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운대국 >
초국, 상해 부두 연안.
"전하, 좌현으로 부두가 보이고 있습니다. 혹, 기분이 내키신다면-."
"『필요 없어요.』"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존 피셔 제독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빅토리아 공주는 기나긴 항해에도 조금도 기분을 풀지 못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있으나, 아무래도 공주에게 시간은 단지 그녀의 처량한 신세를 곱씹게 하는 계기에 불과했던 모양이었다.
입맛이 썼다. 머지않아 출가외인이 되겠으나 그래도 왕실의 공주라고 지극정성으로 섬겼다. 그런데도 공주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지는 못한 것이다. 피셔 제독은 내심 그녀가 과연 한국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머지않아 국혼을 치르기 위하여 기자들 앞에 서야 할 공주가 우거지상이어야, 어느 누가 반기겠는가.
그는 불길함을 곱씹으면서 선교로 돌아와야 했다.
"공주 전하께서는 아직도 방에서 나오시지 않고 계십니까?"
"후-! 그래.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나신 모양일세.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 모두 백방으로 노력해봤으나 잘 풀리지 않았으니, 남은 건 그저 기도하는 수밖에."
피셔 제독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를 태운 여객선의 선장은 비록 지금은 여객선에서 근무하고 있으나 본디 영국 해군에서 복무하였던 까닭에 피셔 제독을 상대함에 있어서도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그는 제독의 권위를 존중하였고, 기꺼이 그를 상급자로서 예우하였다.
선장은 흘끗 공주가 머무는 VVIP 객실을 흘겨보고서는, 이내 어두운 얼굴을 하며 말하였다.
"듣자 하니 선원 중에서 우연히라도 공주 전하의 존안을 뵌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대신 그 하녀들이 선실을 누비고 다니고 있는데, 다들 표정이 어두워 보였습니다. 혹, 각하께서는-."
"문 안으로 들여 보내주시기는커녕 문을 열어주시지도 않더군. 그래도 스리랑카를 지날 적만 해도, 본인만큼은 들여보내 주시지는 않으셔도 문을 열어주시기라도 하셨었는데 말이야."
피셔 제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전에도 히스테리를 종종 부리던 공주였으나, 점차 한국에 가까이 다가오면서 더욱 제 처지에 비탄하게 되었는지 이제는 목소리마저 듣지 못하면 과연 저 방 안에 있는 게 산 사람인가 죽은 사람인가도 분간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그건 결코 긍정적인 소식은 아니었다. 선장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고, 피셔 제독은 먼발치를 바라보았다. 기껏 여기까지 배를 몰고 온 끝에 공주 부부의 불화로 국혼이 파투나기라도 한다면, 그거야말로 헛수고도 보통 헛수고가 아니다. 안 하느니만 못한 일은 저지른 꼴이 되는 것이다.
피셔 제독은 더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가,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며 환히 웃었다.
"참으로 인상 깊은 부두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예? 아, 예. 과연 그렇습니다."
선장은 제독의 말뜻을 깨닫지 못하였다. 다만 반사적으로 그렇다고 긍정했을 뿐이다. 제독은 "그래, 그렇지."하고 웃고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좌현으로 보이는 부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하였다.
"참으로 돈 쓸 곳을 아는 위인이야. 저 부두들을 보게. 무엇이 그리도 특별한지 알겠나?"
"굉장히 널찍널찍하고··· 이런저런 중장비들이 제법 많이 눈에 밟히는군요. 저 뒤로 보이는 물류창고나 시가지도 제법 거대한 게, 만일 중간에 기항하게 된다면 제법 편리할 성싶습니다. 물론 유럽 바깥의 항구치고는 말입니다."
선장은 피셔의 말에 공감해주면서도, 은근슬쩍 눈앞에 보이는 상해 부두를 깎아내렸다. 그건 영국인으로서의 긍지였다. 그의 조국이야말로 세계 제일의 해운 대국이라는 긍지 말이다. 그리고 피셔는 그러한 긍지에 동감했다. 그 또한 영국인인데, 어찌 그와 같은 자긍심이 없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데도 그는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듣기로 아시아에는 이만한 항구가 아홉 곳은 있다더군."
"아홉 곳··· 말씀입니까?"
