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342화 (342/530)

< 미음 >

"사람을 놀리는 게 그리도 재미있소? 하여간 뭐 하나 탁 터놓고서 이야기하는 건 없이 빙빙 돌릴 뿐이고. 대관절 그런 말재주는 어디서 익히신 거요?"

"아우야, 너도 저 속에 구렁이 두엇은 기르고 있는 능글맞은 놈들과 만나다 보면 절로 그렇게 될 거다."

"허, 아주 그냥 저 좋을 때만 아우라고 부르시는구려. 그렇소. 이 아우가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할 일이 드물어서 이렇소. 이제 되었소?"

"하하, 요놈 참. 말버릇 하나는 아바마마를 똑 닮았구나."

이원철은 뚱한 얼굴로 입술을 비죽 내미는 이강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그에게는 퍽 기특하게 보일 수밖에는 없었다. 동생이 시종일관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던 것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제법 넓은 식견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어린 녀석이 이만큼 깨우치려면 얼마나 서책과 신문을 탐닉하고 다녔을까 싶어 조금 가엾기까지 했다.

만일 이강이 몸이 조금 더 튼튼해서 보위를 두고서 경쟁하는 처지였다면 그야 이원철 또한 이렇게 살갑게 대할 수만은 없었겠지만, 몸이 허약하여 궁을 떠나지를 못하니 경쟁자로서의 경계보다는 혈육에 대한 정이 앞설 수밖에는 없었다. 이원철은 자신을 고깝게 바라보는 이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말했다.

"다만 이것만은 일러주마. 아무래도 제법 많은 걸 고민한 듯싶으나, 당장에 정해진 건 노서아가 영길리에 종전을 청했고 우리 대한은 이를 환영하리라는 것뿐이니라. 아직은 아바마마께서도 앞날을 고심하고 계시고, 의회 또한 그러하다. 너무 앞서가지는 말아라."

"앞서갈 게 뭐 있소. 적어도 형님이 이 못난 아우 놈을 거짓부렁으로 속이려던 것이 아니라면야 그대로 이어질 텐데."

"그러니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게다. 당장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세상사가 아니겠느냐?"

그리 말하며 이원철은 가볍게 두 사람이 마주 앉아있던 나무 탁자를 두 번 두드렸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궁인들을 부르는 신호였다. 그의 부름에 응하여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궁인들이 걸어 들어오자, 이원철은 빙긋 웃으며 말하였다.

"여봐라. 아무래도 내 아우가 기가 많이 허해진 것 같구나. 미음을 한 그릇 가져오너라. 내 이 녀석이 미음 한 그릇을 비우는 걸 보고서 가야겠다."

"괜한 참견이요. 되었다. 이미 끼니를 때운 참이니라. 내 그 쌀 냄새만 맡아도 속이 메슥거리는 것 같으니, 그만 돌아가거라."

"쌀 냄새만 맡아도 속이 메슥거린다는 놈이 끼니를 제대로 때웠을 리가 있더냐. 어서 다녀오너라. 후일 우리 아우님께 꾸중을 듣게 되거든 나도 함께 들어줄 테니 너무 괘념치 말아라."

"아니, 진짜 됐다는 데도 이 사람이."

이강이 왈칵 얼굴을 일그러뜨려도, 이원철은 그를 쳐다도 보지 않고서 곤혹스러운 얼굴로 두 사람을 돌아보던 궁인에게 손짓하였다. 어서 다녀오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던 궁인의 선택은 이원철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온종일 방에서 나오지도 않는 이강과 어디에 있어도 한번 쫌은 얼굴을 뵙게 되는 활달한 이원철 중 어느 쪽이 더 무서운가 하면 당연히 후자일 수밖에 없던 것이다. 궁인은 이원철에게 꾸벅 허리를 숙이고서는 종종걸음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도망쳤고, 이강은 그야말로 벌레 씹은 것 같은 얼굴을 하였다.

이원철은 되려 웃었음은 물론이었다.

"하여간에 한시도 마음 편히 두시지를 않는구려"

이강은 투덜거렸다. 짜증 섞인 어투였다. 그 나름대로는 진심이었다. 언제나처럼 가만히 책이나 읽으면서 시간을 죽이거나 묵상기도라도 올리려 했더니 형이라는 작자가 찾아와서는 그의 고요한 일상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원철은 이에 피식 웃으며 답했다.

