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학 >
그리고 이 유교 사회주의는 이념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유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면, 조직적으로는 동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동학의 접주 손병희가 유교 사회주의의 사상가로 이름을 날린 건 조금도 우연이 아니었다. 이 무렵 한국은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 은근히 권장되고 있었다. 당장에 황제의 친모가 천주교도였고, 황제의 친부는 미리견으로 건너가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간증했으며, 황제는 비록 스스로 공인하지는 않았으나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과 기민한 관계를 맺으며 반쯤 천주교도임이 확실시되던 차였다.
이런 와중 한국 내 친불파 확산을 위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파리 외방전교회를 지원하던 프랑스 정부나 한국에서 사업이 번창하기 위해 교회를 중심으로 뭉쳐 살던 미국인 사업가들이 더해지다 보니 개항 이래로 동학은 줄곧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천주교 성당에 다니면 조정을 장악한 친불파 관료들과 연줄이 닿고, 개신교 교회에 다니면 재계를 장악한 친미파와 연줄이 닿으나 동학은 그만한 이점이 없었다.
불교나 토속신앙 등은 뿌리가 깊다 보니 영향이 적었으나, 동학과 기독교는 피차 신흥종교로서 한국 내에서 신자들을 경쟁하다 보니 그 직격타를 얻어맞았던 것이다. 교주 최제우의 처형 이래로 휘청이던 동학은 재정비의 기회도 없이 한국 내 기독교 확산과 함께 쇠락의 길을 걸었고, 결국 2대 교주 최시형은 새로운 길을 찾을 수밖에는 없었다.
"바야흐로 서학의 시대가 오고야 말았다. 천하만민이 서역의 앞선 문물을 하루빨리 받아들이자고 아우성을 치며, 서학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여 많은 신자가 우리 동학을 외면하고 있다. 하나, 그것이 어찌 한울님께서 우리 동학이 사라지기를 바라신 까닭이겠는가? 이는 곧 새로운 시련이니, 우리는 장차 교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 고통받는 이웃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탐구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고, 저들에게 무엇이 없는가를 알게 된다면, 그것이 곧 지피지기면 백전불태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무수한 신자와 접주들이 발길을 돌리는 와중, 2대 교주 최시형이 선택한 길은 궁지에 몰렸음을 시인하고서 변혁을 추구하는 길이었다. 이 무렵부터 동학은 세속을 등진 교단이라기보다는 사회변혁을 위하여 활동하는 일종의 시민운동 단체가 되었다. 최시형은 끝없이 접주들의 현실참여를 촉구하였고, 그 자신 또한 도시와 농촌을 오가며 작금의 시대에 무엇이 부족한지를 살폈다.
이 과정에서 최시형이 거둔 최대의 성과는 바로 교단이 시대에 뒤처지는 걸 피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시대가 어떻게 변하여가는지 항시 귀를 기울였고, 필요하다면 한국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선교법이나 종교의식을 흉내 내며 교단으로서의 기틀을 닦아갔다.
그런데도 이미 떠나고 만 신도들의 발길을 돌리지는 못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동학은 본격적인 교단으로 거듭나며 이 이상의 신자가 이탈하여 교세가 완전히 사그라지는 일만은 피할 수 있었다. 동학은 이제 한울교라 불리게 되었으며, 황제가 종교의 자유를 공인함으로써 조금씩 물 위로 그 정체를 내보일 수 있게 되었다.
"첫째. 황명에 항시 귀를 기울여라. 오늘날 천하만민이 황상을 따르고 있으니, 경거망동하여 황상을 욕보인다면 교인들은 우리를 외면하고 말 것이다.
둘째. 천하의 세태에 귀를 기울여라. 가라앉는 배에 오르는 것도 아니 될 일이고, 하물며 배에 구멍이 난 줄도 모르는 것은 더더욱 아니 될 일이다. 우리 교인들을 그러한 위험에 끌어들여서는 결단코 아니 된다.