"그래. 천진, 상해, 광주(廣州), 청도, 남포, 인천, 부산, 고베, 요코하마. 대북(臺北)이나 원산도 요즈음에 제법 성장하고 있다고는 하는데··· 잘은 모르겠군. 따로 언급이 없었던 거 보면, 아직 우리가 알아야 할만한 항구는 아닌 모양이지."
피셔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말했다. 선장은 그의 설명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다시금 상해 부두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런던항에 비할 바는 못되나, 저만하면 영국 어디를 가도 어엿한 항구도시로서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 모래사장 따위는 끝 모를 시멘트로 뒤덮인 지 오래고, 곳곳에는 벽돌과 시멘트로 지은 물류창고 시설로 빼곡하다.
아니, 다른 건 몰라도 단순 규모로는 확실하게 런던항마저 뛰어넘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1시간이 넘게 항해하고 있는데도 항구의 반대쪽 끝이 보이지를 않았다. 기항을 위하여 속력을 늦춘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뒤로 보이는 시가지처럼 보였던 건물들은 시가지 따위가 아니라 또 다른 물류창고들이었다.
선장은 황급히 망원경을 꺼내어 상해의 물류창고를 자세히 살폈다. 물류창고 하나당 컨테이너가 위아래로 2칸, 좌우로 10칸, 앞뒤로 5칸씩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하나하나의 컨테이너는 방 2, 3칸을 붙여놓은 듯한 크기였고, 그 컨테이너를 옮기기 위하여 수백 명의 노동자가 인력으로 거중기를 돌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건 아무래도 좋았다. 컨테이너의 내용물은 모르고, 사실 몰라도 상관없었다. 선장은 그의 시야 가득히 들어오고 있는 물류창고의 숫자를 조급한 마음으로 하나둘 세어보았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 끝으로 세어본 물류창고의 숫자가 30여 개가 넘어간 순간, 그는 손에서 망원경을 놓치고 말았다.
"맙소사."
나지막한 한마디였다. 그거 비명이라고 해도 좋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물류창고 하나당 100개씩의 컨테이너가 존재했고, 그런 물류창고가 못해도 30개 이상, 어림짐작으로 100여 개 넘게 있었다. 컨테이너 하나당 2.5t의 무게라고 표준규격으로 정해두었으니, 저 상해 부두에만 2만 5천 톤 이상의 물류가 쌓이고 있는 것이다.
그만한 크기의 부두가 아홉 곳이 더 있다고 하였다. 다른 항구까지 고려하면 최소로 잡아도 30만 톤 가까이 되는 물자가 창고에 쌓이고 있거나 쌓일 예정이며, 순간마다 수만 톤의 물자가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으며 또한 수만 톤의 물자가 철도를 통하여 내륙 곳곳까지 유통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경우, 물동량은 수백만 톤을 웃돌게 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는 누구나 알고 있다. 대륙 전체의 물류규격을 하나로 통일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시아에서 아시아를 오가는 컨테이너들은 열차에서 내리는 즉시 상선에 실리며, 다시 상선에서 내려지는 즉시 열차에 올려져 아시아 곳곳으로 퍼져 나간다. 물류를 유통하면서, 아시아의 관료들은 분명 하나의 경지에 오른 지 오래다.
"도대체 저 황인들이 어느새 이만한 번영을···."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두 눈으로 보는 건 분명하게 다르다. 선장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그의 눈으로 보이는 광경이 빙산의 일각임이 분명하기에 더욱 그랬다. 저 상해가 아시아 최대의 무역항이라고 들었다면 차라리 안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보이는 상해는 아시아 최대의 무역항은커녕 아시아의 맹주 한국의 무역항조차 아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눈에 들어온 저 상해항은 영국으로 치자면 뭄바이항 같은 것이었다. 그들 제국이 보유한 가장 큰 식민지에 세운 물류항인 것이다. 저건 포츠머스도 아니었고, 런던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시아의 런던을 보려면 아직 4일은 더 항해해야 할 터였다.
즉 선장이 즉석에서 어림짐작한 물류 규모조차 과소평가일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선장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간 아시아에서 말 그대로 세계 조선소의 발주 물량의 반절 이상을 감당해왔다는 건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시아에서 닥치는 대로 사들인 무수한 상선은 제조업 중에서는 조선업이 대공황의 여파에서 가장 먼저 벗어날 수 있었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서구 각국이 대공황에서 회복하기 위하여 닥치는 대로 받아들였던 상선 발주는 아시아 해상물류의 급성장으로 돌아왔다. 이제 와서 상선 발주를 받지 않겠다고 거부해도 늦었다. 이미 저들은 자체적으로 상선을 건조할 역량 또한 갖추었다.
