교회는 약자들을 위한다는 핑계를 대며 썩어 문드러지고 허물어져 가는 이 낡은 집을 어떻게든 지키고자 프롤레타리아들을 현혹하고 있다! 봉사라는 겉치레 따위에 속지 마라, 동무들! 모두 힘을 합쳐 저 황금으로 치장한 봉건 잔재를 파괴하자!"

이 무렵의 사회주의자들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이러한 말세적 현실 속에서 태동한 일종의 종말론자들이었다. 기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그 위에 낙원을 만들어내자는 종말론자들 말이다. 그리고 여느 종말론이 그렇듯이, 이는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더 없이 매혹적이었으나 현재에 만족하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끔찍한 주장이었다.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은 당연하게도 이 중 전자에 해당했기에, 이들은 유럽과 미국의 사회주의자들과 연계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 참석하여 주셔서 대단한 영광입니다, 나가에 조민 씨. 오늘의 만남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들이 인터내셔널의 대의 아래 협동할 수 있는 귀중한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저야말로 초대해주셔서 대단한 영광입니다, 엥겔스 씨. 국제 프롤레타리아들의 대부께서 몸소 초대장을 보내주셨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시간을 쪼개서라도 가야지요."

"하하하! 대부라니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저보다는, 목숨을 바쳐가며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힘썼던 제 친우야말로 그와 같은 찬사를 받을 가치가 있겠지요."

베를린에서 치러진 카를 마르크스 순교 10주년 기념일에 일본의 민권론자 나가에 조민이 참석한 것이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이 무렵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베를린 봉기와 이에 따른 마르크스의 순교 이래로 그의 친우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주도하고 있었고, 그들의 활동은 각국 정부의 감시를 받았다.

어째서 탄압이 아니라 감시, 였는가 하면 영국발 대공황 이래로 그 세력이 부쩍 성장하여 단순히 힘으로 찍어누를 수 없는 수준까지 성장한 다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장에 영국부터가 인터내셔널에 가입된 사회주의 계열 정당이었던 노동당을 의회에 받아들였고, 프랑스와 프로이센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인터내셔널 총평의회는 세계혁명을 위하여 아시아의 역할이 필요불가결하다고 봤기에, 이러한 일본 내 사회주의 세력과의 연결을 더욱 각별하게 여겼다. 그리고 이는 국내에서 고립된 일본 내 사회주의 세력에게도 마찬가지였기에, 이들은 날로 교류를 활발하게 이어나갔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말해주십시오. 내 모든 걸 지원하리다. 불과 30년 전과는 달리, 이제 세계는 아시아라고 하는 또 하나의 대륙을 일원으로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세계혁명을 위해서는 아시아 내에서도 그에 호응할 세력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엥겔스 씨의 말씀대로입니다. 우리 아주는 구주의 전철을 밟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폐해에 맞설 방법 또한 구주와 같겠지요. 저는 이 사회주의야말로 핍박받는 일본 인민들을 위한 유일한 대안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동지가 되었습니다. 조민 동지, 아시아의 혁명을 잘 부탁합니다!"

이러한 배경은 일본 내 사회주의 세력이 폭발적인 활동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였다. 이들은 인터내셔널 총평의회에서 활동비를 지원받았고, 유럽 유학을 배려받았고, 활동 시 필요한 선전 문구나 노하우 따위를 조언받았다.

그야말로 속성 과외가 따로 없었다. 이들 일본 사회주의자들의 활동력은 여전히 전근대에 발을 걸치고 있던 근왕주의자들이나 비교적 온건한 자유주의 계열 공화주의자들과 치고받던 일본 경찰력에는 문화적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아버지가 경찰을 했기에 아들도 경찰을 하던 도쿠가와 정권 아래에서의 일본 경찰력은 사회주의자들이 서역에서 들여온 선진적인 사보타주 활동에 대응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근왕파와 달리 이들은 일본 전국에 걸쳐 널리 퍼져있었다. 도쿠가와의 근거지인 에도와 관동 일대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관동은 관서보다 산업화가 빠르게 진척되었기에 사회주의 세력의 힘도 속속들이 미쳤다.

"일본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모두 힘을 합쳐 다가올 15일 총파업에 나서자! 저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

"우리 항만 노동자들이야말로 일본 경제의 대들보다! 우리가 멈추면 일본이라는 나라의 대동맥도 멈춘다! 그것을 보여주자!"

1888년.

3천 명이 조금 넘는 항만노동자들을 동원한 일본 항만 총파업은 이러한 경찰력의 무능과 사회주의 세력의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었다. 비록 전국 총파업은 실패로 돌아가 요코스카와 요코하마 등지에 그쳤고 기마경찰을 투입하며 1달 만에 100여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며 마무리되었으나, 다름 아닌 수도권에서 3천 명이 넘는 군중이 집결하였다는 소식은 도쿠가와 정권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그 군중을 현혹한 건 다름 아닌 체제 전복을 꾀하는 사회주의 세력이었다. 예도가 발칵 뒤집힌 건 당연한 순서였다. 근왕파를 숙청하였다고 늘어져 있던 도쿠가와 정권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었던 셈이다.

에도의 무사들은 수도권이라 할 수 있는 요코하마-요코스카 해안에 역도들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에 경악했으며, 각 번의 지번사들은 이 틈을 타 상국 요시노부의 지도력을 흠잡았다. 얼마나 정치를 못 하였으면 백성이 이리도 성화겠냐는 논리였다.