셋째. 백성의 불평에 귀를 기울여라. 우리는 비록 배후가 시일이 짧아 서역의 기리사독(基利斯督)과 같이 부귀영화를 약속할 수 없으나, 마음의 안식을 주는 것만은 할 수 있다. 항시 백성의 불평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어 그들이 자연히 한울님을 따를 수 있도록 안배하라."
이 무렵 최시형이 내세운 것은 흔히 삼청(三聽) 원칙이라고 불리던 위 세 가지의 원칙이었다. 그 이름 그대로, 세 가지 소리에 항상 귀를 기울이라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었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한울교는 조금씩 교세를 다시금 늘려갈 수 있었고, 백성을 대변하며 얻은 명성은 신진학자층과 유림 출신의 식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1870년대 중후반에 접어들었을 무렵, 한때 수백에서 기천까지 그 교세가 크게 줄었던 동학은 다시금 10만에 이르는 교인들을 자랑하며 그 세를 크게 불릴 수 있었다. 이렇게 날로 늘어나는 교세가 조정에 감지되었음은 물론이었다. 조정의 관료들은 교주 최제우의 죽음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고, 따라서 동학의 재흥은 관료들의 경계와 의혹을 일으켰다.
무엇보다 교세를 늘리려고 일부러 백성의 편에 선 것이 결정적이었다. 산업화가 한창 진행되던 무렵에 백성이라고 하는 대범주에는 분명히 도시 노동자라고 하는 소범주가 포함되어있었고, 한울교의 설교자들은 갖은 집회와 시위 따위에 얼굴을 들이밀며 이미 수차례 검거된 바 있었다.
"혹세무민을 일삼는 역적 최시우의 잔당들을 벌하소서!"
"오늘날 불자들이 도성을 오고 갈 수 있는 것은 황상께서 자비를 베푸신 까닭이요, 천주학이 융성한 것은 프랑스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함이며, 감리회와 장로회가 널리 받들어지고 있는 것은 미리견의 태상황이 몸소 임하며 미리견과 대한국이 둘도 없을 우방이 된 까닭입니다.
하오나 오늘날 한울교는 단지 천하에 혹세무민을 일삼아 어린 백성이 그릇된 길을 걷도록 권하고 있으니, 청컨대 저들을 벌하소서!"
조정의 관료들 사이에서 재차 동학을 금지하라는 목소리가 나온 것도 필연적인 일이었다. 아무리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고 있다고 하나, 한때 역적으로서 벌해진 바 있으며 현재진행형으로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반사회적 단체를 용인할 필요까지는 있느냐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무엇보다 이 무렵 의회는 조금씩 신흥 민족자본가들로 채워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있어서 도시 노동자들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는 한울교의 존재는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아직 서역의 자본가들을 따라잡으려면 30년은 더 남았는데, 뭣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건 없이 이것저것 불평만 늘어놓으니 그들로서는 짜증이 치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여 의회는 1878년, 1882년, 1885년. 이렇게 세 차례에 걸쳐 동학 금지법안을 의결했다. 여기에는 교주 최시형과 대접주들의 처벌 또한 당연히 포함되어있었다.
"경들의 근심은 내 잘 알겠소. 하나, 진정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은 무턱대고 금지할 것이 아니라 어찌하여 백성이 그와 같은 잡설에 빠져들고 말았는가 탐구하는 자세가 아니겠소? 저들 또한 짐의 백성일진대, 진정 저들이 내게 돌아서고 말았다면 어찌 나의 탓이 없노라 할 수 있겠소? 이것이 다 짐이 부덕한 까닭이오."