앞으로도 저들은 더욱 많은 상선을 발주해 나갈 것이고, 더욱 항구를 확장하며 더욱 많은 상품이 오고 갈 수 있도록 끝없이 정상을 향해 뻗어 나갈 것이다.
"말해지 않았는가. 돈 쓰는 재주가 있는 위인이라고."
피셔 제독은 선장이 떨어트렸던 망원경을 주워 선장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은 얼굴이었다. 물론 반쯤은 허세였다. 아시아 시장의 성장세야 전해 들었고, 스스로 자료를 찾아 읽어보기도 하였다. 따라서 영국을 떠나기 전부터 저들을 얕잡아 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지금 실제로 눈으로 목격한 아시아의 번영은 그의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는 새삼 왜 한국이 바다로 나오고자 작심하였는지 알 수 있었다. 저 거대한 해상물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해군을 지속해서 증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게 해군을 증강하다 보니 연안 방어를 넘어서 대양으로 뻗어 나갈만한 힘을 축적하게 된 것이다.
피셔는 마른 침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기술력만큼은 저들이 열세다. 우리 대영제국이 손을 보태지 않는다면 차세대 전함 개발 계획 따위 한낮 몽상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일단 개발이 끝나고 나면 순수한 예산의 대결이다. 그때, 우린 저들을 막아설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회의적이었다. 피셔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야 물론 대영제국에는 인도가 있으나, 단순 비교는 어렵다. 무엇보다 한국에 있어서 아시아는 안마당이지만, 대서양을 지나 지중해를 건너 인도양까지 다다라야 겨우 손이 미치는 인도는 유지비용부터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국은 교묘한 통치술로 아시아인들을 현혹해 그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받아내고 있다. 그 신묘한 통치술은 영국의 인도 식민통치보다도 한 수 위라 평가할 수 있었다. 지금도 영국의 정가에서는 한국의 식민통치술을 본받아야 한다며 열띤 탐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와중이다.
이 통치술의 차이가 결정적인 차이를 낳는다. 한국은 아시아 전체의 경제를 성장시켜 파이 그 자체를 키우고 있으나, 영국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성장시킨 끝에 식민지의 힘이 본국을 넘어서거나 맞설 수 있게 되면, 그 식민지는 영국의 손을 이탈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에 6억, 장차 10억을 넘으리라 확실시되는 아시아 시장 전체의 성장은 그 위에 우뚝 선 한국을 보다 위로 끌어올려 줄 터였다.
피셔는 직감했다. 이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어도, 반드시 추월 될 수밖에 없는 구도라고.
"궁금하지 않는가. 일개 식민항에도 이만한 재화를 퍼부은 황인종들의 황제가, 저들의 기항에는 또 얼마나 재화를 퍼부었을지 말이네."
하지만 그는 그런 속내를 숨기고서 태연하게 말했다. 마치 눈앞의 항구나 그를 오가는 수십 척의 상선들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좌우지간 그는 대영제국의 해군 제독이었고, 지금이야 손을 잡고 있어도 또 언제 적이 될지 모르는 이들을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여줄 수는 없던 것이다.
선장은 피셔의 그런 속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예비역 해군 장교로서 모를 수가 없었다. 선장은 얼굴을 붉히고서 헛기침을 해댔다. 그는 서둘러 돌려받은 망원경을 숨겼다. 바로 전에의 추태를 어떻게든 만회하고 싶었던 것이다.
선장은 애써 태연한 얼굴로 피셔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래 봐야 런던에는 미치지 못할 테지요."
"그야 당연한 이야기치 않겠나."
담담한 문답이었다. 당연한 사실의 재확인이기도 했다. 제아무리 아시아의 성장세가 눈부셔도, 그 발전상은 런던에 미칠 바는 못 된다. 하지만 동시에, 일부러 런던을 언급해야 할 만큼 아시아가 무섭게 따라붙고 있다는 이야기도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따로 그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 마주 보고서, 어색하게 웃어 보였을 뿐이다. 일부러 의식하고 싶지도 않았고, 또 의식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만 기함으로 돌아가 보겠네. 혹 공주 전하께서 마음을 바꾸셔서 부두를 구경하러 방에서 나오시거든 곧장 호출하게나. 공주 전하의 기분을 풀어 드리기 위해서라면, 정박은 불가능하더라도 잠시 일정을 늦추는 정도는 가능할 테니 말이네."