결국 상국은 무언가 이에 대한 해결책 내지는 대답을 내놓아야만 했다.

"주모자들을 옥에 가두어 그 배후를 캐내고, 사건에 연루된 역도들을 동토에 유배를 보내도록 하라!"

"""넷!"""

그리고 그 대답은 더 없이 전근대적이었다.

옥에 갇히고 유배를 당한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은, 감옥의 죄수들과 유배지의 현지 주민에게 그들의 사상을 널리 전파해 나갔다.

* * *

그리고 이는 한국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자본가들은 그야말로 악귀 같았고, 분노하는 극빈층 앞에 붉은 깃발을 들고 나타난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에게 무기를 들고 일어서 맞서 싸울 걸 종용했다.

다만, 한 가지만은 다른 것이 있었다.

그 붉은 깃발을 들고 나타난 이들조차 유학자였다는 사실이다.

"본디 나라의 녹을 받으며 사는 목민관의 책무가 대관절 무엇이던가? 위로는 임금을 위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한데 소위 오늘날 작금의 관료란 작자들은 어떠한가? 권세 있는 명가와 상인들을 두려워하여 단지 그들에게 비위를 맞추며 제 한 몸의 부귀영화를 꿈꾸고 있지 않은가!

이는 위로는 황제를 욕되게 하며, 아래로는 백성을 고되게 하고 있으니 이보다 그릇된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저들이 대관절 나라의 녹을 축내는 것 외에 달리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지난 반 천년 간 이어져 온 우리 유구한 대조선국이 이 유구한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항시 민심에 귀를 기울여온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민심을 다스릴 수 있었는가? 항시 기근에 대비하고, 힘 있는 자들이 민생을 어지럽게 하지는 않는지 늘 감시하여 백성이 절로 임금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하였기 때문이다.

한데 작금의 세태는 어떠한가? 내 도시에 나아가 공장에서 일하는 우리 가엾은 백성을 보았다. 행색은 석 달은 씻지 못한 듯하여 꾀죄죄하고 고기 기름은커녕 무 하나 없는 뭇국에 찰기 하나 없는 안남미를 허겁지겁 말아먹는데 보고 있는 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한데 그러한 백성이 한둘이 아니오, 내 시야 끝에서 반대편 끄트머리까지 가득하였으니 그저 통탄할 노릇이다.

어찌하여 이 나라의 선비라는 작자들은 이 새로운 풍요 속의 기근에 관하여 감히 논하고자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어찌하여 우리 힘없는 백성에게 지엄한 국법이 항시 곁에서 그들을 위하고 있음을 깨닫도록 해주지 않는가!"

"혹자는 시비련에서 들여왔다는 여우 모피조차 흠집이 났다며 버리는데, 혹자는 그 흔한 면 옷 하나 사 입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작금의 세태가 그릇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부유한 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니 바야흐로 사람의 귀천이 이까짓 돈 따위로 정해지는 시대가 오고야 말았다.

혹자는 서역은 이보다 극악할진대 어찌하여 이를 그릇 되었다고 말하느냐 하지만, 그렇다면 감히 단언하건대 작금의 세상이 통째로 그릇되었다. 맹자 왈 민심이 곧 천심이라고 하였고, 루소 왈 국가란 국민의 합의 위에 세워진다고 하였다. 하면 당연히 나라는 백성을 위하여 존립하여야 하지 않는가.

저들은 우리 백성이 아닌가? 가난하고 비천하다면 백성이 아니라는 말인가? 이 나라의 헌법이 이 나라의 주권은 백성에 있다고 하였거늘, 어찌 이 나라가 백성을 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이들은 신진학자층과 전통적 유림의 중간쯤에 있는 자들이었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그 융합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자라나면서 유교 경전과 서역에서 들어온 철학 서적을 동시에 접하면서 자라났다. 유학은 선비로서 익혀야 할 기본소양이었고, 서역의 철학은 새로운 시대의 학자로 대접받기 위한 상식이었다.

그 때문에 이들은 유학을 근간으로 서역의 사회주의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그들은 지난 반 천년 간 조선이 어떻게 민심을 다스려왔는지에 대하여 주목했고, 정부가 시장에 어떠한 개입도 해서는 안 된다는 야경국가론에 증오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그간 조선이 그래 왔듯이, 강력한 정부가 민생을 위하여 공권력을 휘두르는 걸 항시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정부는 '당연히' 민생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시대가 변하였다면, 마땅히 구휼 또한 그러해야 한다. 체계적이고, 혁신적인 새로운 구휼제도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 이상 풍요 속의 기근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민생을 위하는 것만이 곧 종묘와 사직을 위하는 길이며, 또한 황상의 은덕을 만백성에 전하는 유일한 길인 까닭이다."

손병희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새로운 구휼제도의 필요성과 이를 지탱하기 위한 거대한 정부의 등장을 거듭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혁명을 내포하고 있지 않았다. 다만 체질 개선을 이야기하였을 뿐이다.

손병희와 그를 따르는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을 주장하는 서역의 사회주의자들이나 일본의 사회주의자들보다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이 무렵 한국의 국가 위신이 하늘을 찌를듯하였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대다수 백성이 작금의 체제를 뒤엎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보니, 전통적인 사회주의자들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빈틈을 파고든 것이 이들이었다. 일본의 전통적 사회주의자들은 수정주의라 불렀으나, 그들 자신은 자신을 이렇게 자칭했다.

유교 사회주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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