다만 여기에 황제는 미적지근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황제에게 자신이 있던 까닭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을 기억하던 황제는 그렇기에 작금의 정세에서 동학이 난을 일으키기란 요원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봉기 초기 속수무책으로 동학군에 당하던 조선군과 달리 작금의 한국군은 개틀링 기관총을 위시한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한국은 외국의 도움이 없으면 반란 진압도 불가능한 불량국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황제는 동학을 금지함으로써 자신이 명시한 종교의 자유가 무너지지는 않을까 우려했다. 이전과는 달리 기독교 종파들과 불교 종파들도 제법 뿌리를 내려 유림이 공세를 펼친다고 한들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겠으나, 그렇다고 해도 전례가 한 번이라도 남는다면 두 번째는 그리 어려울 것도 없었다. 황제는 한 입으로 두말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의회는 세 차례에 걸쳐서 동학을 금지해달라 요청하였고 황제는 이 세 번의 요청을 모조리 뿌리쳤다. 이는 관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보위 초기 기천에 이르는 선비들의 목을 자르던 황제가 보위에 오른 지 20년이 넘어가면서는 화 한 번 내지 않고서 세 차례에 걸쳐 똑같이 말로서 관료들을 타이르려 한 것이다.
"침으로 황상께서도 성숙하시었구나. 이 불초 서생이 세 차례를 번거롭게 하여도 단 한 번도 진노하시지 아니하시고 차분히 귀를 기울여주시니, 내 비로소 우리 대한국에 천명이 따르고 있음을 알겠다. 바로 그렇기에, 역도들이 함부로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어지럽히도록 둘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황제가 모두 뿌리쳤다고 하여 관료들의 반동학 정서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대신, 그들은 일방적인 금지보다 조금 더 교묘한 수단으로 이들을 집중적으로 단속하기 시작했다. 한울교 내에 첩자를 잠임 시키거나 그들의 활동을 일거수일투족 감시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한울교에 입교한 이들의 공무원 지원을 제한하거나 이렇다 할 명분 없이 사제들을 잡아 파출소에 며칠씩 가둬두기도 했다.
직접적인 교단 해산이나 사법재판은 없어도 이와 같은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한울교의 교세는 또 한 번 꺾이고 말았다. 이러한 시련은 한울교에게 또 한 번의 변화를 요구했다. 이들에게는 이제 두 가지 길이 남아있었다. 하나는 자신들이 유해하지 않음을 인정받고자 노력하는 길이었고, 하나는 같은 핍박 받는 처지에 소수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 교단이 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황상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신 덕분이다. 어찌 황상의 신하 된 입장으로서 황상께 이 이상 근심을 끼쳐 드릴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라도 자중하는 모습을 보여 근심을 덜어 드리자."
전자에 해당하는 것은 교주 최시형이었다. 그는 지나친 정치참여가 한울교의 인식을 나쁘게 함을 알아채고서 그를 따르는 교인들에게 집회나 시위를 주도하는 등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피하고 대신에 이 무렵 서역에서 들어온 종교들이 그러하듯이 자원봉사활동이나 보육원과 학교를 짓는 등의 활동에 집중할 것을 권했다.
애당초 그가 정치참여를 권한 건 어디까지나 교세를 재흥시키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던 정치참여 때문에 조정의 경계를 사게 되었음이 확실시된 이상, 더는 진행할 이유가 없었다. 이 이상 깊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교인들의 신변에도 위험을 일으킬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고, 이러한 견해 차이는 한울교 내의 정치참여 분파-특히 젊은 청년층의 이탈을 일으켰다.
"이제 와 서역의 교단을 흉내 낸다고 한들 무슨 소용인가? 애초에 우리 한울교가 한때 쇠락하였으나 이처럼 다시 흥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백성의 소리에 항시 귀를 기울이며 서역의 교단들과 분명히 차별화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만일 우리가 서역의 교단과 다를 바 없어진다면 더욱 교세가 강성한 서역의 교단들에 흡수되는 길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손병희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한때 사멸의 길을 걷던 동학이 지금처럼 번성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그러한 정치참여 덕분이었음을 역설하며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계속 그 길을 관철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교주 최시형이 이러한 주장을 위험시하여 파문을 선언하자, 이들은 교세가 회복되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자 최시형이 타락했다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온 프랑스 유학파 중에는 적지 않은 숫자의 사회주의자들이 존재했고, 손병희는 뚜렷한 구심점 없이 표류하던 이들을 기꺼이 떠안았다. 이들은 경자유전에서 더 나아가 천하 만물은 황제의 것이니 마땅히 모든 토지와 재산을 국유화하여 조정에서 모든 경제활동을 주관해야 한다. 주장하던 유림 내 사유재산 부정론자들을 끌어안았다.