"요놈아. 네가 알아서 잘하고 있거든 내가 일부러 이런 귀한 걸음을 할 성싶더냐? 아우라는 놈이 쌀 냄새만 맡아도 속이 메슥거린다고 끼니도 거르고 있는데, 어찌 형 된 도리로서 가만히 넘기겠느냐? 요놈, 요놈."

"아, 글쎄 끼니는 제대로 챙겼대도! 내 형님 덕분에 네 끼를 먹게 생겼소!"

"네가 다섯 끼를 먹어야 건강한 사람이 세 끼를 먹는 것과 같을진대, 네 끼가 대수더냐? 좌우지간 먹어라. 뭐라도 먹어야 조금이나마 기운이 생기고 잠깐이나마 밖에 나갈 수도 있지 않겠느냐?"

이원철은 이강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 주었다. 나름대로는 이강의 투정을 받아주려는 시도였다. 당연히 이강은 이에 저항하여 어떻게든 이원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워낙에 힘의 차이가 나다 보니 그것이 쉽지가 않았다.

결국 이강은 체념하고서 어깨를 늘어뜨렸다.

"거 대낮부터 집에는 얼굴 한번 안 비추고 사내놈이랑 어울리고 계시니. 형수님이 아주 좋아하시겠소."

이강은 입술을 비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매일 같이 국외를 들쑤시고 다니다가 이제 조금 한국으로 돌아왔으면서, 또 집안은 안 돌보고서 동생이나 괴롭히고 있으니 형수가 참 좋아하겠다-라는 비꼼이었다.

이원철은 이강의 투정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만은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아무튼, 한국에 들어오고서도 매일 같이 집을 비우는 탓에 비를 소중히 하라며 모후에게 꾸중을 듣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원철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도 사내놈이랑 부대끼는 게 이름도 모를 계집애랑 정을 통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더냐? 그리고 나도 우리 아우님께서 평안 무탈하셨으면 지금쯤 진즉 집에 들어갔을 것이다."

"퍽이나 그러시겠소. 또 보나 마나 성균관에나 가서 오랑캐 놈들 얼굴이나 보고 오겠지."

"요놈. 오랑캐라 부르지 말아라. 모두 우리 대한의 건아들을 가르치고자 바다를 건너온 현인들이시고, 대한에서 배우고자 모여든 아주의 건아들이니라. 어찌 오랑캐라 부르며 업신여길 수 있느냐?"

"그래 봤자 오랑캐잖소. 조선인도 아니고 만주인도 아니면 그게 오랑캐지 아니면 뭐요?"

어느새 돌아온 궁인에게서 미음 한 상을 건네받으며, 이강은 투덜거렸다. 이원철은 쓰게 웃었다. 감히 직접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아도, 내심 이러한 말에 동감하고 있는 백성이 적지 않다는 걸 알고 있던 까닭이다. 아니, 사실은 백성만은 아니다. 조정의 관료들 또한 마찬가지고, 군관들이라고 한들 다를 건 없다.

우리가 저들보다는 낫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실제로 한국은 국제외교에서 다른 아시아의 나라들보다 나은 대접을 받고 있고, 이는 한국을 대표하여 국외를 오고 다녔던 이원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당장에 이원철이 네덜란드와 미국, 두 차례의 만국박람회에 참여할 때마다 들었던 소리가 있지 않던가.

'명예 백인.'

"그래, 오랑캐지."

그렇기에 이원철은 선선히 인정했다. 아주에서야 아주의 맹주로서 행동하고 있으나, 아주 바깥으로 나가면 한국은 명예 백인이자 문명국으로서 서구 열강들을 마주했다. 그건 분명한 현실이다. 아주가 성장하였다고 하나 여전히 세계의 중심은 유럽인 이상, 이는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이원철은 분명히 덧붙였다.

"그렇다고 한들 아바마마께서 아주의 맹주이고자 하시는데, 그런 말이 종친의 입에서 나오면 되겠느냐?"

따악.

이원철은 이강의 머리를 가볍게 딱밤으로 쥐어박았다. 너무 강하게 쥐어박으면 미음에 얼굴을 처박을까 걱정되어 가능한 힘 조절을 한 일격이었다. 그런데도 이강의 머리는 휘청거렸다. 조금만 더 세게 쥐어박았더라면 그대로 미음에 얼굴을 들이박았을지도 몰랐다.

이강은 잔뜩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항변했다.