"···괜찮겠습니까? 인도 총독부에서 그 티베트의 마녀를 한국 측에 양도하기로 예정된 날이 보름 안쪽까지 다가왔습니다. 혹 순서가 꼬이기라도 하면···."
"괜찮을걸세. 한국의 황제는 담백한 위인이라고 들었네. 결혼식에만 늦지 않으면 순서가 꼬이는 정도는 눈감아 줄 거야. 물론, 될 수 있는 대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오늘 일정이 늦춰진 만큼 내일 우리 아가씨들에게 석탄을 배로 가져다 바칠 각오를 다져야겠네만."
피셔는 선교를 나섰다. VVIP라 할 수 있을 공주가 나날이 피폐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항해는 더없이 순조로웠다. 도중에 사이공에서 한번 석탄을 가득 채웠으니 석탄이 부족할 일도 없었고, 연안을 따라서 이동하고 있는 만큼 도중에 풍랑을 만나더라도 큰 걱정은 없었다.
함대의 기함으로 돌아가던 길, 피셔는 저 멀리 몇 척의 기선이 다가오고 있는 걸 눈치챘다. 처음에는 상선이라고 생각했으나, 깃발을 보니 아무래도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남쪽을 뜻하는 붉은 바탕에 머리와 다리가 세 개씩 달린 주작이 황금빛 원 안에서 기세 좋게 양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었다. 피셔는 요 근방에서 그들을 마중할 초국의 함대와 만났음을 기억해냈다. 요컨대, 저들은 초국에서 보내온 안내 선단이라는 이야기였다. 피셔는 나지막이 웃었다.
"제법 귀여운 꼬마 아가씨들이군."
다소 가혹했으나, 지당한 평가였다. 적어도 그의 기준으로 보기에는 그러했다. 하나같이 어림잡아도 3천 톤을 크게 웃돌 것 같지는 않았다. 대영제국의 해군 제독이던 피셔에게는 우스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름 이쪽을 마중하러 나온 걸 봐서는 나름 나라에서 제대로 된 군함이라고 들고나온 것일 텐데, 그 배들이 저리 초라해서야 차라리 마중 나오지 않느니만 못했다.
그러나 함대의 기함으로 돌아와, 함교에 우뚝 선 피셔는 이내 생각을 고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음?"
그 초라한 군함들 뒤로, 무언가 유달리 자그마한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것이라고 표현할 이유는 없다. 저건 의심할 여지 없이 배다. 단지 순간 피서가 그것을 배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였기에 혼동하였을 뿐이다.
피셔는 천천히 그의 품속에서 망원경을 꺼내 들었다. 아직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너무나 멀어서, 아직은 어른거리기만 할 뿐 그 형체가 명확히 눈에 보이지를 않았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재차 확인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태극기였다. 달리 말하면, 수평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배는 한국 국적의 배라는 이야기였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자그마한 배는, 있을 수 없는 속력으로 바다 위를 세차게 질주하고 있었으니까.
"아니 도대체 어떻게···!"
그 말 밖에는 나오지를 않았다. 아무리 증기기관을 썼다고 하나, 배가 어떻게 저런 속력으로 달릴 수 있다는 말인가. 배가 아니라 바다 위를 나는 바닷새 같았다. 그리고 그편이 더 믿기 쉬웠다. 단지 눈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으나, 동형 함들과 비교하여 2배, 3배 가까이 넘는 속력으로 내달리는 그 자그마한 배는 피서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툭.
급기야는 피셔는 선장이 그러했듯이, 그의 손에 쥐고 있던 망원경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함교에서 근무를 서고 있던 위관 중 어느 한 사람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함장조차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그 자그마한 배는, 급감속과 급가속을 반복하며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재롱을 피우고 있었다.
"···저게 적 어뢰정이었으면 우리는 지금쯤 다 죽었겠군."
누가 중얼거린 말이었을까. 좌우지간 피셔는 아니었다. 평소라면 함대의 사기를 떨어트릴 작정이냐며 호통이라도 쳤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는 침묵을 지켰다.
그 말대로였다.
< 해운대국 > 끝
ⓒ 리첼렌