그 이전까지도 노동쟁의에 꾸준히 얼굴을 들이밀며 한국 내 노조 세력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던 이들 손병희 파벌이 본격적으로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내건 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였다. 한국 내에서 들끓던 온갖 좌익 과격파 세력을 유교 사회주의라는 이름 아래 끌어모아 동학의 조직체계 아래 고정한 것이다.
"우리는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개혁을 원한다. 오늘날 우리 대한국이 강국이 되었으니, 그다음은 이제 마땅히 누구 하나 배를 주리는 일 없는 나라를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 조정은 마땅히 권세 있는 자들이 아니라 권세 없는 자들의 곁에 서야 하며, 공권력의 행사는 백성을 수호하고자 하는 이상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정당하다."
이는 손병희가 1888년 일본의 항만 총파업에 고무되어 사회당을 세우며 내세운 행동강령이었다. 이들은 위에 행동강령에 따라 이웃 나라 일본이나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이 공권력의 파괴를 주장하는 동안 역으로 공권력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이들은 자본가들 때문이 아니라 시장 자유주의를 이유로 정부에서 손을 놓고 있으므로 이러한 빈부격차가 생긴다고 믿었다. 공권력은 시장을 방관하고 있을 게 아니라, 한편으로는 철퇴를 휘두르고 한편으로는 쌀죽을 떠먹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엥겔스가 이끄는 인터내셔널에서 배제된 건 당연한 순서였다. 애초에 마르크스주의에 뿌리를 두고 주장을 펼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를 끌어들인 이들이 전통 마르크스주의로 인정될 리도 없었다.
"허, 사회당이라. ···뭐, 슬슬 이놈들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올 때가 되었기는 했지."
그리고 사회당의 결성은 당연하게도 황제의 귀에 들어갔다. 황제의 대응은 즉각적이었다. 동학을 금지해달라 의회에서 세 차례에 걸쳐 청하였을 적에는 세 차례에 걸쳐 거부하였던 황제는, 이때는 먼저 의회에 명하여 사회당의 정당 활동을 금지했다. 종교의 자유와 이념의 자유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대한제국은 그 이름 그대로 황제가 존재하는 제국이었다. 이미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그러고 있다시피 자유주의나 민주주의와는 공존할 수 있어도, 제정의 해체를 이야기하는 사회주의와 공화주의는 애초에 상극이었다. 그의 자손들이 수난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황제는 그 둘을 용납해서는 안 됐다.
하지만 황제는 동시에 마냥 탄압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건 이념적 이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도리어 그의 판단은 통치술에 근접했다.
"빨갱이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는 건 이제 슬슬 진짜로 공장이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거고··· 불평분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지.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준다고, 슬슬 떡이나 한둘 물려줄 때가 된 모양이군."
모든 통치술의 기본은 채찍과 당근이었다. 채찍만 휘두르면 정권을 잃기 마련이고, 당근만 준다면 나라를 망치기 마련이다. 정권을 유지하면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면 당연히 그 중간에 타협점을 찾아야만 했다. 미래를 훤히 알고 있던 황제는 그가 휘두를 수 있는 채찍과 물려줄 수 있는 당근 양쪽 모두를 알고 있었다.
황제는 이제 막 아주의 물류를 하나로 통합하여 가쁜 숨을 고르던 한국의 관료들에게 곧장 백성을 부유층, 중산층, 극빈층으로 분류하여 각 계층의 소득 평균과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저소득 등의 통계자료를 뽑아오라며 달달 볶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