"아, 글쎄 내가 무슨 오가는 행인마다 뻥뻥 걷어차고 다니는 저잣거리 똥개인 줄 아시오! 아니, 기면 긴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사람 머리는 또 쥐어박고 그러시오?"

"어허, 이놈이 아직도 제 잘못을 뉘우칠 줄을 모르는구나. 설령 네 말이 옳다고 한들, 황상의 피를 이은 종친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는 법이니라. 듣는 귀가 없기를 망정이지, 만일 신료들이 듣는 앞에서 또 그런 망발을 지껄이거든 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허, 내가 대관절 신료들 앞에 설 일이 어디 있으려고···!"

이강은 말을 하다가 말고서 입을 다물었다.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것도 머지않았다. 당장에, 이번에 근신이 풀린 까닭이 무엇이던가. 혼약 일자가 정해졌기에 풀리지 않았던가.

신료들은커녕, 아주 각국과 아주 너머의 무수한 열강에서 구름같이 모여든 기자들 앞에 설 판국이었다.

"이런 우라질."

주륵.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보통은 한둘, 많아야 열. 그리고 열 명씩 만날 때는 말이 좋아 열 명이지 딱히 먼저 말을 걸기보다는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쫓아다니는 궁인들을 상대한 게 고작이던 이강에게는 상상만 해도 현기증이 이는 듯했다.

도통 사람들 앞에 서는 것에는 익숙해지지를 않던 이강이었다. 아니, 사실 그간 익숙해질 만한 기회도 없었다. 어디 바깥을 나갈 일이 있어야 사람들 앞에 서든 사람들과 어울리든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 적당히 저잣거리에서 날 닮은 놈을 데려와 나 대신에 세우는 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널 지켜봐 줄 백성은 둘째치고서, 네 신부 될 영길리의 공주에 실례가 되는 일이 아니더냐. 제아무리 저들이 먼저 제안한 것이라고 하나, 제 나라의 공주가 그와 같은 모욕을 당하면 영길리가 웃어넘길 성싶더냐?"

"젠장."

이원철의 꾸중에 이강은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새삼스럽게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자각한 것이다. 태자인 이원철이 혼사를 치를 적에도 이번 혼사에 못지않게 화려하게 치러지기는 했으나, 그때도 병 탓에 불참했던 이강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경험이었다.

이강은 다급하게 물었다.

"그, 뭔가 좋은 수가 없소? 아니면, 하다못해 형님은 그때 어떻게 넘기셨는지라고 설명해주시오. 형님은 도성의 백성들 앞에 섰을 적에 어떻게 긴장을 푸셨소?"

"글쎄, 긴장될 리가 있겠느냐? 그저 이토록 많은 백성이 이런 부족한 놈에게 기대를 걸어주니 감읍할 따름이었다. 내 돌이켜 생각하면 그날이야말로 내 인생에 둘도 없을 날이 아니었을까, 싶구나."

"우라질. 하여간에 타고나서는···!"

마치 즐거운 꿈을 꾸듯이 말하는 이원철의 모습에 이강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하여간에 도움이 되지를 않는구나 싶었다.

이원철은 웃으며 말했다.

"뭐,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그래도 네가 상판 하나는 번드르르하지 않더냐? 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영길리의 공주는 물론이오, 이 저잣거리의 아낙네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수 있을지 또 누가 아느냐?"

"상판이 반드르르하기는. 상판에 혈색이 없으니 귀신 같은 거겠지! 뭔가 좋은 비책이라도 내줄 게 아니거든 마음에도 없는 위로는 그만두시오!"

"흐음, 몸의 병이 마음의 병으로 옮았더냐. 이 형이 기운을 북돋아 주려고 하여도 고마운 줄도 모르니, 참으로 고얀 아우님이로세."

"아 글쎄 좀 조용히 하래도!"

이강은 참다 참다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지른 다음, 곧장 뒷골이 당겨서 뒷목을 잡고 뒤로 넘어갔지만 말이다. 참으로 도움이라고는 되지 않는 형님이었다.

그러자 이원철은 이강을 일으켜 세워주고서는, 그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우선 미음부터 다 비우고서 생각하는 것이 어떻더냐. 벌써 미음이 다 식었구나. 혹 숟가락 들 힘조차 없거든, 내 직접 떠먹여 주랴?"

"필요 없소!"

이강은 크게 소리를 질렀다. 힘에서 밀리니 억지로 내쫓을 수도 없고, 잔소리라도 그만 들으려면 일단 이 미음부터 비워야겠다는 생각에 이강은 숟가락을 쥐었다.

그러고서, 마치 미음이 원수라도 된 양 미음을 마구 입에서 퍼넣었다. 워낙에 거칠다 보니 미음이 온통 흘러, 옷이 더럽혀질 지경이었다.

"···혼례를 치르기 전에 우선 수저를 쓰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겠구나."

결국 더욱 못한 이원철이 억지로 팔을 쥐고서 교정을 시켜주었다. 그 뒤에도 여전히 이강의 숟가락질은 신경질적이었으나, 괜히 더 잔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았던지라 이원철이 교정시켜준 자세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제야 이원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에 투정만 늘어서는···."

이강을 꾸짖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강은 듣고서도 모른척했다. 이원철 또한 이강이 듣고서도 모른척한다는 걸 눈치챘으나 구태여 지적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말했다.

"석 달 전에 겨우 첫 삽을 떴다."

"첫 삽을 뜨다니, 무엇을 말이오?"

"정궁 말이다. 네가 황손을 보여주기 전에 근정전까지는 무사히 완성하겠더구나."

이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놀라울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경복궁 재건이야 워낙에 큰 사업이다 보니 방에 갇혀있던 이강의 귀에도 들어온 바 있었다.

이강은 미음을 삼키며 말했다.

"그럼 슬슬 바닥은 다 깔았겠구려. 어떻게 되어가고 있소? 돌 나르는 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돌이라···."

"아니 왜, 이제는 조선이 아니라 대한이고 황제가 거할 정궁이 아니요? 자금성만큼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바닥 정도는 으리으리하게 돌이건 벽돌이건 아무튼 바닥부터 쫙 깔아놓아야 하는 거 아니요?"

이강은 숟가락을 휘휘 휘두르며 말했다. 그 손짓에는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물론 구조 자체야 옛 고황제가 세웠던 그대로 재현하기 위하여 옛 사서들을 뒤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황제가 살 궁전인데 겉으로는 비슷해도 재료나 세부구조는 확 달라지지 않았겠는가.

제 몸이 조금이라도 건강했더라면 한 번쯤 구경이라도 갔을 텐데, 이 비루한 몸뚱어리는 단 한 번도 제 뜻대로 움직여준 적이 없었으니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글쎄다."

그러나 이원철의 반응이 묘했다. 이강은 직감적으로 그의 아버지가 무언가 또 기상천외한 일을 벌였음을 깨달았다.

이원철은 잠시 망설이다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보름 전인가, 널 만나기 전에 한번 정궁 공사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싶어서 다녀왔다만···."

"뭐 석회라도 가져다 부으셨소?"

이강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석회였다. 혹, 바닥을 정리한답시고 석회를 냅다 가져다 부은 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원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최악은 피했다고 안도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보다 기상천외한 일이라니 대관절 무슨 짓을 벌인 거냐고 불안에 떨어야 하는 것일까.

곤혹스러운 시선으로 이원철을 바라보는 이강에게, 이원철은 담담하게 답해주었다.

"바닥이야 뭐, 대수로울 건 없었다만. 가서 보니까 그 앞에 깊이 땅을 파고 있더구나."

"그거야 뭐 대수로울 것도 없지 않소? 우선 주춧돌을 놓으려면 땅 정도는 당연히 파겠지."

"수직으로 10m 정도 말이다. 아니, 그 이상이던가? 나도 눈대중이라 잘은 모르겠다."

이강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서 이원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이었다. 수도관이 놓이고 있는 판국에 이제 와서 우물을 팔 것도 아니고, 뭐하러 땅을 그리 깊이 파는지 의뭉스러울 수밖에는 없었다.

이원철은 가만히 턱수염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나도 잘은 모르겠다만, 아바마마께서 정궁을 시작으로 도성 땅 밑을 달릴 기차역들을 세우시려는 모양이더라."

이원철의 설명은 모호한 것이었다. 그 나름대로 국외를 들쑤시고 다녔다 자부하는 이원철이더라도, 아직 런던을 제외하면 달리 운영되는 곳이 없는 지하철에 대해서는 낯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세상 구경을 다닐 일이 없던 이강에게는 어떠했겠는가.

"아바마마께서 기어이 노망이 나신 거요?"

"예끼 이놈아."

딱.

이원철의 딱밤에 이강은 마침내 미음 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말았다.

< 미음 > 끝

ⓒ 리첼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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